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첫째주일
하느님을 만나려면
창 22장 1-18, 마태오 4,1-11

지난 주 수요일부터 세계교회는 사순절이란 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간의 기간을 말하는데, 여기에 여섯번의 일요일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 사순절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처음에는 2,3일정도의 단식으로 시작하였다가 3세기 이후 니케야회의 때부터 40일의 단식과 경건훈련으로 제도화되어 왔습니다. 하루에 한 끼 저녁만 먹되 채소와 생선과 계란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것이 외면적 규율보다는 내면적 경건훈련에 치우쳐 개인에 따라 많은 편차를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지금도 이를 엄격히 지키고 있지만, 신교 교회는 이 절기에 대해 특별히 정해진 규율이 없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점차 이 절기의 중요성을 인식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불교에도 동안거 하안거와 같은 특별한 경건훈련기간이 있고, 이슬람교에도 라마단이란 절기가 있어 한 달동안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는 물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먹지를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저희 교우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사람이 이슬람교도였는데,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루 열 몇 시간씩 물도 마시지 않는 것은 일종의 고문으로도 보여 졌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모두 이 라마단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합니다.

[사순절과 한국교회]

저는 개인적으로 신교 교회에서도 이 사순절의 전통을 되살려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좋은 기회로 삼고 부활절을 단순히 예수의 부활로만 이해하는 교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부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교교회는 교권으로 타락한 중세가톨릭으로부터 개혁을 시도하면서 좋은 전통도 모두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의 상징물을 모두 우상으로 여겨 심지어는 십자가상마저 거부하였고, 경건의 훈련을 모두 외식적인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서의 근본 진리에서 이 믿음을 경건훈련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남한의 교회는 지금까지 값싼 은혜만을 강조하고 축복을 남발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룩하고자 하셨던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진실이 넘쳐나는 하느님 나라 운동과는 영 관계가 먼 개인영혼 축복공장으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자신의 말한 것들을 행하도록 가르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자신의 하신 말을 마음으로 믿도록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행하도록 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영어로 제자와 훈련은 같은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으로 삼은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과 여기서 받은 시험 그리고 이를 물리친 이야기는 바로 사순절을 맞자 우리가 어떤 신앙을 확립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고 믿습니다. 이 성서의 이야기 세 가지 유혹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들의 삶에 있어 어떤 것인지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를 행하고자 하는 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거부하고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리라.’는 말씀에서 과연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얼마나 이 말씀을 적용하며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기 보다는 돈이 부족한 것에 더욱 염려하며 살지 않았는가?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항상 사람들로 들끓는 성전 꼭대기에서 사뿐히 뛰어 내렸다면 그는 신으로 당장 경배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한탕주의, 인기몰이 성공주의와 결과주의를 거부하시고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물리치셨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한 주간 그런 한탕주의와 인기의 유혹을 거부하면서 살았는가?

마지막으로 악마는 자기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것들을 주겠다고 유혹하였을 때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과연 나는 그런 유혹들에 대해 그렇게 물러가라고 외쳤는가? 누가 불의에 눈 한번 감아주는 조건으로 권력의 자리를 제시할 때에 이를 거부할 수 있는가? 아니면 타협하고 협상하고 계산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인생이라는게 그렇게 원칙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 혼자 의롭게 산다고 세상이 어디 하나라도 바뀌는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게 인생의 지혜이지.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는가?

이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세 가지 유혹들은 모두 우리들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들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성공과 출세와 부의 축적이 모두에게 동일하고 지극히 당연한 목표가 된 지금 이 말씀은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만 가는 수많은 고층아파트의 군락 속에서 자기 방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자유의 위기]

스탈린을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구소련 공산주의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이 고통에 근거해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을 통해 구소련의 어두움을 폭로한 노벨문학상의 솔제니친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비방할 뿐만 아니라 자유를 이념으로 내세우는 서방세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서방세계는 자유를 소유하고도 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며 그걸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들지 않는다. 서방세계는 이미 그 영적인 힘을 잃어버렸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진정한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솔제니친은 여기에 인간 미래의 나아갈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본을 제시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솔제니친의 비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 향린인들은 자유를 좋아하고 그리고 자유인이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과연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희생하였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책임과 희생이 빠진 자유 그것이 과연 예수께서 추구했던 그 자유와 일치하는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이런 정도를 자유라고 부른다면 그건 성서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자유가 아닌가?

