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사순절 넷째주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신명기 7, 7-11; 마태오 16,21-28

이제 사순절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각자 한두가지의 신앙훈련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성서를 읽고 기도묵상을 하고 기호음식등을 절제하고 있는 줄 압니다. 혹 결심했다가 흐지부지되었다면 오늘 다시금 마음을 다잡기 바랍니다.

뉴욕 브룩클린에 사는 신부님이 병원심방을 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길에 으슥한 골목에서 권총 강도를 만났습니다. ‘지갑을 내놔’ 안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기 위해 코트 단추를 풀자 목에 두른 하얀 성직자 칼라가 드러납니다. ‘아 신부님이시군요. 죄송합니다.’ 계면쩍어 하는 이 강도에게 말을 걸고자 신부님이 대신 시가를 하나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강도가 말하기를 ‘신부님 전 사순절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행복추구와 십자가]

올해 미국 하바드 대학에서 가장 많은 수강생이 신청한 과목은 ‘행복한 삶’이라는 과목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가르치는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행복이라는 단어에 매료되는 일은 미국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남한의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목이 실제로 대학에 있는지 몰라도 제가 듣는 것은 조금이라도 힘든 과목은 학생들이 신청하지 않아 폐강을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고, 쉽게 학점을 딸 수 있는 과목에는 학생들이 몰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젊은 사람들의 사회 현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떠나 신앙세계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에 행복이나 축복이니 성공이니 하는 단어를 남발하는 목사님들에게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듭니다. 여기 행복의 길이 길이 있습니다. 축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천국 가는 길이 있습니다. 라고 쉽고 원색적으로 설교하는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반면 저희 교회와 같이 ‘국가보안법을 즉각 철폐하라’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믿음의 현실참여를 강조하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얘기하는 교회들에는 사람들이 적게 모이고 힘들다고 피합니다. 이건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역사의 현실입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쉽고 편한 넓은 길에 사람들이 몰리고 좁고 험한 길에 사람들이 적게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런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또한 성서와 인간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결국 그런 사탕발림에 현혹이 되어 잘못된 길을 걷게 되고 파국을 마지하면 그때서야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선다는 것이지요. 그전까지는 자신이 걷는 길이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콜라 맛을 처음 맛본 아이들이 밥을 제쳐두고 콜라만을 찾듯이 신앙도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점심이나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거의 대체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전 카페인에 약해서 점심 이후의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 잠을 설치는데, 조미료에도 제 몸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건 제 몸의 체질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제가 미국에 20여년 넘게 살면서 그런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별로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맛있는 반찬이나 국을 만나면 전 조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줄 알면서도 거기에 제 숟가락이 자주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기호음료와 달리 참 샘물은 향기가 없습니다. 무색무취합니다. 참 하느님의 말씀 또한 맛도 향기도 없지 않을까? 기호음료를 영어로 soft drink 라고 합니다. 마시기 쉽다는 의미에서 소프트란 말을 썼는데, 이는 소프트한 음료를 많이 마시면 몸 또한 소프트해지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마시기 쉽지 않은 hard 음료 샘물을 마시고 조미료가 들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식품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자연그대로의 딱딱한 말씀을 즐겨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조미료가 가미되고 soft하게 요리된 목사의 설교보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좋아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더 시간을 드려야 하지요. 너무 소프트한 무른 말씀만 골라 먹다보면 영혼이 약해져서 삶의 고난을 만나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 깊은 산속의 약수터를 찾아 오염되지 않는 샘물을 마시듯이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도 깊은 산속을 올라가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훈련은 평소에 일상에서 행해져야 하지만, 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이라 특히 사순절이 되면 이런 훈련과 고난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사랑하는 디모테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받은 은총으로 굳세어지시오. 내가 들려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그러면 그들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군인답게 그대가 받을 고난을 달게 받으시오. 군에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를 뽑아준 상관을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살림살이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또 운동선수가 월계관을 얻으려면 규칙대로 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들여 일한 농부가 먼저 소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으시오. 주께서는 모든 것을 다 깨닫는 힘을 그대에게 주실 것입니다.’(디모테후 2,1-7)

바울로는 예수를 따라가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세 종류의 사람으로 말했습니다.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입니다. 군인의 특징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총을 잘 쏘는 군인도 전투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 전 부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운동선수의 특징은 규칙을 좇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 할지라도 규칙을 어기면 그건 운동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납니다. 농부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때를 따라 일하는 수고입니다.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때를 잘 지켜야 합니다. 땅을 뒤집을 때 뒤집어야 하고, 씨를 뿌려야 할 때 뿌려야 하고, 피를 뽑아야 할 때 뽑아야합니다. 조금 일찍 하거나 조금 늦게 하면 모든 수고가 헛되이 돌아갑니다.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는 그 하는 일이 매우 다른 사람입니다만, 그 원칙은 동일합니다. 규칙을 지키는 것과 땀을 흘리는 수고입니다. 한마디로 훈련입니다.

