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나사렛 선언


이사야 61, 1- 5 ; 루가 4, 16- 21


박 근 원 목사

은퇴한 교수로서 지난해도 설교를 한 번 했고, 금년에도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밖에 다니지를 않습니다. 향린교회는 제가 동경하는 교회, 처음부터, 학생 때부터 교회고, 저 뒤에 앉아 계시는 머리 하얀 황성규, 김성환 학교 때 친구들인데, 교회를 방황하다가 저 양반들이 향린교회에 정착을 했고, 나는 경동교회에 정착을 한 것 뿐 이지, 우리 마음은 다 같습니다.

지난 1월 신년 하례회 때, 그거 안 나가는데, 어떻게 나갔다가 이전에 서울노회 목회자 수련회에 내가 강연하는 것을 어떻게 아시고 조목사님께서 다그쳐서 그 강연 우리 교회에 해 주십시오. 그러더니 어차피 오시니까 설교 말씀도 주셔야죠 하고 제가 거절을 못했습니다. 존경하는 제자고, 미국에서 목회하면서도 서로 교류도 더러 있었고, 제가 시도했던 한국교회 예배 같은 예배를 한국에서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데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는 꽤 먹혀들어가요. 그런 차원에서 조목사님 주변에 대화했던 기억이 있어서 제가 거절하지 못하고 여기 섰습니다. 이 자리에 서니까 안병무 선생 생각이 나는데, 안병무 선생은 제가 학교에서도 모셨고 그러는데, 그 양반은 40분 안주면 설교 안 한다, 설교라는 게 한 번 실마리를 풀어서 결론을 맺기까지는 한 40분 걸립니다. 꽤, 인류학적으로, 옛날 불트만이 그랬고,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도 그랬고, 그런데 제가 이제 학교에서 배우기는 설교는 20분 넘으면 안 된다. 조 목사님 미국 계시는 그 프린스톤 같은 데서는 설교는 딱 17분만 해야 된다. 1분도 넘으면 안 된다. 하니까 그 양반들의 설교시대도 간 것 같고 나도 고민고민하다가 시간을 제약하기 위해서 그냥 풀어놓으면 막 갈 거 같아서 그 원고 메모한 거 위주해서 말씀을 드릴까 생각합니다. 좀처럼 뭐 용기를 못 낼 수도 있는데 다행이 인제 향린교회도 교회력에 따라서 지정 본문 가지고 설교를 하신다, 해서 제가 안심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주현절 다섯 번째 주일 지정된 본문입니다. 주현절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타난 계절이다. 본래는 1월 6일에 나사렛 마굿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게 1월 6일이라고 천문학자들은 생각을 하고, 동방정교회에서는 그 날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키는 12월 25일에 성탄절 하고는 다르고, 그 사람들은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는데 세계교회에 가까이 지면서 결국 주현일을 그래도 포함해야 되겠다, 생각해서 세계교회가 1월 6일 주현일을 포함해서 사순절까지의 그 기간을 주현절로 지키자 그래서 주현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계열에 배열된 성경본문들은 쭈욱 보면은 재밌습니다. 주님께서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사건들, 시기별로 그리고 사건별로 그것을 나열해서 꽤 학자들이 잘 정리를 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뭐 교회 전승에서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별로 나타나고, 양떼들을 지키는 목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나고, 곧 이어서 낙타 등에 업혀서 피난민으로 애굽에는 피난민으로 나타나시고, 갈릴리로 돌아와서 그런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30이 되면서 좀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요르단 강에 나타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 나타나서 마귀의 시험을 받고, 이렇게 시작되는 예수님의 나타남이 결국 변화산에 나타나서 하늘에게 음성을 듣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에는 시작이 되도록 이렇게 짜깁기가 돼있습니다.