예수께서 추구했던 자유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하느님의 법도가 실현되는 그 나라를 향한 자기희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이 땅의 물질주의적이고 인간파괴적인 인 현대기술사회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희생적인가? 오히려 잘못 정의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더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고 싶습니다.

[창조는 고통(피)을 부른다.]

시인 허만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상처 입는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피를 흘린다.’ 창조를 뜻하는 한문 창(創)자는 동시에 ‘상처’란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목사 고진하의 몸이야기 158쪽에서 재인용) 창조하기 위해서는 옛것이 피를 흘리고 상처받는 일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가 잘 아는 면벽구년의 불가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던 혜가는 승산의 토굴 속에서 면벽 수행을 하는 달마를 찾아갑니다. 달마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 토굴 속에서 면벽한 채 무려 9년을 앉아 있었습니다. 혹한의 눈보라를 무릎 쓰고 달마를 찾아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이를 얻지 못하면 여기서 죽으리라는 각오로 뒤로 돌아보지 않는 달마의 뒤에 앉아 마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 후, 온 몸이 돌덩이처럼 얼어붙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이윽고 달마가 침묵을 깼습니다. ‘그대는 내 등 뒤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정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혜가가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달마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 따위 나약한 정신으로 어떻게 정법을 얻겠다는 것이냐?’ 그 순간 달마의 등 뒤에서 짤막하면서도 절제된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시에 토굴 속은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달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꼭 9년 만에 처음으로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한 사나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팔에선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눈밭에는 핏덩어리 그의 팔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면벽 9년 동안 숱한 수행자들이 다녀갔지만, 이런 사나이는 처음이었습니다. 달마는 고통 속에 이그러진 그의 얼굴 속에 애원하는 눈빛을 저윽이 바라보았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그 마음을 꺼내어 보아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마.’ ‘마음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하냐?’ 사뭇 냉담하던 달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이 사나이는 달마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큰 절을 합니다. 팔 한쪽을 잘라 내놓고 달마의 제자가 된 혜가의 이야기는 우리의 머리칼을 쭈빗 서게 만듭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에는 동물들을 대신 죽이는 제사의 얘기는 있지만 자신의 몸의 신체 일부분을 스스로 잘라내는 이렇게 처절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구약성서 본문으로 선택한 오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눈이 범죄케 하거든 눈을 빼어내고 손이 범죄케 하거든 손을 짤라 버리라. 한 지체가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온 몸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지금도 이 시간에는 이 좁은 남한 땅에서만도 수천만에 달하는 신앙인들이 교회나 절 이 외에 여러 다른 곳에서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를 예배하며 어떤 삶의 지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내 지체 한쪽을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절박감이 있는가?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절박감이 있는지요? 예수님을 좇았던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뒤로 하고 따랐던 그런 절박감이 있는 것인지요? 저는 우리 향린인들이 다른 교인들보다는 기본적으로 그런 절박감은 조금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철폐를 현수막으로 내어 거는 이 교회에 적을 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희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그런 향린의 사회구원과 진보의 간판 아래 숨어서 지내려는 신앙의 안일함 또한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고 싶습니다. 가끔 ‘향린교회는 편해서 좋다.’는 얘기도 듣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처럼 한두 주 빠진다고 해서 그리 닦달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계율도 그리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정도에 머문다면 향린의 주소를 찾아도 매우 잘못 찾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는 하느님은 단지 열의 하나 정도에 만족하시는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열 전부를 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팔 하나쯤 냉큼 잘라 던져내는 그런 신앙인들을 원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린이 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팔 하나쯤 잘라내는 일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향린인입니다.

