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예언자

미가 4장, 1- 5 ; 에페소서 10장 10- 20

나  성 국 목사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평택에서 성서의 말씀이 거꾸로 뒤집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2:4)

이 장엄하고도 감격적인 평화선언은 우리 땅 한반도에서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농토는 콘크리트로 뒤집혀 전쟁기지가 되고 밭 갈던 땅은 군사훈련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쌀 대신 총알과 미사일이 나오고, 부서진 대추리 분교 위에는 군수창고가 들어섭니다. “생명을 경작하는 손”들은 떠나고 “죽음을 당기는 방아쇠들”이 트랙터 대신 탱크를 앞세워 들어오고 있습니다. 480만평 인근의 뭇 생명을 먹이고 입히던 생명의 땅은 사탄의 전초기지가 되어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한 열린 총구가 되었습니다. “농기구를 쳐서 총을 만들고, 농토를 빼앗아서 전쟁기지를 만들라”는 이 사탄의 기획은 누가 만들고, 누가 실행하고 있습니까?

성서의 말씀이 이토록 완벽히 뒤바뀌고 있는 현실이 달리 또 있을까? 예수님은 그의 팔복선언 가운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바라거나” 심지어는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그것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다만 평화를 바라고 기도할 뿐 그것을 위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선포하고 예언하는 말씀이 거꾸로 뒤집히고 있는데도 대다수의 교회는 침묵하고 방관할 뿐, 평화를 외치지도,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중세시대의 최고의 학자라 일컬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 ‘이노센트 4세’와 교황청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바구니들이 바티칸 시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교황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저것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시절에는 베드로 사도가 금과 은은 내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의 교회는 금과 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의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역시 “금과 은은 많고” “웅장한 성전” 또한 많으나, 베드로처럼 “일어나 걸으라” 는 능력의 말씀, 성령의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능력 있는 역사개입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할 그 어떤 통찰도, 정열도 잃어버린 채, 굳어진 체계 속에서 냉각되었거나, 자기들만 뜨거운 허무한 열기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화를 위해 일 할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해 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 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위해 일하십시오. 일하기 전에 외치십시오. 외치기 전에 누가 평화이고 누가 폭력인지, 무엇이 진정 “평화의 적”인지를 올바로 분별하십시오. 

오늘 미가서의 본문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명료한 평화의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장 전체를 통틀어 나타나는 미가의 역동적인 평화신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미 4 : 1-5까지 "평화신학"을 예언적 선언으로 선포하고 있고, 6절에서 8절까지는 그러한 예언의 성취와 더불어 이루어질 "평화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13절까지는 그러한 평화현실이 과연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미가가 선포하는 첫 번째 평화신학은 "평화란 민족 간의 분쟁이 종식되고 전쟁의 도구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 질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1.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2. 그리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되     리라.
3. 그리하여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미 4 : 3).

평화의 기초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일과 그리고 누가 옳은지를 판가름하는 정의(正義) 수립의 작업을 전제로 합니다. 힘에 의해서 평정된 현실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는 것은 정의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공정하고 공평한 관계가 아닌 평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서가 보는 평화관입니다.

