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지도 좋을까!

시편 133편 1-3; 에페소 3, 14-21

조헌정목사


[설과 우리 문화]

60년대 이후 도시산업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이나 추석에 함께 붙어 다니는 말이 민족대이동, 귀성전쟁, 교통대란입니다. 이번 3일동안 이동하는 사람 숫자가 남한 인구 전체보다 훨씬 많은 6천 5백만이라고 하니 평일에도 교통혼잡 속에서 살아가는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게다가 제사상을 준비해야 하는 여자들은 명절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 한쪽이 지근지근 아파오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절증후군은 꼭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 3일동안 운전대를 잡고 양쪽 집안을 왔다갔다해야 하는 남자들의 경우에도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선물을 들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즐겁기 마련입니다. 우선은 가족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것이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거기에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찾아가는 그곳이 자신이 어렸을 때 자라난 고향이라면 이 흥분과 기쁨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고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베트남 같은 경우에는 이런 설날에 자기 고향을 찾아나서는 일에 일년치 수입을 다 써야하는 경우도 있고 그 기간도 한달이나 걸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을 불사하고서라도 고향을 찾아 나선다고 하니 이 경우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는 그래도 매우 행복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차례, 가정의례인가? 조상숭배인가?]

남한 땅은 좁은 곳이라 마음만 먹는다면 평시에도 고향땅을 방문하고 부모님을 방문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설날에 많은 인구가 이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 함께 모여 드리는 조상제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계 숫자는 없지만, 상당한 비율이 참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조상제사에 열심하는가? 조상제사에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일까? 컴퓨터와 핸드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에 이른 남한사람들이 조상제사에 있어 그렇게 열심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줄기세포의 과학을 신봉하는 남한 사람들이 상을 차려 조상들에게 주는 이 제사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떡과 과일은 물론이요 숟갈도 놓고 젓가락도 놓습니다. 심지어는 재작년인 것 같습니다만, 어느 장례식장에 갔는데, 거기 놓여진 수박을 보더니 한 여인이 그냥 이렇게 노면 조상님이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고, 뚜껑을 도려내고 그 안을 파서 먹기 좋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일도 먹기 좋게 깎아서 놔야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냥 멋이나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상님이 오셔서 먹는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특히 기독교인들 경우에는 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보고 절을 거부함으로 가족 내에 많은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가족끼리 함께 모여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단순한 가족의례인지 아니면 조상을 신격화한 조상숭배인지는 가족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종교학적으로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현재 남한에서 이루어지는 조상제사는 단순한 가족의례보다는 조상숭배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남한 인구의 반 이상이 무종교인들인데, 이 무종교인들이 조상을 신격화함으로 일년에 한두번 하는 이 조상제사를 종교화함으로 신앙의 대리만족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이 조상제사가 단순한 가족의례를 넘어 조상숭배쪽으로 가고 있다면 저는 이를 종교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민족공동체적인 입장에서 심각하게 비판하고 성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이념적 양극화입니다. 이 민족은 남북분단으로 인한 좌우이념대결과 전라/경상이라는 동서지역대결로 나뉘어져 갈갈이 찢겨있고 반목질시 속에 중병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갈등과 반목의 뿌리가 바로 내 가족 혹은 내 집안이라고 하는 폐쇄적 사고를 만들어내는 조상제사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조 오백년의 역사 속에 유학으로 인한 수많은 당파싸움과 사화들의 뿌리 속에 바로 문중이라고 하는 편 가르기가 있었고 이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일이 바로 조상제사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이 우리를 선진국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념적 양극화에 따른 패거리 의식을 극복할 때, 우리는 선진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반공동체 유행]