사순절은 단순한 사십일이 아닌 피를 흘리는 고난의 사십일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이 고난에 동참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 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고, 개인의 형편에 따라 그 모양은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지금 죽어도 좋은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생과사의 절박감은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탐심을 죽이라]

때로 어떤 신앙인들은 과거에 붙잡혀 나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는 말로 스스로 위로합니다. 외딴 프랑스 마을에서 전도를 하던 이들에게 숙박소 주인이 자랑스레 ‘나도 종교적 경험이 있소.’라고 말하더니 아내를 향해 ‘가서 다락에 있는 커다란 가방 뒤에 있는 것을 가져와 이 양반들께 보여 드려.’라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가 가져온 것이라곤 너덜너덜해진 잔해뿐이었습니다. 그가 자랑스레 간직하고 있었던 종교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그간 쥐가 뜯어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지구에 중력의 법칙이 있듯이 우리 삶 안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항상 모자라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 그 물건은 매혹적인 광채를 띠게 되지만, 일단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나면 그것은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모자람을 느낀 인간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광채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하여 다람쥐 체바퀴 도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승리가 아닌 분투만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대한 추구를 추구할 따름이다.’ 말장난같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일이야 말로 신앙인이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과제입니다. 스스로를 객관화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절대자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영성의 지혜라고 말하겠습니다.

알라스카에서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잡는 방법은 우리들의 탐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늑대를 잡기 위해 날카로운 칼에 피를 묻혀 얼립니다.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를 덧입히고 덧입힙니다. 그런 후에 늑대가 지나다니는 길에 놔둡니다.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고 이를 슬슬 핥아먹기 시작합니다. 한번 피의 맛을 본 늑대는 이제 혀바닥을 열심히 놀려가며 맹렬하게 피를 핥아먹습니다. 어느덧 새벽의 날이 밝아옵니다. 그러나 늑대는 아직도 열심히 빨아먹고 있습니다. 칼날에 배어진 자기 혀에서 나오는 자신의 피를 아직도 먹이에서 나오는 피인 줄 알고 열심히 빨아먹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차가운 피였지만 이제는 더 맛이 있고 향기가 나는 따뜻한 피를 말입니다. 밤새 칼날에 베어진 그의 혀바닥은 마치 뜨거운 폭염에 갈라진 논바닥마냥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갈라져 있고 거기서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피가 흘러나옵니다. 결국 늑대는 자기 피를 먹고 계속 핥아먹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면 에스키모인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제 탐심에 쓰러진 늑대를 거두어 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순절은 단순한 종교적 절기가 아닙니다. 절제와 훈련을 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렸던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유명합니다. 제가 떠난 후에 축제가 시작되었으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본래의 의도는 그렇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이제는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 먹고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못하니 그 전에 실컷 먹고 즐기자는 욕구가 그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 삼바 축제가 가져오는 비도덕적 문란함이 비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적으로 말하면 남한교회마냥 사순절이나 그 이전이나 그 이후나 별다른 변화가 없는, 다시 말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것 보다는 한때 실컷 먹고 즐기고 그리고 나서 종교적 규율에 따라 자제하고 절제하는 것이 더 분명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생활의 변화의 동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65일 변함없이 검은 양복에 의젓하게 폼을 잡다가 어둠만 내리면 은근한 장소에 들어가 폭탄주나 돌려가며 남의 여인의 몸을 더듬는 이중 문화보다는 차라리 드러 내놓고 즐기는 문화가 더 솔직하고 정직한 것이 아니냐? 도대체 향락문화가 남한 땅처럼 성행한 곳이 세상 또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브라질처럼 대낮 거리에서도 사랑을 느낀 두 연인이 깊은 키스를 하는게 보다 도덕적이 아닌가? 저도 30년 전 미국에 처음 가서 그리 흔한 모습은 아니지만 공원에서 초등학생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미국은 도덕적으로 썩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국에서 느끼는 것은 정말 썩은 것은 남한사회이고 남한의 교회이고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한겨레 기자가 재미있는 관찰을 했더군요. 한나라당 박진의원이 국회 기자실에서 ‘한나라당은 왜곡된 폭탄주를 끊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며 폭탄주 잔을 망치로 깨뜨렸습니다. 그래 이를 지켜본 민노당 박대변인이 ‘술잔이 무슨 죄인가, 마신 사람이 문제지.’라고 한마디 했고, 기자는 박진의원이 깼어야 할 것은 폭탄주 잔이 아니라 룸살롱의 간판이라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추신을 달았습니다.(참! 박진의원님, 폭탄주 잔 깨시고 왜 그냥 가십니까. 깨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더군요.)

