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부활 후 셋째주일
잠언 1,2-9; 고후 4, 7-15절
예수의 생명을 살려내는 교회

지난 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사는 목사인 제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적 정의 실천과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 힘쓰고 있는 향린교회에게 있어서나 동아시아의 평화를 넘어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기를 원하는 한민족에게 있어서나 참으로 암울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역사에 부끄러운 한 주간]

첫날 월요일부터 우리는 강정구교수의 재판 과정에서부터 판사의 부당한 절차와 검사의 구형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본래 이날은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요청한 증인이 증언을 거부해서 나올 수 없게 되자, 변호사측이 준비한 증인까지 일방적으로 철회하도록 하고 무리하게 절차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정구교수께서는 최후진술 또한 서면으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 검사는 4년 구형에 자격정지 4년이라는 도대체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는 4년 전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나 발표한 6.15 공동선언문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범죄행위입니다. 하루에도 수 백명의 국민이 금강산과 개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방문하고 있는 이 남북 화해의 시대에 ‘6.25는 통일전쟁이었다.’는 발언이 해묵은 국민감정을 건들었다는 이유로 60이 넘은 학자의 생명을 8년씩이나 잡아가두겠다는 착상이야말로 정신병 환자의 짓거리로 보여 집니다.

이것도 그냥 얘기한 것이 아니라 학자로서 평생에 걸친 연구 결과에 기초한 학문적 결론이었습니다. 학문적 결론에 대해서는 학문으로서 대답하고 비판할 것이지 이미 대통령마저 박물관으로 보내야 마땅하다고 선언한 국가보안법을 들이대어 학자의 입을 막는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뻔한 것입니다. 세계경제대국 10위니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 시대니 하는 것은 단지 숫자상의 허구일 따름입니다. 양심과 사상 학문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사회는 돼지들이 모여 사는 우리일 따름이지 이성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 사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입니다. 이 이성이 있어 인간은 과거에 서로를 헐뜯고 죽이는 깊은 상처의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넘어서서 옳은 것은 옳다 인정하고 틀린 것은 틀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과거의 해묵은 감정에 매여 산다면 그것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것이요 그런 인간은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금 남한의 사법부는 하늘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고귀한 이성적 판단을 스스로 포기하고 짐승의 자리로 내려서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대추리 도두리에서의 국가의 만행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끌어가고 초등학교를 부수는 폭행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몇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500여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체포당했습니다. 흔히 보수언론에 주입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미군주둔이 북한의 위협이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평택에 확장되는 미군은 북한의 위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럼스필드 국방장관이 미국국회에서 보고하였듯이 평택기지가 완성되는 2008년도가 되면 남한에 거주하는 미군의 숫자는 현재의 3만여명에서 칠천명으로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북한 침략을 막기 위한 미군주둔만 목적으로 한다면 기지 확장이 아닌 기지축소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이는 미국이 동북아 패권유지를 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이는 국가가 하는 시책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대화에 기초해야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공산주의 국가가 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다들 그렇게 얘기합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면 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그게 자기 문제가 되면 그제서야 발 벗고 나섭니다. 인간의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알고 대처하는 깨달음에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랑하는 이성의 힘입니다. 대추리 도두리의 남아 있는 힘없는 주민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할머니라고 여기는 힘이 이성의 힘이요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야훼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그리고 우리가 이 분을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땅의 모든 인류가 바로 나의 형제요 자매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들이 당하는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라는 고백입니다. 여기 한 가족원이 있는데, 만약 한 사람이 가족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핏줄을 나누었다 하더라도 이 사람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이 무엇입니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대결, 남과 북의 사상대결을 넘어서 한 형제의 핏줄이 더 강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인류의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목격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해를 외치고 인간 사이의 용서를 외치고 원수사랑을 가르치자 세상 권세자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자신들의 법에 위배되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킨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원수 사랑을 외치고 화해를 외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른 민족도 아니고 말과 문화와 습관이 같은 민족을 향해서 말입니다. 한반도의 오늘의 현실만을 두고 보았을 때, 인류의 진보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정보와 편리함의 진보는 있었을지언정 분명코 인간의 이성적 진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실체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냥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까? 그건 돌의 존재를 믿는 것이나 토끼의 존재를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그 절대자가 나를 보호하고 축복할 것이다. 그건 성서가 말하는 야훼 하느님이 아니어도 하는 일이고 복음서의 예수님이 아니어도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의 신 그리고 맘몬의 신이 훨씬 더 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야훼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진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과 이 확신을 갖고 사랑의 대상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할 때 사람이 성숙해졌다고 말합니까? 어렸을 때는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자신을 넘어 형제자매를 위할 줄도 알고 부모님을 위할 줄도 알고 어른을 공경할 줄도 알 때, 우리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말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넘어서 동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의 대상을 넓혀가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오랜 세월 믿어도 자기 가족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뭔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비난을 받고 안티기독교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이 더 한다는 것이지요. 말은 사랑 사랑 하면서 제 욕심만 더 챙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 좋지요. 그런데 맨날 자기 가족만 챙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정도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다 하는 것 아니냐? 예수 믿는 사람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사실 이천년 전 예수님도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을 이미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세상적인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구하지 말아라. 그건 이방인들이나 하는 촌스러운 짓거리이니,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교회 목회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 교회에 등록한 교인들만 열심히 챙기는 가족중심 목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 가족의 숫자를 늘릴까? 사실 이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신학을 배운다는 건 그것은 목회의 영역을 가족에서부터 세상으로 그 대상을 넓혀가는 일입니다. 남의 교인도 제 교인으로 알아 배려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교인이 떠나면 가슴이 아프니까 남의 교인 뺏어오지는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같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줄 알아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교회목회]

