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부활 후 첫 주일, 장애우주일
내 어린양을 돌보라
신명 8, 1-6, 요한 21, 1-17

성서는 인간을 신의 자리에 한번 올라서보고자 하는 피조물로 그래서 끊임없이 신과 대결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고 이를 근본적인 원죄라고 말합니다. 선악과 이야기나 바벨탑의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이고(ego)라 말하며 교육학에서는 이를 자아 혹은 자기라는 주체의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이고는 갓난아기 때는 계속 울어대는 것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청소년소녀기가 되어서는 소위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저항의식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20대 청년기가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라는 유아독존적인 자아의식을 갖게 되고 30대가 되면 가정과 직업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훈련하고 남보다 뛰어난 자질을 드러냄으로 자기 존재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대략 나이가 40이 되면 이 자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변화가 나타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점점 바꿔지면서 자기라는 존재외에 또 다른 자기들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아독존적 절대자기인식에서 상호평등의 상대자기인식으로 사고가 전환합니다. 이를 공자는 知天命이라고 했고 슈바이처박사는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들에 둘러싸인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젊은 시절 곧 절대자기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사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를 위해 일하면 그것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자기를 인정하게 되는 상대자기의 시기에 도달하면 사는 일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때로는 생각의 폭이 더욱 넓어지면 지구촌의 전 생명체들의 운명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상대자기에 대한 깨달음은 마침내 내가 만약 참이라면 상대방도 참이 아닐 이유가 없는 것이고 만약 상대방이 거짓이라면 나도 거짓이 아닐 이유가 없다는 깨달음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 지난 사순절에 우리가 이웃종교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대화를 하게 된 바탕 이유가 있습니다. 진리란 대화와 비판을 통해 얻어지는데,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보다 잘 이해하고 비판을 통해 나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데서 진리의 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 인간]

절대적 진리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는 대화와 비판이라는 진리의 길에서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예수님마저도 상반된 말씀을 하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 하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가족간에 분쟁을 유발하고 너희 가운데 불을 던지러 왔노라.’는 말씀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갖고 비교하면 예수님은 이율배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평화는 분쟁을 피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쟁을 극복함으로 얻어진다는 깨달음을 가질 때에 이 이율배반은 보다 깊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하여 진짜 신앙의 이율배반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이해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참 사랑도 매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그 매가 자기에게 올 때는 이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과 타인을 향해 각각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들이야 말로 진짜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때때로 인간의 사고,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깨비 같은 것인가? 말은 생각을 통해 나오기에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지만, 이는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좁은 생각에서 나온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인 줄 알고, 해야 할 일인 줄을 알면서도 자기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던 사람과 같은 결과를 낳고 말면 별것이라고 생각했던 자기도 별것 아닌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한계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이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향해 분노하고 한숨짓고 체념하며 고통스러워하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30은 훨씬 넘었고, 세상 쓴맛 단맛 다본 사람이니 젊은이라고 말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그래도 중년이라고 말하기는 힘드니까 그냥 젊은이라고 합시다. 이 젊은이의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아니 베드로 곧 바위라고 이름을 불러주었던 스승 예수가 죽었으니 베드로라는 이름도 의미 없는 이름이고 이제는 옛 이름 그대로 시몬이라고 부르는게 좋겠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맹세한대로 예수님 뒤를 따라 같이 죽지 못했으니, 아니 죽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3년이나 먹고 자고 동고동락 하였던, 가족보다 더 진한 형제애를 나누었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차라리 시몬이라고 불리우는 것조차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수제자라 불리우던 대표적인 제자 시몬 베드로, 예수를 부인하는 일도 총 칼을 든 권력자 앞에서라면 목숨이 아까워서나 그랬다고 스스로 자위라도 하고 사람들 앞에 나가 변명이라고 해보겠지만, 아무 힘도 없는 여종 앞에서 예수는 모른다고, 절대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람이라고 하늘에 맹세를 하며 딱 잡아 떼어버렸으니, 이제는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합니다. 한번이면 실수라고나 하겠는데, 세 번이나 거푸 부인을 했으니 이건 실수도 아니고 고의라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지난 며칠동안 그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가슴을 치며 통회합니다. 자기라고 하는 자신의 내부에 감춰진 본연의 모습, 비굴한 자기 모습에 그만 스스로 소스라치며 진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못 박았던 십자가의 못이 빠져 나와 시몬의 몸속에 들어와 혈관을 따라 이곳저곳을 마구 찔러대는 것 같습니다.

