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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강단은 향린교회 주일예배의
'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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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3
5월 14일 창립53주년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사야 61,1-11 에페소 2,14-18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예화가 있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가에 작은 인명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파도가 칠 때는 위험을 무릎 쓰고 나가서 실종된 자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래서 점차 이 구조대는 유명해졌고, 구조된 사람들과 인근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 대의 보트를 구입하고 더 많은 구조대원들을 훈련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가입한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이 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상용 간이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 치우고 보다 좋은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점차 그 구조본부는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의 모임과 친교에 기쁨을 얻게 되자 그들은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고, 대신 바다를 바라보는 일을 즐기고 자신들의 구조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회원들은 인명 구조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고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이를 그만두기를 원했고, 소수의 회원들은 인명구조야 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투표에 의해 패배하였으며 대신 아래편 해안에서 나름대로의 인명구조대를 새로 세웠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했고, 또 다른 구조대가 그 아래쪽에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향린교회의 정체성]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53년 5월 17일 한국전쟁의 포화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잿더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민족에게 희망을 던지고 이 사회를 구원코자 12명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향린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작은 공동체가 여러 우여곡절과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향린교회는 양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질적인 의미에서 향린 교회는 한국기독교사에 매우 독특한 자리매김을 하여 왔습니다. 목회자가 없이 22년을 지켜온 평신도교회의 정신이 살아있고, 삶이 곧 선교요 복음 활동이라고 하는 사회적 선교정신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로서 여러 선교활동에 동참하지만, 그러나 총회헌법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 시대에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법을 앞서가는 내규와 정관을 만들어 개체교회로서의 향린의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들라면 목회운영위원회의 운영과 장로 목사들의 임기제 분가선교 등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전통음악을 사용하고 하늘뜻펴기나 축도를 행함에 있어 목사중심의 틀을 깨고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사제라고 하는 깬 신앙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외적 교회 틀에 맞춘 우리의 신앙 내용이 충실히 갖추어졌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교인 누구나가 그렇다!고 확신 있게 답할 자신감은 아직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인 스스로 자신이 하고 있는 세상 일이 곧 사제의 일이요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형의 제도와 법규개혁은 쉬우나 무형의 심리와 사상 개혁이야말로 어려운 과제’라고 하는 어느 학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얼마 전 저는 보수교회 교인으로부터 축도를 목사가 하지 않고 교인들이 함께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혹 이단종파가 아닌가?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부모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지만, 축도는 오직 목사만이 할 수 있다고 배워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 어디에 축도는 목사만이 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오히려 성서는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사제 혹은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나 제자들 또한 당시로 말하면 목사들 그룹인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무시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는 전문인?]
목사의 역할을 얘기할 때 두 가지로 크게 나누입니다. 첫째는 목사는 목회의 전문인이다. 그래서 평신도목회는 그의 목회를 돕는 것이다. 둘째는 목사는 교인들이 자신의 받은바 달란트를 잘 펼치도록 훈련시키고 그래서 교인들의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생활목회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사람이다. 하나는 전문인에 강조를 두고 다른 하나는 훈련책임에 강조를 두는 생각입니다. 목사는 훈련받은 전문인이라는 주장은 맞습니다. 평신도 교회를 주창하는 여러 교회들도 담임목사는 없다 할지라도 실상은 그 안에 목사들이 활동하고 있고, 향린교회도 목사 없는 교회를 20여년 하여왔지만 결국은 목사를 두는 교회로 변했고 지금 만약 목사를 두지 않기로 하였을 때 일어나는 파장은 상당히 클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있어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는 전문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사를 목회의 전문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많은 함정과 모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나 변호사라는 전문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의사들이 우리를 직접 치료해 줄 것을 기대하지, 우리를 훈련하여 다른 사람을 치료하도록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변호사가 우리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우리를 한명의 법조인으로 훈련시킬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사는 것입니다. 목사의 전문직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적인 길인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말고 해답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플 때마다 와서 심방해주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별 효험이 없으니까 기도전문인이 당신이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주고 직접 기도해야 효험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예수님은 과연 홀로 전문목회인으로 남고 말았는가? 