전 그래서 사도 바울로와 디모테오이 뒤를 이어 전도자가 된 저는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이 훈련을 소홀히 하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실제 전투에서 잘하면 되지 뭐. 지금부터 땀을 흘릴 필요가 뭐 있어.’ 운동선수가 하루 종일 그늘에 앉아 쉬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시합 때에 잘하면 되지 뭐. 지금부터 땀 흘릴 필요가 뭐 있어. 빈둥빈둥 거리면서 농부가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 한꺼번에 열심히 하면 되지 지그부터 수고를 할 필요가 뭐 있어.

여러분 신앙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노라면 모두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 이를 이겨나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고난에 대처하는 모습이 제각각입니다. 왜 나만 이러느냐?고 불평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극단으로는 당신 같은 하느님은 믿을 수 없다고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인내하며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때로는 고난 속에서도 이웃을 바라보며 오히려 감사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는 그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신앙 훈련의 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평소 훈련양이 많았던 사람들은 삶의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훈련에 소홀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고통에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칩니다.

그래서 전 신앙은 저축예금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조금씩 저축을 하였다가 필요한 때에 꺼내 쓰는 것이 저축예금입니다. 어려움이 없을 때에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듯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편안하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만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허둥지둥입니다. 그리고는 철야에 금식기도에 울며불며 매어 달리는데 물론 우리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이때에도 기도에 응답을 하시지만,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이 되고 10년 20년 사람들에게서 같은 행태를 보게 되면 짜증을 내시겠지요.

[난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신앙을 어떤 한순간의 기적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향해 나아가던 실천이 없던 사람이 발버둥친다고 어느 날 갑작스레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종교인들이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암시하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오 7, 22-23)

저는 오늘날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콜라나 조미료와 같이 일시적으로 마음에 위안을 주는 잘못된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무색무취의 깊은 샘물을 즐겨 마시기보다는 향기와 색깔에 속아서 기호음료에 몸을 내어 맡겨 속아 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엄청난 저주를 말씀하셨을까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행한 것도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행했으면 자기 대신 예수를 전파하였으니까 오히려 칭찬을 해주어야 하지 악을 행했다고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왜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도 예수님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저주를 받아야만 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기적 그 자체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적 이후의 차이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적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기적을 넘어 예수라는 인물에까지 나아가도록 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신적 모습 곧 영광의 그리스도의 모습에만 몰두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후자 기적 그 현상에 머물지 않고 기적을 행한 예수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기적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고난의 길에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적인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지난주에도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영광된 그리스도에 관심할 것이냐? 아니면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아들 예수에 관심하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영광된 그리스도와 사람의 아들 갈릴래아 예수는 다른 두 사람은 아닙니다. 한 인격의 다른 모습입니다. 이는 결코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신앙은 아닙니다. 어느 쪽을 먼저 선택했더라도 우리가 똑바로만 가면 그 길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광된 그리스도를 먼저 선택한 사람들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고난의 길을 기쁘게 가는 사람은 결국 영광된 자리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선택은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선택하는 양자택일이 아닌 우선순위에 관련된 선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연약하기에 영광의 그리스도를 먼저 선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만 머무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한 변화된 영광의 주님을 본 베드로가 무어라고 말합니까?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많은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빵을 얻어먹자 그를 왕으로 삼으려하고 따라다닙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시지요. ‘너희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이 영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께서 나눠 주시는 자신의 살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그 말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성서에는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 6장 66절에 있는데 절수를 보니까 666이네요. 마치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사탄의 대명사 666을 연상하네요. 사탄이란 꼭 우리를 짓누르고 억압하는 세력만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편하게만 거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유혹 또한 사탄입니다. 이때 군중들이 떠나가니까 12제자마저 흔들거립니다. 그래 예수님이 묻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콜라 맛을 본 어린이들은 맹물에는 관심이 없듯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들은 당연히 고난에 찬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그만 그 환영에 마음을 빼앗겨 고난의 길에 참여하지를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육신의 빵에 배부른 사람들은 생명의 빵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일은 착오였다고 믿습니다. 왜 돌로 빵을 만들라는 사탄의 시험을 거부하신 주님께서 빵을 만드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셨는지에 대해서 항의성 의문이 많습니다. 결국 떠나갈 사람들을 왜 모으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참을 수는 있지만, 자식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빵을 훔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한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기는 하셨지만,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빵을 만들어 나눠주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 고난에 찬 그 길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게 하고 그 고난의 길에서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산 아래로 내려가자. 너희가 본 영광은 산 아래의 고통에 찬 현실을 통과하도록 위함이지 이 산위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자]

모세는 분명히 말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 수에 있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겉모양의 화려함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종살이 하던 집에서 너희를 건져내셨다.’

