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혁명

창세기 1, 1- 2 : 마르코 1, 12- 15

김 진 목사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참 할말이 많습니다. 늦었지만 인도선교활동도 보고해야하고, 또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달 되었는데 그 동안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지. 최근 창립식을 가진 “씨?평화” 모임이나 지난주부터 이번 주 수요일까지 7박 8일간 “예수평화탁발순례”에 대한 느낌도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자세하게 나누고 싶은데 그러다 보면 설교시간을 거기에 다 사용해도 모자를 것 같아서 ‘하느님 말씀’ 전하면서 필요하다면 부분 분 말씀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고, 저의 선교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저의 지난 활동을 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죠? 다 알고 계시죠? 반응이 썰렁한 것을 보니 저와 저의 선교활동을 별로 사랑하지 않으시군요?

그러나 한 가지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설교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넘도록 꾸준하게 저의 선교활동을 마음과 물질로 후원해 주시고 계시는 교우님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해외선교에 무관심에 가까운 우리 교회 분위기에서 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 관심으로 후원해 주시는 교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통해 인도 씨알 아쉬람은 올 해 안에 80평 규모의 프로그램 센터(샨티바반)가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예수혁명”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마음속에 떨림과 울림으로 다가왔던 한편의 설교가 떠올랐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설교였는데요, 약 15년 전 즈음, 89년 90년이라고 생각되는데,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 부활절 채플 설교라고 기억합니다. 그 날 안 박사님이 강단에 오르자마자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앉아 있어요? 왜 옆에 무기고가 없습니까? 무기고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니요? 지금 무기를 들고 나가야할 때 아니요? 왜 이러고 있습니까, 싸워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 날 안 박사님이 우리에게 총이나 대포 등 진짜 무기를 들고 폭력으로 싸우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절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생활하는 우리들의 신앙모습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안 박사님은 당시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믿는다면 지금 죽음을 무릎 쓰고라도 나가서 생명의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아주 비장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불을 지른 설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오늘 감히 그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예수혁명’ 선동하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예수혁명! 예수혁명! 여러분 오늘 설교제목을 보는 순간 무엇이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졌습니까? ‘예수혁명’ 말하기 전에, ‘혁명’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아마도 이 단어를 보고나 듣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혁명’, ‘정치적 혁명’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것도 아주 과격하고 급작스러운 변화를 떠올려 질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혁명’은 물론 그런 혁명도 포함되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혁명’을 전하고자 합니다.

‘혁명’의 한자어가 지닌 본래 의미는 ‘천명 즉, 하늘의 명을 새롭게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표현으로 하면,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이 사회, 이 역사에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없이 태어난 존재는 아무도 없고, 뜻 없는 역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그 뜻이 희미해집니다.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불투명해지고, 그러면 내가 왜 사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명, 하느님의 뜻이 불확실해지니까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때 바로 그 하느님을 명을 새롭게 받드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혁명`입니다. 자신을 혁명하지 않고, 즉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하지 않고서는 자기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자기를 혁명해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찾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사회혁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 이 역사에 내 비취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새롭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혁명입니다. 이런 사회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먼저 끊임없는 자기혁명이 필요합니다.

이런 “혁명”의 뜻에서 보면 예수는 참 혁명가였습니다. 예수야말로 우리 인간에 부여된 그러나 감춰진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드러내는, 그래서 이 역사를 향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새롭게 하는데 온 삶을 받친 진정한 혁명가의 삶을 사셨습니다. 당시 종교의 이데올로기, 전통들, 관습들 하느님의 뜻을 가리고, 억압할 때 예수는 그것에 맞서 하늘의 뜻, 아버지의 명(命)을 새롭게 전했습니다. 인류 안에 묻어 있고 가려있던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형상’요 ‘하느님 자녀’이라는 뜻을 드러내셨고, ‘하느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는 혁명적인 주장과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때 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일으킨 혁명을 믿고, 그 혁명을 계속해서 일으키는 혁명군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평화, 하느님의 생명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일으켜서 세워서 자신을 혁명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역으로 그렇게 혁명적으로 살지 않고, 또 못하면 기독교인일지는 몰라도 예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가 말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은 혹시 갈지 몰라도,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는 살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 기독교가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해서 예수조차 참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고, 그 이름이 땅에 떨어져 있지만, 그러나 본래 예수 믿는 것, 예수신앙, 예수혁명,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 아닙니다. 죽음을, 죽임 당함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처절한 믿음이요, 삶입니다.

저는 예수와 기독교의 관계와 마치 ‘붕어와 붕어빵’ 관계라고 말하곤 합니다. 여러분 ‘붕어와 붕어빵’이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양은 비슷합니다. 현재 예수와 기독교의 실질적인 관계내용이 딱 그 정도 수준인 듯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예수가 말한바 그 모양은 대충 그려져 있는데 알맹이에 예수내용, 예수혁명이 빠져있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착각합니다. ‘이 정도 믿으면 예수 믿는 거 맞겠지, 이렇게 오래 믿었으니까 죽으면 천국은 갈 거야.’ 그렇게 믿어지나요?

