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11 너희는 행복하다 / 임보라 목사
사무엘하 21, 1-10 ; 마태오 5, 3-12

[행복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지난 화요일, 현충일 휴일에 제 남편이 지휘자로 있는 강일교회 성가대 단합대회가 있어서 함께 안면도에 다녀왔습니다. 오고 가는 차 속에서 여러 교우들이 어울려 버스에 설치되어 있는 노래반주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중 한분이 ‘눈물의 씨앗’ 이라는 노래에 율동을 곁들여 부르셨는데, 그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이별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할테요.’

오늘 여러분께, ‘행복하세요?’ 혹은 ‘행복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무엇이냐?’ ‘행복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개, ‘건강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단란하게 살기 때문에....’ 혹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라는 대답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반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돈이 없기 때문에....’‘일이 너무 많아서...’ ‘몸이 너무 아파서...’ 등등의 답이 나올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건을 따지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만족감을 느끼는 강도가 강할수록 ‘행복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런 만족감이라는 것은 무언가 성취하고자 했었던 것이 실현되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행복하다’라는 느낌은 그만큼 반감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딱 10억원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정말 10억이 생겨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감에 빠져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주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지, 금새 이 사람은 10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끼게 됩니다.

제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용돈을 줄 것을 요구 했습니다. 돈이 뭔지도 잘 몰랐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주위를 살펴보니, 용돈이란 것을 받는 아이들이 있고, 그것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을 보니, 꽤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500원씩을 주기로 했습니다. 대신 어디에 썼는지 공책에 쓰기로 약속을 했지요. 처음에는 이 500원을 받고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용돈을 받은 그날, 500원을 다 써버리고 나더니, 울상이 되어서는 양심상 또 달라지는 못하고, 언제 줄 것인지? 다음 주 월요일에는 꼭 줄 것인지? 에 대해서 몇 번 씩이나 확인을 하더군요.

굳이 행복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들지 않더라도, 이것이 사람의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항상 많은 것을 욕심내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지속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다는 거죠.


[참된 행복]

오늘 읽은 마태오 5장에는 ‘참된 행복’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갈구하는 심정으로 예수를 따라온 수많은 민중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신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루가의 내용과 비교해서 마태오는 그 내용을 확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되, 물질적 가난에서 더 나아가, 소망, 가능성 등을 갈구하는 영적인 가난, 의에 굶주려, 불의에 맞서나가는 적극적인 실천을 내포하는 굶주림 등 이 모든 말씀에는 적극적인 실천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실천의 행위를 담은 행복 선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뒤집히게 느껴질 만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 제일 인 줄 아는 이들에게, ‘그게 아니라,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깔보는 민중들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맹목적으로, 문자 그대로 복종하는 너희들이 아니라, 율법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삶 속에서 이루려고 하는,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 이 민중들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예배 후에, 다시금 우리 교우들과 또 우리의 이웃교회들과 함께 평택 대추리를 향해 갑니다. 저는 지난 5월4, 5일 이후, 낙심 가운데 있는,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에게 여러분들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로를 비롯하여, 볍씨를 뿌려놓은 논, 콩을 심어놓은 밭, 주민들이 땀과 정성을 모아 세운 대추 초등학교는 부숴져 버렸고, 대추리, 도두리에 사는 주민들이 쉽게 내왕하지 못하도록 경찰병력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분단의 담이 생기고, 밤낮없이 군인, 경찰들의 기압소리, 낮게 날아가는 정찰기 소리에 매일의 삶이 지옥 같을지 모르는 이분들에게, ‘행복’을 운운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소리로 들릴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난 몇 년 간,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파괴하는,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를 향해 생명의 땅, 평화의 땅을 지키려는 뜨거운 의지를 보여왔고, 의에 굶주려 하며, 불의에 맞서왔습니다.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 억울함, 돈 몇푼 더 받으려고 저런다는 모욕 등이 오히려 행복의 조건이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여인 그러나 행복한 여인]

반면, 오늘 읽은 사무엘하 21장에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리스바입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후궁이었으며, 사울 왕조가 몰락해 갈 즈음에는 사울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었던 아브넬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다윗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는 다윗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 남자를 거쳐야만 했던 리스바에게 있어서 또다른 불행이 덮쳐왔습니다. 자신의 아들 둘이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삼년이나 내리 흉년이 들었는데, 이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니, 그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명목 하에,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둘과 사울의 딸 메랍이 낳은 아들 다섯을 내어줌으로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했고, 죽은 시체는 무려 7달 가까이를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했었습니다.

