2006년 1월 8일
하느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이 세상을 변혁하게 하소서
이사야 61, 1-4; 필리비 1, 27-30

[한류 그 뿌리는?]

지난 2일자 뉴욕타임즈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남한 젊은이들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사진과 더불어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경의 백화점에 가면 Korea City라는 층이 따로 있어 남한의 유행하는 모든 물건들이 거기에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한류영향으로 옷으로부터 머리모양 음악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중국인들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남한의 유행을 모방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열된 물건의 대부분은 중국제품이고 물건들도 꼭 한국적인 것을 상징하는 물건은 아닙니다. 뉴욕야구팀 양키스 모자도 있고 일본 아스토로 소년 인형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젊은이들이 이런 것에 상관없이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변방으로 수천년동안 침략을 당해오고 오랑캐민족으로 업시 여김을 당해온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자부심을 가질만한 얘기인데, 그 깊은 면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즈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바로 이 중국서 유행하는 한류들이 모두 미국에 뿌리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핸드폰과 tv가 중국소비자들의 선망이라면 정신적으로는 남한의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가 중국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산되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구의 기독교가 동양인의 가면을 쓰고 중국에 파고 들 듯이, 서울에 사는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엮어내는 드라마를 통해 현대인의 성공과 개인의 행복이라는 주제가 상업적 소비주의와 맞물려 아주 교묘하게 중국사회에 파고 들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남한의 가족중심의 드라마는 중국이 문화혁명으로 인해 잃어버린 유교의 뿌리를 생각나게 하여 중국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문화를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사가 한(韓)류라고 말하고 있지만 독자로 하여금 이것의 뿌리는 미(米/美)류이다.라는 논조가 그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결국 남한은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가 강성한 국가로 지금 미국의 똘만이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문화적으로 그러합니다. 정치 군사적으로 그러합니다. 종교적으로도 그러합니다. 끝으로 언급하기를 남한이 경제적으로 잘 살게는 되었지만, 세계 최고의 이혼율과 저 출산율 그리고 세대차이와 성차별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뉴욕타임즈가 남한의 기독교를 미국의 똘만이로 인식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 본질에 접근하는 민중적이고 토착적인 우리의 신학과 성서해석이 더욱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이런 세계적 시각이 결여된 자기 교회성장이나 자기만의 좁은 신학의 이론들을 고집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떠받드는 문화적 내용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신앙도 이제는 열정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남한이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교회라고 자부합니다만, 실제 그 내면을 보면 말만, 국적만 한국인이지, 실제 기독교 신학의 알맹이는 모두 미국보수주의의 신학의 복사본입니다. 이런 점에서 향린의 국악예배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적 차원으로 높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한의 기독교가 민중신학을 통해 수입신학에서 수출신학으로 발돋움했다면, 문화적으로는 국악예배를 해외수출 기독교문화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시작과 목적]

진정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무한한 삶과의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묻고 이에 대해 답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보낸 이가 누구이고 또 그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며 적어도 그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는 만인을 하나의 기원을 가진 가족으로 결합시키고 그들의 삶에 공통된 궁극의 목적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이렇게 고귀한 목적으로 출발했지만, 인간의 손 안에서 항상 긍정적인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분명히 기층민중들에게 하나의 희망이자 민족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글을 깨우치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민족과 민주 그리고 자유와 해방운동에 주도적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의 최고의 교육자이며 최대의 계몽자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종교는 외면적인 현상에 치우치기 시작하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적 단체가 되어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해물이 되기도 합니다. 6.25전쟁 중에 교단이 갈라서는 일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요즘 다수의 기독교단체들이 사학법을 반대하는 것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스스로 선언한 은퇴를 번복하고 그 교단이 정한 70세 은퇴연령을 지나서 교인 전체다수가 찬성했다는 이유로 75세까지 목회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교회나 본인으로서는 최선의 길을 선택했는지는 몰라도 한국기독교 전체로 본다면 엄청난 손실을 안겨준 결정입니다. 지도자는 용퇴에 있어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더욱이 하느님을 믿는 목사로는 비신앙적인 생각입니다.