최근에 일어난 한 가지 예를 봅시다. 사람이 자신이 옳은 것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삶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로되, 이것이 지나쳐서 남의 생각을 짓밟는 행위는 참으로 옳지 못한 일이고 그것이 더욱이 고통을 당했을 때, 이를 비방하고 고소해하는 것은 참으로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사회의 지도자급에 의해서 진행되었을 때 우리는 절망을 금치 못합니다. 1989년 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여 청바지와 자유로운 모습을 통해 북남 양쪽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임수경씨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이 작년 여름 필린핀 연수를 갔다가 풀장에서 익사하였습니다. 이 기사에 수많은 국민들이 죽음을 고소해 하는 악질적인 댓글(악플)을 달았습니다. 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난 악질적인 댓글 들입니다. ‘장군님 곁으로 가지 않고 죄 없는 애까지 죽였구나.’ 이와 같은 악플 누리꾼들에게 서울지검은 모욕죄를 적용해 벌금 100만원씩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25명의 신원을 보면 직업교수 은행원 대기업 사원 주부 자영업자였고 40대부터 60대까지 고루 퍼져있으며 30대는 소수였고 10대나 20대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경솔했다고 반성을 했는데, 유독 한명의 대학교수만이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서울에까지 올라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느냐’며 당신들이 내려오라고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회에서 지도자로 대우받는 대학교수가 ‘뭘 그런 것을 가지고...’ 라고 반응을 한다는 사실에 저는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학생들이 그분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반문해봅니다.

[한국인 유대인인가?]

외국 특히 미국에서는 남한 사람들을 오리엔탈 쥬(동양계 유대인)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1년 365일 휴일도 없이 일하고 다른 민족들은 어떤 불상사를 당할까봐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술과 마약으로 찌든 흑인슬럼가에도 들어가 조그마한 가게를 열고 방탄유리 속에서 권총을 차고 장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유대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주권이 없는 자기 동족을 혹사시키고 경쟁하는 가게에 만약 영주권이 없는 한국인이 종업원으로 일하면 그 사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이민국에서는 자기 동족을 고발하는 민족은 한국사람 밖에 없다고 하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는 이런 얘기가 내려옵니다.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는 노예상인이나 산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유대인이 다른 민족사람들과 함께 붙잡혀서 노예시장에서 팔려갑니다. 힘센 청년이 팔려나가고 아리따운 여인이 첩으로 팔려나갑니다. 유대인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자는 유대인입니다. 몸도 좋고 일도 잘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금 몇 개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재빨리 값을 더 얹어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얹어 불렀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이윽고 이 유대인은 나중의 사나이에게 낙찰이 되었다. 이 사나이는 유대인 노예를 데리고 시장을 떠났다. 얼마쯤 가다가 그는 노예에게 ‘샬롬’하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유대인이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유대인은 만약 같은 유대인이 궁지에 빠진 것을 보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사람을 건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전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몸값은 유대인 사회가 헌금하여 충당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비드온슈바임’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유대인은 붙잡힌 동족을 해방시켜줄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해적들은 유대인만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인이나 희랍인이나 칼타고인에게는 유대사람처럼 동족을 구하려고 그들의 지역사회가 몸값을 물어주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국민은 단지 중동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동유럽과 미국과 러시아에서 건너온 수많은 백인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족이고 형제자매로 여긴다. 외국에서 유대인들은 얼굴색이 달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다 말해주지만, 단일민족이라고 자랑하고 단군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한국인은 서로 경계합니다. 미국이민사회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바로 한국인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줄 모릅니다. 유대인이나 중국인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이 있으면 주위에서 돈을 모아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남한사람들은 올라서는 사람들을 짓밟고 잘된다 싶으면 같은 업종의 가게를 바로 옆에다 차려 경쟁을 하고, 이미 계약 마지막 단계에서 웃돈을 얹어 남의 계약을 가로채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얼마 전 교계신문에서는 뉴저지의 작은 한인교회가 미국교회당을 빌리기로 계약까지 했는데, 갑자기 돈을 올려달라고 하여 그 이유를 알아보니 다른 한국인 교회가 웃돈을 주고 들어오겠다고 한다고 하면서 같은 한국사람끼리 그것도 그리스도인들끼리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한탄조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장단점이 있고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선민민족주의는 인류공존에 해악을 가져오지만, 우리는 이런 민족공존의 생각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폐쇄적인 가족중심주의를 깨뜨리고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제사제도를 민족공동체의 시각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들딸이라면 모든 재산을 다 넘겨주고 자기 몸까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 가족관계만 한 단계 벗어나면 아예 남으로 적으로 여기는 이 정신적 황폐함이 바로 이 조상제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상제사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정의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큰 목표에 맞추어 조상제사의 정신을 새롭게 하자는 주장입니다.

