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메는 강산 가슴에 곱게 수놓으며”


열왕기상 13, 1- 11; 16- 24 ; 에페소 2, 14- 19

조 헌 정 목사


[독창성의 문제]

여러분도 같은 경험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는 한참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깨어난 적이 있습니다.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주제는 분명했는데 그것은 4글자였습니다. ‘줄-기-세-포.’ 그날은 황우석교수가 서울대진상조사위원회 발표에 대응한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일에 제가 뭐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에 관련되어 있는 원천기술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 새롭게 만들어졌을 때, 이를 독창적인 발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면 학문의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 독창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발명은 없습니다. 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서 발명의 단서를 얻습니다. 에디슨을 발명의 왕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여기저기서 실패한 누군가로부터 단서들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복음서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비유들조차도 유대 랍비들의 눈으로 보면 해석의 독창성은 인정하여도 모든 말씀들의 원천기술 또한 예수님에게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강단 전면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기입된 교인 십자가가 붙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 나라의 교회들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모습을 다른 교회에서 본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독창적이라면 독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초가 있었습니다. 부임 직후 강남향린교회를 갔는데, 거기 달린 성전 십자가는 하나의 십자가가 아닌 수십 개의 작은 십자가를 묶어서 하나의 큰 십자가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묵상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배실의 전통창틀도 제가 다른 교회 예배실에서 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근처 식당에서 보았던 기억들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독창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아 이건 향린교회의 독창적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중대한 거짓말과 논문 조작이 있었다는 점에서 황우석교수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는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과연 원천기술이라고 불릴만한 그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서울대조사위는 그런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고 황교수측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과학적 논의는 잘 모르지만, 어디까지를 원천기술로 보느냐는 기준에 따라 답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의 글들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상대방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같다보면 인용구 없이 단어 몇 개를 바꿔 마치 자기 문장인양 쓰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기나라 말이 아닌 서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논문 작성을 하는 경우 이 유혹은 참으로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건데, 저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매주 전하는 하늘뜻펴기 또한 무에서 창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저기 읽었던 글과 생각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하늘뜻펴기가 만들어집니다. 전 목회 초창기 시절에 제 나름대로의 하늘뜻펴기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의 설교를 읽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나의 것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을 때부터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구입해서 읽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향린교회로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전혀 하지를 않고 있는데, 그건 향린교회의 특성상 별로 참조할만한 목사님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하늘뜻펴기 한편을 펴내는 일이 다른 목사님들에 비해 훨씬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기에 독창성이라는 점에서는 언제나 자부심을 갖고 있고, 여러분이 저의 하늘뜻펴기에 대해 관심하는 것 이상으로 저 또한 제 스스로 오늘은 어떤 하늘뜻펴기가 펼쳐질는지에 대해 매주 기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문 선택도 아직은 세계교회가 정한 매일성서읽기표(렉셔너리)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도 그런 기대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학 교수들은 렉셔너리를 선택하는 것이 목사 자신의 편향성을 극복하기에 신학적으로 옳은 것으로 말씀하지만, 전 아직까지 렉셔너리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서두가 긴 것은 오늘 저의 하늘뜻펴기는 성서 해석의 원천기술이 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제와는 거리가 멀고 과학연구소에 맡겨 DNA 일치를 조사하면 아마 10%정도일 것입니다. 2년 전쯤으로 기억됩니다만, 현재 기장 서울노회 한빛교회 유원규목사님께서 목회자 모임에서 하늘뜻펴기를 하셨는데, 그 성서해석이 참으로 독창적이라 제가 그 원고를 보내달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유목사님 또한 누군가에게서 단초를 얻긴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받은 설교문은 유목사님께서 지난 3년 전 2003년 3월 23일 ‘남북 두 예언자의 비석 이야기’란 제목으로 한빛교회 전임자이기도 하셨던 문익환목사님 방북 14주년을 기념하여 했던 설교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야만적 현실]