‘교인 다수가 원해서 했다.’ 이건 웃기는 얘기입니다. 박정희독재정권도 전체 국민이 원해서 지속되었고, 현재 북한을 포함해서 이 세계의 많은 독재정권 또한 국민 다수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이라크 침공도 미국 국민 다수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다수가 원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서는 다수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말할 따름입니다. 적어도 종교적 지도자는 자신의 한 일이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폭넓은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점에서 우리 교회가 지난달에 채택한 정관에 담임목사의 정년제한뿐만 아니라 7년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한 일은 잘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제가 그때까지 살아있을는지도 의문이고 재임투표에서 통과될는지도 의문이지만, 처음에는 왜 내가 63세에 은퇴해야 하는가? 하는 떨떠름한 마음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를 보면서 그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향린교우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전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다거나 정년을 넘어 계속 목회하는 이기적 행태를 볼 때마다 자기 교회만을 생각하는 소아병적인 행동이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는다는 사실을 왜 보지 못할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갖습니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면 신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포기요 이웃사랑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자기 포기에 앞장을 섬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을 끄집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9 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주제]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을 보세요. 구약성서의 이사야서의 말씀만을 읽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바로 이 말씀을 하느님 나라 운동에 가장 핵심의 말씀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이 예수운동의 핵심을 이번 2월 14일부터 브라질에서 모이는 제9차 세계교회협의회가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있고 이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재차 확인하여 올해의 기장 표어로 선택을 했고 우리 향린교회 또한 전례에 따라 이 총회의 표어를 저희 교회의 한해 표어로 채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본 기독교장로회가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제가 보기에는 번역상의 단순한 실수라고 말하기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큰 오류를 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번역이 아닌 반역을 하였습니다. 영어로 된 표어는 이렇습니다.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직역을 하면, ‘하느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이 세계를 변혁시키소서.’ 그런데 이를 ‘은총의 하느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말의 의미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변화와 변혁은 다릅니다. 영어로 change와 transform은 엄격히 구분됩니다. change도 물론 단지 겉만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고 속의 변화를 말하지만, transform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 곧 구조를 포함한 혁명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따라서 영어 단어의 transform에 유의해서 변화가 아닌 변혁이라고 번역해야 옳았습니다. 또 그냥 ‘은총의 하느님 이 세상을 변화하게 하소서.’ 라고 말하면 ‘하느님, 당신의 은총을 베푸셔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라는 일반적 간구로 변하고 맙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하느님의 책임입니다. 라는 의미로 들려집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책임 부분이 없어집니다. 이는 한국기독교의 최대 맹점이자 히틀러의 암살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동료의 밀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 훼퍼 목사께서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값싼 은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따라서 기장이 택한 표어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본 뜻을 잘못 전하는 단순한 번역의 실수가 아닌 신학적 반역이 된 것입니다.

[변혁시키는 협력주체들]

그러나 제가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으로 쓴 ‘하느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이 세계를 변혁하게 하소서.’ 의 간구의 기도에는 분명히 인간의 책임부분이 함께 말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역할은 은총의 부분이고 인간의 부분은 이 은총으로 새롭게 된 인간이 행해야할 실천이 함께 고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기장 총회가 했듯이 그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참가자들에게 보낸 주제해설문에는 그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변혁시키는 협력주체들’(Transforming Partners)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변혁하게 하는 협력주체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총회의 주제는 단지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서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 책임을 하느님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함으로 우리 자신의 과제에 충실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진실된 기도란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우리의 준비를 말합니다. 책임과 협력을 무시하는 기도는 주술적인 것이지 진실된 기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이 세계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맞바꿀만큼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따라서 우리에게도 세상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듯이 이 땅에서 자신을 부인하면서까지 세상의 틀을 바꾸는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억눌린 자가 해방을 얻고 갇힌 자가 자유를 얻는 역사는 물건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단순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사고 구조를 나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사회 구조와 틀을 힘과 경쟁에서 나눔과 정의의 틀로 변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틀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은 틀을 바꾸기를 원치 않습니다. 남 보고는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포함되는 변혁은 원하지 않습니다. 마치 부자청년처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원하여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가진 것들을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틀의 변혁은 거부합니다. 부자로서의 틀을 계속 갖고 영생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 어디에도 그런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 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건 예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요 예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입니다.