제가 한달 전 평택평화집회 일로 잠시 유치장에 있을 때에 저와 함께 있었던 청년 다섯 명 중 한 사람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두명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닌 적은 있었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앞이라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교회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전 그때 그들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이게 바로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임을 말씀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저는 향린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99마리의 양이고 유치장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석방이 되는 날은 주일 아침 10시쯤이었으니까 제가 지문날인을 하고 빨리 나가면 12시쯤에는 교회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한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단지 교회에서 일하는 교회목회자인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 곧 생활목회자인 여러분이 일상생활 속에서 취해야 할 행동입니다. 금요일 저와 교우 두 분이 그리고 어제 아침에는 10명의 교우들이 비 오는 일을 무릅쓰고 경찰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파주경찰서를 찾아 갔습니다. 어제 아침에 다들 석방이 되었지만, 제가 갔던 금요일에는 박종양교우와 최성남집사의 여동생인 최선희선생을 비롯한 10여명이 평택집회 일로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최선희선생은 2주전 우리가 목회자폭행 규탄과 미군지기 확장반대를 위한 명동거리기도회를 가질 때 비를 맞으면서 우리에게 평택의 소식을 힘 있게 전해주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나 보았더니 목주위에 뻘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체포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흔적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서장은 자리에 없어 수사과장을 만나 인권유린에 대한 항의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구차스런 변명을 하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 여동생이 만약 같은 일을 당했는데도 가만있겠느냐?’ 남의 불행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 그 남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신앙이 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기독교인은 원수의 아픔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지난 한주 동안 강정구교수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과 평택에서 일어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폭력적 사태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매우 침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강정구교수를 지지하는 양심적인 교수들과 학생들과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기장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해외협력교단 대표자 30명을 불러 3박 4일 동안 ‘동북아평화를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세계교회가 남북의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새로운 기구를 만들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을 사인한 짧은 성명서를 내었는데 이는 평택에로의 미군기지이전을 반대하고 강정구교수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규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성명서는 여러 국가기관에 제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성명서를 내는 일로 그치지 않았고 모두 직접 평택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공권력이 투입된 그날이라 우리는 온정리 삼거리에서 경찰들에 의해 제지를 당해 그 자리에서 거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이 평택방문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고 제게는 이분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책임이 없었다면 전 아마도 그날 온정리에 있지 않고 문정현신부와 함께 대추초등학교 지붕위에 올라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녁 몇 분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광화문 규탄집회에 갔습니다. 홍창의장로님을 비롯한 여러 교우님들이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들에게 저게 바로 우리 교회의 깃발이고 이분들이 우리 향린교회 교우들임을 말할 때에 제가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인도에서 오신 목사님들은 여기저기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곤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분위기는 마치 심령부흥회마냥 뜨겁다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을 받은 제자들은 성전 안에서 들어가 복음을 외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에서 외쳤기 때문입니다.

[질그룻 안의 보화]

지난 주 우리는 평화의 길을 거부하고 역사를 되돌리려는 권세자들의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에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로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들입니다. 인간사회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부활의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실망하지 않고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4장 7-10절) 여러분 이를 믿으십니까?

사도 바울로는 계속하여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5일은 어린이날로 그리고 내일은 어버이날로 지킵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요즘 가정의 윤리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심과 자식들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예전과 같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회가 점점 개인이기주의화 되어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양하기 힘들다고 나이든 부모님을 버리는 경우도 있고 자식도 버립니다. 예전의 먹고 살기 힘들었던 때보다 먹고 사는 일이 더 풍부해진 지금 사람은 더 이기적으로 되었습니다.

가족이기주의 또한 매우 심해졌습니다. 특히 자녀교육을 보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 아들딸만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려운 친구를 보면 도와주라는 얘기보다는 경쟁에서 무조건 이길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입에서 제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입버릇처럼 나오고 있고, 중고등학생들은 성적을 비관하며 목을 매달거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입장이 되어 과연 저들의 인생에 필요한 것을 교육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유행을 좇아 무심코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경쟁과 냉정함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가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을 회복하라]

지난 수요일 기도회에 오신 분들에게 엽서를 나눠 드리고 가족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시도록 하였습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자녀들에게서 그런 편지를 받게 되고 오늘도 청소년부와 대학생부의 한명이 사랑의 편지를 읽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들께 부탁하건데 이 사랑의 편지를 받지만 말고 사랑의 편지를 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난 너를 믿는다고 그리고 지난 일을 용서해 달라고 글로 써서 주시기 바랍니다. 에페소서 6장에 보면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시오’라고 하면서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용서 칭찬과 격려 이것이 주님의 정신입니다.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일들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식도 어머니 아버지가 손 한번 잡고 기도하는 것을 거부할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할 수 있다면 자식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의 예식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이 늙은 나이에 창피하게 그런 일을 어떻게 합니까?’ 아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도 씻겼는데, 부모님이 자식의 발을 왜 못 씻습니까? 자식들도 나이 드신 부모님의 발을 씻겨드릴 때에 효를 다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전 이 시간에 성서의 이 구절 저 구절을 들이대면서 효가 무엇인지? 가족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복잡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엽서를 보내고 손을 잡고 기도를 하시고 서로의 발을 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교회를 다니는 가정이라면 성찬식도 행하실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저는 성찬식은 반드시 교회에서 목사에 의해서만 행하여져야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가정이라는 교회에서 한 가족공동체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정은 작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는 곳입니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일이 지식의 근본임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5년 10년의 성공의 길이 아닌 영원한 성공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몸으로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 정신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는 곳이 기독교 가정입니다. 향린에 속한 가정은 모두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세상의 그 어떤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이를 실천함으로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늘의 영원한 축복으로 다 채움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