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앙과 생태신앙


창세기 2, 1-11 ; 빌립보 2, 1-12


허 병 섭 목사(녹색대학)


이렇게 서고 보니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도 계시고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도 계시고 세상을 꿰뚫고 계신 어른도 계시니 마음이 콩당 콩당하여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향린교회는 기장교회의 전형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간증을 할까 합니다.

이 자리에 박영숙 선생이 계십니다만 안박사님께서 저에게 부탁이면서 제의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유럽에는 마더 테레사가 있고 일본에는 하천풍언이 있는데 허목사가 우리나라에서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어떨까?’ 안박사님도 한때 키엘게골에 심취하였고 실천적 삶을 모색해 보신일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스승의 제의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주민 조직 운동과 의식화 활동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명예를 얻고 존경 받게 되는 도구로 삼을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목사라는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본래 가난하게 살았던 삶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선교를 하거나 함께 살면서 현대사의 흐름에 기여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목요기도회를 처음 조직한 일, 동월 교회에서 공부방을 처음 시도한일, 지역운동의 일환으로 탁아소를 처음 시작한 일, 도시의 대안 교육으로 지역 사회학교(처음에는 빈민학교라 했습니다.)를 시도한 일 자활을 위한 생산 공동체를 조직한 일 등 많은 일을 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하나임 선교 신학에 투철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삶과 실천의 결과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와 제도를 온존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결과에 대해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체제를 기계로 보았을 때 이 기계를 운전하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회체제를 운전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나 재벌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리모콘으로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재벌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살고자 했는데 사람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는 도시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농촌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습니다.

농사를 하면서 저는 신앙이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농사하고 있는 농작물은 물론 자연의 뭍 생명체들로 부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농사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넓고 친절하고 정이 넘칩니다. 농부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마음이 편합니다. 옛날처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분노와 저항을 일삼았던 분별심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 생명의 신비에 다가갑니다. 명상과 성찰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참과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실천하고 있습니다. 대안 교육을 하려는 사람들, 귀농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개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민들과 함께 쌀 수입 반대 시위에도 참여하고 한미 FTA반대에도 참여합니다. 새만금 반대 싸움도 합니다.

농사를 하면서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시림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신과학 운동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지구라는 행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성, 태양계가 지닌 생명성, 우주가 지닌 생명성을 창조하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조각 예술가에 비유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조각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갈고 닦은 기술과 정신 혹은 혼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가 첫 작품을 만들 때 쏟는 정성과 혼, 그리고 기술은 최고의 경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작품은 빛이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며 원천입니다. 그 후 물과 육지 동물과 식물 바다의 생명 등을 만드십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십니다. 조각가의 경우 첫 작품에 쏟은 정성에 비하면 작품 활동이 거듭될수록 처음의 혼과 정성은 감소될 것이고 관성에 빠질 것이며 작품성에 대한 의지 보다는 단순한 반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반복을 절박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심정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의 창조는 지구 태양계 우주의 생명성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창조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입장에서 못된 인간을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여기실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의 생명성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암세포가 인간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폭우 폭설 돌풍 헤일 등으로 인한 재앙은 지구라는 생명체가 인간을 향한 저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기독교가 권위적이고 우월감이 강해서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자부십도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신앙 중심으로 기독교가 틀 지워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신학 공부를 할 무렵 문익환 목사님은 구약신학의 거목인 폰 라드의 구속사(구원신앙) 신앙에 도전하여 창조신학을 반증하시는 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창조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창조신앙을 새롭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생태신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신앙을 드러내는 본문으로 저는 빌립보서를 즐겨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보통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기독교 윤리 정도로 가볍게 설교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성규 교수님이 계시지지만 저는 바울 신학에서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한신대의 이준모 교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만 이 본문을 생태적으로 읽고 읽은 대로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농사를 하면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밀알 그 차체입니다. 저는 벼농사를 하면서 관찰합니다. 볍씨는 땅에 떨어져 자신의 외피를 벗어던집니다. 하나님과 같은 외피를 벗어던지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볍씨는 자신의 몸을 썩힙니다. 그래서 흙 속에 있는 수억의 미생물들에게 자기 몸을 먹이로 내어줍니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기의 몸을 먹은 미생물들이 배설을 하면 볍씨의 씨눈이 그 배설물을 먹고 뿌리가 내리고 싹이 자랍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와 예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결국 한 알의 볍씨(밀알)는 5개 혹은 7개의 이삭으로 자랍니다. 한 개의 이삭에서 최소 120개의 낱알이 달립니다. 외피를 벗고 자기 몸을 썩혀 타자의 먹이로 내어주므로 6백 개 혹은 8뱍 4십 개의 볍씨(생명)로 부활합니다. 이준모선생은 이 볍씨의 활동, 변신, 혹은 희생의 과정을 생명을 일으키는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밀알의 노동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삶이 생명을 일으키는 밀알의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생태적으로 읽히는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생태신앙과 관련하여 철학적 사유와 신학적 사유에 관한 이론과 논리가 널리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들의 책이나 글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기 보다는 농사하는 삶 자연을 꿰뚫어 보면서 진실을 찾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카토릭 잡지인 경향잡지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간구해야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아니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지구라는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을 실천하려면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삶을, 스스로 불편한 삶을, 스스로 힘든 삶을 살아야합니다.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이 자연을 망치고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면 교회의 재산을 팔아 땅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사서 생태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빌려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30년 이 후 땅은 생명력을 잃고, 점점 증가하는 기상이변으로 곡식을 빼앗아갈 것이며 급격히 춥거나 더워서 살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30년 후에 자기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에너지 패권을 장악하려합니다. 이라크에 대한 도발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식량패권을 위해서 WTO와 FTA프로그램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백 년 동안 지구를 연구한 생물학자, 기후학자 천문학자 에너지 전문가, 환경학자들이 30년 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자본의 힘과 논리를 거역하지 못하는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지구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지구라는 생명체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식과 후손은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