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사무엘상 3, 1- 10 ; 요한복음 1, 43- 51


김 혜 란 목사(한신대 교목실)

부족한 저를 귀한 향린교회에서 초대해 주심에 하나님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여신도주일을 맞이하여 여신도 또 남신도 교우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무엇보다 제게 영광입니다.

모든 주일이 그렇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주일입니다. 오늘은 기장교단이 정한 여신도주일이자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기뻐 축하하고 생각하는 주현절 둘째 주일입니다.

제 나이가 아직 많지는 않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면서 고백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말로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우연이었는데 지나고 보면 필연이었던 것 같은 그런 경험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필연-여호와 이레였더라 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 교우여러분도 공감하실 줄 압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무엘서와 요한복음 말씀은 제가 향린교회 여신도주일 설교를 부탁 받고 정한 본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세계교회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함께 쓰고 있는 교회력 성서일과 (lectionary)에 따라 정해진 주현절 둘째 주일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한 주동안 어떤 성서구절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성서일과에 따른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아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우리 향린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 말씀이 택해진 건 사실 우연인데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 제가 볼 땐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필연적인 말씀이었다는 거지요. 우연처럼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오늘 함께 생각해 볼 말씀을 통해 필연으로 여러분에게 체험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구약 말씀은 사무엘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사무엘과의 대화입니다. 신약 말씀 역시 빌립과 나다나엘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빌립을 제자로 부르시고 부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대화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문제제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성서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인데 그 소리에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현현을 고백하는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였는데 우리는 그 본문을 듣지 않고 읽었습니다. 하나 여쭈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담당자분이 읽을 때 듣기만 하신 분 있으세요? 아니면, 배치된 성경책이나 갖고 계신 본인의 성경책을 읽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여기 계신 향린교회 교우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또 예수님에 관하여 성서라는 책을 통해 알고 만나고 합니다. 아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항상 읽으면서, 많은 시간 혼자 사적으로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인주의 읽기 중심의 서구 문화가 우리 한국 교회와 신앙교육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방식에 대해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성서는 이성적이고 인지적인 문자언어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5세기 유럽에서 성서를 책으로 출판하기 전까지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졌고 기도, 노래, 춤, 시, 그림, 등 다양한 비문자적 예술 언어로 체화되고 고백되었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그 시편은 기도와 노래, 드라마로 표현되어 있지 개인 독서용이 아닙니다. 영성 훈련이나 기도 훈련을 위해 시편을 조용히 읽는 일도 의미가 있긴 하지만, 시편의 원래 목적은 노래로 부르고, 들려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통한 공동체의 고백이었습니다. 성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한 권의 책으로 존재하지만,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서는 다양한 감정, 감성, 공동체들의 애환이 실려 있는 공동체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가 예배 안에서 창조적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고 어린이의 마음처럼 상상력을 가지고 보고 듣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신앙의 핵심구절이자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황금률이 되는 신명기 6장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으라고 했지 읽어라 또는 생각해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역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하셨고 당시 사람들에게 입으로 전해졌던 율법 이야기를 활용해서 사랑과 정의 평화에 대해 가르쳤던 기막힌 이야기꾼 선생님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인들이었습니다.