한 노예가 말합니다. 만일 나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다면 나는 당장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내 주인을 섬기고 비위를 맞추도록 강요받지 않게 될 것이고 누구와도 대등하게 될 것이며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그러나 해방되는 순간부터 그는 당장 밥을 먹기 위해 누군가 아첨해야 할 대상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주인은 더 이상 먹여주기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떠한 비천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전보다 훨씬 더 괴로운 노예의 상태로 전락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욕망의 만족을 위해 몸을 팔아야하는 현실을 보듯이 말입니다.

그때야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전 주인을 섬기고 있을 때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었지. 게다가 일도 그리 힘들지 않았지.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불행한가. 전에는 내 주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도대체 몇 사람인가? 지금도 힘든데 풍족한 생활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한탄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의 온갖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예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진정한 행복이란 삶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정의와 신의 법칙에 따라 사는 일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모든 사람의 마음이 원하고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얘기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어떤 현대의 사상가가 말한 글이 아니라 에픽테토스라는 2천년 전 희랍 철학자의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추구한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조금 나아지는 형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정의와 신의 법칙에 따라 사는 일입니다.

저는 이 사순절에 여러 가지 신앙 훈련에 참여하고 계시는 여러분께 영광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의 아들과 딸로서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투자하는 고난의 참여는 여러분의 신앙 저축통장에 예금하는 일입니다. 주보 뒷면 목회자 코너에도 실렸습니다만, 이제 남은 사순절 기간동안 여러분 주위의 고통당하는 이웃을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이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면 구청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려줍니다. 주위의 많은 봉사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번 토요일 저희 교회가 하는 장애인 할아버지들을 목욕시키는 나간이목욕봉사도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물론 여러 가지 모양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고통을 이겨나는 길은 역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찾아가 함께 나누는 길입니다. 나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어쩔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의 틀을 벗어나 주님의 틀로 들어가 주님이 관심하는 고통당하는 이웃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여러분의 고통을 해결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맨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하고 그를 위로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는 뜻입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자는 말씀은 주님이 내 짐을 대신 지어줄 테니까 너는 빈 몸으로 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함께 지고 가자는 말씀입니다.

아 저는 여러분이 이 ‘함께 멍에를 매자’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담긴 신앙의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 다 잊어버려도 좋은데 이거 하나만 깨닫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팔레스타인은 땅이 돌이 많고 척박해서 두 마리의 소가 동시에 끕니다. 그런데 이 두 마리에 멍에를 매서 묶어두면 처음에는 끄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서로 힘겨루기를 해서 한놈이 가자고 하면 한놈이 버티고 한놈이 버티면 한놈은 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쪽이 포기하면 그때부터는 매우 쉬워진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이끄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힘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이끄는 쪽으로 여러분을 맡기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단 하루의 시간만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식대로 지금의 믿음의 방식대로 여러분의 남은 시간을 모두 쓰고 끝마치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대로 가세요. 그러나 만약 후회할 것 같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뜻을 높이 세우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보에 목회자 코너에도 실렸지만, 민족화해를 위해 앞장서시다가 직위해제를 당하신 강정구교우님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재판에 참석하여 힘을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저지를 위한 평화운동 특히 기도신앙운동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새벽기도도 없고 철야기도도 없는데, 이번 하루를 참석하시면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지요. 토요일에 가면 저녁에 주민들과 함께 집회를 갖고 천막교회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잠을 자고 새벽 황새골을 걸어보면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 뜻을 준비하면서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한사람도 참여할 것 같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저도 그냥 결단했습니다. 이런 것이 신앙적인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런 요청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서 계신다면 우리들에게 부탁하시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주님과 더불어 함께 멍에를 매는 일이고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를 품에 안는 사람들]

전 제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따름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제 십자가.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무겁습니다. 벗어버리면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가져가셨으면 딱 좋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한번도 내게서 가져간 적이 없으실 뿐더러, 오히려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지고 서있기도 힘든데,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십자가를 사랑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는 이 십자가 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고 품에 안고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짐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모습입니다. 전 십자가는 등에 짊어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벗겠다고 해서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미워하면 짐이 됩니다. 그러나 품에 안으면 그때부터 무게감이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짐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십자가를 사랑하여 품에 안을 때, 그때 십자가는 더 이상의 무거운 짐이 아닌 나를 인도하는 생명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