저는 새해를 맞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주제로 얘기하고 싶었고, 1월 18일이 문익환목사님의 12주기 추모일이 되기에 자연스럽게 연결을 지은 것입니다. 지난 주 목회 설문조사에서 신앙적으로 본받아야 할 사람들을 특강의 형태로 소개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 개인의 삶을 신앙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남한 교회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작년에 전태일열사를 추모하는 거리기도회를 가졌습니다만, 이런 일도 한 번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 정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인의 우상화가 아닌 우리가 신앙실천운동에 실체와 구체를 위한 작업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남북통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문익환목사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요 신학자요 성서번역가요 시인으로 50대 이후의 삶은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의 최전선에서 감옥 안에서 산 날이 밖에서 산 날보다 많았던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의 뇌리에 가장 크게 남아 있는 사건은 1985년 3월 25일 비밀리 방북을 하여 김일성주석을 만났던 사건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한 60년이 넘어가도록 남과 북의 불신과 적대적 감정은 그대로 유지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은 심심하면 멀쩡한 시민들을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빨갱이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언론에 재갈이 물린 국민들은 이를 당연시 여겨 왔습니다. 요즘 그 조작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빨갱이에 대한 국민들의 밑바닥 공포 정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황우석교수 사태를 두고서도 MBC를 빨갱이라는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뭐가 좌파정책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조금만 새롭게 개혁하려고 하면 현 정권을 좌파정권 심지어는 빨갱이정권이라고 공공연히 부릅니다. 그저 빨갱이라는 명칭만 갖다 부쳐 상대방을 비난하고, 단지 이 세 글자로 그 사람의 일생을 끝장내는 야만적 행태는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분단 때문에 한겨레로 같이 살아야 할 우리가 서로 원수가 되어 미워하고 불신하고 죽이는 사이가 되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비극이죠. 남은 북을 괴뢰라 하고 북은 남을 주구라고 서로 비난하다보니까 7천만 겨레는 다 개 아니면 꼭두가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치욕을 떨어버리는 일이 분단극복의 의미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현재 남한만 하더라도 군사비 지출이 30%에 가까운데, 만약 100만원 버는 사람의 월급에서 방범비로 30만원을 떼어간다고 하면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들이 있지만, 모든 모순은 이 민족분단의 모순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오늘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서본문입니다. 오늘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는 남쪽의 한 예언자와 북쪽의 늙은 예언자가 함께 만나는 얘기입니다. 이를 남쪽에서 간 문익환목사님과 북쪽의 김일성주석의 만남에 연계하는 것은 성서신학적으로나 신앙 일반에 있어서도 엄청난 모순이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오늘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그런 모순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경우에도 성서 이야기를 현실에 접목시킬 때에는 외줄 밧줄을 타는 모험이 있지만, 오늘은 우리 안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밧줄타기-성서의 이야기와 오늘의 연계]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따라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가나안의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들은 각 지파별로 땅을 받고 살아갑니다. 한 400년을 왕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 시대를 사사시대 혹은 판관시대라 말합니다. 그리곤 사무엘선지자 이후 다른 민족과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왕을 세우게 됩니다. 1대 사울왕 2대 다윗왕 3대 솔로몬왕을 지나 4대째부터는 정치적 이해와 이념적 대결로 남과 북이 분단됩니다. 남쪽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을 중심한 유다 지파가 모여 유다왕국을 세우고, 북쪽은 나머지 열지파가 모여 이스라엘왕국을 세웁니다. 그런데 지파의 수로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은 북쪽이 차지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모두 야훼 하느님을 믿었는데, 당시 믿음으로 본다면 이 야훼 하느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성전에 계셨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만, 여전히 북의 백성들은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그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민족의 정통성이 여전히 남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북왕국을 세운 여로보암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수적으로 보거나 민중평등이념에 있어서나 분명히 민족의 정통성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있었지만,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이를 확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에 맞먹는 성전을 북쪽에 세웁니다.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베델과 단에 하나씩 두고 임의대로 제사장을 임명하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여기서 제사예배를 하였습니다. 어느날 여로보암 왕이 백성들과 함께 베델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남쪽 유다에서 온 한 하느님의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오 제단아 제단아 야훼가 말한다. 다윗의 가문에서 요시아란 한 아들이 태어나리니 두고 보아라.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사제들을 죽여 그 뼈를 네 위에서 태우리라.’ 당연히 여로보암 왕이 분노하여 손을 들어 그를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의 손이 그 자리에서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얘기하고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곤 왕은 이 하느님의 사람을 잘 접대함으로 야훼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자 그를 왕궁으로 초대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왕실 재산의 절반을 준다 해도 왕의 궁에서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지 않겠소. 야훼께서 나에게 여기에서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지 말고 올 때도 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오.’ 그리고는 그는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얘기가 여기서 마치고 말았다면 이 얘기는 그저 성서에 나오는 평범한 이야기에 그치고 말겠지만, 성서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베델에 살고 있던 늙은 예언자가 그 얘기를 듣고는 급히 그를 뒤쫓아 갑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합니다. 그러자 이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의 명령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 늙은 예언자가 거짓말을 합니다.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예언자요. 야훼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을 집으로 데려다가 식사와 물을 대접하라고 하셨소.’ 그러자 하느님의 사람은 그를 따라 다시 베델로 올라가 그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때 이 늙은 예언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야훼의 말을 순종하지 않았기에 당신은 죽어 조상의 무덤에 묻히지 못할 것이오.’ 그리하여 이 하느님의 사람은 남쪽을 향해 가는 도중에 사자를 만나 죽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늙은 예언자는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 가족 묘지에 안장을 하고 ‘내가 죽거든 이 하느님의 사람이 묻힌 무덤에 같이 묻어다오. 내 뼈를 그의 뼈 옆에 나란히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우선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커다란 모순을 발견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간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죽은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른 명령을 자기에게 주셨다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 이 늙은 예언자는 어떠한 심판도 받지 않습니다. 이건 정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잘못은 둘 다에게 있는데, 어째 한 사람만 형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얘기를 문익환목사님과 김일성주석의 만남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또 성서 이야기를 남과 북에 그대로 연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금송아지 우상은 북쪽 사회주의 것이라기보다는 남쪽 자본주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성서 본문을 갖고 말씀을 전하는 보통목사님이시라면 이 이야기를 삼등분하여 그 강조점을 전할 것입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왕의 손을 그 자리에서 마비시키기도 하고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예언대로 이 베델성전은 요시아 왕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둘째 한때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에는 가차 없이 죽음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느님은 위대하시어, 사자를 통해서도 그 심판의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사자가 만약 배가 고팠다면 이 하느님의 사람도 죽여서 먹고 나귀도 죽여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자는 죽이기만 했지 먹지는 않았습니다. 나귀도 사자도 그 시체 곁에 그냥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역사입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예언자요.]