물론 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표는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도가 되어 그들 자신의 목회를 펼쳐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 운동은 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 땅 바깥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제가 다음주부터 두달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여러분이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이거 담임목사가 없어 교회가 제대로 운영이 되겠나? 교인들은 제대로 출석하겠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래는 제가 처음 여러분에게 얘기할 때는 8번의 반 정도는 하늘뜻펴기를 교우들이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들로부터 반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없는 상황에서 교인들이 잘 따라줄려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교우들이 하는 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에 감동이 적다고 말하고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십년을 이론과 실제로 훈련받은 전문목사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단상을 단지 전문목회자들의 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장소는 교인들이 목회의 주체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의 장도 되는 것이고 이런 일들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 간에 더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를 통해 도전을 받기도 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깊은 차원의 목회를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저는 과연 향린교우들이 스스로 사제라고 하는 깊은 확신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생활목회자로서의 정체성 회복]
맨 날 음식점에 가서 먹다 보면 집에서 밥 해먹는 일이 귀찮아집니다. 비용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된장찌개를 집에서 해먹으려고 마켓에 가서 최소한의 단위로 멸치와 호박과 두부와 콩나물과 감자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6,700원이 나오데요. 그것도 조미료와 쌀은 뺀 값입니다. 그런데 4천원이면 바로 옆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재료를 갖고 만들어 먹으려면 수고와 시간도 투자가 되어야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니까 맛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여간 만들어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나서 저녁시간을 다 보내고 나니까 괜한 짓거리를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생 이렇게 식당을 이용만하고 살수는 없잖습니까? 가까운 곳에 식당이 없는 곳에 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만약 된장찌개가 먹고 싶지만 만드는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밥이라는게 그냥 만들어주는 것 먹는 맛하고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먹는 것하고는 그 보람과 기쁨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또 된장찌개라고 해서 다 같은 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수 만들어 먹지 않는다면 자기 입맛에 맞게 개발하는 것은 더욱 할 수가 없습니다.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선교여행차 러시아의 시골의 식당에도 가고 시골 집에도 가보았습니다. 별로 음식이 맛이 없어요. 뭐가 러시아 전통음식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 주부께서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50년 이상을 배급생활을 하다보니까 음식 만드는 법을 다 잊어버렸고 자기 위의 세대로부터 배우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스스로가 한명의 목회자로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나라가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것이요. 그들 자신이 하느님 나라 목회의 주체자임을 깨우치는 말씀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전문목회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 이후로는 목회의 기본적인 것조차 할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기도도 잘 못합니다.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법도 모릅니다. 사랑도 봉사도 모두 전문인들에게 맡겨버렸으니까요. 어떤 교회에서 제직들이 하루씩 나와 봉사하도록 했는데, 어떤 제직은 파출부를 대신 보냈더랍니다.
오늘 창립주일을 축하하는 것은 단지 창립을 축하하는 모임을 넘어서서 창립 목적이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전제를 걸고 인간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인간들이 점점 도시화되어가는 사회 구조에 더욱 매이게 되고 인간의 생명이 지구의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은 단지 한 개인을 뜻하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공동체 교회로서의 사명을 얘기하게 되고 공동체의 구원을 얘기하게 됩니다. 더욱이 교회가 신앙의 전거로 삼고 있는 성서가 곧 공동체의 얘기입니다. 구원의 주체자로서의 공동체이고 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 성서입니다. 성서의 가장 큰 주제는 물론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실체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신앙의 과제는 평화실현 곧 샬롬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평화였습니다. 복음서는 아기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사도바울로는 오늘 에페소서 본문에서 아예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신앙의 과제 또한 평화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 2장 14-16절)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유다인과 이방인의 원수관계는 바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원수관계를 말하고 북한과 미국의 원수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둘 사이의 갈리게 했던 담을 헐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남과 북 그리고 북과 미국을 갈리게 한 담과 율법 조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국가보안법이고 한미일군사동맹이고 북중러군사동맹입니다. 이를 폐지해야 한반도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리스도뿐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던 베드로 바울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수 따름이, 작은 그리스도들에 의해 그런 희생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답은 명확합니다. 단지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의 실천적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저부터도 변명하고 있는 것이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고토규 슈스이라는 일본 사회주의자가 러일 전쟁이 한창인 1904년 3월에 한 신문에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일러 양국 정부는 각기 제국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마구 군사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인종도 지역도 국적도 다를 것 없다. 여러분과 우리는 동지요 형제요 자매다 결단코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은 적은 일본인이 아니라 실로 지금의 소위 애국주의요 군국주의다. 따라서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여러분과 우리의 공동의 적이다.’
