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모두에게

욥기 12, 12-16 ; 갈라디아 6, 1-5

최 영 선 권사

우리나라 속담에‘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강단이 얼마나 신성한 곳인지 미처 알지 못하고 올라왔습니다. 제가 어쩌다 겁 없이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냈습니다. 그 용기는 바로 여기에 함께 계신 향린 교우 여러분입니다. 오늘 이 강단에서의 말씀은 제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되면서 신약은 어느 정도 읽었지만 구약은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빚이 되어서 항상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나태함에 짓눌려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구약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신약에 비해 구약은 너무 따분하다’가 저의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5~6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컴퓨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한글 타자 연습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손놀림을 익숙하게 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선택해 치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구약을 한번 처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변해 어느새 절박함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몇 달에 걸쳐 구약을 쳤습니다.

구약을 치는 동안 구약은 저에게 폭풍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책은 전혀 없고, 오직 구약 한 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다른 책은 읽지도 않았고,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 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인간들의 파란만장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의 고귀함과 비천함이 너무 적나라하여, 때론 몸서리쳤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비현실적이었으나 오르고 싶었던 산! 가보고 싶었던 골짜기를 다녀온 듯, 돌이켜 보면 아득하고, 현기증이 납니다. 지금은 모두 지워버렸지만 A4용지 약 480매 정도였습니다.

성경 속에서 막연하게 고난의 상징이며, 고통을 몸소 겪은 대표로만 알았던 욥을 접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욥이 그토록 신실한 하느님의 사람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욥과의 만남은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에게 욥과 같은 신실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한번 찾아보고 싶다는 꿈같은 열망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고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전적으로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욥의 신앙은 너무 높고 깊고 또 성스러워서 도저히 제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이 바로희망을 잉태한다는 것을 저 나름대로 터득하고는 제 삶의 어려움이 닥쳐오면 제일 먼저 욥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제가 겪고 있는 일상의 어려움은 너무 가소로워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제 마음 속에 욥이 들어와 있다는 표적입니다.

어쩌면 욥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삶을 주관하고 있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설마 욥 만큼의 재난이 올 것이냐" 고만 생각하면 전혀 걱정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욥을 알고부터는 어떤 일도 번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저는 살고 있다고 믿으며 진실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욥은 저의 삶에 환한 등불입니다.

조금 전 교우가 읽었던 욥기 12장 12절에서 16절의 말씀을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나이와 함께 지혜가 자라고, 연륜과 함께 깨달음이 깊어가도
지혜와 힘은 결국 그에게서 나오고
경륜과 판단력도 그에게 있는 것
그가 허무시는데 누가 다시 세우며
그가 가두시는데 누가 풀어 놓겠는가?
그가 수문을 닫으시면 말라 버리고
그가 물을 쏟으시면 땅은 온통 결단 나는 것을
힘과 슬기가 그에게서 나오니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의 손 안에 있지 않은가? "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찾아와, 욥과 욥의 하느님을조롱하였을 때, 하느님의 사람일 수밖에 없는 욥의 대답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왠일인지 시이저가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눈을 부릅뜬 시이저가 부르투스를 향하여 "너 마저?" 하는 장면 말입니다. 같은 친구를 바라보는 시이저의 눈과 욥의 눈은 분명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감히 분노와 연민의 눈일 것이라고 말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만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인간들의 말장난인 우정이나 신뢰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묵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에게 지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가이없는 티끌이겠습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 꽃 피고 새 우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천국입니까?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작은 천국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욥이며,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불가사의 하지만 분명한 어떤 의미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제가 항상 즐겨 읽는 라이너 마리아 릴께의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를 읽고 두서없는 이야기를 맺을까 합니다.

“나는 신의 주위를 맴돈다. 아주 오래된 탑의 주위를 맴돈다.
수천 년 동안 나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매인지 폭풍인지
혹은 위대한 노래인지“





김 미 애 청년

우리의 마음속에는 사자와 양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성숙은 의해 이 양과 사자가 함께 뒹굴도록 해주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사자는 주체적이며 결정을 내리는 자아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두려움 많고 연약한 양도 있습니다. 양은 애정과 지원을 격려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자아입니다.

