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갈릴래아로 먼저 가신 주님
에제키엘 33장 1-6절; 마르코 16장 1-8절

제가 평택 평화집회에 참석했다가 짧은 기간이지만, 사흘 동안 유치장을 다녀왔는데 일요일이 끼어 교우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31년 만에 찾아본 유치장이 시설이나 대우면에서는 상당히 좋아졌다는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지문날인을 거부하여 강제집행을 당했는데 그때 불필요한 폭력을 경찰이 행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하겠습니다. 교우들은 빨리 나와 다행이라고 하는데, 제가 만난 모든 목사님들은 왜 그리 일찍 나왔느냐?고 매우 섭섭해 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향린교우들을 비롯한 평화를 바라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의 노력이 있어 경찰이 앞으로는 국방부가 진행하는 미군기지 문제에 관여하기를 꺼려하고 있고, 국방부 또한 주민들과 대화로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때까지 우리의 노력을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 조서를 쓰는 과정에서도 왜 국가가 법에 따라 정당하게 진행하는 미군기지를 확장하는 일에 왜 목사가 나서서 방해를 하느냐? 는 질문을 계속 받았습니다. 제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국가라고 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정권이나 유신독재 시대에 일을 우리가 정당하게 여기지 않듯이 옳지 않은 일도 한다. 그리고 지금 미군 기지를 확장하는 일은 장기적으로 볼 때 평화가 아닌 긴장을 유발하고 결국 전쟁 요인이 된다. 나는 목사로서 멀리 대다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의 보초]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은 에제키엘 선지자를 향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적군이 처들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보초가 비상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는 보초의 책임이다.’ 예언자란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시대의 선각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110년 전 우리 민족이 강대국의 먹이가 되어 이 강토에서 청일전쟁이 크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많은 선각자들이 일어나서 외쳤지만 대다수의 위정자와 백성들은 귀를 기울리지 않았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랴? 하고 한쪽 귀로 흘려 보냈습니다. 나도 먹고살기 바쁜데 그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모른 체 하였습니다.

지금 평택에서 모든 삶을 버리고 투쟁하는 소수의 평화지킴이들은 바로 이런 역사적 의식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을 지키기 위한 보초들입니다. 저도 같은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보초는 가장 먼저 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초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에 온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는 단순히 교회 개혁에 앞장서는 진보적 교회가 아닙니다. 이 민족의 미래를 지고 가야하는 보초교회입니다. 저는 여기에 참 신앙의 진보성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부활이해의 위험]

예수께서 왜 성전을 허물라고 그리고 율법을 어기는 일을 공공연히 행하였겠습니까?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관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이해할 때 주로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육체의 부활로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었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관에 들어갔다가 나온 예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부활입니까?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부활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소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나사로가 나흘 만에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증언하지만, 나사로가 영원히 살아 하늘나라로 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다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도 우리가 말하는 부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더불어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입니다. 아니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 역시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서나 사도바울의 서신 속에서 여러 곳에서 그 몸이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전서 15장 소위 말하는 부활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존립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한번에 오백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녔는데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 있습니다.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왜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시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고 그리고 그를 처형한 대제사장이나 로마의 백부장을 포함한 군인들 앞에 나타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희망과 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차별적으로 나타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의 기록을 보면 역사적인 사실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는 우리의 인식 밖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기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억지로 믿으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으니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일입니다.

다만 제가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결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 대신에 부활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복음서는 각기 나름대로의 부활의 사실과 경험을 전하고 있는데, 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개인적 종교신비체험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부활증언]

마태오복음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백성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받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마르코복음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래아로 가라는 명령으로 마칩니다. 루가복음은 엠마오 고향을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즉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예루살렘 그 골고다 길로 나아갔다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요한복음 또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는 목양의 사명을 맡기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단순한 신비체험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활의 증언이 있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씌어진 마르코 복음은 매우 독특한 부활의 증언을 합니다. 물론 오래된 마르코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8절이 마지막으로 되어 있고 조금 후대에 씌어진 복음서에 9절 이하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래 모든 학자들은 본래 마르코 복음은 8절이 마지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장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빈무덤만 보입니다. 그래서 흔히 부활이라는 말 대신에 빈무덤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저는 이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서의 저자가 의도하는 독특한 부활증언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갈릴래아로 먼저 가셨다. 그러면 왜 다른 복음서와 같이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다시금 만났다는 기사를 빼트렸을까? 무슨 의도에서 였을까? 마르코복음 저자가 의도하는 부활의 체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부활예수가 없는 부활체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만약에 부활 예수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 부활한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날개가 있어 날아다녔나요. 벽도 마음대로 뚫고 다니는 투명인간과 같은 능력이 있었습니까? 밥은 잡수셨나요? 잠은 주무셨나요? 우리의 질문은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얘기할 때, 신비적 환상에 붙잡혀서 오늘의 현실을 무시하고 피안의 영원의 세계만을 꿈꾸는 종교적 판타지로 들어갈 위험도 많이 있습니다. 이건 종교가 갖는 보편적인 위험입니다. 저자 마르코는 이 위험을 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일부러 부활의 기사를 누락을 시키고 갈릴래아로 먼저 가셨다고 그래서 부활한 주님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갈릴래아는 어떤 곳이고 그렇다면 오늘의 갈릴래아는 어디이고 그래서 우리가 부활한 주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갈릴래아로 가라]

흔히 말하는 대로 갈릴래아는 당시 유대 땅 가장 북부에 위치한 곳으로 정치경제사회 모든 부분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로마나 예루살렘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이 가장 많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온한 지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6,70년대에는 전라도 출신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정부 요직 군 장성, 법관임명 등 모든 부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항쟁도 따지고 보면 이런 차별이 계속되어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차별받는 지역의 출신이었고, 이 지역에서 하느님 나라 복음 운동을 하셨으며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이리 오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이리 와서 내가 살아 있음을 보고 겁내지 말고 내가 하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에서 갈릴래아가 어디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를 가야 제대로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부활의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이웃들 가운데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빈민지역이 오늘의 갈릴래아이고, KTX승무원 농성장이 갈릴래아이며, 새만금과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가 바로 오늘의 갈릴래아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예배는 여기 향린교회 예배실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까지 나아가는 실천입니다.

제가 여기 아주 조그마한 십자가를 가져왔습니다. 이 십자가는 총알 탄피를 펴서 만든 십자가입니다. 지난 2월 브라질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 참석자들에게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나눠준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폭력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 바로 팔레스타인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기독교인들과 팔레스타인기독교인들은 서로가 만든 나무 십자가와 바로 이 탄피십자가를 서로 교환하며 주님의 평화를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갈릴래아에서 만나서 이룩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입니다. 죽음의 무기를 생명의 힘으로 바꿔나가는 운동이 바로 화해와 용서의 복음 운동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갈릴래아로 가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