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셋째주일 (3월 19일)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
창세기 22,9-14, 요한 3,1-12
조헌정목사

[한국 미국을 구하다]

‘미국 한국을 구하다.’ 이는 하나도 놀랄만한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전쟁을 그렇게 보고 있고, 많은 사람이 한반도의 현대사를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군이 있어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다고 믿는 국민이 다수이고 그래서 미국을 은혜의 나라라고 고마워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국 미국을 구하다.’ 이런 얘기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기사가 지난 주 금요일 미국신문 스포츠란 머리기사에 실렸습니다. 세계야구대회에서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미국은 결승전 탈락 위기에 몰렸는데, 우리가 일본을 이김으로 준결승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이 미국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번 한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난 월드컵에서도 미국은 자력으로 16강 진출이 안 되게 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포르투칼을 이김으로 16강에 진출했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구하다.만 절대명제가 아닙니다. 한국이 미국을 구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입니다. 더구나 저는 종교문화 부문에 있어 우리가 정신만 바로 차린다면 우리가 미국을 구하고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미소 냉전의 작품인 남북 분단의 아픔이 지금은 고통으로 다가 오지만, 통일이 되는 그날 이념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이 세계에 해방과 구원의 파라다임이 되는 그날이 분명히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번 야구경기에 한국이 미국을 구해주었지만, 미국은 이를 차버렸습니다. 미국이 멕시코에게 짐으로 한국이 마련해준 4강의 밥상을 걷어 찬 셈입니다. 그래 조금 있으면 남한과 일본이 결승을 향한 고지인 3번째 맞대결이 벌어집니다. 생각해보면 현대사에 있어 미국과 일본은 우리와는 깊은 애증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야구를 하는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이 두 나라와 이렇게 물고물려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이번 세계야구대회는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이 세계 최고임을 자랑하려고 주최했지만, 결과는 꼴찌라는 시나리오 최악의 상태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이 다른 나라와 하는 시합에서는 3국 심판을 세우는 기본적 상식조차 무시하고 자국 심판을 내세워 명백한 사실을 두 번이나 뒤집는 매우 어리석고도 부정직한 짓을 하였습니다. 이번 세계야구의 결승전 승자가 누가 되었든 패자는 분명합니다. 미국은 세계에 망신살이 뻗쳤고, 오늘 경기를 일본이 이기더라도 일본은 30년 동안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찌로의 발언- 이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일본국민의 일반적 정서라고 보는데-으로 인해 수치심을 떨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보면서 성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일의 성사는 하느님이 하신다’는 잠언서의 말씀입니다. 이번 미국이 꼴찌를 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일본이 우리에게 2번이나 진 이유는 실력에 있다기보다는 자만과 오만이 심어준 결과입니다.

저는 부시대통령이 이번 야구의 결과를 보면서 세계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고자 하는 오만과 욕망은 미국을 결국 패망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금 부시대통령의 지지도는 미국 안에서 조차 최하에 있습니다. 내일 이라크전 3주년을 맞아 미군을 철군하라는 평화데모가 미국 전역 400군데 이상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미국이 바로 서는 길은 이를 회복하는 길은 지금이라도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나라의 주권을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일입니다. 지난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를 만드는 일에 세계 모든 나라가 찬성했지만, 오직 미국과 이스라엘만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도대체 인권을 가장 중요시 여겨 세계인권백서를 내는 미국이 무엇 때문에 유엔의 인권이사회 구성을 반대하는 것입니까? 부시대통령은 지금 자기가 하면 로만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오만과 자만 속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평택에서는 미군기지확장을 위해 평생 농사지어온 농토를 강제로 빼앗기 위해 4천 명의 경찰이 이백 명에 불과한 농부들과 평화지킴이들을 무력으로 밀어붙여 여러 사람이 다쳤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지금 미군 기지를 확장하는 대상은 북한이 아닌 중국입니다. 기지 확장은 국가 안보를 더욱 위험하게 만듭니다. 평택미군기지문제는 단지 반미냐 친미냐 하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한반도에 평화냐? 전쟁이냐?는 우리 국민의 생존권이 달려있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정치군사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 뜻있는 기독인들이 모여 어제는 이곳에 천막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평택에 평화가 올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농사지어 그 찰진 평택미를 먹을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연과 땅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쌀이라는 생명을 낳는 땅을 사람을 죽이는 군사기지로 만들면 땅이 분노합니다. 새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발과 경제논리로 공사를 다시금 시작했지만, 제가 아는 것 하나는 자연은 자신이 수억 만년동안 누려왔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향해 반드시 보복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그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침묵했던 오늘의 우리를 비난할 것입니다. 성서는 이미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안식일을 통해 인간은 쉬어야 하는 생명체임을 알게 하셨고 안식년을 통해 땅도 쉬어야 하는 생명체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에서 농부들이 안식년을 지킨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예전 공산주의 나라로 알려진 러시아에 가면 지금도 농부들이 농토를 일곱 등분하여 매년 한 등분은 휴경지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땅을 생명으로 여기는 이 자연공동체 사상 때문에 솔제니친이 서방세계를 떠나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니그데모 - 모험과 개혁으로]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보신 분들은 제가 어떻게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파 학자 니고데모와 19세기의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해 궁금하리라 믿습니다. 실은 저도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도자’로 번역된 희랍어 원어(archon)는 다스리는 자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가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70명으로 구성된 유대의회라는 최고결의기관의 한 일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입법부의 국회의원이자 행정을 지휘하는 고위관료이자 동시에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가르치는 신학자였습니다. 당시로 말한다면 니고데모는 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은 자리에 까지 도달한 사람입니다. 지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지혜에 있어서도.