지금 이 나라는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를 두고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습니다. 한명숙총리의 말대로 120년의 외국군의 주둔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끝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수순인지? 군대와 경찰이 논바닥에 야영을 하면서 삼중 사중의 가시철조망과 포크레인으로 다리를 끊고 흙의 장벽을 쌓아 주민들을 완전 고립시켜 놓은 상태에서 대화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땅값이 오르고 지역경제에 활성화를 가져오기에 찬성을 하고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자식과 같은 땅이 파헤쳐지는 모습을 보고 땅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하고 오늘도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라는 사람들과 원천적인 봉쇄를 하려는 공권력은 또 다시 부딪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다치고 싸우다보면 본래의 대상은 사라지고 엉뚱한 것들이 싸움의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애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공동의 적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
사실은 폭력시위냐? 아니면 평화적 시위냐?도 논쟁의 주제는 아닙니다. 미군기지 확장이냐? 아니냐?도 논쟁의 주제는 아닙니다. 진짜 주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입니다. 미군기지 확장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이냐? 아니냐? 50년 전의 정답이 지금도 여전히 맞는 정답이냐? 지금도 여전히 정답이라면 언제까지 정답이냐? 미군은 점점 줄고 남북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자꾸만 크게 벌어지는데 언제까지 정답으로 존재해야 하느냐? 한반도의 평화가 우리의 논쟁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고 있는가? 과연 미군기지 확장을 해서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된다면 그 평화는 무슨 평화이냐? 평화에 대한 갖가지 의견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에 의존해서 이스라엘민족의 평화를 지켜나가려는 헤롯당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야훼 하느님의 율법과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일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력투쟁만이 나아갈 길로 여겼던 열혈당원파도 있었고, 야훼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계시고 그러기에 거기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의식에만 관심하던 제사장들도 있었고, 이 땅의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다. 라고 믿고 외딴 곳에 따로 모여 살았던 소수종파인 에세네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고 예수님이 선택하신 평화의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를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얘기를 자세히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고통 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시면서 저들의 고통의 근원이 되는 병과 마귀를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저들을 깨우치셔서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나서 정작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로마 총독과 대제사장이라는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시대마다 그 강조하는 색깔이 조금씩 달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정신 ‘평화’만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로마의 군사력에 기대여 평화를 추구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오늘 저는 예수께서 계신다면 오늘 한반도에 산재되어 있는 군사기지와 미군기지들을 보시면서 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시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처음 예언에서 평화의 길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2장 3-5절)
계속하여 그는 선포합니다. ‘주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그들은 옛 성터를 재건하고 오래 전에 허물어진 폐허를 다시 세우리라. 무너진 도시들을 새로 세우고 그 옛날 선조 때 헐린 집들을 신축하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부서진 대추초등학교가 다시금 새로워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4대종단의 사제들이 함께 대추리에 모여 평화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우리 모든 사제들은 무너진 대추초등학교 건물 주위에 손을 잡고 둘러서서 침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학교건물이 들어서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지금은 뿌리 채 뽑혀져 죽어가는 저 자리에 언젠가는 나무가 자라고 이런 팻말이 붙어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
이사야와 예수님의 꿈은 단지 집과 건물이 복원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야훼의 사제들이라 부르고 우리 하느님의 봉사자라 불러 주리라.’ 저는 우리 한민족이 지금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다투고 있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미군기지가 여기저기 수십군데에 이르러 이게 독립국가인지 아니면 하수국가인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평화의 사제들과 봉사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합니다.