우리 향린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나 될까요? 다른 교회와 달리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고 사회실천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아주 의식 있는 교회니 이 정도면 예수님의 교회겠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비판하는 보수 기독교 목사, 뉴 라이트 목사들이나 교인들을 생각하니 우리 자신은 왠지 뿌듯합니까? 만약 하느님, 우리 주님께서 평가하신다면 얼마의 점수를 받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절대평가입니다. 여러 교회 중에서 어느 정도 나은 교회라고 해서 점수를 후하게 주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분명한 예수믿음의 기준과 행동의 근거에 따른 절대평가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눈으로 볼 때, 예수의 혁명적인 삶으로 평가할 때, 초기 그리스도인의 에클레시아를 비춰볼 때 우리 향린교회 몇 점짜리 교회겠습니까? 향린교회의 지식수준은 좀 높을지 모르겠는데 신앙수준도 높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저나 여러분 개인의 성적표는 또 몇 점이나 될까요? 향린교회라는 좀 진보적인 교회 나간다고, 자신들은 저런 기독교인들과 다르다고 자위하십니까? 교회가 진보적이니까 나 또한 진보적이고 보다 예수의 정신에 가까운 삶을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를 생각해 봅시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예배, 그 예배 때 하느님을 만나고, 말씀을 만나 변화가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는 역동적인 예배입니까? 아니면 마치 신앙 강좌 듣듯이 예배에 참석하고, 콘서트를 듣는 양 찬양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일성수를 마치 고답적인 신앙인의 논리인양 생각하고 ‘밥 먹듯이’ 예배에 빠지면서 신앙을 잘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교인은 없습니까?

한번은 예수님께 우쭐해하고 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보다 의롭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비판하는 보수교회 교인보다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비판하는 것 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면 기복주의 아닌 신앙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하루에 하는 정기적인 기도는 식사기도, 밥 기도 밖에 더 있습니까? 그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다고 웃으면서 비아냥거리며 비판하는 여러분은 도대체 얼마나 성서를 읽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까? 저들은 교회주의에 빠져서 사회변화에 관심도 없고, 오직 내세구원만 부르짖는다고 비판하는 여러분은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의 평화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당위적으로 외쳐야하니까 할 수 없이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평택 미군기지화가 물 건너가겠습니까? 일주일 내내 딴 생각, 다른 삶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또 정도로 결단하고 헌신해서 이 땅에 평화가 이뤄지겠습니까? 전쟁을 일으키거나 싸우는 자들은 목숨 걸고 하는데 평화운동은 남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니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지고 상투적으로 하니 폭력문화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단 한번 기도하더라도, 단 한번 저항하며 외치더라도, 이 땅을 뒤덮은 더러운 군사주의, 폭력, 반생명 문화를 뒤집어 없겠다는 간절한 예수혁명의 가슴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목회는 ‘평신도 목회다’ ‘평신도 목회다’ 외치고 또 평신도가 설교도 하고 축도도 같이 하는데 우리 현실 삶 속에서 평신도 목회자로서의 노력이나 열매의 소리는 왜 그다지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수백 명의 향린교회 교인인 있는데 그 우리들이 역시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습니까? 헌금을 드려도 정말 마음 담아, 정성어린 마음으로 받치지 않으니 오병이어의 역사는커녕 예산에 못 미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 예수님 믿는 거, 하느님 믿는 사람들 맞습니까? 이렇게 살면서도 우리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보다 의롭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을 뼈 속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향린이 펼치고 있는 목회나 선교활동을 혹은 여러분의 신앙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고 있는지, 우리 교회가 예수의 교회인지를 되돌아보고, 속과 겉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자기혁명과 사회혁명이 하나로 통전될 때 비로소 예수혁명이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런 혁명을 일으킨 분 아닙니까? 우리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 제자, 그의 혁명 깃발을 따르는 혁명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늦기 전에 자신을 향하신 하느님의 명을 새롭게 받아내야 합니다. 자신을 혁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 또한 예수의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예수가 지녔던 믿음, 예수가 바라보았던 신관, 인간관, 세계관, 자기이해가 곧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의 눈으로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을 보기 시작할 때 개인과 사회에서 예수혁명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말씀이나 사랑의 실천에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면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도 잘못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잘못하면 예수신앙을 예수를 하나의 신앙의 대상으로만 모셔놓고 섬기고 예배하는 종교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금관의 예수’로 박제 시켜 놓고 거기에 절하고 기도하는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하나의 우상으로 놓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셨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현실, 이 역사 속에서 살아계시면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동감 넘치는 만남을 통해 예수가 일으킨 사랑의 혁명, 평화의 혁명을 이어가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가 지녔던 믿음, 즉 예수께서 믿었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사람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우리의 믿음과 신념이 되어야 하고, 예수가 지녔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지녔던 확고부동했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비로소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가졌던 자기이해, 자신확신처럼 우리 또한 자신을 확신할 때 우리 또한 예수로, 예수의 혁명군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자신이 믿었던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셨는가?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성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예수 믿음의 길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마르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기를 묘사한 것입니다만 사실은 예수의 삶을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뒤, 34절까지 함께 읽으면 예수의 믿음과 실천이 한 눈에 다 들어옵니다. 이 오늘 본문 이야기를 혁명가 예수의 삶을 집약한 것으로 보면, 우리 또한 예수의 혁명군으로, 자기혁명과 이 땅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믿음과 실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찾아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와서 그를 휘감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성령의 어떤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평화의 영의 모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물속에 푹 잠겼다가 강물 위에 물방울을 튀기며 일어납니다. 그 위에 가장 먼저 평화의 영이 임하는 모습니다. 평화의 영, 평화의 기운에 완전히 휩싸인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평화의 영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 그래서 그 존재가 온전히 평화에 젖었다는 것, 그것은 오늘 우리의 예수 평화운동에 도전을 주는 부분입니다.

