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2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예수와 폭력: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
시편 58, 1-10; 루가복음 22장 35절-53절


어느 사순절 프란시스코 수도원에 한 수도사가 원장 프란시스에게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저 디모데 수도사가 몰래 우리의 규율을 깨고 소시지를 먹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프란시스는 모두 모이게 한 후 소시지를 한 접시 갖고 와서 모두 하나씩 먹으라고 하면서 자기부터 먹었습니다. 혹 사순절의 서약을 깨뜨렸다고 스스로 자책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서약이 깨진 것에 너무 마음 쓰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규율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평화로운 황새골]

전 이번 주간 얼마 전까지는 한번도 가리라 계획하지 않았던 평택을 3번이나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는 기장 평화공동체가 사순절 기간동안 하루에 한 목사님이 돌아가며 맡는 평화기도 지킴이로, 목요일에는 서울노회의 목사님들과 함께 다녀왔고, 어제부터 오늘 새벽은 교우분들과 평화기도모임으로 함께 다녀왔습니다. 생각지 않게 20명이나 참가하시어 제가 당황하였지만,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기쁜 것은 연령별로도 20대로부터 70대까지 골고루 교회 처음 나오시는 분으로부터 수 십년을 다니시는 분들까지 균형 있게 참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과 다음 주 토요일에 두 번 더 진행이 됩니다. 사무실에 이름을 알려주시고 토요일 4시까지 교회로 오시면 됩니다.

오늘 새벽 성찬의 떡과 잔을 들고 안개 낀 황새골의 광활한 논을 바라보았습니다. 논들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얘기가 없었습니다. 이곳에 기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곳에서 중국을 물리친 이후부터입니다. 남의 나라를 서로 갖기 위해 그 땅에서 싸운 역사. 이게 바로 먼 얘기도 아닌 110년 전 바로 우리 할아버지의 얘기이고 평택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지금 미군기지로 확장하려는 대추리 도두리 땅은 본래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농부들이 바다를 막고 순전히 맨손으로 가꾼 곳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평생을 바쳐 맨손으로 흙을 갖다 부어 생명을 낳는 옥토로 가꾼 이 땅을 외국군이 주둔하는 전쟁기지로 내어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인간이란 지독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구원의 폭력 기사들]

오늘은 이 한반도와 인류의 평화를 바라면서 성서에 나타난 폭력에 관한 애기들을 함께 생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읽어나가노라면 동감이 가지 않는 많은 얘기들이 등장하지만, 특히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우리는 과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미 항전을 포기한 적의 마을에 가서 노인이고 여자고 어린이고 남김없이 죽이는 장면들, 심지어는 동물까지 남김없이 죽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합 왕 말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는 ‘아합 가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과 측근들과 제사장들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 살육을 야훼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시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왕하 10장 11절) 다른 민족과의 전쟁도 아닌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싸움에서 이는 너무 지나친 정치보복입니다. 우리나라가 예전에 정적을 멸할 때에 삼족을 멸하는 비극의 역사가 있는데, 야훼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이상을 넘어선 살육입니다.