향린교회 창립일은 5월 17일입니다. 이는 516군사 쿠데타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린교회의 정체성과 그 부름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반평화적인 사탄의 세력과 내일의 하느님 나라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둠의 어제를 향하여 있지 않고 밝음의 내일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살아가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사야 61,1-11 에페소 2,14-18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예화가 있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가에 작은 인명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파도가 칠 때는 위험을 무릎 쓰고 나가서 실종된 자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래서 점차 이 구조대는 유명해졌고, 구조된 사람들과 인근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 대의 보트를 구입하고 더 많은 구조대원들을 훈련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가입한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이 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상용 간이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 치우고 보다 좋은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점차 그 구조본부는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의 모임과 친교에 기쁨을 얻게 되자 그들은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고, 대신 바다를 바라보는 일을 즐기고 자신들의 구조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의 회원들은 인명 구조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고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이를 그만두기를 원했고, 소수의 회원들은 인명구조야 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투표에 의해 패배하였으며 대신 아래편 해안에서 나름대로의 인명구조대를 새로 세웠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했고, 또 다른 구조대가 그 아래쪽에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향린교회의 정체성]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53년 5월 17일 한국전쟁의 포화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잿더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 민족에게 희망을 던지고 이 사회를 구원코자 12명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향린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작은 공동체가 여러 우여곡절과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향린교회는 양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질적인 의미에서 향린 교회는 한국기독교사에 매우 독특한 자리매김을 하여 왔습니다. 목회자가 없이 22년을 지켜온 평신도교회의 정신이 살아있고, 삶이 곧 선교요 복음 활동이라고 하는 사회적 선교정신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로서 여러 선교활동에 동참하지만, 그러나 총회헌법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 시대에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법을 앞서가는 내규와 정관을 만들어 개체교회로서의 향린의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들라면 목회운영위원회의 운영과 장로 목사들의 임기제 분가선교 등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전통음악을 사용하고 하늘뜻펴기나 축도를 행함에 있어 목사중심의 틀을 깨고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사제라고 하는 깬 신앙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외적 교회 틀에 맞춘 우리의 신앙 내용이 충실히 갖추어졌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교인 누구나가 그렇다!고 확신 있게 답할 자신감은 아직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인 스스로 자신이 하고 있는 세상 일이 곧 사제의 일이요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형의 제도와 법규개혁은 쉬우나 무형의 심리와 사상 개혁이야말로 어려운 과제’라고 하는 어느 학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얼마 전 저는 보수교회 교인으로부터 축도를 목사가 하지 않고 교인들이 함께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혹 이단종파가 아닌가?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부모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지만, 축도는 오직 목사만이 할 수 있다고 배워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 어디에 축도는 목사만이 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오히려 성서는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사제 혹은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나 제자들 또한 당시로 말하면 목사들 그룹인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무시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는 전문인?]
목사의 역할을 얘기할 때 두 가지로 크게 나누입니다. 첫째는 목사는 목회의 전문인이다. 그래서 평신도목회는 그의 목회를 돕는 것이다. 둘째는 목사는 교인들이 자신의 받은바 달란트를 잘 펼치도록 훈련시키고 그래서 교인들의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생활목회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사람이다. 하나는 전문인에 강조를 두고 다른 하나는 훈련책임에 강조를 두는 생각입니다. 목사는 훈련받은 전문인이라는 주장은 맞습니다. 평신도 교회를 주창하는 여러 교회들도 담임목사는 없다 할지라도 실상은 그 안에 목사들이 활동하고 있고, 향린교회도 목사 없는 교회를 20여년 하여왔지만 결국은 목사를 두는 교회로 변했고 지금 만약 목사를 두지 않기로 하였을 때 일어나는 파장은 상당히 클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있어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는 전문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사를 목회의 전문인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많은 함정과 모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나 변호사라는 전문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의사들이 우리를 직접 치료해 줄 것을 기대하지, 우리를 훈련하여 다른 사람을 치료하도록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변호사가 우리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우리를 한명의 법조인으로 훈련시킬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그들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사는 것입니다. 목사의 전문직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적인 길인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말고 해답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플 때마다 와서 심방해주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별 효험이 없으니까 기도전문인이 당신이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주고 직접 기도해야 효험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예수님은 과연 홀로 전문목회인으로 남고 말았는가? 