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본문
출애굽기 5장 1-5절, 마태오복음 2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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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김아무개입니다. 김아무개가 당신입니까? 아니요! 김아무개는 저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가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청소년부와 새날청년회를 담당하고 있는 한문덕 전도사입니다. 저는 20대 후반,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주경야독이라는 말처럼, 각종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던 중 2002년 2월 17일, 향린교회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지난 5년간 향린에서 청소년부 담당 전도사로 섬기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사이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사후보생 수련과정 중에 있고, 앞으로 별탈이 없다면 2008년에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이번 설교의 주제를 놓고 고심하는 가운데 제 삶을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는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왜 수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목사인가?" "무엇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는가?" 이 질문은 저를 고등학교 2학년, 꿈 많던 시절로 이끌었습니다.

새벽기도와 금요철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던 저는, 어느 날 문득 "하느님이 계신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시나? 꼭 하느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느님과 단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매일 새벽과 저녁에 단 한 가지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한번만이라도 내게 나타나 보시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나를 불러라,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네가 모르는 큰 비밀을 가르쳐주리라"는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한번 정도는 응답할 것이라고 저는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가도록 매일 새벽과 저녁에 부르짖었건만, 하느님은 한 번도 제게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음성조차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꿈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꿈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여지없이 이러한 기도를 하던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제 다시는 교회도 가지 않고 하느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또 다른 한 가지 생각이 저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삶! 그 삶이 네게 더 낫단 말이냐?" 이 질문은 저를 때렸습니다. "예수의 삶이 네게 그렇게 하찮은 것이더냐?" 그 순간, 저는 새로운 결단과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잘 모르겠다. 저 하늘 먼 곳에 천국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예수의 삶! 예수가 보여준 사랑, 최소한 그것만큼은 배신하지 말자!" 종교체험이라고나 할까요? 그 때의 다짐이 저를 목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데는 각각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태신앙이라든지, 병이 나았다든지, 교회 나와서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든지 어떠한 소중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이러한 종교체험은 인생을 사는 동안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선택의 순간에 기준이 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고, 좌절과 낙담의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억과 감격은 망망대해나 끝없는 사막에서 길을 알려주는 별처럼 우리 인생의 규범이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 감격과 기억은 시들해지고, 저 멀리 고고하게 떠있는 별을 응시하던 나의 눈은 어느새 땅 아래로 내려오게 됩니다. 직장 상사에 시달리고, 애들 챙기고,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고, 먹고 사는 걱정과 염려를 하다보면, 예수에게서 발견한 고귀한 진리와 사랑과 비전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의와 그의 나라는 내 안중에서 사라지고, 현실에 대한 처세에만 골몰합니다. 오랜 세월 그러다 보면 종교 생활은 하나의 취미 생활로 전락하고, 참 구도의 길은 멀어지며, 현실 너머를 가리키며 손짓하던 여러분의 별도 사라집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goer)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주교 존 엘브리지 하인스는 설교를 시작할 때 늘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께 아무런 뜻도 없는 일들을 습관처럼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모든 신앙이 처음의 싱싱함을 잃고 시들어져 갈 때,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과 맞대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나의 삶을 꿰뚫어 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내 삶의 핸들을 틀어야 합니다. 신앙을 시들게 했던 현실의 문제를 과감하게 내려 놓고, 하느님께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요구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압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압제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억압과 속박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 나가 하느님 앞에서 축제를 여는 것(1절)과 광야로 사흘 길이나 나가서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리는 것(3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광야에 가서 예배하려면 우선적으로 파라오의 억압에서 해방되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과 억압과 비민주와 독재와 비상식과 폭력과 불평등과 같은 모든 악에서 자유로워진다고 민주와 평화와 상식과 평등과 사랑과 행복의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로부터의 자유 즉 Free from은 어딘가를 향한 자유 Free to가 없을 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방향을 잃은 자유는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의 부족한 한계를 늘 기억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부도덕한 사회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악에 참여하는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세우며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해방이 다윗이나 솔로몬 정권의 착취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남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거나, 자신의 욕망과 아집의 종이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일에 매여서 하느님을 잃어 버린 사람이 하느님 없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더욱 세상일에 매이는 결과를 나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해방과 자유는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접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근본적인 치유의 길입니다.

