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파랑새>


- 평택대추리 군부대철수와 평화농사실현을 위한 기독인 연합예배 -

에스겔 37, 1-14 ; 요한 17, 21

한 상 렬 목사


이토록 숨 쉬며 살아있음이 기적이고 천년 전도 아니고 백년 후도 아닌 지금 여기 함께 만난다는 것이 신비로이 느껴집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민족의 비통한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최전선에 와서 현장예배로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역사 현장 속에서 수난 받는 주님을 사모하며 함께 하는 이 거룩한 행진에 저같이 미련한 사람을 불러주시고 세워주심에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이 땅, 평택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을 여기 계신 분들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저는 다만 저의 작디작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뜻을 사모할까 합니다. 아픔, 아픔을 말할 때 마다 저는 약방의 감초처럼 함께 나누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애기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달렸구요, 몸은 하나더래요. 이 아기는 한 사람일까요 두 사람일까요? 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머리가 둘 달렸으니 둘이라 할 수도 있고 몸뚱이가 하나이니 하나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때려보면 안다고 하죠. 한 쪽 머리통을 때려봤습니다. 아플겁니다. 아픈데 한쪽에서 헤헤거리고 있다면 둘이요, 으악~으악~.. 함께 아파한다면 하나인 것입니다. 친구의 아픔이 내 아픔인가, 이웃교회의 아픔이 내 아픔인가 북녘동포의 아픔이 남녘동포의 아픔인가, 그리고 평택 현장, 우리 대추리 주민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인가? 우리는 지난 5월 4일 현장에서 으악소리와 주민들의 피눈물, 암흑 속을 보았습니다. 나성국 목사님도 함께 하셨습니다만은 우리는 또 보았습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흘리는 피를. 못된 언론들이 폭력시위 운운을 합니다.

우리가 그랬습니까? 폭력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죠. 구조적인 폭력이 있고 저항하는 폭력이 있고 진압하는 폭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구조적인 폭력 진압하는 폭력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죽도를 들었습니다. 13,000명이 에워쌌습니다. 죽도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방어적인 것이요, 당연한 저항권의 표시요, 정당방위인 것입니다. 무자비한 진압 속에서 눈이 깨지고 머리통이 깨져서 피가 난자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어디 신경을 잘못 맞았는지 온 몸을 벌벌 떨면서 병원에 실려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광주의 아픔이, 광주의 그 아픔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광주에서 체포되어서 보안대로 끌려갔다가 광주 상무대에서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용기가 솟아 올랐지만 내가 고문을 당할 때는 비겁해졌습니다. 비겁과 용기의 갈등 속에서 제 인격은 바스라지고 죽고만 싶었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비겁해서 죽지는 못했습니다. 이 아픔 속에서 터져나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박정희가 죽고나서 민주화가 될 것 같았지만 또다시 군대, 깡패, 이 마귀들이 왜 이렇게 판을 치는가? 왜 여학생들의 유방이 잘려나가고 왜 나이드신 어르신들, 노인들이 개머리판에 맞아서 개구리 뻣듯이 돌아가시고 어린아이가 총에 맞아 죽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분단 때문이다. 분단 때문이다. 분단이 되고 나니깐, 안보 이런 것들이 이렇게 먹혀들어가는 거구나. 진정한 민주화도 통일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구나. 그 뒤에 또 알았습니다. 미국의 개입이 있다. 하여 자주민주통일이야 말로 우리 민족사적인 과제인 것을 역사를 새로 알았습니다.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5.18이야말로 우리의 분명한 소명을 이땅에 던져주고 있습니다. 저는 산자와 죽은자 앞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꼼지락 거린다고 민주화 통일이 된다고 믿었지만 먼저 가신 님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특히 이번에 이 현장에서 피튀기는 그 현장에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아직도 역사는 이렇구나. 5월 4일 밤새도록 뒤치락거리면서 새벽에 이 대추리학교 현장에 나와서 그리고 다시 이 아픔과 절망 속에서, 이 무너짐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학교는 다 무너졌지만 땅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새들은 노래합니다. 그리고 아파하는 주민들과 함께 새벽부터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 부서졌지만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면 알겠지만 어느 농민이 죽창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갑오농민전쟁의 사건. 옳거니! 이 민중의 위대한 역사, 그 누가 막을 것인가? 때때로 터지고 왜곡되고 거꾸로 가는 역사인 것 같지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또 역사의 경험 속에서 결국 민중의 역사는 승리함을 믿습니다.

평화동산에 파랑새라는 조형물이 있죠? 그 파랑새는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 동화책 아시죠, 파랑새? 제가 지난번에 유럽의 벨기에 뒤셀 평화원정대로 갔을 때 벨기에 민중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봤더니 바로 이 파랑새의 작가 메테를 링크가 벨기에 출신이더라구요. 1911년 노벨상을 받았죠. 이 파랑새, 널리 알려진 동화 이야기, 다시 새삼 보면서 다시 새겨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파랑새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추억의 나라, 과거의 나라 가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다가 이제 파랑새를 하나 얻어서 현실로 돌아왔더니 그새 검은새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미래의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엔 온통 다 파랑새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 현실로 가져왔더니 그새 빨강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과거, 미래에 진실이 있지 않고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여기에 삶이 있고 진실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우리 민족을 생각해 봤습니다. 등장하는 남매 찌르찌르와 미찌르는 바로 우리의 남북동포들입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맵니다.