전쟁도 아니요 권력투쟁도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어린이 수십명이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해되는 얘기도 나옵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선지자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어 죽였다.(왕하 2장 24절) 아이들은 자기 보는 대로 놀려댈 수 있지요. 아니 철모르는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려댄다고 해서 화를 내는 인물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화가 난다고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주하니까 암곰이 나와 아이들 42명을 모두 찢어 죽였다. 이건 성서를 떠나서도 도대체가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성서학자들은 그저 이 이야기의 배경에 성서가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70세 은퇴연령을 넘기자 교단법을 고쳐 담임목사직을 고수하고 있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는 설교 시간에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하느님의 사자 곧 목사를 비난하는 자는 이와 비슷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성의 얘기를 했다고 하니 같은 목사로서 성서를 그렇게 문자에 매여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더욱 동의할 수 없는 일은 이 말에 성도들이 아멘 할레루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아찔할 따름입니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문자적으로 이용하다보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성도가 새벽에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펴서 눈에 들어온 구절을 그날에 지켜야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성경책을 펴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가롯 유다가 목을 매는 구절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기도하고 성서를 펴니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기도하고 성서를 펴니 ‘속히 하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시편구절은 또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느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 안에서 부수소서. 야훼여 저 사자들의 송곳니를 부러뜨리소서. 저들을 물이 흘러 없어지듯이 풀이 밟혀 시들 듯이 유산하는 여인들의 몸에서 핏덩이가 쏟아지듯이 달팽이의 진액이 말라버리듯이 난데없이 불어 닥친 회리바람에 싱싱하던 가시덤불 말라버리듯이 만드소서. 착한 사람들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고 그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악인의 피로 발을 씻는 그런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라. 저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 씌어 있으니 무조건 아멘이라고 답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락크에서 미군이 조장한 종족살인이 계속되고 있다. 정권을 빼앗긴 시아파는 미국편에 서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서니파에 대해 부족갈등을 넘어서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30명의 사람들이 목이 베어진채로 발견되고 있고, 시아파의 성전이 미군이 관련된 총격전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성전 기도실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들이 단지 내가 미워하는 원수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자빠지는 것을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나 또한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도 이런 폭력의 구절들이 군데군데 나옵니다. 특히 종말을 설명하는 묵시록에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죄인들이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묵시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장 22절) 그런데 여담이지만, 요즘 지옥문이 혼잡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남한 출신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황불에 집어넣었더니 불가마에 단련된 이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아이 시원하다.’고 즐기는 바람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혼잡이 지옥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남한 출신 때문인데, 도대체가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원본하고 얼굴 모습이 너무나 틀려서 이를 일일이 대조하느라고 그런답니다.

성서의 하나하나의 구절이 어떠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서의 가장 크고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하고 정의를 노래하고 용서와 은혜를 나누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서문자주의와 신앙의 편협]

성서의 문자와 종교적 편협성에 갇힌 오늘날의 기독인들 또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미국의 근본주의 목사는 대표기도 시간에 낙태수술을 지지한 대법원 판사들이 죽게 해달라고 하면서, 특히 병들어 아픈 헤리 블랙맨 판사를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한 방향으로 어떤 식으로든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남쪽에 있는 보수기독인들 또한 비슷합니다. 김정일을 제거해달라는 기도를 공공연하게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원수사랑은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나 이라크 이란의 보수적 신앙인들은 아마 부시대통령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안의 폭력을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쓰는 그래서 우리 또한 폭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정의의 길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난 주 신문 한쪽에 기록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사형수 유영철을 용서하고 그를 양자 삼겠다는 64세의 고정원씨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2003년 10월 고정원씨는 연쇄 살인자 유영철씨에 의해 85살의 어머니 그리고 환갑을 앞둔 아내 그리고 4대 독자인 그의 아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씨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 유씨를 용서하가로 마음먹고 재판과정에서 탄원편지를 낸 바도 있고, 설날에는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무엇이 고씨로 하여금 원한과 복수를 끊고 용서를 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것은 부모님께서 남에게 나쁜 짓 하고 살지 말라는 가르침과 가톨릭에 귀의한 종교의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난 내가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 이분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영철을 무기징역을 살게 하고 설사 사형으로 그의 목숨을 끊게 한들, 죽은이의 목숨이 돌아오지도 않고 내 마음의 증오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치유는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는 이루어질 수 있지만, 국가적 차원이 되면 이런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일제시대의 일본의 만행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모두 용서하자고 용서를 선포하면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해 항의할 것입니다. 일본이 공개적으로 회개한다면 모를까 회개하지 않는 일본을 왜 용서해야 하는가?