[인간 신뢰의 상실]

몸은 친구들과 함께 다시 고향 갈릴래아 바닷가로 내려왔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그 예루살렘 성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 찬송하리로다.’ 손에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그 무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만도 분명 뭔가 손에 잡히는 듯 했는데, 불과 며칠 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어 예수는 역적으로 민중을 선동한 악당으로 낙인이 찍히더니 하룻밤 사이에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없이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 앞을 왔다리갔다리 하더니 급기야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입니다. 율법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었던 유대지도자들이, 공정한 법을 가장 중요시 여겼던 로마정부에 의해 그런 일이 자행되어다는 사실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백성들의 변심입니다. 예수를 향해 환호하던 그 백성들이 갑작스레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다니... 그것도 어떻게 살인자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고 대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칠 수 있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 그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신뢰의 포기.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병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가 침묵을 깨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네.’ 함께 모여 있던 여러 명의 동지들, 말은 안했지만 같은 고민을 하던 참이라 모두 따라 일어섰습니다. 실로 3년 만에 잡아본 노, 3년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도 손바닥에는 굳은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물을 던져보니 옛날 솜씨 하나도 줄지 않았습니다. 어부 출신의 시몬, 그리고 야고보 요한은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그 옆에는 학자풍의 나타나엘과 뭔가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굳은 얼굴의 토마와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했던 제자와 다른 친구는 고기 통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그날따라 고기가 딴 곳으로 모두 이사를 갔던지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합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이는 스승을 배반한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침통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이제 어둠의 밤은 사라지고 점점 새벽의 아침은 밝아오지만, 빈 그물에 그들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만 갑니다. 날이 밝아 고기떼들이 점점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고기 잡는 일은 그만 포기해야 할 판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그물 거둘 때를 찾고 있었던 시몬,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는 쉬워도 그만두기는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바둑의 돌 던질 때를 찾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망해가는 사업체를 정리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언제 이 그물을 거둘 것인가? 침울한 동료들은 베드로의 눈치만 살피면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해변가 저 멀리서 어떤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아라.’고 말합니다. 지난 밤 수없이 던져본 자리. 그런데 들려온 그 음성에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음성에는 뭔가 저들의 깊은 영혼의 밑바닥을 한번 휘젓고 가는 듯한 묘한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머릿속에 엉킨 기억의 실타래를 푸는 듯한 음성이 아스라니 귓가를 스쳐 새벽햇살에 떠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더 던진다고 그물이 달아지랴.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던진 그물. ‘그러면 그렇치! 당신이 누군데 우리 일에 참견하는 겁니까?’라고 화풀이를 담아 큰 소리로 외치려는 순간, 손아귀에 갑자기 팔딱팔딱 고기들의 뛰는 동작이 짜릿하게 전해옵니다. 저도 미국에서 몇 번 낚시를 해보았는데, 찌를 끼는 기술, 던지는 기술, 낚아채는 기술이 모두 부족하여 언제나 별 재미를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저 한밤 찰싹거리는 물소리 들으며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아 따라나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 자리가 운이 좋았는지, 팔뚝만한 Rock fish를 십여 마리 연속 낚았던 적이 있습니다.(사전에 나오지 않아 우리말로는 뭔지 모르지만, 횟감 찌개용으로 최고입니다.) 낚시 해보신 분들 이 짜릿함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도 밤새 미끼만 다 날리고 낚시대를 거두려고 하던 낚시대가 휘청하며 순간 대어가 걸렸을 때의 그 짜릿함 말입니다.

팔딱팔딱. 갑자기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합니다. 새벽녘 짙어오는 안개들을 힘없이 바라보던 열 네개의 눈알들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면서 앗! 소리와 함께 모두 달려들어 그물을 끌어올립니다. 성서에는 고기에 크기에 대한 말은 없지만, 팔뚝보다 더 큰 엄청난 크기의 153마리의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숫자를 세어본걸 보니까, 갈릴래아 바닷가에서 한번의 그물로 끌어올린 숫자로는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만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주석서에는 이 153이라는 숫자는 당시 로마에서 발간된 물고기 그림책에 나오는 모든 물고기의 종류로 설명하고 있어 세상의 모든 민족의 숫자를 상징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곧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한 제자들에게 맡겨진 모든 민족을 제자삼고 땅 끝까지 전하라는 복음의 사명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당부 ‘내 양을 돌보라.’는 요한 공동체의 남은 숫자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체험은 사랑의 회복]