물론 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표는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도가 되어 그들 자신의 목회를 펼쳐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 운동은 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 땅 바깥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제가 다음주부터 두달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여러분이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이거 담임목사가 없어 교회가 제대로 운영이 되겠나? 교인들은 제대로 출석하겠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래는 제가 처음 여러분에게 얘기할 때는 8번의 반 정도는 하늘뜻펴기를 교우들이 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들로부터 반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없는 상황에서 교인들이 잘 따라줄려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교우들이 하는 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에 감동이 적다고 말하고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십년을 이론과 실제로 훈련받은 전문목사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단상을 단지 전문목회자들의 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장소는 교인들이 목회의 주체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의 장도 되는 것이고 이런 일들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 간에 더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를 통해 도전을 받기도 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깊은 차원의 목회를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저는 과연 향린교우들이 스스로 사제라고 하는 깊은 확신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생활목회자로서의 정체성 회복]
맨 날 음식점에 가서 먹다 보면 집에서 밥 해먹는 일이 귀찮아집니다. 비용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된장찌개를 집에서 해먹으려고 마켓에 가서 최소한의 단위로 멸치와 호박과 두부와 콩나물과 감자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6,700원이 나오데요. 그것도 조미료와 쌀은 뺀 값입니다. 그런데 4천원이면 바로 옆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재료를 갖고 만들어 먹으려면 수고와 시간도 투자가 되어야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니까 맛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여간 만들어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나서 저녁시간을 다 보내고 나니까 괜한 짓거리를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생 이렇게 식당을 이용만하고 살수는 없잖습니까? 가까운 곳에 식당이 없는 곳에 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만약 된장찌개가 먹고 싶지만 만드는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밥이라는게 그냥 만들어주는 것 먹는 맛하고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먹는 것하고는 그 보람과 기쁨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또 된장찌개라고 해서 다 같은 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수 만들어 먹지 않는다면 자기 입맛에 맞게 개발하는 것은 더욱 할 수가 없습니다.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선교여행차 러시아의 시골의 식당에도 가고 시골 집에도 가보았습니다. 별로 음식이 맛이 없어요. 뭐가 러시아 전통음식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 주부께서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50년 이상을 배급생활을 하다보니까 음식 만드는 법을 다 잊어버렸고 자기 위의 세대로부터 배우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스스로가 한명의 목회자로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나라가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울 것이요. 그들 자신이 하느님 나라 목회의 주체자임을 깨우치는 말씀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전문목회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린 이후로는 목회의 기본적인 것조차 할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기도도 잘 못합니다.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법도 모릅니다. 사랑도 봉사도 모두 전문인들에게 맡겨버렸으니까요. 어떤 교회에서 제직들이 하루씩 나와 봉사하도록 했는데, 어떤 제직은 파출부를 대신 보냈더랍니다.
오늘 창립주일을 축하하는 것은 단지 창립을 축하하는 모임을 넘어서서 창립 목적이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전제를 걸고 인간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인간들이 점점 도시화되어가는 사회 구조에 더욱 매이게 되고 인간의 생명이 지구의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은 단지 한 개인을 뜻하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얘기할 때, 공동체 교회로서의 사명을 얘기하게 되고 공동체의 구원을 얘기하게 됩니다. 더욱이 교회가 신앙의 전거로 삼고 있는 성서가 곧 공동체의 얘기입니다. 구원의 주체자로서의 공동체이고 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 성서입니다. 성서의 가장 큰 주제는 물론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실체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신앙의 과제는 평화실현 곧 샬롬의 꿈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평화였습니다. 복음서는 아기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사도바울로는 오늘 에페소서 본문에서 아예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신앙의 과제 또한 평화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 2장 14-16절)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유다인과 이방인의 원수관계는 바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원수관계를 말하고 북한과 미국의 원수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둘 사이의 갈리게 했던 담을 헐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남과 북 그리고 북과 미국을 갈리게 한 담과 율법 조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국가보안법이고 한미일군사동맹이고 북중러군사동맹입니다. 이를 폐지해야 한반도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리스도뿐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던 베드로 바울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수 따름이, 작은 그리스도들에 의해 그런 희생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답은 명확합니다. 단지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의 실천적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저부터도 변명하고 있는 것이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고토규 슈스이라는 일본 사회주의자가 러일 전쟁이 한창인 1904년 3월에 한 신문에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일러 양국 정부는 각기 제국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마구 군사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인종도 지역도 국적도 다를 것 없다. 여러분과 우리는 동지요 형제요 자매다 결단코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은 적은 일본인이 아니라 실로 지금의 소위 애국주의요 군국주의다. 따라서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여러분과 우리의 공동의 적이다.’