2006년 새해를 맞아 교수들에게 올 한해를 바라는 사자성어를 뽑게 하였더니 ‘약팽소선’(若烹小鮮)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자의 뜻은 ‘작은 생선을 서서히 삶아야 한다.’는 말인데,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다. 라는 의미에서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전 이 성어에 담긴 동양적인 ‘자연 흐름’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로되, 이 나라의 교수들이 얼마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기득권자들인 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증거라고 생각하고 실망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도 여러분의 교수가 계시지만, 향린의 교인들은 적어도 이런 단어는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350만 농민이 파산할 지경에 있고, 수백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가는 판에 흘러 가는대로 가만히 놔두라니? 전 이런 분들이 오늘 이 남한 사회의 지식인으로 그리고 지성인으로 자처한다는 점에서 실망과 더불어 작은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지성인이요 지식인이라면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져야 하고 사회의 기층민중에 대한 아픔에 동참하려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하거늘... 철저히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 형제가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고, 자신의 부모님이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있다면 이 따위 편안한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몇 살인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만 당신이 사랑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알고 싶다.’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11쪽)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꿈을 간직하셨고, 오늘도 자기를 따른다는 사람들에게 같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 말씀을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번 총회의 주제 말씀으로 선택을 했고, 앞으로 7년 동안 이 말씀에 기초한 복음 활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념과 특권]

이 말씀에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로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고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는 필리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해 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할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1장 3-6절)

그리고 그는 이 신념을 계속 설명하면서, 자기를 비난하는 다른 복음 전도자들에 관해 ‘가식으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니 나에게는 기쁜 일입니다.’(18절) 라고 말한 후에 계속해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20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리고는 필리비 교인들에게 아니 오늘의 향린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29절)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 믿음이 지금 바른 길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잘못된 길에 서있느냐? 를 판가름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에는 모두 즐거이 동의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믿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이 특권을 누구인들 거절하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특권과 더불어 또 다른 특권이 함께 따라오는데,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입니다. 이 믿음의 특권과 고난의 특권은 따로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세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도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이고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하나도 저절로 포기되는 둘이자 하나입니다.

전 이 사도바울로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고백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지켜나가야 할 본분이라고 믿습니다. 바울로의 신념은 단순히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인해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현실, 곧 지금 감옥 안에 있고, 자기를 모함하는 소리를 듣고 있고, 여기서 나간다 하더라도 이런 고난이 계속되어질 수밖에 없는 차가운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신념입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신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여러분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요즈음 징병을 거부하는 양심수들에 대한 대체복무제도를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안했고 국방부장관이 이를 수용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원에서의 수혈을 거부하고 군대징집을 거부합니다. 저는 이분들이 갖는 성서해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는 노력과 희생에 대해서는 존경합니다. 이분들이 군대징집을 거부하는 것은 교회와 국가라는 성속의 이원론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복종은 곧 하느님에 대한 불복종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면에 있어 타당성을 인정하지만, 이는 신앙의 세계를 너무 협소화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저는 이분들이 군대징집거부를 보다 세계평화문제와 관련하여 한다면 좋겠습니다. 정말 이분들이 평화의 문제에 관련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펼쳐나간다면 단순히 징집거부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반대에도 앞장을 서야 할 것이고, 평택미군기지확장 반대운동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혈이나 군징집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에서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만, 보다 큰 사회적 평화문제인 국가보안법 문제, 민족의 평화문제와 관련한 통일운동, 세계적 평화 문제에 관련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분명한 신앙의 모순입니다. 저는 저들의 신념의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었지만, 제정 러시아에서 나사렛교회를 다니던 프랑크 노바크는 타메시바르에서 군에 입대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맨 처음 다른 신병들과 함께 연병장에 갔을 때, 그는 총을 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연병장에 있던 장군이 노바크의 주위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에게 자초지종이 보고 되었고, 장군은 노바크에게 왜 총을 잡지 않느냐고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노바크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복음서를 꺼내면서 말했습니다.