현실적 감각과 합리적 사유를 동원해서 계산 해보면 모세와 아론의 방문은 터무니없습니다. 전략도 없고, 전술도 없으며, 승산도 없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식민지 민중의 요구를 들을 리 없습니다. 거대 제국의 문명을 만들어준 민중과 노동자를 전부 해방하라는 늙은이의 소리는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를 찾아갑니다. 어디에서 이러한 힘이 나올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의와 공평과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을 경험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전에 자신의 힘으로 동족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모세는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고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하느님께 우리를 내어 맡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한분이지만, 또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향린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과 거대한 교회건물을 짓고,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도하는 이들의 하느님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벌 폐지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과 입시철이 되면 자식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목에 매고 100일기도를 하는 이의 하느님과도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인지요?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은 우리가 누구에게 경배해야 하고 어떤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300년 전 중동과 유럽은 알렉산더 장군에 의해 재편되고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을 당합니다. 페르시아 시민들이 식민지 백성이 되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눈을 들어 별을 관찰하며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를 이끌어줄 혜성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를 골몰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에 나오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여기서 동방은 페르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박사들”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마고스는 주로 마술사, 즉 점성가나 꿈풀이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박사들은 메대 제국의 관리로 정치종교 고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위층에 속했으며, 이러한 지위는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박사들은 종교적 기능을 하는 사람인 동시에 정치적 계급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단순히 종교적 의식처럼 보이는 행사의 목적도 실제로는 신이 내려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박사들은 신의 대리인인 위대한 왕을 도와 주는 사람, 특별히 왕이 신들과 대화하고 신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하여 제국의 풍요와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도록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적인 계시를 풀어내는 일, 즉 왕실 사람이 꾼 꿈이나 특이한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일을 했습니다. 박사들은 우주의 운행에 대한 지식을 연마하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비범한 변화에 주목하여 신의 뜻과 사물의 질서를 해석해 내는 임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주전 331년 알렉산더의 동방 정복 이후 상황이 달라집니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한 후 국가를 잃은 박사들은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이들은 바빌론, 캅파도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아라비아, 이집트 등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지만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네트워크를 가지고 알렉산더와 그를 이은 헬레니즘 왕조, 로마 제국의 힘에 대항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동방의 박사들은 서방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페르시아 의 망명정치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로마제국 각지에 흩어져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오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박사들이 보잘 것 없는 유대 한 마을의 민중의 자식을 찾아와 경배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귀족적 저항의 대표적인 세력이 유대 땅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태어난 힘없는 민중의 아기에게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러분은 캐롤도 부르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아기 예수는 고요히 말구유에 누워있고 그 주위로 예수의 부모가 앉아있습니다.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이 경배하며,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낭만적 이미지를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태의 예수 탄생이야기는 이런 낭만적이고 지극히 평온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마태공동체(교회)는 참혹한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 지역이 로마에 의해 재편되면서 지역의 갈등과 긴장은 계속 되었고, 이스라엘은 식민지의 곤궁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유대-로마 전쟁이 벌어지자,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고,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였습니다. 거대 제국에 의한 유아학살의 기억을 간직한 마태공동체는 몇 천 년 전 이집트에 의한 유아학살을 떠올리면서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마태의 예수 탄생이야기는 거대 제국의 악랄한 학살의 경험 속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거짓 평화와 거기에 빌붙어 자신의 이권을 누린 정치인들을 뒤집어 엎으려는, 애절하면서도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라고 동방박사들이 물었을 때, 헤로데 왕이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엄청난 학살 속에서도 살아남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의 감격을 주었던 모세와 같은 지도자, 아니 모세보다 더 위대한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을 기대하며 그려낸 이야기가 바로 마태의 예수 탄생이야기입니다.