많은 기독인들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회개나 용서에 대해서는 분명하지만, 이것이 민족의 이름으로 등장하면 모두 정의의 심판을 주장하며 폭력에 저항하는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시킵니다. 9.11테러에 미국 기독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프카니스탄과 이락크의 침공을 정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덩달아 남한의 많은 기독교인들 또한 이락크에 우리의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택에서도 경험하는 일이지만, 꼭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죽이는 일이 발생해서가 아니라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전쟁연습을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잔’이 뜻하는 것은?]

전 여기서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폭력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정당하다면 얼마만큼 정당한 것인가? 하는 신앙의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께서 올리브(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다고 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이반되는 것인가? 흔히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하는 내 뜻의 길을 십자가를 지지 않고 피신하는 것으로 목사님들이 흔히 설교하는데, 이는 너무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예수라도 이 상황에서 내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피신했을까? 지난 3년동안 수차례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얘기했던 내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도망을 갔을까? 저뿐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기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정도를 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만, 그러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이는 군인들이나 조폭의 세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을 피하셨다. 이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결코 죽음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진리 안에서 바로 살려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밀알이 땅에 묻혀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과 사탄의 시험을 통해 이미 자신의 죽음을 뛰어 넘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전 숙청의 모험도 하셨고 공권력에 대담하게 도전하셨습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셔서 도망하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고민하셨던 기도는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더라도 무력으로 끝까지 대항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무력에 의한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인가? 바로 이 고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반항하다 생포된다면 여전히 십자가의 처형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길은 양자에 길에 모두 피할 수 없는 결말인데,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항복할 것인가? 이 둘 사이에서 예수님은 고민하신 것이었습니다. 장렬한 죽음.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변혁가 혹은 혁명가가 원하는 마지막 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적인 뜻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길로서는 참으로 바람직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민중혁명을 통해 당장의 승리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로마의 군사적 힘에 대항한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 탄생 100여년 전의 마카베우스 형제들의 저항 운동을 통해 역사가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한때 무력 투쟁을 통해 로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을 회복하고 유대의 독립을 쟁취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유대 민중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성서 고고학에 의하면 팔레스틴의 한 마을에서는 무려 2천명이 십자가형을 당한 것으로 발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미군들이 베트남의 한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청소하듯이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역사도 있었습니다. 무력에 의한 저항 운동의 결말은 분명합니다. 처참한 살육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어차피 죽음의 길을 선택한 혁명가들에게는 가장 매력 있는 길입니다. 예수 당시의 역사는 당대에 만도 정치적인 이유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로마에 대항한 반란운동이 서른 번 이상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것도 대부분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와 폭력의 유혹]

예수님 또한 이런 반란을 고민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반영하는 성서의 말씀도 있습니다. 루가복음 22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기 바로 직전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자루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 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가지고 가거라.’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주님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만하면 되었다.‘’하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성서 구절에 대한 서구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그리 명쾌하지 않습니다. 왜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했는가? 겉옷이란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후의 물건입니다. 한 개인이 그 삶에 마지막 필요한 것이 빵이라면 사회적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있어야 할 것은 옷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팔아 칼을 사라. 이는 죽음을 앞둔 전사들이 최후의 항전을 뜻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계백장군이 전쟁에 앞서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사실 성서의 말씀은 로마에 대항한 유대백성들이 철저히 패망한 이후 예루살렘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된 이후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의 귀를 거슬리는 구절은 모조리 삭제해야 했습니다. 권력에 비판적인 예수님의 정치적 발언들은 삭제되거나 모호하게 변경이 되거나 종교적인 서술로 변질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루가의 남아있는 파편 이야기들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상상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버리고, 무슨 하느님의 아들이니 그리스도니 주님이니 구원의 주님이니 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루가복음에 나타난 이 성서의 말씀 그대로를 읽으면 이렇게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그 올리브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기 직전까지는 무력항전을 계획하셨습니다. 이제 삶은 끝이니 옷을 팔아서라도 무기를 구입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라고 이해되는 폭력 저항의 길과 아버지의 뜻으로 이해되는 항복 사이에서 무지하게 고민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때의 기도의 투쟁을 ‘땅에 떨어지는 땀방울이 피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곧 목숨을 건 기도의 싸움을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뜻을 꺽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신의 3년간의 삶이 송두리째 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또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루가복음 본문을 보면 그들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습니다.’무슨 슬픔일까요? 무력 항쟁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끝내 패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힘의 논리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떤 유혹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무력 투쟁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을 인용한다면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외부로부터의 악에는, 즉 남이 나에게 가하는 악, 도저히 제거될 수 없는 악에는 분개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자기 자신의 악과는 전혀 싸우려 들지 않으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냥 세상 논리에 빠져 슬픔에 젖어있기 보다는 이 문제에 대해 신앙적으로 고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향해 칼을 처 드는 실존적 결단의 고민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일단 칼을 들었으니 그대로 내쳐 죽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그 갈등과 고민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왜 이렇게들 잠만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하고 책망하십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밀고자 가롯 유다를 앞세운 일단의 로마군병의 체포조가 다가옵니다. 이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칼로 쳐버릴까요?’ 그리고 실제로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뜨렸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순순히 항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반항이고 우리의 본래 계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만해 두어라하고 말리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주십니다.