지난 5월 4일과 5일은 우리 역사에 아물 수 없는 상처인 “5월의 광주”를 연상케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2천여 명의 평화지킴이들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황새울 들녘에는 붉게 먼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올 해도 농사짓자” 는 것뿐인 주민들과 평화지킴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1만 4천여 명의 전경들과 군대, 그리고 용역들이 동원되는 민주화 이래 사상 초유의 군경 합동작전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정신을 가진 정부요, 나라라면, 제 나라 군대도 아닌 외국 군대의 기지를 세워주기 위해, 제 나라 농민들의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분들에게 먼저 석고대죄를 했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못나고 힘이 없어 그 중 제일 힘없는 백성들을 희생시키노라고 국방장관 이하 관리들은 몇 번이라도 주민들을 찾아가고 설득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국방장관이, 국무총리가 주민들을 찾아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시간표대로 협의매수하고, 응하지 않으면 강제수용하고 법원에 행정대집행 명령을 발부 받았으니 법대로 하였다면 그만입니까? 하물며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촛불을 들며 지켜주었던 참여정부가 바로 그 시민, 학생들을 진압하고 연행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을 보낸단 말입니까? 이러고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헌법 제1조 2항) 고 할 수 있습니까? 그 날 2만 명의 공권력이 하려고 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농민들이 농사를 못 짓게 철조망을 치자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것도 작전이라고 군부대가 출동하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그 날 대추리 분교의 지붕 위에 올라가 끝까지 저항했던 어느 신부님이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저 미국이라는 지주를 위해 싸우는 머슴과 마름이라고, 국방부와 정부는 미국이라는 지주의 마름이 되어 자기 백성을 머슴처럼 부리고 내어 쫒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틀린 말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와 소통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2장 14절은 “그 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다” 고 했습니다. 그러데 우리는 멀쩡한 논과 밭을 철조망으로 둘러쳐 넘을 수 없는 담을 만들고, 길을 끊으며, 농수로를 파괴하는 반성경적, 반생명적 권력 앞에 서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정부의 말대로 오래전에 국가 간에 한 약속이요, 국회의 비준을 받아 이루어진 합법적인 국책사업이라는 데 동의해 주어야 하는가? “올 해도 농사짓자”는 주민들의 절규는 더 많은 토지보상을 받아보려는 일부 주민들의 생떼쓰기에 불과한가? 광화문을 밝히는 촛불을 든 시민과 노동자, 학생들의 주장은 반미와 미군철수를 노리는 일부 불순세력들의 책동인가?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인식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아니, 일부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이 악마의 발톱을 평화의 도구로 떠받들고, 그들과 한 패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국의 죽음의 예언을 평화의 약속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미필적 고의가 되어 수많은 효순이와 미순이를 낳고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을 내쫓아도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노예주의적 사고, 국가가 하는 일이면 개인은 희생해도 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 북한의 전쟁도발 위협이라는 분단 지향적, 반북 이데올로기, 바로 이런 것들이 미국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해 주어야 하고, 미군이라면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더라도 붙들어야 한다는 우상숭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먼저 이러한 우상숭배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유와 생명, 해방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외세와 국가라는 힘을 숭배하는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애굽의 그늘과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며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으로부터 도피한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돈과 그늘이 우리를 지켜주고 살려준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미국에 저당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기독교가 이런 외세 의존적 사고를 버리고 자유에로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민중의 생존권과 민족의 자주권을 누구보다 소리 높여 외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미국과 국방부의 입장이 아니라,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과 굳게 연대해야 합니다. 일부 보수신문들처럼 그들의 절규를 강도만난 자의 신음소리로 듣지 않고 보상금을 바라는 꾀병에 생떼쓰기로 듣는다면, 그는 더 이상 한국인도 신앙인도 아닙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믿는다면, 아무리 국가라도 한 사람의 생존권을 그의 땅으로부터 박탈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2006년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평화지킴이 싸움은 한국의 민주적 자유와 민족적 자주가 어느 만큼 달성되었는지를 시험하는 시험대입니다. 이 시험대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몇몇 교회와 기독단체들이 연대하여 대추리에서 부활절 평화연합예배를 드리고, 천막교회를 세우고, 돌아가면서 매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대한 평화의 물결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한 사람이 든 작은 촛불이 대추리, 도두리를 넘어 광화문을 덮고, 촛불의 바다를 이루어 서울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 누구도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 땅에 들어올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언자 미가가 보여주는 평화의 비전은 분쟁이 해결되고, 정의가 승리한 후에는 "나라들 마다"은 "자발적으로" 전쟁도구인 무기를 평화의 도구인 농기구로 바꾸고 무장해제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에 의해서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는 그런 수동적인이 아닙니다.  무기를 농기구로 바꾼다는 것은 "죽음을 꾸며내는 일 대신에 생명을 경작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폭력과 전쟁 지향적 삶을 버리고, 생명을 섬기고 돌보는 삶으로, 삶의 정열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미가 예언자의 정치군사적 평화이념은 사회경제적 차원의 평화이념으로 연결됩니다.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앉아 쉬리라” (미4 : 4)