그런데 그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말은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몰래 찾아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지 못하는 세상을 어둠으로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하는 요한복음 1장에서 본다면, 그는 세상에 속한 곧 율법에 속한 구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조금 후에 보겠지만, 그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만큼 두려움에 쌓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 문맥으로 보더라도 그는 율법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훨씬 강하고 요한복음은 그를 다음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과 더불어 어둠의 세계에서 빛으로 나아온 대표적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가 함께 나눈 얘기가 몇 문장으로 간추려 소개되고 있지만, 이날 밤을 세워가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핵심적인 부분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 단순한 명제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날 집을 나서는 니고데모가 가졌던 주저함과 두려움, 그럼에도 나설 수밖에 없는 그의 절박한 마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길은 성서 속의 인물이 되는 길입니다.

제가 니고데모라면 아마도 예수 만나는 일을 한번쯤 생각은 했을지언정 결코 행동에 옮기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저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도대체가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권력도 있습니다. 부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율법선생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까지 받고 있습니다. 내가 왜 예수라는 젊은이를 찾아가 지혜를 찾아야 합니까? 이 사실을 백성들이 안다면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그리고 예수라는 젊은이는 도대체 그 출신부터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마리아 출신 다음으로 경멸하는 갈릴래아 출신입니다. 그의 하는 일은 아버지를 따라 목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목수하면 어떤 직업적 개념을 갖습니다만, 당시 목수라는 것은 날품팔이를 의미하는 수준의 단어였지 요즘같이 어떤 기술을 가진 생활이 보장된 직업적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임스 로빈손같은 성서신학자는 말하기를 예수 당시의 나사렛이란 동네는 기껏해야 주민 200명 정도인 아주 작은 촌락이었다. 주민 200명이라면 예수님의 가족만 해도 여섯 일곱은 되었으니까 30가구 정도의 마을을 말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강원도 산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학교가 없었다. 예수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90%의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예수 또한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4절에도 ‘저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듯 아는 것이 많을까?’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글을 읽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글을 읽고 쓰셨다는 성서 구절도 있습니다. 루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사렛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를 펴서 읽었다.는 구절이 나오고 12세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얘기도 나오고, 요한복음 8장에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얘기를 보면 땅에 뭔가를 쓰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학자 로빈슨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들은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복음서가 기록되던 1세기 후반의 교회공동체가 만들어낸 믿음의 기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이슬람교 파룩주불선교사도 말하기를 모함마드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모두가 석사 박사증을 따기 위해 맹렬하게 내달리고 있지만, 배움이 반드시 사람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능력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다는 말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어떤 성취감을 느끼는 일일지 몰라도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그건 사회가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생산하였다는 의미도 됩니다. 많이 배울수록 사회 적응도가 많으니까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뒤집어 생각하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창의적일 수 있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규범을 넘어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할 천재적 소질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교육비도 많이 들고 아무리 투자해 보았자 거기서 거긴데, 차라리 남의 뒤꽁무니 따라가는 교육을 시키지 말고 아예 정규학교교육을 무시하고 전혀 색다른 교육, 학교에 의존하지 않는 대안교육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말할 자격은 없지만, 현재 남한에서의 교육은 너무 지나쳐서 사실은 아이들을 망치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합니다.

