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변혁을 향한 회개
창세기 2, 1- 3  ; 마르코 2, 23- 3,6

조  헌 정 목사

요즘 남한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미식 축구선수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하인스 워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흑인 미군과 한인 어머니 김영희씨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올라선 하인스 워드. 그와 어머니에 관한 삶의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미국과 남한 언론에 기사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워드는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쿼터백, 런닝백과 와이드리시버라는 세 가지 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극히 드문 만능선수인데, 이를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하루에 세 가지 직장, 곧 공항음식점의 접시닦이와 호텔청소부 그리고 식료품 점원을 감당했던 고난의 삶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소수계 이민자로 살았고, 저 또한 밤낮구별없이 하루에 세곳의 일터을 쫒아 다녔던 숨가뿐 순간도 있었고, 또 목사로서 이 분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기에 김영희씨의 기사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워드는 흑인이기에 2류 시민으로 살아야 했고, 게다가 동양의 피를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흑인들로부터도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학교를 가던 워드는 친구들이 볼까봐 고개를 숙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렇게 하면 창밖이 보이지 않게 되지 않느냐?고 얘기를 합니다. 그날 차에서 내려 힐끗 뒤돌아 본 어머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본 어린 워드의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생기고 그로 인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의 오른팔에 하인스 워드라고 한국말로 문신을 새깁니다. 전 이 대목에서 진정한 인간승리를 봅니다. 그가 MVP 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한국말로 문신을 한 그의 정체성 확립에 대해서 말입니다. 단지 한국인이라고 하는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기 정체성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언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양인 여자가 당했어야 할 차별과 모욕을 뚫고 일어선 민중정신의 승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헌신적인 사랑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소위 배웠다고 말하는 그 누구보다도 삶의 가장 귀한 가르침을 아들에게 전합니다. 워드는 말합니다. “어머니는 내게 모든 성공과 승리의 순간‘기회에 감사하고 겸손하라’했다”고.

[현실을 극복하는 참 교육]

그래서 미국인들은 하인스워드를 만능운동선수로 기억하겠지만, 우리는 이혼과 가난과 혼혈이라는 최악의 심리적 장애와 사회적 차별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자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하루 3-4시간 학원을 다녔지만 좀 더 다니지 못한 것에 좌절해서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린이의 생각은 이 사회의 단면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과의 우열 비교를 성적만으로 그리고 성적을 돈으로 환산해내는 황당한 사회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드를 통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내는 참 교육은 바름을 가르치는 사랑이지 결코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현재 언론에서는 워드의 성공 배후에 있는 어머니의 헌신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 이 어머니의 헌신 이면에는 하느님 신앙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마 이 얘기는 차츰차츰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우드 얘기가 그냥 개인에 대한 찬사로 그치지 않고 요즘은 이 워드릍 통해 남한 내의 혼혈인에 대한 관심으로 번져가는 일입니다. 만약 워드가 남한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아마 초등학교조차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혼혈인 친구들을 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남한 사회는 혼혈인들을 이유 없이 차별합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남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따라 해외입양이나 이주의 기회를 거부하고 혼혈인으로는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다 하는 군복무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땅에서 태어나 이땅에서 교육받은 그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병역미필이 된 그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고, 결국 이 차별과 한과 억울함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24세에 불임수술을 합니다. 남한사회의 이 폐쇄적인 모습에 절망하고 분노한 그는 하느님이 그에게 허락한 생명보존의 본능과 아버지됨의 축복을 스스로 잘라 버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배기철이고, 현재 그의 나이는 50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를 애지중지하는 걸 보면서 나는 이 땅에서 개만도 못한 존재라고.’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만도 3만 5천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우리 군인들이 뿌려 논 차별받는 혼혈인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와 인권현실]

그러면 이런 인권의 문제에 가장 앞장 서야 할 교회는 어떠한가요? 순혈통주의에 매몰되어 혼혈인들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별은 다인종의 나라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워드의 어머니와 같이 미군과 결혼한 한인여성들은 차별 때문에 아무 교회나 나가지를 못하고 그들만이 다니는 교회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이런 교회를 담임한 경험은 없지만, 동료목사들을 통해 얘기를 듣고 임시당회장을 경험하기도 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남편이나 아내 한쪽이 미국인인 몇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 한인 여성과 라틴흑인계 푸에토리코 남성이 저에게서 결혼 주례를 받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남자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어도 부부가 열심히 예배에 참여를 하였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교회를 나오지를 않아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인이 이 여인에게 남편이 어느 부대에 복무 했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남편은 한국에는 가본적도 없는 사람이고 서로가 직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한 것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크게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마 평생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의 편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인종적 편견이든, 종교적 편견이든, 사회적 편견이든 편견 그 자체는 무서운 죄악이고 우리는 누구나 그런 편견을 갖고 살아갑니다.