이 정도는 여러분도 하실 수 있지요? 그런 이 시간에는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십시다. 첫째, 하느님의 사람이 북왕국 베델을 방문한 목적입니다.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 외에 또 다른 성전을 만들고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었다는 종교적인 이유만이었을까? 우리가 아는 대로 여로보암 왕이 베델에 성전을 세운 것은 단지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시하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가 갈리고 성전이 갈리면 결국 분단은 영구고착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12년 전 문익환목사님이 통일 운동권에서 조차 비판하던 북한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영웅적 심리가 아니라 분단을 고착화하는 어떠한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신앙적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왜 남쪽에서 간 하느님의 사람은 그리도 쉽게 북쪽 예언자의 얘기에 속아 넘어갔을까? 하는 점입니다. 나라도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갔을까? 나와 의견이 정반대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내가 방금 기도하니까 하느님께서 반대로 하라고 하셨다.’ 여기에 넘어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돈이 모자라 건축이 중단된 한 시골교회 목사님이 대형교회의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목사님을 찾아가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이 목사님께서는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 목사님 제가 하느님하고 대화를 하여 보니까 그런 일이 없다는 구만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셨다고 해서 쉽게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제가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는데, 다음 주에는 평택에서 예배드리라고 합니다. 라고 얘기하면 이 중에 몇 사람이나 동조할까? 대부분은 드디어 목사가 망령이 들기 시작했구나 하고 말할 것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람이 왜 이 늙은 예언자의 초청에 그리도 쉽게 응했는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도 뭔가를 고민하고 그리고 결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늙은 예언자는 처음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예언자요.’ 이를 다른 말로 바꿔 말한다면 ‘나도 당신과 같이 북쪽과 남쪽의 분단이 고착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도 북남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요.’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명령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다른 사람을 통해 먹어도 된다고 들려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생각한 것은 ‘나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문익환목사님과 김일성주석은 서로 포옹하며 만나기는 했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길에 있었습니다. 목사의 길과 정치인의 길이 달랐고, 한 사람은 남쪽과 미국에서 성서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소련에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념적 차이와 배경을 넘어서서 서로 만났고 포옹하였습니다. 개인으로 서로 하나 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민족 앞에서 하나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만을 외치던 보수주의 신앙인들에게서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악의 화신 사탄의 대명사 김일성을 용납한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목사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공동번역성경 구약실장을 지낸 신학자이지만 목사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선과 악을 분명히 하는 분들이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거나 70세 은퇴조항을 어기는 일에 있어서는 선악이 분명하지 않는 그 이유를 저는 모릅니다.