치우는 사람이 여성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결국 특권의식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가슴을 더듬고 뭐라고 하니까 술집 주인인줄 알았다. 이거야 말로 비난받아야 할 특권의식입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물의를 빚은 그 의원이 그래도 여러 의원 중에서는 그래도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사회 지도층을 향한 우리의 절망감은 더욱 커지고 자조 섞인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남을 비난하는 일은 그만 하십시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다. 사회의 변화는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무엇인가?

[사순절과 절제 훈련]

의사이자 심리상담가이자 신학자인 폴 뚜르니에는 ‘하느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하느님이 우리 인간 안에 심어 논 하느님의 형상 가운데 하나를 하느님 자신에게도 있는 모험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그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인간을 당신의 동료로 삼으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맡기시는 일은 모험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리하여 뚜르니에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인간은 모험에 자신을 맡길 때에 자신 안의 신성함을 느낀다.’ 신자이든 아니든 모험을 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뛰어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 95쪽) 그리고 누구나 모험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 깊은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열정이 없이는 결코 모험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열정이라는 단어를 풀이하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 하늘뜻펴기를 하면서 생뚱맞게 들리는‘모험’이라는 주제를 여러분에게 제시하는가 하는 이유는 이번 사순절 경건훈련을 계획하면서 이번에는 그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험적으로 시도하여 보시라는 뜻에서 말씀드립니다. 작년에 행했던 것보다는 한 발짝 더 내딛어보시라는 것입니다. 몇 가지 경건의 훈련의 예를 제시한다면,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번 40일동안 신약성서를 통독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10시에 20분동안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기도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대로 하루 한 끼를 단식하든지 한 끼만을 먹든지, 혹은 세끼를 꼬박꼬박 다 찾아먹으면서도 좋아하는 식품 고기같은 것을 안 먹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기호식품을 절제할 수도 있습니다. 술 담배도 있고요. 꼭 술을 먹어야 한다면 일차만 혹은 한잔만을 고집할 수도 있습니다. 연속극을 너무 좋아한다면 이를 절제하도록 하세요. 생필품 외에 샤핑하는 것을 금할 필요도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면 의식적으로 말을 줄이는 침묵 훈련도 좋습니다. 반대로 가정에 대화가 없었다면 대화를 늘리는 것도 훈련입니다. 상대방을 볼 때 장점만을 보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훈련도 있습니다. 단지 한 끼니를 단식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해당하는 돈을 구제헌금으로 모아가는 것은 더 큰 훈련이 됩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성서배움마당 또한 여러분의 훈련을 돕기 위한 시간들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않는 격주로 주일 아침마다 갖는 안병무읽기도 있고 한달에 한번 모이는 유아방모임이나 구역모임 등도 한번도 참여해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건의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는 필수적 조건이나 충분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들의 최소한의 노력이자 고난의 아픔 없이는 부활의 영광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자신의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고 확인한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려면 자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고 하느님이 하셨던 일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 확실한 것 하나는 불안한 미래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모험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아픔을 느껴야 하듯이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못 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일 수도 있고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일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백세가 넘은 그 자신은 그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들 이사악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의 미래의 전부, 아니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풍성하리라는 하느님의 미래가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을 드는 때]

그런데 그는 어느 날 하느님의 미래의 전부가 달려 있다고 믿었던 그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아니! 자신의 미래의 전부. 아니! 하느님의 미래의 전부를 향해 그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칼을 번쩍 드는 때.

그때 우리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윤기야! 윤기야! 정구야! 정구야! 영옥아! 영옥아! 금심아! 금심아! 철수야! 철수야! 선희야! 선희야! 네 칼을 멈추어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자신을 부르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서 안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포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 그리고 어렵고 두려운 일은 자기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동시에 가장 평안한 때는 자기를 내려놓았을 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주장의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포기의 자유입니다.

바닥이 뻔히 모래인줄 알면서 거기다가 집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래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석이 보인다면 당연히 반석 위에 집을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래가 모래로 보이지 않고 반석이 반석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래위에 집을 짓기도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래인생과 반석인생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세상을 좇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이 걸어간 발자국을 좇아 자신을 추구하는 인생이 모래 위에 지은 모래인생입니다. 암말기입니다! 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쌓아올린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모래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걸어가지 않는 새로운 길 그리고 좁은 길에 과감히 자신을 투여하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땅의 것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반석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길 사이에서 성공이란 정의는 새롭게 내려져야 합니다. 성공이란 세상 안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