오늘의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나타나신 이야기, 예수께서 자라나신 동네에 회당 나사렛회당 그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성서봉독의 순서를 맡았던 것 같아요. 오늘 이 두 분이 성서봉독 순서를 맡았던 것 같듯이. 그 때는 그날에 읽도록 지정된 본문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두 눈으로 두리번거리면서 찾아서 읽었던 것 같지 않아요. 그 시중드는 사람이 두루마리를 갖다 주니까 그것을 펴서 읽은 것이 주님께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표준새번역이 이렇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는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 오늘 본문에는 은총의 해, 제 개인적으로는 `은총의 해`라고 하는 것이 더 감각이 있는 것 같은데 표준새번역에는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읽은 신약의 본문도 구약도 읽으셨는데 구약 본문이 딱 그 신약하고 들어맞지를 않습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당시 읽었던 것이 70인 역이라고 해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본문이기 때문에 조금 뉘앙스가 내용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확 끄는 말은 이 은총의 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내용인즉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영을 내리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이런 일들을 해라 하시는데 여기에 언급된 일련의 사건들을 행동에 옮기는 이 은총의 해를 선포하라고 하는 과제를 주신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니까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께 주목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이 순간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 은총의 해가 선포된 것입니다. 구약 전문에서 오래 말해오던 희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선포하셨다고 해도 되고 예수님의 공생에 사건, 예수님의 삶 자체가 은총의 해, 희년의 선포라고 하는 뜻도 됩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고 짐작을 했으리라고 믿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골자인 어떻게 보면 엑기스인 이 희년고백에서 조금은 역사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보다 한 500년 전 이스라엘 신앙전통 이사야에 예언을 조금 수정해서 선포를 하셨는데 사실 이 희년법이라고 하는 이 역사는 오래됩니다. 전설로 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와서 7년 안식년을 지내고 뭐 가나안 정착의 초창기부터 이런 것이 있었을 것이다, 전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문서로는 이 희년 주장들이 레위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초기부터 있었던 안식일 규정과 채무 면제규정, 남의 빚을 받아다 언젠가는 또 모두 다 탕감하리라 하는데 이런 규정들을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 집대성한 것으로 역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식년이 7년이니까 7년을 7번하면 7*7은 49. 그리고 그 다음에 지난 50년째 해를 이스라엘 백성은 희년으로 지켰습니다. 이 희년으로 알리는 뿔나팔을 불고 거룩한 축제, 엄청난 축제들이 일어났는데 희년이라고 하는 말은 순양의 뿔, `요벨`이라고 하는 순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것이 희년의 알림인데 이 `요벨`이라고 하는 말에서 `쥬빌리`라고 하는 독일어나 영어나 이 희년이라고 하는 말이 유래가 된 것입니다. 이 때가 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속죄의 예식을 치루고 대대적인 해방 실천작업을 실현했던 것입니다. 땅을 묵힙니다. 이는 땅을 쉬게 하라고 하는 안식년법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도 휴식하시는데 땅도 쉬어서 생태에도 어떤 쉼이 있어야 된다. 땅을 묵힘으로 지력을 잃은 땅의 생산력을 높이고, 이 해에 절로 나는 열매와 곡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고 또 짐승들의 몫으로 놔둡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이 생계를 지원하는 동시에 인간의 경작으로 쫓겨난 생물들이 다시금 찾아와서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모범. 땅과 가옥은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줍니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시편에 의하면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은 식객일 뿐입니다. 누구나 땅을 영구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난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땅을 파는 경우가 생기고 심각한 경우에 경제의 불균형 같은 것들이 생겼던 겁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힘을 모아서 그럴 때 땅을 도로 찾아주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럴 처지도 되지 않을 경우에는 50년 기다렸다가 희년이 되면 땅 소유주는 조건 없이 그 땅을 되돌려 받습니다. 집이나 목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채무는 탕감 받습니다. 여러분 뭐 그렇게 채무자는 없을 것이라 짐작을 합니다마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규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돈을 꾸어 주지 못합니다. 이자를 받을 수는 더욱 없습니다. 그런데도 곤궁한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고 또 이자를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자를 붙여서 절대빈곤에 빠지고, 이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50년마다 희년이 되면 결국 정기적으로 빚을 갚지 못하는 이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종도 풀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쓰라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난과 부채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종으로 넘기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성경에 보면 그들을 노예취급하지 말고 손님처럼 대해라. 일정한 기간 7년이 되면 그들에게 한 밑천 줘서 종살이를 해방시켜라. 그것이 레위기 신명기에 있는 법입니다. 희년이 되면 종들은 다 자기 기업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유토피아와 같은 생각이죠.