[유대의 항쟁역사와 한민족의 항복역사]

예수님은 끝내 자신의 유혹을 거부하시고 비폭력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지난주일 일산구역 예배에서 김낙중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상황이 비슷하고 그리고 침략과 지배를 당한 역사가 비슷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폭력에 저항하여 투쟁하여 결국 그 나라가 와해되고 디아스포라 흩어진 민족으로 살아왔고, 우리는 반면에 강대국이 침범할 때마다. 중국이면 중국 일본이면 일본 미국이면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머리를 조아려 그 명목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두 나라의 걸어온 길이 서로 다르지만, 어느 쪽이 옳은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한 이스라엘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 나라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유지가 바로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 민족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폭력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을 힘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들 또한 엄청난 자기 안의 폭력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또한 옳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해 사회는 혼란 속에 놓여 있고, 남과 북은 서로 갈라져 정통성을 주장하며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제 3의 길은 없는 것인가?’

[폭력 앞에서의 3의 길]

저는 바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이 제 3의 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제 3의 길, 폭력을 통한 저항의 길도 아니고, 도망을 가거나 항복하는 비겁의 길도 아닌, 저항을 하지만 그러나 비폭력을 통해 폭력으로 누르는 자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제 3의 길이 바로 예수께서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오른뺨을 때렸던 폭력자가 왼뺨을 돌려대는 민중의 저항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하는 길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뒤뚱뒤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로마 군병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폭소하도록 만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오후 박영숙권사님의 사진 갤러리 개관을 감사하는 예배를 위해 교인들을 태우고 남산 길을 오가는 길에 제대군인들이 걸어 논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친김일성을 처단하라.’ 그리고 같은 날 평택을 가기 위해 서울역을 지나치면서 ‘친 김일성을 처단하라.’는 소리 높여 외치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와 허울 좋은 자유주의 그리고 애국심이라는 싸구려 감상적 국가주의에 기초한 광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말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소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바가 과연 인간의 내면성에 잠긴 폭력에 호소하고 있는가? 아니면 평화에 호소하고 있는가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나누인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진보의 길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미움과 폭력에 호소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면 이는 참 길은 아닙니다. 이것이 안겨다주는 승리는 결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면 이는 진리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거부하고 군사기지를 반대하는 것은 전쟁이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일에서만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국가간의 증오를 심게 되어 결국 국민의 양심은 사라지고 오직 타도해야 할 적만이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애국심은 생명을 죽이는 살인허가증으로 돌변합니다. 자유를 잃지 않을까? 내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국민들로 하여금 지배자들 앞에 쉽게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심지어 성서에서 조차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인들은 악인의 피에 발을 씻기를 원했고, 실제 과거 서구 2천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고 7,80년대의 남한에서는 조찬기도회에서 군사 독재자와 그들의 손에 든 무기를 축복하였습니다.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고 누이와 오빠를 잃은 사람들이 처참한 목소리로 슬퍼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을 향해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습니다.