노동자가 그 일한 바의 열매를 외부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고 만족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곧 평화사회라고 하는 천명입니다. 평화란 자기가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앉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나 미래의 불안감이 없이 일상생활을 안정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성서적 평화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가는 정신적, 사상적 자유의 평화를 말합니다. 인간이 비록 정치적, 경제적 평화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사상적 차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없으면 참 "샬롬"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미가는 5절의 말씀에서 “어느 민족이나 각각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지 않느냐, 우리도 자손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미4:5).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들의 신을 "독자적으로" 신앙하며 살 수 있는 세계, 오늘날로 말하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 수 있는 자유” 그것이 평화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소수자의 자유가 얼마나 됩니까? 소수의견의 자유가 얼마나 허용되고 있습니까?

사실 구약의 지독스런 유일신 신앙은 그 출발이 소수자의 자기 권리 주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패권화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문화를 압도하면서 주장하는 것이 야훼 유일신 신앙이 아닙니다. 모세가 출애굽하면서 파라오에게 요구했던 것은 “우리가 광야에서 하느님 야훼에게 예배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근본도 없는 떠돌이 소수자들이었고, 이 소수자들이 “자기들도”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광야로 보내달라는 것이 모세의 요구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소수자의 권리가 주변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말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형성된 것이 유일신 신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서의 야훼신앙은 고집불통의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가 자기 신앙과 자기 이데올로기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침해받지 않고, 그 정신적, 사상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힘찬 선언이자 투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평화현실을 가로막는 구체적인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에페소서가 말하는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에페소 6:12)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신앙인의 싸움이란, 영적인 것,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적 싸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영적인 것이란, 현실의 실재를 이해하는 신화적 표현이었습니다. 신약성서가 “이 세상/세계”(코스모스)를 말 할 때, 그것은 단순히 객관적인 물리적 세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 관계망을 이루는 체제, 정치적 지배체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지배적 체제로서의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발터 윙크라는 신학자는 신약성서에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코스모스”라는 말을 “지배체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본질적인 뜻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8:23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딴 세상의 존재, 즉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체제라는 말로 이해하면, 본래의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는 이 체제에 속해 있지 않다” 그는 하느님의 체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를 거부하는 것은 이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체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 정신을 무장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허리를, 가슴을 손과 발을 무장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서에서는 현실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뜻이 가장 잘 살아나는 본문이 고린도전서 1:26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체제)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체제)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체제)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지배질서 속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과 소수자들이 어리석고, 약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하느님은 이 지배질서를 무력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지배체제와 싸우기 위해서, 이 지배체제가 무기로 삼고 있는 총과 칼 대신에, 이 지배 체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폭력적인 무장을 빼앗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전망의 힘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 체제의 무장이 칼의 폭력이라면 하느님 나라의 무장은 진리와 정의와 평화입니다.  그것을 실현하게 하는 힘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개인이 하지만, 개인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외부세계와 맞붙기를 시도하기 전에 이미 내부의 싸움터에서 결정적이 승리는 먼저 이루기 위한 영적인 투쟁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투쟁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인의 싸움이란, 분쟁으로 가득 차있는, 악마적인 지배질서로 가득 차있는 세상 속에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을 악마의 체제 속으로, 사탄의 체제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하고 있는 이 현실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하늘의 투쟁이자 땅의 싸움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서 악의 영령들이 깊이 출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악마적인 지배의 영성을 벗겨내고, 평화의 영성을 통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냉혹한 현실주의 정치학자로 일컬어지는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의 역사는 무장한 폭군들에 의해, 맨손의 예언자들이 당해 온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무장한 예언자는 성공했지만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무장한 예언자의 최고의 경우는 모세이고, 비무장한 예언자의 최고의 경우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과연 예수님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만큼 무장한 폭군들에 의해 죽임당한 맨손의 예언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새로운 나라, 그가 기초한 새로운 삶의 질서와 비전은 수많은 민족들과 개인들에게, 그 어떤 무장도 이길 수 없는 사랑과 헌신과 열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러일으킨 자들은 미가서(4:6-8)에 의하면, "절름발이들"과 "흩어졌던 자들"과 "비틀거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평화를 얻고, 땅을 얻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였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주류 세계 안에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정의와 평화의 현실을 이루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 받는 자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여러분의 삶을 무장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