하여간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라는 청년은 오히려 피해야 할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산헤드린 동료들은 예수를 미친 사람, 신을 모독하는 불한당 나아가서 체제를 위협하는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상을 뒤집고 채찍을 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 쫓은 다음에 ‘이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행한 행동은 사회의 근본체제를 뒤집어엎는 매우 과격한 행동이었습니다. 요즘말로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의 만남은 정부의 핵심 요원이 빨갱이를 접선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있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고 모험에 찬 행동입니다. 그간 쌓아올린 명예와 지위가 송두리째 날라 갈뿐 아니라 맥카시 의원이 이를 안다면 자신과 가족을 모두 빨갱이로 몰 것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찾아 나섭니다. 왜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가진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가?’ 여기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매우 아리송한 답변을 하십니다. 우선 새로 난다는 희랍어 부사 anothen 은 ‘두 번 혹은 다시’라는 뜻과 ‘위로부터’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나야한다. 곧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의미로 얘기를 했는데,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까?’로 이해합니다. 전 적어도 중학생 실력만 되면 이해할 수 있는 이 말을 니고데모가 잘못 이해하여 어리석은 답변을 했다는 것은 사실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율법이라는 전통과 문자에 매인 유대교 자체를 어리석은 것으로 표현하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가졌던 종교적 열망, 신앙의 숙제, ‘하느님을 보겠다.’는 이 말은 당시의 시대적 사고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눈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보아서도 안 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본 자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분의 뒷모습만을 보았고, 모세도 그 음성만을 들었습니다. 당시는 야웨라는 그 이름조차도 입술에 올려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을 아는 길은 모세를 통해 전해준 율법 곧 문자적 언어를 통해서만 알고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 저 안 지성소에만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성전 밖에서 그리고 율법 밖에서 하느님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매우 혁명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저는 추측합니다. 그는 문자로만 이해되는 율법의 시대가 끝이 왔고, 새로운 것이 도래하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유대교의 이 기존체제에 어떤 변혁이 오지 않으면 유대교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산헤드린 안에서는 개혁을 외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성전을 허물라’는 소리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으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리하여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라며 예수에게서 핀잔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날 밤 두 사람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공동전선을 펴나가기로 어떤 묵약이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이후의 니고데모의 행적을 보면 그런 묵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니고데모는 이후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 산헤드린 회의가 열립니다. 본래는 예수를 잡아 직접 심문하고자 모인 회의였는데, 잡으러간 경비병들이 빈손으로 와서 답변하기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잡으러간 경비병들이 예수의 말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렵지만, 하여간 예수 없이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온 중앙정보부 감찰계장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예수는 현 체제를 거부하는 매우 위험스런 사람으로 보고 되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빨리 처단할수록 좋다는 결론을 맺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이라면 목소리를 높이는 맥카시 의원이 재빨리 손을 들고 주장하기를 이 예수라는 작자는 오늘이라도 당장 잡아 법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여기는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오도하고 성전을 허물라 주장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 미치광이를 빨리 잡아 처단해야 한다. 이는 빨갱이의 두목 바알세불이다. 그를 그냥두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다. 이전에도 세례 요한이라는 빨갱이 두목을 처단하여 불온한 사상이 번져가는 것을 막지 않았느냐? 빨리 처단하면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질 것이다. 싹이 나올 때 잘라야지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이에 모든 동료들이 책상을 치며 ‘맞다. 그 말이 맞다.’ 하고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니고데모가 ‘잠깐’ 하면서 일어서서 좌중을 한번 둘러보더니 찬물을 끼얹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맥카시도 법대로 진행하자는 니고데모의 반론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처음 예수를 찾아 나설 때의 첫 번째 행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을 다시 한번 깊이 각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진리를 외치고 신념에 따라 산다고 하지만, 너도나도 돌을 던지는 그 순간 자기 몸을 던져 한사람을 변호할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 순간 우리는 고민합니다. 남들 다 하자는데, 내 혼자 반대한다고 뭐가 되겠어? 내 혼자 한다고 역사가 바뀔까?...

독일대중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불의의 세력 앞에서 쉰들러는 폴란드 유대인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 재산을 바쳐 살려 내는데, 그 살려낸 사람이 폴란드 전체에 살아남은 유대인보다 많았습니다. 한사람의 보잘것없는 외침이 진리 안에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갖고 나옵니다. 로마정부가 빨갱이로 처단하고 온 예루살렘 백성들이 침을 뱉고 저주하여 죽인 예수를 위해 바로 그날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모시기 위해 찾아 나섭니다. 3년 동안 쫓아다녔던 제자들마저 사라진 그 골고다 현장에 몰약을 가지고 나타난 니고데모. 그야말로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역사를 바로 알려면 정사보다는 야사에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의 반열에 끼지 못한 니고데모야 말로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키에르케고르-껍질을 깨고 나서라]

이쯤에서 니고데모 얘기는 마치고 키에르케고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9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살았고, 42세에 죽은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서구 기독교사상에 영향을 끼친 철학자가 한두 명은 아니지만, 칼 바르트와 불트만 틸리히와 같은 20세기 현대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를 들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키에르케고르와 니이체를 들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동시대 사람으로 각각 덴마크와 독일에서 살았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둘은 근본에 있어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헤겔에게 그 철학의 체계를 두고 있지만, 그러나 헤겔이 주장하는 절대이념 이데아의 틀을 깨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둘 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역사관 곧 기독교를 맹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루터교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니이체가 신은 죽었다며 절대신을 부정하고 짜라투스투라는 철인을 내세워 자신 안의 힘을 지향하는 운명주의 철학을 만들어간 반면 경제적 성공을 이룬 경건한 아버지와 본래 하녀였다가 두 번째 아내가 된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번째 막내로 태어난 키에르케고르는 타고난 우울을 기조로 고뇌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절대자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의 내면적 신앙을 도출해 냅니다.