신명기 21장에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그를 처형하고 나무에 달아놓을 경우, 이는 이미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니 나무에 단 채 밤을 보내지 말고 그날 묻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은 이들의 시체를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려 7개월을 그렇게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다윗이 내어준 7명의 사울 가문 아들들은 사실,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희생양이라기 보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싹이었기에, 한풀이를 명목으로, 사울의 후손들을 싹을 완전히 없애기기 위한 다윗을 위한 희생양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었던지, 리스바는 7개월 내도록, 상복을 바위 위에 펴놓고서는 주검을 지켰습니다. 낮에는 새가 앉지 못하게, 밤에는 들짐승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서에 리스바의 음성이 담겨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끈질기게 7개월을 버텨낸 리스바의 행동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 사람들 목숨에 대해서는 눈꼽 만치도 관심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열한 다윗과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나 그 가슴에 멍이 수도 없이 들어있는 우리 누이요, 우리 언니요, 우리 어머니인 리스바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비록 자신의 한맺힌 말이 담겨있지는 않았지만, 리스바가 보여준 행동은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악법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당시 사회는 ‘탈리오 법’이라고 해서 동태 복수, 동형 보복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도 ‘누구든지 악의로 흉계를 꾸며 이웃을 죽였을 때는 도망가다 제단을 붙잡고 있더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관행대로 기브온 사람들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다윗은 정당성을 부여하였지만, 리스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의 부당성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윗이 그제서야, 사울의 뼈와 그의 후손들의 뼈를 합장하도록 하였고, 그 후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나라를 돌보시게 되었다고 성서는 적고 있습니다만. 이는 다윗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리스바의 말없는 항거가 하늘을 움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로, 리스바는 현실적으로는 한없이 불행한 여인이었지만, 마태오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의로 가득 찬 다윗을 거울과 같이 비춤으로, 하늘을 움직여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너무 비참해서, 너무 억울해서, 행복이라는 말을 도대체 대입시킬 여지가 없는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미 하늘나라는 그러한 이들의 것입니다.


[일본 동경의 스나가와 마을]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이라는 거울에 비춰봄으로 여실히 드러나는 미국의 반평화적인 야욕과 오만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상을 초월한 군경 합동작전을 통해 자국민들을 짓밟은 이 나라 정부의 완악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뜻을 준비하면서 자료들을 살펴보다, 지금의 평택과 꼭같은 일이 벌어졌던, 일본 동경의 서부 다치가와(立川)에 있는 쇼와기념공원(昭和記念公園)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공원을 일명 ‘평화공원’이라고 부르는데요.

다치가와 미군비행장 옆에 자리한 스나가와라는 마을의 주민들도, 패전 전에는 제국군대의 기지로, 패전 후에는 미군기지에 내몰려 평온하게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미군기지 확장 때문에 농사를 짓다 쫓겨나는 기구한 팔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일본정부와 미국정부는 태평양지역 있어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비록 일본의 요구가 있을 경우 미군이 공동 대응하겠다는 것이 형식논리였지만, 실질은 미군의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에 따라 미일 정부는 주일미군의 군사력, 특히 공군력의 태평양 일대에서의 제공권 제고를 위하여 미군기지 확장을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패전 전후 몇 번이나 군대 때문에 토지를 수용 당했던 마을 주민들은 수차례에 걸쳐 기지 확장을 위한 측량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동경도가 이를 강행하자 가열 차게 항의했습니다. 항의 도중 일부 주민은 철책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일본정부는 미일안보조약에 기초한 미일행정협정에 따른 형사특별법 제2조 위반으로 주민들을 기소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동경지방재판소의 다테(伊達)판사는 1959년 3월 30일 이들에 대하여 전격적으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주일미군이 비무장평화주의를 규정한 일본헌법의 평화주의에 반하는 존재이고, 주일미군으로 인하여 무력분쟁에 휩쓸릴 가능이 높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습니다. 또 미일행정협정에 따른 형사특별법 2조의 형벌이 경범죄처벌법보다 더 무거운 것은 헌법위반이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는 참 용감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국, 일안보조약 개악논의가 한창이던 터라 긴장한 검찰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최고재판소에 비약 상고하였고, 최고재판소는 1심의 무죄선고를 파기하여 돌려보낸 결과 동경지방재판소의 다른 재판부에서는 1961년 3월27일 주민들에게 경미한 2000엔 벌금의 유죄를 내렸다고 합니다.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이후 스나가와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은 때마침 활발해져가고 있던 전국 각지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맞물려 더욱더 공감대를 확산하였고, 결국 1968년 12월19일 미공군사령부는 다치가와 시의 미군기지를 스나가와 지역으로 확장하려던 계획을 전면 중지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1977년에는 확장하려던 다치가와 시의 미군기지마저도 일본정부에 반환하게 되었고, 결국, 그 기지 예정지의 대부분이 현재의 평화공원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인권운동사랑방 발행, <인권오름> 제7호)


[그래도 너희는 복이 있다]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은 오는 6월30일까지 마을에서 나가라는 퇴거명령서를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철거를 명목으로 주민들에게 또 어떠한 폭력이 자행될런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모든 것이 기정사실화 된 것 아니냐는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는 이들에게 ‘너희는 행복하다’‘이곳은 여전히, 생명의 땅이며, 평화의 땅입니다!’라는 하늘의 음성을 우리 몸에 담아 다시금 평택으로 향합니다. 이는, 하늘의 음성을 전함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안일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와 평화를 이 땅에 이루어내기 위해 고되고 좁은 길을 걸으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월드컵 경기가 7월10일까지 한다는데, 시작도 전에 이미, 월드컵 열풍으로 휘어 감겨진 이 광기 속에서, 적어도 우리들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지를 놓치지 맙시다.
온 나라가 월드컵 얘기 말고는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말하려고도 하지 않을 때, 평화의 불빛을 밝혀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고정희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직도 평화를 위하여 싸우고 눈물짓는 사람아,
그래도 너희는 복이 있다. 해방의 땅이 너희 것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동영상] 황새울 이야기 (동영상을 볼 예정이었으나, 파일 작동이 안되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의 행복은 막연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주님의 평화를 이 땅에 꽃피우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갈 때,
안주하려고 하는 나약함을 떨치고, 모욕과 박해와 비난에 맞설 때,
우리는 비로소 참 행복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