‘당국은 이 책의 인쇄를 허락했으니 이 안에 적혀있는 가르침에 따르는 것도 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구세주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총을 잡지 않는 것입니다.’ 장군은 노바크의 말을 끝까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 책에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노바크는 처음에는 우물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한참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군모와 군복을 벗어서 총 옆에 내려놓고, ‘자 이것은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폐하의 것은 모두 폐하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보적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구분하라는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해석에서 카이사르의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지. 라고 말하면서 성속의 구분 짓는 것을 거부합니다. 저는 이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하느님의 것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지 라고 고백을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느님이 주인이 아닌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부모와 형제에 대한 부양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하느님께 드렸다고 ‘고르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라는 헌금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마치 이것이 신앙의 전부인양 강조하는 교회가 있어 가끔씩 물의를 빚기도 합니다. 십일조의 본 뜻은 이렇습니다. 열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의 것임을 먼저 고백하고 이에 대한 증표로 하나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를 단지 열의 하나라고 하는 산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는 첫째 되는 것,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농사의 첫 열매, 자식의 첫 열매를 말합니다. 이 첫 열매에는 열의 하나라는 산술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전 제가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회사에 처음 취직을 해서 첫 월급을 그대로 바치는 젊은이도 보았고, 개업을 하고나서 첫날 수입을 모두 드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전 그런 분들을 볼 때, 그 사람이 부자가 되든 안 되든 이미 삶에 성공자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는 처음 것을 드림으로 뒤따라오는 모든 것도 하느님의 뜻대로 쓰겠다는 고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열의 하나를 하느님의 것으로 드렸으니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율법적인 위험한 믿음입니다.

참 십일조의 개념은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버는 대로 모두를 하느님께 드리고 나서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만큼 갖다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 가운데 셋만 갖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일곱만 갖고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열을 도로 다 갖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열을 넘어서 더 가져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일조의 나눔의 개념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온 몸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열의 하나에 만족하는 쩨쩨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날을 일요일이라는 말 대신에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오늘은 주일, 곧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6일은 주님의 날이 아닙니까? 나머지 날도 분명히 주님의 날이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날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주일이라 부르는 것은 다른 6일과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고, 바로 오늘 첫날을 주님께 드리는 것과 같이 나머지 6일의 삶도 주님께 드리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기쁨과 감사와 감격 속에서 하루를 보내듯이 나머지 6일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기쁨과 감사와 감격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만약 오늘의 감격이 오늘 하루만 효력이 유지되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가정에서든 가까운 교회에서든 예배를 드려 이 감격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화 신학의 본질입니다. 거룩한 것을 세속화 시켜 거룩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룩이 되어 세상으로 들어가 세속화된 것을 거룩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히 우리 자신을 위한 믿음이 아님을 고백하십시다. 구원은 시제로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세례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미래의 구원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그 미래의 구원을 향해 현재의 구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푯대를 향해 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후보 선수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각기 자신의 골인점을 향해 뛰고 있는 선수이지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 선수는 한명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앞질러 간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언제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뒤로 돌아!’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나라는 ‘뒤로 돌아!’의 나라임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고백하십시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하늘 천상에 고고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특히 작은 자 가운데 소외되고 고난 받는 작은 자들 가운데 이미 화육하신 분임을 고백합시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그런 사람을 찾아가고 위로하는 믿음이 됩니다. 저는 향린교회 출석하시는 교우들은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여러분도 위로를 받아야 할 분이시지만, 위로를 통해 위로함을 받는 사도의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시간에도 이 땅의 많은 작은 자들이 우리의 위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향린교회가 변혁과 부활의 공동체로서 참여해야 하는 실천이 있습니다.

이번 토요일 평택에서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땅을 미군들의 기지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땅으로 내어줄 수 없다는 농민들이 촛불을 켠지 500일째가 됩니다. 이미 우리는 지난해에 전 교인이 그곳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다시금 그 마음을 모으기를 원합니다. 건강이나 시간이 허락되시는 분들은 이번 주 토요일 저녁 모두 평택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이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서 세계의 평화의 문제에 함께 고민하고 이 시대의 부름에 동참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땅만을 일구어 오신 분들이 강제로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하는 일은 단지 한미간의 정치적인 문제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에만 머물 것인지 아니면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특권을 누릴 것인지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보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이익을 남겨야 먹고 사는 상인이었습니다. 잘못해서 지체하여 강도를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 또한 삶에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현실을 피해갈 이유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자기 앞에 쓰러진 사람은 자신들을 개같이 여겼던 유대인이었습니다.

2차대전 불란서의 레지스땅스들이 붙잡혀 감옥에서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운동에 전혀 참가한 일이 없는데 잘못 잡혀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은 억울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왔으니까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잡혀 온 사람이기에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레지스땅스도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 한다 말인가?’ 그때 죽음을 기다리던 한 레지스땅스가 조용히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 백 만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영화 ‘로베레 장군’의 한 장면입니다만, 우리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라고 소리치는 분이 한 사람도 없기를 기도하면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