[편견과 믿음]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편견을 깨뜨리는 삶이었습니다. 종교적 편견과 사회적 편견 인종적 편견을 부수기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남쪽 유대사회는 북쪽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심한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한 민족이었는데, 나라가 갈라진 이후 북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멸망을 당합니다. 이때 점령국 앗시리아는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북왕국에 강제로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래 피가 섞였다고 남쪽 유대인들은 북쪽 형제를 개같이 여겼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이 북쪽사람들을 공산주의 이념에 물든 빨갱이로 보는 편견과 같습니다. 빨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북의 형제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개로 여깁니다. 빨갱이는 짓밟고 때리고 죽여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강정구교수님을 구속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빨갱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국대가 직위해제를 결정한 것은 빨갱이라는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강교수님이 국가나 국민에게 어떤 실질적인 해를 끼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사회적 편견을 깨고 건들어서는 안 되는 분단이념의 성역을 건들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깨기 위해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사마리아 땅을 들어갑니다. 그리고 대화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곤 이 여인을 종교적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해방과 자유를 얻은 이 여인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사람들에게 뛰어가서 자신이 구세주를 만났다고 예수님을 알리지요. 결국 예수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제자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지 자기 안에 있는 편견을 부수어야 합니다. 단지 자기 안의 편견을 부술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편견을 부수기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참 이해]

오늘은 세계교회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화요일부터 브라질 포르테 알레그레에서 모이는 세계교회협의회 9차 총회를 맞아 기장 총회가 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은 하늘뜻펴기 본문 말씀을 세계교회협의회가 정한 성서읽기표를 좇았습니다. 구약 창세기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이레째는 쉬셨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는 구절입니다. 신약 마르코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 이 거룩한 이레째 날은 종교적 안식일로 엄히 지켜지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를 어기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구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랐습니다. 아마 주인 없는 밀밭이거나 혹은 주인의 허락을 받은 밀밭에서 식량 조달을 위해 밀을 잘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안식일39가지 금지조항 중 파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문제시 삼자 예수님은 다윗도 도망 다니던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던 제단의 빵을 먹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답하심으로 상대방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십니다. 이어 또 다른 안식일 사건이 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납니다. 물론 생명의 경각이 달려 있는 위급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안식일 편견을 깨트리기 위해 그를 앞으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청중을 향해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하고 물으신 다음 그를 고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임을 말하고 그것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어떠한 인간적 전통이나 법이나 편견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시 이 일은 단순한 종교적 논쟁거리가 아닌 목숨을 건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있은 후에 반대파들이 예수를 죽일 것을 공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논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지금도 안식일에 대한 편견이 존재합니다. 우선 안식일이 언제인가? 하는 것도 교단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1980년대 불의 마차(chariots of fire)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후에 중국선교사가 된 보수적 그리스도인인 에릭 리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합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1912년 올림픽경기의 영국의 단거리 선두주자로 선발되었습니다. 예선경기가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는 안식일에 경기를 할 수 없다 하여 경기를 포기하였고 전 국민이 그의 결정에 분노했습니다.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국민의 요구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일어나는 번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슬람신도였다면 그는 금요일에 시합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만약 안식교도이거나 유대교도였다면 그는 토요일에 시합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언제인가? 종교나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또 개인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왔지만, 제게 있어 교회는 하나의 일터입니다. 주일은 여러 교우들을 만나는 기쁨의 날이요 하느님께 예배하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긴장된 날이기도 합니다. 만약 안식일이 쉼을 뜻하는 것이라면 제게 있어 안식일은 오늘이 아닌 월요일입니다.

안식일이 언제이냐?도 논쟁거리이지만, 안식일에 꼭 교회를 나와야 하는 성수주일의 문제도 논쟁거리입니다. 전 신학교 2학년 때 신분을 감추고 인천 대성목재에서 여름방학동안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2교대로 하루 12시간씩 통나무를 깍아 베니아판을 만드는 일을 했고 이때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전 당시 돈을 벌려고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안식일을 엄히 지켜야 하는 교인이라면 상당한 죄의식을 갖고 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전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고 목사가 될 사람인줄을 알았기에 주일이면 소대 고참들이 교회를 다녀오라고 했지만, 제가 산을 넘어 주일예배를 다녀오는 동안 저의 동료들이 제가 해야 할 작업을 대신 해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졸병 시절에는 교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꼭 예배당에 참석을 하여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들어야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일까?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면 안식일을 어기는 일일까? 당시 제가 갖고 있었던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숨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활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북의 그리스도인들을 파악할 때는 교회 참석 숫자로 제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몇몇 교우들은 일요일에도 일을 합니다. 예배 참석만 하고 오후에는 직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직장을 가지 않더라도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일을 하기도 합니다. 현대 시대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단지 직장을 가지 않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닌 어떤 일 혹은 누구의 일이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선언은 사람이 무슨 일이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는 자유선언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매우 논란이 많은 단어이지만, 저는 이 말을 ‘하늘의 부름에 순종하는 섬김’의 사람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하늘의 부름이란 곧 생명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을 단지 쉬는 날로만 이해합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그치고 쉬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일을 그치고 쉬는 날이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샤바트는 단지 일의 중지라는 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 제정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의 성서 이야기가 출발하게 된 신앙적 배경을 분명히 깨달게 되면 안식일에 담긴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됩니다.