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 아니면 성경 속에 담겨있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 모법 같은 것들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떤 평등, 평화를 이루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그 이념, 이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희년법은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족에게는 땅을 돌려주었지만 원주민의 땅은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족으로서는 종살이를 풀어주었지만 이방인은 종의 해방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동족에게는 이자를 놓아서는 안 되지만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놓아도 괜찮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그 순수성을 보존하고 죄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이방인 아내들은 억울하게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레위기법에 희년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스라엘에게만 한정해서 굉장히 국한된 그런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선언의 내용으로 봐서 레위기가 아니고 이사야가 꽤 수정한 이사야 신앙전승을 받아서 그것을 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데로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살찐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하는 이런 진짜 이상향이었고 유토피아적인 평화를 꿈꾸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의 꿈을 사회와 정치, 경제적인 삶의 자리에도 옮겨서 오늘 구약성서 읽어주신 분이 읽은 데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처를 싸매주고 포로를 해방시키고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는 석방을 선언하고 하는 일을 복음으로 이사야는 예를 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이사야의 복음을 받아서 선포하면서도 여기서 또 이사야를 수정합니다. 이사야 본문에 보면 61장 2절에 보면 그렇습니다. 주님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라. 엄청난 희년의 축복도 있지만 보복을 받을 사람들은 보복을 받는다더라. 이렇게 선포를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보복의 날은 그냥 컴퓨터에서 뭘 지워버리듯이 지워버리고 은총의 해만을 복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희년법의 역사가 기독교 2000년뿐만 아니라 구약역사 수천 년 동안 지내오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액기스인데 이것도 많이 수정을 거쳐서 바로 복음으로 선포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은총의 해를 레위기 희년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사야의 총체적인 평화의 꿈을 이어 전승을 하면서도 새로운 구원이고 구원의 관점, 해방의 관점이라는 공동번역이 해방이라고 하는 말을 쓴 거... 저 부분 다 우리 문익환 선생님이 초역했던 것 아니겠습니다만 새번역보다 훨씬 더 뉘앙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의 주의 은총의 해는 시온 벽 밖 백성에 의해서 선포되었으며 시온의 회복되는 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과 은혜의 해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선비나 차별이 없이 온 세상, 온 인류에게 널리 개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은 온 생명을 향한 은총의 하나님과 그 은총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온전한 구원과 해방을 밝히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은총의 해를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선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지금 이 세상이 기쁨으로 누려야 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 세상이 그렇게 되어져야 할 실천과제로써 우리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교회력에 주현절 다섯째 주일 우리에게 주신 이 본문 오늘의 말씀이 금년의 주현절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복음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이 희년법은 아주 성공적인 규정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와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거든요. 그 역사가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절, 시드기야 왕과 같은 시절, 결국은 안식년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현실은 여의치 못했습니다. 이 법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 예레미야는 굉장히 질책을 합니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는 모두 너희 친척, 너희 동포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했는데 내 명령은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보고 너희들이 안식년법, 희년법을 지키지 않아서 죽은 것으로 알게 될 것이다" 좀 혹독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예레미야서 34장에 이런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희년법이 결코 성공한 법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완전히 폐기된 법도 아니었습니다. 실패했으나 거듭거듭 강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법이 희년법입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도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사렛 회당에서 이 은총의 해의 법, 희년법의 성취를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시금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 신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해라,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하나의 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이죠. 불가능한 가능성을 믿으라는 것이죠. 우리가 할 수가 없고 해낼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모두 아니다 하면서도 끝내 이것은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희년법이니까요. 값없이 무조건 세상 죄를 용서하라고 하는 습관적이 기원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희년 은총의 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하신 그 하나님의 값비싼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고 그 변화가 이미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들어서 그 신앙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의 희년법에 대한 본문이 주어진 성서일과 주현절 다섯 번째 주일에 선포하도록 한 본문이긴 합니다만 우연치 않게 세계교회협의회가 다음 주부터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아에서 열리는 데 이번 9차 WCC 총회의 주제도 이 본문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이것이 WCC의 주제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도 이 세계교회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도 오늘의 성서 본문의 내용을 그랬어요. 