본래 조상제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마을공동체를 확립하기 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본래의 이런 공동체 정신은 거의 사라지고 이기적 가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성서의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공동체 그리고 나아가서 민족공동체 확립을 꿈꾸어 봅니다.

[교회는 공동체여야 한다.]

오늘 구약본문 시편 133편은 3절로 된 아주 짧은 시편이지만,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올라가면서 불렀던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아마 오늘 설날을 맞아 가족끼리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윷놀이를 하는 가족들은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말로 신앙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가족공동체는 생명의 출산을 통해 한 일원이 되지만 교회는 세례식이라는 한 예식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세례는 과거의 삶을 뉘우치는 회개의 표시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종교적 의미에서 결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공동체가 한 일원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의식이기도 합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구원과 해방의 종교적 예식이지만, 이는 동시에 온 교회 공동체가 한 떡과 한 잔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너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확인하는 사회적 예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나오지만 등록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싫어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결코 사적이고 비밀스런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맺는 관계는 인격적이고 진실되고 공개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한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임하는 구원은 그 한 개인을 통한 전체를 구하는 계획이지 그 혼자만을 구하고자 하는 계획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개인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결코 고립된 개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열두제자와 함께 사역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120명의 성도가 함께 한 곳에 모여 있을 때에 임하셨습니다. 기독교 초기 소아시아 지방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한 일부가 교회에서 빠져 나와 개인적인 행동을 취하고자 하였을 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히브리 10, 24-25)

교회의 생명은 공동체라는 것이고 믿음생활은 이 공동체를 확인하여 가는 삶입니다. 누가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성서 구절을 많이 외우고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믿음이 가장 바르고 좋은 믿음입니다. 성서는 한 개인의 고독한 은둔생활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나서 곧바로 이 사랑을 자신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오해할까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우리가 지난해에 열심을 내었던 소모임이나 올해 열심을 내고자 하는 구역모임들은 모두 이러한 이웃을 향한 믿음의 공동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 공동체는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동호회 조직과는 다르고, 같은 연령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클럽 또한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압니다. 서로 다른 세대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하나 됨을 확인할 때 공동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될 때, 이때 우리는 단지 성령의 인도함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 성서 본문은 ‘형제들이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이 이다지도 좋을까’ 하고 노래한 다음 이 공동체의 상징을 두 가지의 은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기름으로 다른 하나는 헤르몬 산에 내리는 이슬입니다.

[아론의 수염 타고 흐르는 기름]

출애굽기 29장에는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들을 임명하는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희생제물이 준비된 다음 아론은 제사장의 예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성별하는 기름’을 머리 위에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름은 하느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시요 성령의 상징입니다.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기름은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거리고 향기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반사되는 빛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비쳐집니다. 이때 이를 본 하느님을 믿는 공동체 안에는 따스함과 편안함이 일어납니다. 앞에 서 있는 제사장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통해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누군지도 모르는 그러나 같은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공동체 일원의 머리에서부터 기름이 흘러내려 얼굴로 수염을 지나 어깨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도 하느님의 아들과 딸인 제사장이구나. 우리의 믿음이 정말 성숙해지는 때는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바로 이러한 성별하는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절로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도 기쁠까 형제자매 함께 모여 사는 일’하며 노래합니다.

히틀러 독재 하에서 디이트리히 본훼퍼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는 근거는 그가 가진 신앙의 됨됨이나 그만이 갖는 영성이나 경건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의 형제가 되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주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혼자서는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헤르몬의 이슬]

두 번째 상징은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타고 내리는 모습입니다. 헤르몬 산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백두산만큼 높습니다. 높은 산에서 하룻밤을 자본 사람들은 이슬이 얼마나 많이 내리는가를 압니다. 새벽이슬에 반짝거리는 풀잎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건조하고 황량한 땅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이것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상상은 없습니다. 산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새벽의 이슬줄기. 그건 상상만 해도 힘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다. 새벽이슬을 흠뻑 맞은 인생은 결코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다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새벽의 이슬은 새로움과 가능성을 상징하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유대 땅 광야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고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의 얼굴이 헤르몬의 새벽의 이슬로 가득 젖어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그 사람에게서 오는 생명력은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응 그 사람 내 알지 이런 사람이야.’라는 섣부른 판단은 결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관계 속에 지루함이라고 하는 것 또한 상상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소외감은 더욱 그러합니다.