이 둘은 당시의 시민적 그리스도교와 현세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피상적 신앙을 가르치는 국가교회에 죽음을 선포하고 정면으로 대결한 사상가입니다. 당시의 젊은이 아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살아있는 철학자입니다.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한번쯤은 거쳐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두 철학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길을 걸었지만, 신조와 전통 속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신앙의 표피를 공격하고 인간의 내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중요시 다루었던 성서 구절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장면입니다. 이미 2주전에 이 아브라함의 얘기를 했지만 오늘 또 다시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키에르케고르 때문입니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묶고 그의 목을 치려고 칼을 드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윤리적 고통과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종교적 사명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번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목을 향해 칼을 처들고 고뇌하는 인간, 이것이냐 저것이냐? 결단해야 하는 인간 이쪽으로 가도 모순이요 저쪽으로 가도 모순일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 우리의 불안에 떠는 실존을 고발하면서도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니 절망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는 종교적 진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 가 중요했습니다. ‘내리 칠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 난 이 짓은 못합니다’ 하면서 칼을 내던질 것인가? 하는 결단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결단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단을 하기까지의 고뇌와 불안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전 니고데모에서 그 불안을 보았습니다. 고뇌하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편안함을 떨치고 나올 때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읽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깨야 하는 고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을 그 어떤 것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삶과 유리된 형식의 종교를 거부했습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 또한 교회의 복음 선포가 일요일만의 예배중심에서 일상의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명동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이 서있는 자리 곧 38 철책선과 평택 대추리 도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화의 힘]이라는 책에서 역사학자 켐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 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에 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저는 니고데모를 예수 시대의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영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누렸던 한 인간, 누구보다 지식이 많았고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던 노학자. 미래가 보장된 사람. 그러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쌓아올린 학문과 깨달음에 스스로 이의를 제기하고 오랜 고뇌 끝에 자신을 죽이기로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보리라. 한번의 깨달음을 위해, 참 자기를 알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전 생애를 맞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에 괴물을 만난다면 두려움 없이 맞부닥치리라. 그래서 죽는다면 죽으리라 그래서 거듭나리라.

지난 화요일 성서배움마당 두 번째 시간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신앙이란 자기 성찰 곧 자기를 알아가는 길인데, 이는 곧 자신을 꾸준히 하느님 앞에 세워 놓는 치열한 훈련임을 강조하면서 마무리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방문이 열리면서 반원 한분이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9시 24분으로 이제 6분이면 끝나는 시간입니다. 자리에 앉으면서 회식 때문에 늦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1시간 30분짜리 배움마당에 6분을 남겨두고 교회로 온 발걸음에 대해 매우 놀랐습니다. 비록 자리를 뜰 수 없는 회식자리였지만, 그 회식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 세우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두 번 참석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등록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안상평교우입니다. 한번 일어서시기 바라고 뜨거운 박수를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지 않은가?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선 것이 같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에 잘하자 이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고 세상이 그에게 가르쳐온 지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혹 도착했을 때 교회 문이 닫혔다 할지라도,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회식과 배움 두 사이에서 불안해하며 초조해하며 고뇌하다가 그러나 끝내 체념하지 않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인간. (제가 너무 띄웠나요?)

니고데모 또한 결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깨달음과 배움에 늦음은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배우고 깨달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신앙의 개혁을 위해 모험했고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했던 실존적 결단을 감행했습니다. 선택받은 유대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자동무임승차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서고 싶었습니다. 야곱마냥 신과 더불어 씨름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한 물과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외면 곧 문자와 전통의 방식 곧 외면에서 하느님을 만나던 방식을 떨쳐내고 나만이 경험하는 내면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러하다는 말씀. 바람과 성령.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하나의 단어 ruah 곧 하느님의 숨입니다. 하느님의 숨에 쏘이는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하늘에 속하기에 그의 삶의 궤적이 어디로 향할는지 결코 예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함이 그를 참 자기에게로 인도해 줍니다.

참 신앙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말씀과 기도훈련을 통해 하느님 앞에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을 감싸고 있는 현실을 부수고 개혁과 변혁의 길로 나아가는 기간입니다. 구더기가 나방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기간이고 군더더기 같은 껍질을 벗어 던지는 기간이고 거짓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알몸으로 서는 시간입니다. 바로 이 길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났고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를 따라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서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