은혜란 말을 쓰지 않고 은총의 하나님, 같은 말인데 영어나 독일어나 같은 말인데 우리 말로서는 은혜는 값싼 은혜에 가깝고, 은총의 하느님, 같은 말인데 은총이라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기장 총회는 은총의 하느님,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주제를 통해서 한 해 동안 명상하면서 고민하면서 살도록 신앙훈련을 하면서 살도록 결정을 한 것입니다. 세계교회도 그렇고 우리 교단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지켜지지 않는 것, 아니 지킬 수도 없는 이 은총의 해를 선포하면서 우리로서는 성취할 수 없지만 제발 하느님, 당신의 은총으로 이런 변화를 성취해 주시옵소서 하는 비장한 신앙적인 결의만이라도 우리들이 하면서 살아야한다. 그런 것이 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법과 어긋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부채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 부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우리 경우보다도 훨씬 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엄청난 제1세계에 부채를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제1세계의 부강한 나라들이 이를 탕감해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WCC 총회 같은 데서는 탕감해주라는 명령은 못해도 그런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짖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폭력이 지배하는 이 지구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입니까? 폭력이 중동의 문제 뿐 입니까? 우리 현실의 문제입니다. 온 세계교회가 뒷짐만 지고서 그저 엄청난 현실을 구경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WCC가 기치를 들고 하나님께 매달려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혼동 가운데서 우리 기장도 매달려 호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창조적인 변화가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이런 것이 일어날 수는 없을까? 이런 세계 교회의 고민에 우리 한국교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개교회주의에 빠져서 자기 교회만 키우고 자기교회만 잘되면 되고 하는 사고들에 젖어 있습니다만 오늘의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세계 어느 곳에 못지않게 우리나라 현실도 문제는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진보 보수의 갈등,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 우리 정부가 매달려서 생각을 갖고 양극화 현상을 해결해 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의 생각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까? 남북 대치의 현실, 날로 더해가는 빈부의 격차, 무엇하나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 하는 앙케이트 조사에 결정적으로 지배적인 사람들의 의견이 기쁜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상황은 그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만 우리의 민족은 역사의 어둠이 짙어 올 때마다 천지개벽 사상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것을 바뀌어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동학 운동도 그런 것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더 오랜 역사전통이 있습니다. 조금은 미신적이고 조금은 소극적인 묵시신앙 같은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들의 선포한 그리스도 교회 희년사상도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해 오셔서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변화를 주십시오. 하는 호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희년신앙도 말하자면 천지개벽 같은 것이죠. 그러나 소극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니고 신앙적인 결단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질서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해 주십사하는 희년신앙의 염원을 우리가 받아서 고백하고 거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백남준 선생 돌아가셔서 어제 장례식 하는 것 지켜보면서 한국이 낳은 천재적인 예술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가의 죽음을 보면서 세계인도 놀라지만 우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술세계에는 문외한인 우리로서 어떻게 그의 예술세계를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만 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 세계의 장르파괴, 관객과 작가의 간격을 헐고, 미술도 보는 미술이 아니라 듣는 미술을 만들고, 음악도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으로 만드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의 장르를 개발한 것이 백남준 선생의 기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고정관념의 파괴, 이것이 그의 예술세계의 지름길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은 우리 현실에 대한 분명한 도전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에 관심 가졌던 남북 분단의 극복도 고정관념의 파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죠.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양극화와 진보, 보수의 극복의 가능성도 백남준 선생의 예술의 이미지처럼 고정관념을 그 장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해, 희년의 신학은 우리 모두의 고정관념을 깨고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하는 명령입니다. 명령은 아닐망정 그것은 우리를 압도해오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이 역사에 직접 개입해 오셔서 우리 개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오셔서 이것이 아니면 아니 된다, 이렇게 강요해 오실 때 우리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적인 자세, 이것을 다짐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 은총의 해의 선언의 요청인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주십시오.

주여 오시옵소서. 아멘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