전쟁에 의한 인명이나 경제 손실보다 더 큰 것은 대중들을 왜곡된 관념의 포로로 몰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도록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일단 증오심이 발단하면 그 앞에는 오로지 한길만이 존재합니다. 저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현실도 안타깝지만 서로를 증오하는 그 마음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정치적 통일 군사적 통일 국토의 통일은 어느 면에서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하나 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평택을 가면서 결코 그곳에 있는 눈앞에 보이는 미군만이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 있는 패권주의와 군사주의가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고 북과 남의 한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저놈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적개심과 증오가 내가 싸워야 할 적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전 그래서 예배 시간에 부를 찬송가를 선택할 때에 신앙을 하나의 전쟁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군대의 장으로 묘사한 전투용 찬송가에 매우 주저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가지고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이 적군이 누구냐?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다른 인간이냐? 아니면 내 안의 욕망이냐? 하는 정의가 보다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너 가는 길을 모두 가기 전에 네 손에 든 검을 꽂지 말아라 저 마귀 흉계 모두 깨뜨리고 끝까지 잘 싸워 이겨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천성문만 바라고 나가세’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이웃은 보지 않고 천성문만 바라고 나아가니까 문제입니다.

얼마 전 친구인 지방의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 보수 신학자들이 모인 신학토론회가 있어 무슨 얘기들을 하는가 들어보기 위해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기장 감리교 예장통합측 진보측들을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과는 교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신학자들이 이렇게까지 폐쇄적일 줄은 정말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도 나이든 분들이 아닌 소장학자들의 주장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계교회가 모인 자리에 가면 얼마나 차이가 많은데, 그리고 이 한반도 안에만 해도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이웃종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같은 신교 교인들끼리 교리가 조금 다르다고 교단이 다르다고 이단으로, 사라져야 할 적으로, 무찔러야 할 사탄으로 본다면 가톨릭은 물론이고 불교나 유교 원불교 천도교와 같은 다른 종교 사람들은 아예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지요. 이런 원인이 어디 있느냐? 이웃은 보지 않고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들어간다고 믿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천성문만 바라고 나아가는 종교는 자기를 깨치게 하는 신앙이 아닌 자기를 떠바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적 또한 내가 믿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보는 것이고 그들이 당하는 아픔 또한 나의 아픔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아가 분명한 가르침. 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하는 가르침 이는 위험한 가르침이고 잘못된 가르침일 경우가 많습니다. 삶의 모호함은 존재합니다. 의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 사람은 여전히 암흑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비폭력을 통한 저항의 길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이 원했던 대로 폭력저항의 길을 선택했다면 예수의 길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 혹은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폭력저항이 준비되고 그리고 그것이 식민지 백성으로서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이를 포기하고 비폭력 저항의 길을 선택함으로 기독교는 지난 2천년의 인간 역사의 방향을 전쟁의 길에서 평화의 길로 뒤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러했고, 마르틴 루터 킹목사가 그러했고 남아프리카의 투투 주교와 만델라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향린의 길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아는 것 하나는 이 길은 결코 오늘 제가 말하는 것처럼 쉽게 주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절한 기도의 투쟁을 통한,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의 피눈물 나는 투쟁을 통하여 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떡과 포도주를 내 몸으로 알고 먹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폭력의 저항. 자발적 죽음을 통한 저항. 자신의 목을 들이 내미는 진리를 향한 저항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짧은 안목 속에 있는 사람들, 자기 당대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는 조바심에 깃든 사람들에게는 패배의 길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포함한 평화를 주창해온 이웃 종교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길이 승리의 길이요 진리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