문제제기를 한 김에 한 가지 더 짚고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독교 문화 안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것을 더 낫다고 보는 생각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말하면 경험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문자주의적인 것을 열등하게 보는 태도가 있지 않은 지 비판을 해 봐야겠습니다. 서구 1세계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기독교 문자우월주의에 빠져, 그 식민지역 내에 존재했던 토착종교를 억압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근대사에서 천주교가 조상들의 제사들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기독교 의식보다 열등한 것으로 치부했던 예와 개신교가 우리 전통종교였던 무당, 샤아머니즘을 비합리적인 열등 종교로 탄압한 것도 그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자를 가진 종교나 서구 문화가 구전 전통 종교나 비 서구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글을 읽을 줄 알아야 되고, 비판적으로 읽는 눈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한 기독교 교육이고 교회가 사회를 향해 해야 할 선교이자 사명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자주의와 이성주의를 지나치게 선호하면서, 비문자적인 문화, 구전 전통을 포함한 민중들의 이야기, 그들의 경험을 미개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되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학과 신앙 교육은 식민주의 신학이자 교육이기 때문에, 결국 세계 대다수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인 문맹자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체험적이고 비문자적인 매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별적 입장은 종교 문화적인 영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적, 정치적인 영역으로 확대되고 성차별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달 저희 가족은 전주 근처 죽림에 있는 기장 교회 수요 예배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남편인 데이빗 목사가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목사가 초청을 했는데, 너무나 착하고 좋은 약 20여분의 할머니들과 함께 은혜스런 예배와 친교를 가졌습니다. 그 후 그 교회 친구 목사님을 통해 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 때 함께 하셨던 교인들이 거의 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인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가난한 곳 중의 하나로 꼽힌다는 그 곳에서 전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가면 글 모르는 사실이 발각되니까 챙피해서 안 온다는 사실도 제겐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구요. 문자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가득찬 교회문화가 민중 중의 민중들인 이들 여성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구나 하면서 저는 반성했고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주의 교육과 예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제가 확실한 통계는 잘 모르겠지만 문맹인들이 제일 많은 곳이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제일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은 제 3세계, 아프리카, 인도를 포함한 동남 아시아지역, 그리고 남미 나라들일 것입니다. 특별히 제 3세계 여성들이 문맹자로서 가장 가난하고 무식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글을 못 배운 사람들, 문맹 여성들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고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일까요? 제가 설교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경험은 우연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합리주의, 이성주의, 문자주의가 얽혀 식민주의 확대에 기여를 했고, 기독교도 한 몫을 담당하면서 비서구적인 사람들을 가난하고 무식하고 미개한 자들로 차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이 어떻게 본문과 오늘 여신도주일과 관계가 되는지 여러분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함께 읽은 사무엘서 3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어 사무엘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는 청각을 요하는 감각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험적인 이야기입니다. 옆에 있던 엘리조차 듣지 못한 사건이었기에 객관성을 띤 합리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없고 얼마든지 비이성적인 이야기로 (사무엘이 정신이 나갔군)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의미가 우리에게 깊숙이 다가오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이 이야기를 감각적이고 경험적으로 듣고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적극적이고 감각적으로 임재하신 사건인데, 사무엘이 이만큼 경험적이고, 직관적으로 고백하고 응답한 사건인데 어떻게 오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읽어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이 사건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을 통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빌립은 직관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임을 알게 되었고, 나다나엘에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근거, 즉 율법에 기록된 바-를 대지만 믿지 못하는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는 시각적인 참여를 요하는 대답을 합니다. 무화과 나무 밑에서 자기를 보았다는 말을 듣은 나다나엘은 그 때서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의 적극적이고 감각적인 경험, 보고 만나고 오고하는 그 구체적인 행위가 얼마나 신앙의 도를 깨우치는데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서구 여성신학 자체가 서구 남성주의적 신학이 지닌 이원론적 신학, 다시 말해 이성, 합리, 문자 문화에 치우쳐 감각, 경험, 비문자적 문화를 소외시키고 배척했던 그 신학을 비판하면서 태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들의 삶, 경험, 이러한 몸을 통한 감각과 경험에 기반한 신학을 만들어 내면서 여성신학이 여성들 뿐 아니라 다른 소외된 소리에도 기울이고, 모든 인간과 생명의 해방을 선포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의와 평등을 외치는 여성신학의 소리는 제가 보기에는 성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이고 비문자적인 사건과 행위와 함께 연결될 때 지금보다 더 지혜와 힘 있는 살아있는 소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여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제가 감히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향린 교회가 국악을 통해 한국 토착화 또 탈식민주의적인 예배를 정착시키고 있음을 보고 감사하고 또 감동을 받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저는 문자주의를 탈피한 예배, 모든 감각을 살려주는 예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상상력을 펼치십시오. 예배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혀 문자언어, 악보를 포함하여, 글을 읽지 못한다고 가정을 하고 예배를 만들어 보십시오. 글을 아직 읽지 못하는 4-5살짜리 아이들을 염두에 두십시오. 글을 볼 수 없는 장님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들이 기쁘고 감사하며 참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지 고려할 때 향린교회는 향린교회 어린이 뿐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 가장 소외된 자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가깝게 계실지 모르는 그 분들과 연대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예배라든가 기장 전국 여신도회 교육원 예배를 참조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보여 집니다. 한계는 있지만 이들 예배가 문자주의를 벗어나 우리 밑바닥에 살아있는 감각들을 자극하고 삶의 경험으로 체화시키는 예배라고 보여 집니다.

또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강단에서 보니까 나이가 드신 교우들이 눈에 보이는군요. 이 분들, 이 분들의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구전으로 담아서 예배와 다양한 교회 교육에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야기 주제는 무궁무진할 거 같습니다. 거창하게는 그 분이 보고 들은 한국사회, 한국 전쟁,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겪었던 일들, 소박하게는 그 분들의 자녀 교육, 무엇을 먹였고, 입혔고, 아플 땐 어떻게 했고, 그 당시 장난감을 어떤 거였고, 심지어, 요리법도 전수 받으면 어떨까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음식을 거의 해 먹지도 않지만, 막상 한다고 하더라도 요리책을 사서 읽거나,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읽어서 음식을 만드는데, 제 생각엔, 우리 할머니들의 입으로 전해 주신 요리법이 훨씬 맛날 거 같습니다.

어제 제가 문동환 선생님 딸인 문영미 언니의 부탁으로 친할머니 김신묵 여사의 구전 이야기 (테이프로 녹음된 이야기) 풀어 놓은 걸 볼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 분이 들려주시는 1900년대 만주에서의 일부터 김신묵 할머니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수천 권의 책보다 더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신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정말 값진 선물이었구요.

기장은 물론 한국교회를 선도하고 있는 향린교회가 서구적인 문자 이성주의를 극복하고, 우리 문화와 구전전통을 발견해 내면서 진정한 토착화신학, 탈식민주의 예배를 성숙시키기 기원합니다. 그 과정은 반드시 오늘 말씀처럼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성서의 이야기를 신학화 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꿈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죽림교회 여신도교인들과 함께 글을 모르기에 더 성서의 이야기를 가깝게 느끼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어쩌면 글을 아는 우리보다 더 잘 터득할 수 있는 그런 성서 공부와 예배를 함께 드리는 꿈입니다. 더 큰 꿈이 있습니다. 세계 문맹인 여성들과 함께 듣고, 보고, 만지고, 맛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그들의 이야기와 성서의 이야기를 엮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꿈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사랑의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경험하며 자유롭게 되고, 그 진리로 인해 불평등, 차별, 우월주의가 무너지게 되는 걸 보는 꿈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꿈을 보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약속이 아닐까요?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요1:50) 이 일을 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주현절,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증거 하는 일이 아닐까요?

제가 가진 이 꿈을 오늘 향린교회 교인들과 나누고 싶었는데, 보고 듣고 부르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사무엘서, 요한복음서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제가 왜 교회력 성서일과의 우연이 여호와이레의 필연이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나누는 실천으로 함께 사무엘서 말씀을 들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읽지 마시고, 함께 들으십시다. (테이프 돌아감) 할렐루야.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