[창조기사와 안식일의 배경]

우선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의 얘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얘기는 갈대아우르에 살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종교사회적으로는 출애굽의 해방의 역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언제 덧붙어졌는가? 기원 전 586년경에 남쪽의 유대왕국이 신흥 바빌론제국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수천명의 왕족과 귀족과 제사장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 바빌론 그발강가에서 살아가던 유대인 포로민들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믿었던 야웨신은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과 더불어 죽었다고 믿게 되었고 그땅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2세들은 이제 야훼 하느님이 아닌 바빌론의 마르둑 신을 믿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바빌론의 창조의 신화에 대항하여 유대 제사장들은 야훼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종교적 계율을 연계하였는데,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제정은 단지 종교적 계율이 아닌 거대한 제국의 힘과 문화에 대항하여 포로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종교적 몸부림이었고, 약자로서 자유와 해방과 생명을 향한 민중선언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던 안식일과 할례가 예수님 당시에는 약자보호와 자기 민족정체성을 위한 생명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의 세세한 율법의 조항들로 변질되었고 이 조항들을 지키는 일이 의인이 되는 길이라는 율법종교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가 삶의 현실을 떠나 하나의 조항으로 변질되면 그때부터 종교는 사회적 변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에 눈을 감게 만드는 민중의 아편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안식일 파괴 배후에 담긴 해방과 자유의 정신이 있습니다. 종교적 편견과 사회적 편견을 깨트리는 생명운동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다시금 창조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창조의 적극성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7일째에 안식하시며 가지셨던 그 창조의 기쁨과 충만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과 혼돈의 세계로부터 빛과 질서와 공존의 세계에로의 창조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메타노이아-변혁을 향한 회개]

세계교회협의회가 7년 만에 총회를 시작하면서 오늘의 성서 본문을 채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창조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으로 다시금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어 또한 ‘하느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키소서.’ 라고 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혁하려면 지금까지의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회개 곧 metanoia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하려면 지금까지의 것들이 옛것이요 지나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희랍어 메타노이아에서 메타는 ‘함께’ 혹은 ‘후에’ 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이고, 노이아는 마음을 뜻하는 nous의 변형어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회개라고 번역이 되는 메타노이아는 글자 그대로 하면 ‘마음과 함께’ 혹은 ‘마음 후에’ 라고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흔히 교회 안에서 회개는 마음의 뉘우침 곧 마음과 함께 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과 함께’ 하는 뉘우침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마음 후에’로 이어지는 행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회개는 단지 마음의 뉘우침인 repentance의 단계에서 끝나지 말고 행동이 뒤따르는 conversion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회개는 conversion 돌아섬의 회개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그물을 잡았던 손을 놓고 배를 뒤로 하는 돌아섬. 예수쟁이들을 잡아 가두고자 가던 다마스커스 길이 갑자기 예수를 전도하는 길로 뒤바뀌어지는 돌아섬. 십자가 처형 후 고향 땅 엠마오에 도착한 두 제자가 그날 밤으로 떠나온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금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는 돌아섬. 구약의 예언자들은 그냥 마음을 뉘우치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야훼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어라]