지금 이 나라는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를 두고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습니다. 한명숙총리의 말대로 120년의 외국군의 주둔이라는 치욕적인 일을 끝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수순인지? 군대와 경찰이 논바닥에 야영을 하면서 삼중 사중의 가시철조망과 포크레인으로 다리를 끊고 흙의 장벽을 쌓아 주민들을 완전 고립시켜 놓은 상태에서 대화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땅값이 오르고 지역경제에 활성화를 가져오기에 찬성을 하고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자식과 같은 땅이 파헤쳐지는 모습을 보고 땅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하고 오늘도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라는 사람들과 원천적인 봉쇄를 하려는 공권력은 또 다시 부딪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다치고 싸우다보면 본래의 대상은 사라지고 엉뚱한 것들이 싸움의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애국주의와 군국주의가 공동의 적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
사실은 폭력시위냐? 아니면 평화적 시위냐?도 논쟁의 주제는 아닙니다. 미군기지 확장이냐? 아니냐?도 논쟁의 주제는 아닙니다. 진짜 주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입니다. 미군기지 확장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이냐? 아니냐? 50년 전의 정답이 지금도 여전히 맞는 정답이냐? 지금도 여전히 정답이라면 언제까지 정답이냐? 미군은 점점 줄고 남북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자꾸만 크게 벌어지는데 언제까지 정답으로 존재해야 하느냐? 한반도의 평화가 우리의 논쟁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고 있는가? 과연 미군기지 확장을 해서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된다면 그 평화는 무슨 평화이냐? 평화에 대한 갖가지 의견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에 의존해서 이스라엘민족의 평화를 지켜나가려는 헤롯당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야훼 하느님의 율법과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일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력투쟁만이 나아갈 길로 여겼던 열혈당원파도 있었고, 야훼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계시고 그러기에 거기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의식에만 관심하던 제사장들도 있었고, 이 땅의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다. 라고 믿고 외딴 곳에 따로 모여 살았던 소수종파인 에세네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고 예수님이 선택하신 평화의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를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얘기를 자세히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고통 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시면서 저들의 고통의 근원이 되는 병과 마귀를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저들을 깨우치셔서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나서 정작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로마 총독과 대제사장이라는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시대마다 그 강조하는 색깔이 조금씩 달리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정신 ‘평화’만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로마의 군사력에 기대여 평화를 추구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오늘 저는 예수께서 계신다면 오늘 한반도에 산재되어 있는 군사기지와 미군기지들을 보시면서 같은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시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처음 예언에서 평화의 길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2장 3-5절)
계속하여 그는 선포합니다. ‘주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그들은 옛 성터를 재건하고 오래 전에 허물어진 폐허를 다시 세우리라. 무너진 도시들을 새로 세우고 그 옛날 선조 때 헐린 집들을 신축하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부서진 대추초등학교가 다시금 새로워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4대종단의 사제들이 함께 대추리에 모여 평화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우리 모든 사제들은 무너진 대추초등학교 건물 주위에 손을 잡고 둘러서서 침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학교건물이 들어서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지금은 뿌리 채 뽑혀져 죽어가는 저 자리에 언젠가는 나무가 자라고 이런 팻말이 붙어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
이사야와 예수님의 꿈은 단지 집과 건물이 복원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야훼의 사제들이라 부르고 우리 하느님의 봉사자라 불러 주리라.’ 저는 우리 한민족이 지금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다투고 있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미군기지가 여기저기 수십군데에 이르러 이게 독립국가인지 아니면 하수국가인지 분간을 할 수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평화의 사제들과 봉사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합니다.
향린교회 창립일은 5월 17일입니다. 이는 516군사 쿠데타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린교회의 정체성과 그 부름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반평화적인 사탄의 세력과 내일의 하느님 나라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둠의 어제를 향하여 있지 않고 밝음의 내일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살아가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