북쪽의 베델성전의 멸망을 선포하러간 이 하느님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베델 성전에서 일하는 늙은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악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도 당신과 같은 예언자로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요.’ 라고 말할 때에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됩니다. 내가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나선 사람이라면 내 어찌 화해의 초청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성서의 침묵과 하느님의 고뇌]

전 여기서 하느님의 고민을 읽게 됩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어긴 그 민족사랑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남과 북의 예언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는 그 마음을 헤아립니다. 하느님께서 그 마음을 떠보시기라도 하듯이 밥을 먹는 도중에 갑작스레 이 늙은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당신은 야훼의 말을 순종하지 않았고 명령을 지키지도 않았소. 가던 길을 되돌아왔고 음식과 물을 먹었소. 당신은 조상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할 것이오.’ 이때 그가 그 명령을 잊고 있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뉘우치고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이 있었더라면 그는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얘기를 들은 이 하느님의 사람은 먹던 식사를 다 마치고 안장을 실고 길을 떠나는 장면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예고된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는 급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침묵합니다. 자신의 예고된 죽음 앞에 한마디의 항의도 몸짓도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성서 기자의 침묵에서 하느님의 고뇌와 하느님의 사람의 거룩한 자기희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야훼 하느님은 이 자신의 명령을 어긴 이 사람을 -성서는 그가 말씀을 어긴 이후에도 계속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사자를 통해 죽게 만듭니다. 마치 우연한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 사자가 먹지 않았으니 이건 분명히 하느님의 손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우연으로 가장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깊은 뜻을 알았을진대 당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직접 죽일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북의 이 늙은 예언자 또한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죽음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몹시도 마음이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는다면 거짓말을 한 자신의 죄는 엄청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한 10년이나 더 살다가 죽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죽은 후에 그가 죽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던 도중에 사자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부랴부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릅니다. 보통은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시체를 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이 있어서 그랬는지 직접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룹니다. 그리곤 자식들과 더불어 슬프게 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이 쓰던 묘지에 그를 묻은 후에 자식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들랑 내 뼈를 그의 뼈 옆에 나란히 묻어라.’

여기서 늙은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이 자기 집을 떠나고 나서 그가 자기 말에 속아서 집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빗대서 자기가 한 말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자신의 집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하나 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심판을 받아 죽은 그와 함께 뼈를 묻겠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의 뼈와 나란히 하겠다는 선언. 어쩌면 지옥이라도 좋다. 나는 이 민족의 화해와 하나 됨을 위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와도 함께 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문익환목사님은 ‘꿈을 비는 마음’에서 이 하나 되는 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 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단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오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북은 남의 형제와 자매를 꼭두각시로 남은 북의 형제와 자매를 빨갱이로 개로 여기는 비극적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 우리는 제 삶에 바쁘다는 핑계로 남북화해와 통일 논의를 모두 정치권에 일임하고 실천은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문익환목사님을 비롯하여 통일을 위해 숨져간 모든 분들이 지금 땅속에서 통곡하고 계실 것입니다. 왜 우리의 문제를 남에게 다 맡기고 바보마냥 살아가느냐?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정치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념의 문제이자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통일에 대한 실천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진실성에 대한 잣대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자에게 해방을 보지 못한 자에게 빛을 선포하고, 묶인 땅 사마리아와 구원에서 제외된 이방지역을 넘나들며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듯이 오늘 우리도 남과 북의 한쪽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참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화해 정신을 살려 빨갱이라 매도된 사람들의 뼈를 추스려 나의 뼈 옆에 함께 묻어두는 화해 운동을 펼쳐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꿈에서라도 우리는 외치십시다. 목메는 마음 가슴에 곱게 수놓으며 이렇게 외치십시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새민족으로 만드셨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파견사 -

조금 전에 여러분이 부른 261장 찬송의 작사자가 김재준목사로 되어 있지만, 3절은 문익환목사께서 작사하셨습니다.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는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햇불되어 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