그물을 끌어올리자말자 저분이 누구인가 하며 다시 바라다보는 순간 누군가가 ‘주님이시다!’ 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그대로 바닷물에 텀벙 뛰어들어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아마도 젖은 채로 예수님을 붙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었겠지요. 이미 예루살렘에서 한 번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시고는 간다온다 말없이 사라지셔서 영영히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줄 알았던 주님이 이곳에 다시 나타나셨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밤새도록 고생하신 것을 아시고 이미 떡을 구워놓으셨고 잡은 물고기를 구워서 아침 식사를 함께 나눕니다. 마치 어머니가 밭에서 갓 돌아온 자식들에게 고구마 옥수수를 꺼내 놓는 것과 같은 따뜻한 모성애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따로 불러서 그랬는지 아니면 모두가 보는데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세 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라는 말 대신에 시몬이라고 부른 사실입니다. 이전에 이렇게 부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물론 주석가들은 그가 주님을 배반하였기에 본래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친구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부탁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공동번역에 번역되어 있는데, 희랍어 본문에는 ‘이 사람들’이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이것들보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면서 이 사람들, 곧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그리 타당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시다.‘라는 말에 바다 속으로 제일 먼저 뛰어듬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증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번역을 ’이것들보다.‘ 라고 함으로 해석의 여지를 좀 더 남겨두었으면 좋았겠다는 말씀 펴는 자로서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으로도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지금 눈에 보이는 배나 그물이나 가족이나 직업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예수 사이에서 항상 고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 시몬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베드로는 예전 생활로 되돌아갔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묻는 것은 네가 세상보다, 너의 이기적 자아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랑의 크기를 비교하는 질문을 하셨다고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장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냐 혹은 세상 것들이냐 라는 해석보다도 무엇보다도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에게 맡겨진 사도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보는 가톨릭에서는 이 성서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3년 전 처음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순간과 현장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초청에 베드로는 즉시로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그리고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세 번째에는 자기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 같은 예수님이 섭섭해서 약간은 목소리를 높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네 양들을 잘 돌보아라.‘ 물론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보다 분명히 하는 확인의 의미도 있었거니와 다른 편에서 보면 이미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그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도 희랍어 본문을 보면 3번 반복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도 처음과 둘째 번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세 번째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든 어머님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부부의 사랑이든, 연인끼리의 사랑이든 모두 같은 한 단어 사랑 혹은 love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어 단어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희랍어는 사랑을 뜻하는 5개의 단어가 있어 관계가 누구냐에 따라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이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와 인간의 감성에 기초한 에로스라는 단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가페로 물은 예수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의 사랑으로 답을 하고 있고 세 번째는 예수님도 시몬도 모두 필레오란 단어로 주고받습니다. 학자에 따라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자도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저자가 단어놀이(wordplay)를 통해 숨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볼 때, 여기에도 분명히 의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처음 두 번 계속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인 아가페를 사용함으로 베드로에게 어떤 보다 높은 결단을 촉구했지만, 베드로가 계속 자신은 한번 실패한 사람으로 그런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 아가페보다는 그 사랑의 헌신도가 약간 떨어지는 필레오로 계속 답하자 예수께서도 거기에 동의하셨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과 같은 장면을 연상케 하는 루가복음 5장에서는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 주십시오.’ 같은 맥락으로 이해가 됩니다.

[부활의 체험은 목양의 회복]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목양의 명령도 엄격하게 말하면, 처음 것은 내 새끼양들을 먹이라.(Feed my lambs) 두 번째는 내 양들을 돌보라.(Tend my sheep) 세 번째는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Feed my little sheep)로 각각의 단어가 다릅니다. 이것도 보다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그리 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오늘 장애우주일을 맞아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부탁하신 말씀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엄격하게 번역하면 새끼양을 말합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로 말하면 갓 들어온 새 신자를 말하고 사회공동체로 말하면 자기 혼자서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지체를 말합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듯이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는 사회적 약자 당시로 말하면 땅이 없고 노동력이 없는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나눔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십일조도 본래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나눔이 목적이었습니다. 지금은 국가가 세금징수를 통해 복지차원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있지만, 신앙공동체는 복지시혜 이전에 약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신앙의 깨달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한 몸에 속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발가락이 아플 때, 손가락이 그냥 위로한다라고 말로 하지 않습니다. 그 아픔이 그대로 전달이 됩니다. 참 사랑은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참 사랑에는 아픔이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복지기관들이 하는 사랑의 실천과 교회가 하는 사랑의 실천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는 마구간에 낳게 하시는 낮아짐과 비임이라는 고통이 수반되는 사랑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틀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사랑은 고통 바로 그 자체입니다. 교회가 외치는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랑. 물론 우리는 예수가 아니니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너무 연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만 제가 하나 아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그래서 주님 앞에 우리가 힘없이 무너질 때,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힘없이 쓰러질 때, 우리 안의 성령께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도 나이 80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고 할 수 없다고 4번이나 거절하였을 때 하느님은 그에게 출애굽 민족 해방의 사명을 맡기셨고, 베드로 또한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하여 철저하게 무너졌을 때,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그들의 가진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낮아짐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소한 장애 때문에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이의 부모의 자리로 낮아졌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사회적 차별을 그냥 눈감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만약 하루아침에 삶터를 빼앗긴 새만금과 대추리 농어민의 자식의 자리로 낮아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가의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군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른바 혼혈인이고, 이 나라에 머물고 싶어도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이주노동자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러니 별 수 없다고 체념하시겠습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그리고 한 주간 동안 아니 여러분의 일생동안 분명히 기억하실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시지 않으시고,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꿔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이 땅에 작은 자로 살아가는 장애우들의 삶의 모습을 화면을 통해 보면서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을 발견하고 그 주님과 여러분 자신을 동일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화상보기) .....................................

자 여러분 우리 다같이 시몬을 따라 한번 고백하십시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