이 돌아섬의 회개 곧 변혁을 향한 회개는 세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방향은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깨끗케 하여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잠잠해야 합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들이 쫓아옵니다. 이때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이때 모세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잠잠하여 오늘 야훼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아라.‘ 어느 누가 말했듯이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면 무조건 뛰고 보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방향을 모르면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조용히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배 중의 2분간의 침묵이 어색하신 분은 평소에 하루 20분의 침묵, 필요하다면 2시간의 침묵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의 죄악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메타노이아-변혁을 향한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이웃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면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아픔 속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 잠겨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나의 기쁨 밑에 잠긴 다른 사람의 희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워드는 말했습니다. 최우수선수상은 나에게 주는 상이 아닌 우리 팀 전체에 주는 상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개인에게 주는 상이라고 우기신다면 그건 나와 어머니가 합작한 것이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그가 믿는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립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합시다.’ 변혁을 향한 회개는 타인을 향한 우리의 무관심과 편견을 부수는 일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변혁을 향한 회개는 어둠의 세력에 맞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평택 대추리에 비어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알고 어떤 어둠의 세력이 금요일 밤에 그곳에 가서 마루바닥의 판자를 뜯어내는 등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그 교회의 목사와 교인이었다고 하지만, 이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어 몬 어둠의 집단이 있습니다. 물론 그 교회 또한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민족의 아픔과 마을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해야 할 교회가 제일 먼저 교회를 미군기지로 팔고 떠나는 일은 분명 예수님의 복음정신에 어긋나는 일이요, 하느님의 창조정신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목사와 교인이었다면 주민들이 한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곳에 함께 남아 교회가 기도하는 장소로 쓰일 수 있도록 보존해야 마땅합니다. 저는 사진으로 부서진 그 예배실을 보면서 심히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국가 권력의 부당함에 분개하고 자본 앞에 굴복한 교회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는 핍박의 땀과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입니다. 방해가 심할수록 교회는 더 강하게 모일 것입니다.

[지구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이러한 평화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단지 대추리 도두리에서 그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변혁을 향한 회개는 이 지구를 보존하려는 생태적 삶의 변혁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구원은 단지 인간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생명체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연은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만다 보시기에 좋아더라.고 말씀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동역자인 우리에게 이를 회복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메타노이아-변혁을 향한 회개입니다. 물질주의 성공 신화를 깨트리고, 소비행복주의의 우상을 깨트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공존을 외면하는 군사적 힘에 기초한 민족우선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현재 세계는 경제나 정치 이전에 종교간의 갈등으로 심히 반목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교주 무하마드를 악마로 그린 사진을 게재한 덴마크의 한 신문사로 말미암아 반서구 반기독교 데모 물결이 세계 57개국 이슬람권 전체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9.11테러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의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번진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종교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이 지구상의 진정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저희 교회는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에는 이웃종교인들을 직접 모시고 함께 대화를 모색하는 다섯 번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예년과 달리 참석률을 높이기 위해 수요일 대신 일요일 오후에 할 예정입니다.

[세계의 아픔을 품는 향린교회]

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음 주에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 참석하러 간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난 향린교회가 질에 있어 세계의 아픔을 품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는 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꿈을 뒷받침하는 기억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안식월을 맞아 스코틀랜드 서쪽 끝 아이오나라는 아주 작은 섬에 있는 공동체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돌로 된 기념교회가 있고, 여름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모인 약 50여명의 젊은이들과 신학자 목사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신앙의 토론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토론하고 기도하는 가장 큰 주제는 세계의 평화와 정의 실현입니다. 그들이 기거하는 방과 성전 복도에 남아프리카, 미얀마, 네팔, 볼리비아에서 신앙적 양심 때문에 억압받고 감옥에 갇힌 수십 명의 사람들의 사진을 붙여놓고 매일 기도를 합니다. 물론 한국인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세계 평화와 인권을 향한 기도센터 곧 지구의 중심이라고 부릅니다. 전 향린공동체 안에도 그런 거룩한 장소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남한 땅 어딘가에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향해 기도하는 그런 영성의 장소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갈릴래아 예수운동, 세상 개혁의 꿈을 꾸는 각국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 삶을 나누고 배우고 흩어지는 그런 신앙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삶의 고통에 눌려 기도하고 싶을 때, 언제라도 가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 향린동산 보유와 매각에 관련한 일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전 보유나 매각이냐?는 양자택일의 논의 보다는 이런 꿈을 먼저 함께 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이 꿈이 바로 안병무선생님과 홍창의장로님을 비롯한 향린의 선배들이 땅을 구입한 동기라고 믿습니다. 잊혀진 꿈을 되찾아서 이를 나누고 그래서 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면 답은 쉽게 찾아지리라고 믿습니다.

어제 한겨레 사설의 영화 ‘왕의 남자’의 예상치 못한 흥행의 원인을 주류에 대한 조롱과 모반, 뿌리 뽑힌 자의 애환 등 비주류 이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 기사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대개 세상을 변혁시키는 건 주류가 아니다. 이들의 규범, 제도, 관계, 감수성, 그리고 기득권을 전복시키려는 비주류다.’ 제가 말하는 향린교회의 세계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향린교회가 남한의 비주류로 남아 어떤 변혁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세계의 비주류로 나아가 변혁을 이루자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는 본래 비주류가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과 딸들 곧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 주인으로 나서는 변혁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끝으로 주보에 실려 있는 WCC 총회주일을 맞은 기도문을 함께 읽고 침묵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 파견사 -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모든 생명체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품는 향린이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의 풀 한포기의 호흡과 더불어 함께 숨쉬는 영적 인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연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결코 그의 지식이나 신분에 의해서 비천해지거나 고귀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의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