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순명(順命)

요한 12, 27- 36

김 경 재 목사



예루살렘행 자체가 순도(殉道)를 작정하신 것

교회력상 사순절 마지막 주일은 종려주일이다. 그런데 종려주일로 시작되는 주간은 고난주간이 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을 성금요일이라 부르고, 집중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한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발생하여 성 밖 골고다(해골) 언덕에서 집행된 로마법에 의한 십자처형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아예 죽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이번에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을 충분히 예견하셨다.

베다니에서 향유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붓고 흐느끼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감싸는 마리아는, 12제자들보다도 더 예민하게 이번 예루살렘행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의 마지막 발길이 될 것을 예감했다. 오늘도 그렇듯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돕자는 유다의 제안은 공허하게 들렸고, 그의 죽음을 미리 장사지낸 예표로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섬김을 받아드리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3)는 말씀은 안드레와 빌립 등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훈으로서만 아니라, 예수 스스로 생명밭에 떨어져 죽고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스스로 다짐하시는 뜻이기도 하다.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열려면, 새로운 생명의 나라를 동트게 하려면, 죄의 권세를 결정적으로 정복해버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빛의 시대가 열리려면, 당신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깊이 느끼고 있었다. 주저주저 한다거나, 훗날을 도모하면서 뒷날로 미룬다거나, 불의한 현실세계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면 예수님은 인류성인의 반열에 드는 만인의 스승은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구원자, 메시야)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성경은 전한다. 하늘 아버지께 이 곤경의 때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곧바로 예수님은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는 .것을 다시 각성하고 다만 “아버지의 이름만이 영광스럽게 드러나기를” 구했다. 지극히 감성적 민족인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기엔, 예수의 괴로움은 닥쳐올 십자가 처형의 육체적 고통 때문이라고 평면적 이해를 하기 쉽다. 고난주간의 십자가 묵상도 “십자가 위에서 못질 당하시고, 옆구리에 창까지 받으시는 그 고통이 얼마나 아프셨을가?”라고 육체적 십자가 고난만을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인류사 속에는 정의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쓴 수많은 열사도 있고, 몸둥이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마저도 태연자약하게 받으면서 불의한 자들을 죽어가면서도 준엄하게 꾸짖는 용감한 순교자들이나 올곧은 선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음이 몹시 괴로우심’을 육체 고통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들은 주님의 그 심령적 고통을 영원히 이해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나님과의 온전히 하나 된 삶을 사셨던 주님께서는, 잠시라도 아버지와 단절되는 생명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고, 참혹한 십자가 처형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 권세들이 만들어 낸 먹구름에 가리워지는 것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골고다는 피동적 순종의 자리가 아니라, 적극적 순명으로서의 진리싸움터

고난주간에 많이 읽는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의 노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주간에 슬픈 감정에 휩싸인다. 그 결과, 고난주간은 처절할 만큼 불꽃 튀는 예수님의 진리의 싸움 기간임을 간과하기 쉽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순종하는 자세로 십자가 쓴 잔을 받아드리셨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평면적 시각을 바꾸어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마지막 고난주간과 십자가 처형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속죄제물로서의 운명’에 모든 주체성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피동적으로 당신의 몸을 이 세상 권력자들에게 내맡긴 죽음의 행진이 아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때부터, 아주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결정적 진리 싸움을 하시려고 예루살렘 골고다로 나아가셨다. 세상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고 지배하는 모든 우상적 힘들과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마권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다. 그것은 진리의 싸움이었다.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사랑의 싸움이었다. 불의와 보복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싸움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명(順命)은 곧 그대로가 이 세상의 악과 거짓에 대한 저항과 진리의 싸움이 된다. 이세상의 우상들의 얼굴에 쓰고 있는 마스크를 벗겨내면서 그것들이 두려워해야할 것이 아닌 한갓 ‘종이호랑이들’ 임을 온 세상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고난주간 하루하루 전개되는 사건들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진리싸움이었다. 체포당하실 때 검으로서 대결하려는 베드로를 말리시는 제자설득, 대제사장 가야바 법정과 로마 총독관저 재판과정에서 침묵, 폭도로 돌별한 군중들에 대한 연민의 기도, 십자가 형틀 위에 높이 달린 채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대속의 기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는 마지막 말씀 등,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깊이 보면, 진리의 싸움이며 참에 대한 순명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패배였는데, 사흘 뒤에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기에, “예수 패배, 빌라도 승리”라는 처음 판결이 뒤집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직 십자가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이후 사흘 뒤 부활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십자가가 승리이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악과 우상을 이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우면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심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셔 높이 들리우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첫째, 이 세상 임금들이 심판을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