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로마에 대항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태는 로마를 대항하는 메시아를 보잘 것 없는 식민지 백성의 아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로마라고 하는 거대 제국의 폭력에 대항하는 궁극적인 힘이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민중의 자식에게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이며 낯선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러한 마태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봅니다. 일개 목동에게서 왕을 보는 것, 물가에 던져진 아이에게서 지도자를 보는 것, 버려진 돌에서 집안의 주춧돌을 보는 것, 떠돌이 민중의 아기에게서 로마를 꺾을 힘을 보는 것,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에게서 새로운 대안세계의 주인을 보는 것!, 십자가의 절망에서 하느님의 희망을 보는 것! 맘몬의 세계에서 자발적 가난의 영성을 택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메시아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은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돈은 참 하느님이 아니다." "내가 메시아는 아니다"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메시아다" 할 때 그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되고 천한 민중들과 함께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입니다. 33살 뜨거운 청년의 나이에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남을 위한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인류가 이전에 겪지 못한 새로운 인류였고,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목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새로운 하느님을 만났고 보았습니다. 그 하느님은 인간위에 군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신 하느님, 인간을 위해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죽음도 피하지 않으신 하느님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났기에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그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2000년 전 예수께서 행하신 그 사건을 반복적으로 일으키십니다. 즉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살지 않습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남을 위한 존재로 살아가며,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되고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 하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나를 온전히 예수께 내어드려서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반복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걸만한 하느님은 바로 예수에게서 자신을 드러낸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저희 교회의 남자 화장실에 가보면 변기 위에 이런 글이 붙어 있습니다. "물이 나올 때까지 검은 부분에 손을 대 주세요" 물이 나오지 않으면 악취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관찰을 해보니 물을 내려도 비가 오는 날이면 여전히 악취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화장실 물을 내려도 하수도에서 잘 빠지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었습니다. 서울의 하수도 전체가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 교회 화장실 변기 하나 물을 잘 내린다고 해서 악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 혼자 남을 위한 존재가 된다고 해서 온 세상이 곧바로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 혼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모든 것이 올바르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함께 모여야만 합니다. 잘못된 하수도 전체를 고쳐야 악취가 사라지듯, 잘못된 구조 전체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한미 FTA와 평택의 미군기지 문제, 강정구 교수님과 같은 훌륭한 학자의 사상과 자유를 말살시키는 국가보안법, 평화통일의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등등 많은 문제들은 나 하나만 변해서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을 뒤집기 위해 이스라엘의 한 민중의 아기와 연대하려고 했던 페르시아의 고위층 관료처럼, 오늘 미제국주의의 패권에 맞서 우리도 또한 고통 받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연대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을 위한 삶으로 가려는 나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남은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끝없이 내려가야 합니다. 예수와 친구가 되려면 예수가 친구했던 사람과 친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의심이 드십니까? 염려가 생기십니까? 용기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이 산을 옮길 것이고, 바다를 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1879~1944)를 사셨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스님이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26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합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 시는 1919년 삼일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든 한국 민중이 좌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아픔을 절절히 느끼며 그 시대의 고뇌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보여 줍니다. 식민지의 백성이기에 갈고 심을 땅이 없습니다. 땅이 없으니 추수할 것도 없지요. 저녁거리가 없어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거지는 인격도 없고, 생명도 없으니 너 같은 놈을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주인이 말합니다. 혹시 우리가 미국의 등살에 못 이겨 우리의 동족인 북한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는지요?

식민지 백성이기에 집도 없고 민적도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라며 능욕하는 장군 앞에서 무너지는 조선 민중. 오늘 최저 생계비 70만 600원조차 받지 못하며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쏟아지는 대기업과 한국 경찰과 정부의 폭력이 이와 같지 않은지요?

윤리와 도덕과 법률은 오로지 칼과 황금, 즉 권력과 자본의 시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참 종교인이었던 만해 선생은 이런 시대에 고통 받는 조선 민중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울분을 느끼며, 울다 지쳐 쓰러집니다. 화를 낼만한 힘조차 없어지고 오로지 슬픔만이 남은 그런 찰나에 한용운은 영원한 생명, 진리이신 당신을 봅니다.

2006년 7월 2일 현재를 사시는 향린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수없이 많은 과제에 당면해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용운 스님은 시대적 아픔을 보면서 멋드러진 시적 표현으로 자신의 고민을 말합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느 날 누군가가 나무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해 주겠니?" 그러나 나무는 꽃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해 말해 주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