이 이중의 자아는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당신이 사자에게만 주위를 기울이며 힘을 쓰면 지쳐 쓰러져 버릴 것이고 양에게만 주위를 기울이면 다른 사람의 보살핌만 갈망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이 두 가지를 온전히 다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더십의 재능을 져버리지 않으면서 애정과 돌봄을 바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을 져버린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자아가 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편안함을 느끼며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써 이 이 세상에서의 사명과 공동체 안에서의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을 자유롭게 찾으며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수행 할 수 있는 독특한 임무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우리의 깊은 필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마음을 좀 더 잘 열수 있을 것입니다.

향린을 찾아오며 저에게는 이 이중성 중에서 특히 교회의 공동체를 양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회에서 지친마음을 위로받고 현실에서의 불안한 이 마음을 다잡아 줄 곳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교회를 방문하며 사람들이 아는 척 해주지 않으면 그 교회 사람들 차갑다 라고 생각하였으며 많은 관심을 보여주면 부담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사자의 마음도 가지고 싶었지만 사실 교회공동체에서 내가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기도 하고 괜히 나선다라는 말을 들을 것 같기도 하고 아직 하느님을 잘 모르니 시간이 좀 흐르면 그때 되면 해야지 라고 말하며 항상 도망 갈 곳을 마련해 두고는 교회에서 항상 이방인처럼, 아님 그림자처럼 그렇게 교회를 찾아 해매였으며 향린교회에서도 처음 몇 달 동안은 그렇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향린을 찾아 온 젊은이들을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온 사람인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랬기에 향린 공동체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지만 아직은 조심스럽게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다른 새 교우들도 그럴 것입니다.

향린공동체에서는 생활은 큰 결단이 필요로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회에서 일만 하며 살지 못하도록 많은 고민을 던져주시고 그 사회의 모습 속에서 고민으로만 머무르지 않으며 행동하게 하시고 가끔씩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사회를 바라보거나 하느님의 제자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뵈면 진정 청년의 모습은 나이 듦이 아니란 걸 알게 해 주시어 좋기는 하지만 그런 깨어있음에 부족한 듯한 나의 모습에 왠지 모를 질투심이 쌓이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 조심스럽게 향린공동체를 느낀 점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이중성 사자와 양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공동체에서의 관계속에서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 교회 모습 속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어느 교회보다도 개개인의 신도들에게 주체성을 인정하는 기회와 장이 많습니다. 그랬기에 항상 사회 현상에 깨어 있으며 소리 높이는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침묵하지지 않았지만 그 모습 뒤에 교회 공동체를 그저 평가하고 잣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과 사상이 비슷하다며 내 발길로 걸어온 이곳을 보며 그저 이방인처럼 겉돌며 잣대 세워놓고 평가하거나 일관성 없이 마음 속 사자와 양의 마음껏 말만하거나 아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가고 싶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아님 그저 나의 주장을 말하는 자리에 참여 한 것으로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 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곤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의 모든 일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함께 하였냐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의견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들이 수반되었는가에 공동체의 움직임이 보여 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준비하지 않아도 움직여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을 위해 어느 곳 에서는 누군가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은 얼마나 잘하는가가 중요하기 보다는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감사하며 그 일을 즐기며 하는가가 중요한듯합니다. 그랬기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서로 기도해 주며 함께 고민하고 싶지만 우린 너무 쉽게 일꾼 누가 잘 하더라 그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며 쉽게 말하는 모습을 보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그 일을 하다 지쳐 나가는 것일 테이고 어떤 교인은 자신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주저되고 염려되어 공동체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힘들다며 주저하고 있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능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할 수 있으며 함께 지지하며 갈수 있는 공동체 문화이기를 희망합니다.

그거 제가 한번 해 볼께요,..기도해 주세요... 그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서로 이런 말 많이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으면 합니다. 물론 저도 아직 일을 보면 이 일능 나에게 시키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서지만 나의 작은 다짐으로부터 향린공동체 일원으로써 활동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공동체 분들을 사랑하며 필요로 하는 일에 행동하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그것이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하였으면 하는 말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하는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짐을 져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자기 짐을 질 때 우리 모두의 짐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멍에는 가볍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 우리 공동체에서 나누어야 할 각자의 짐, 성령의 능력으로 능히 지고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