간추리자면 아론의 수염까지 흘러내리는 기름은 제사장끼리의 공동체의 교제를 의미하고 헤르몬의 이슬은 이 공동체에 더해지는 신선한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이 기름과 이슬이라는 그림언어를 보여준 이 시편 기자는 이에 한마디를 덧붙이기를 그곳은 -형제의 모습 속에서 기름과 이슬을 보는 그 공동체는-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곳은 영생이로다.

좀 거칠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불교인들은 극락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비종교인 또한 인간은 누구나 영생하기를 원합니다. 그래 장수에 관련한 음식이나 제품은 끊임없이 만들어집니다. 명절 때마다 행하는 조상제사 속에도 이 영생하고자 하는 소원 또한 담겨 있습니다. 내가 영생하는 조상을 잘 받들어 섬기면 나도 그 섬김 받는 조상의 대열에 끼어 영생할 수 있다는 소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생의 염원이 강하면 강할수록 조상제사는 더욱 빈번해지고 그 절차는 더욱 까다로워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편기자는 죽음 후에 오는 삶이 아닌, 바로 형제들의 모습 속에서 제사장의 기름과 헤르몬 산의 이슬을 보는 그곳이 바로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준 사람들, 낙심하고 절망하였을 때 가까이 다가와 말없이 손을 잡아주던 사람들.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격려의 말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주었던 동료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많은 기쁨을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여러분은 바로 그런 사람들 속에 함께 있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곳이 바로 야훼께서 복을 내리신 영생의 자리이겠지요.

기독교사상 2월호에 실린 자그마한 글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진하게 떨려오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영생의 삶]

두 수녀님에 관한 얘기입니다. 마리안에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 이 두분은 오스트리아의 간호학교를 나오신 분으로 소록도 병원에 오십니다. 그 때는 각각 1962년과 1966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섬을 떠나지 않았으니 두분 모두 40년의 전 생애를 보낸 셈입니다. 아마도 가장 살기 싫은 곳을 뽑으라면 국민 다수가 소록도를 뽑을 터인데 이 이국의 여인들은 이곳을 선택하여 평생을 살았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면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매만지고, 시간이 나면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 마을을 돌아 다녔고,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 하여 마지못해 받았던 월 10만원과 식비는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도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로,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여비로 나누어 줍니다. 병원이 마련해 준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고 피하고, 섬사람들이 소중하게 기억하는 두 분의 헌신적인 삶은 끝이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두 수녀님의 나이가 일흔이 넘게 되자 이제는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이 두 분은 이른 새벽 섬을 떠나고 맙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라는 짧은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작년 11월 말 40여 년 전 소록도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하나만을 들고서 도망치듯 떠났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머뭄과 믿어지지 않는 떠남. 그들이 남긴 은혜가 너무 커서, 그들이 떠난 자리가 너무 커서 섬사람들은 열흘이 넘도록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이 두 수녀님을 ‘큰 할매 작은 할매’라고 불렀다 합니다. 평생을 이 섬에 갇혀 전혀 죄 짓지 않았으면서도 천형 받은 죄인인양 자신의 가슴을 치며 평생을 살아가던 이 소록도 주민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야훼 하느님이 누군지는 몰라도 ‘할매 하느님’은 알았다고 하지요.

2천년 전 에페소 성도를 향한 사도 바울로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 두 수녀님으로 인해 이분들은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았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과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게 되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소록도에 버려진 이 분들은 두 분의 수녀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깨어진 몸속에서 아론의 수염타고 흘러내리는 성별의 기름으로 반짝거림을 보았고, 헤르몬 산의 이슬이 형제의 얼골(얼의 골짜기)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모습 속에서 새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건 천형이 아닌 천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천국 영생이 따로 있겠습니까?

저 또한 기도합니다. 이 향린공동체에 속한 우리 모두가 이런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단지 두 사람의 헌신된 수녀가 아닌 수백명의 헌신된 제사장들로 넘쳐 나기를...

그리하여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도 기쁠까 형제자매 함께 모여 사는 일’의 찬양이 울려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