이 파랑새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복, 통일이겠습니다. 통일을,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파랑새라고 따올 때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파랑새를 찾고 찾고 헤맸지만 결국 돌아와보니 집에 있었더란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주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자주할 때 바로 통일은 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존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너희들, 자유하는 자주성이야 말로 하나님 형상의 본성으로 느껴집니다. 개인도 자주할 때 진정한 힘이 있고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걸 파해서는 개인도 개인으로 설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자주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자주를 말할 때에 우리는 외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외세는 중국도 있어야 되고 일본도 있어야 되고 미국도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외세는 어디입니까? 바로 미제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대 일본, 우리 민족대 중국, 우리 민족대 미국, 그것이 올바른 구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가야 할 텐데 가장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고 마치 파랑새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짓을 이 미제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진실로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원한다면 반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명백하게 반미입니다. 반미라는 구호가 온 국민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미를 폐쇄적이고 국쇄적인 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미 지구촌입니다. 다함께 살아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 효순이 미선이 4주기 추모제를 광화문에서 했습니다. 벌써 4주기가 되었네요. 그당시 저는 백몇십만명의 서명의 그 뜻을 안고 반미 투쟁을 했습니다. 효순이 미선이 영정을 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서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지나가던 미국인들이 왠일이냐고 물어보고 그 사연을 알고 나서는 우리 정말로 잘못했다. 항의를 같이 하겠다. 그런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인들, 평화를 애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인들 많이 있습니다. 미국이 다 망하라는 항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제국주의 정책, 반미국정책의 준말이 반미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런 세계제패주의, 신자유주의 미국의 생리상 이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 결국은 미국도 망하는 짓입니다. 그럼 우리는 결단코, 결단코 막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미제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인 것을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벨기에 가서 반미를 말할 때 만인이 다 공감해 주더라구요.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미제가 소위 전략적 유연성, 표현이죠, 무슨 유연성입니까, 하여간 오히려 지금 대중국을 상대로 해서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우리말로 쓰자는 이 속에 무시무시한 전쟁의 그림자가 있는 것입니다. 반미를 고수해야합니다. 한미 FTA를 반대해야합니다. 할 과제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누구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미를 앞장서서 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파랑새를 얻어서 무얼 하겠습니까? 우리끼리 잘먹고 잘살자는 것입니까? 우리가 평화와 통일을 해서 무엇 하자는 겁니까? 간단히 세가지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전선을 세워야 합니다. 전선이 무너져 있습니다. 엄혹한 현실로 이미 대치 전선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미제와 그 수구들의 전선이 쳐져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력합니다. 단결해야 합니다. 단결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단, 결, 거꾸로 하면 결단입니다. 기필고 하나가 되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더라도 하나가 되자는 결단, 대동단결의 결단, 작은 차이를 넘어 크게 하나가 되자는 이 결단, 뜻이 있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다섯교회가 하나가 되는 이것이 씨알이 돼서 정말 예수 전선을 다시 세워야 됩니다. 명백히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투쟁해야 합니다.

두 번째, 변해야 할 대상은 역사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항상 주님 앞에 자기를 성찰하면서 자기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경제적 혁명도 이룰 수 있고 여러 가지 이룰 수 있겠지만 생활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살림살이를 되돌아보고 정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전 살을 맞 닿는 자기 변혁의 과제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우리는 에스겔서에 보면 민족 부흥을 꿈꾸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저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예, 살아납니다. 살아야만 합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할바가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해야합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뜻대로 하소서가 때론 회피와 혹은 핑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자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그럴 수 있습니다. 팔자소관으로 운명적인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주님뜻대로 하소서가 아닌 줄 압니다. 정말 온 정성을 다하여, 십자가의 군사로서의 온 힘을 다하여 전진하면서 그러면서 당신만이 아십니다, 기도로 오직 기도로 주께 나아가야 합니다. 정말 기도하는 우리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손에 성서를 한손에 신문을 들고 올바르게 역사인식을 하면서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하실까 어디로 가야 할까를 잘 알아야 하고 주님을 따라 가는 우리들로서 진정 기도하며 주님께 다 내 맡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줄로 압니다. 역사 변혁, 자기 변혁, 기도 중에 오직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원하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앞서서 수수께끼 하나를 했지요. 이 수수께끼는 알다시피 탈무드에 나오는 것인데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을 때 동족의식을 느끼라고 이걸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민족적인 답변이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 이 수수께끼를 만날 때마다 무지개를 만날 때마다 설레는 것처럼 설레었습니다. 수 십 년 간 제 일을 해나가면서 전 1995년 교회가 희년으로 선포하고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라고 했던 그날이 넘어가는 그날 밤을 세면서 다시 한번 이 수수께끼를 생각해봤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첫 번째 한 말이 안녕하십니까,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하면서 껴안았습니다. 자, 한쪽의 머리통을 때립니다. 한쪽이 아파합니다. 하나인 것이 분명하죠. 한쪽 머리통을 때려봅니다. 한쪽이 웃고 앉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둘입니까? 아닙니다. 한 몸입니다. 한쪽 머리통이 깨지면 자기도 곧 죽을 줄 모르고 웃고 앉았습니다. 결국은 한 몸입니다. 제일의 답은 같아야 한 몸이라고 한다면 두번째 답은 달라도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달라도 한 몸입니다. 바로 이런 의식이야말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기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정말 민족 부활을 이루고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어젯밤에 했던 기도, 두 가지를 통해서 생각해봅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라는 십자가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본 요한복음 17장 21-22절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 되게 하소서. 한 몸 되게 하소서.’ 성자 성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 몸 되게 하고 이웃과 한 몸이 되고 자기 자신의 한 몸이 되고 자연과의 한 몸이 되는 역사. 한 몸 되게 하소서. 우리는 이 주님의 기도를 붙들고 십자가를 달게 지고 전진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는 우리들의 파랑새는 무엇입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