우리 안의 평화 없이 어떤 평화운동도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내 존재가 평화롭지 못한데 어떻게 반(反)평화, 비(非) 평화 상황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화를 누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전하겠습니까? 왜 이 땅에 수많은 평화운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열매가 빈약합니까? 왜 기독교 평화운동에 힘이 없습니까? 왜 예수의 이름으로 평화운동을 하는데 변화가 없습니까? 그것은 예수처럼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라고 까지 말씀하신 예수의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내 자신의 마음과 몸의 평화 없이는 참 평화운동에 뛰어 들 수 없고, 그런 상태로는 평화운동의 현장에 있다 해도 그것이 곧 평화운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이미 예수의 평화가 내 안에 있음을 믿고, 평화의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임하시는 평화의 영을 보십시오. 그래서 이 땅 위에 내리는 평화의 영, 평화의 기운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혁명군,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이고 시작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세례 받음에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것은 예수 마음의 확신입니다. 예수 스스로 가졌던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 자신은 자신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 앞에서 많은 일을 행하고, 실천해서 그 결과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가진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내 겉모습과는 무관하게, 내 자신은 본래부터, 학력이나 사회적인 힘과 능력, 직업, 재산의 많고 적음 등등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사회적인 위치에 상관없이 본래적으로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존재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녀다’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낍니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어머니고, 우리 또한 그의 자녀라고 말로는 고백하면서 왜 그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습니까? 왜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또 다른 한편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휩싸인 채 그것을 욕망하십니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믿음이 아닙니다.

엊그제 뉴스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이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이 ‘우울증’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명 죽음에서 조차 경제 손실이 매년 3조에 달한다는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찌되었든 충격적인 보도입니다. 자실은 악한 영의 존재를 증명하는, 죽음의 기운이 이 땅을 덮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은 본래 어떤 생명체를 죽이는 것에 익숙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퀴 벌레, 파리나 모기 한번 죽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자그마한 벌레가 내 손가락에 죽임을 당할 때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만 징그러워 그러기도 합니다만 그 생명의 죽음에 내 생명의 움찔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펄떡이는 물고기나, 살아있는 생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모습을 여러분은 아무렇지 않은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본래 생명체는 정말 필요하지 않고서는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죽인다? 이것은 제정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두움의 영, 죽임의 영에 씌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살이 정말 안타까운 까닭은 그렇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의 생명이 죽으면 육신에 얽힌 괴로움은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은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살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살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로 우울증을 들었습니다. 현재 전국의 우울증 환자는 남성 18만 8545명, 여성 75만 8457명 등 모두 94만 7002명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왜 생깁니까? 여러분은 언제 우울하십니까?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가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가 느껴질 때 우울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울해지다가도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믿음이 생기면 그 우울함에 곧바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으세요? 예수의 평화의 혁명군으로 살고 싶으세요? 그러면 일어나 무엇을 하려 하기 전에 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다. 참 내 마음에 드는 구나. 너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란다.”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 음성을 못 듣게 만드는 수많은 판단들은 잡념이라고 치부하시고 이 세밀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일은 광야의 수련입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의 이끌림을 따라 광야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곳에서 40일간 머물면서 자신을 수련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하느님의 독생자이시니까 그의 모든 능력과 지혜와 용기, 마음의 상태 등등이 선험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그 분은 죽으실 때 까지 기도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지금 말로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수련해 가신 분이십니다. 1장 35절에 보면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도 전에 외딴 곳으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조차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광야에서 40일 동안 수련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 전, 그리고 공생애 동안에도 죽을 때 까지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 보이면서 기도하며 수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에 유혹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마귀의 유혹을 받은 적 있습니까? 마귀는 아무나 유혹하지도 않고 때론 유혹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아서들, 스스로 유혹에 빠지는데 굳이 유혹할 필요가 뭐있겠습니까? 마귀가 유혹하려면 예수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신의 전략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이 되어야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뜻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처할 수 있는 강력한 시험을 당하셨다는 것이고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는 표현은 그 가운데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과 만남 속에서 수련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인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기독교인, 개신교에 가장 약한 부분이 수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련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명상수련이 불교만의 수련인줄 아십니까? 예수님은 명상하지 않으셨을까요, 마음공부가 원불교에만 있는 수련인줄 아십니까? 가톨릭 예수마음 수련이라는 말은 들어 보셨나요? 수련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동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느님 자녀 노릇하기 위해서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기 때문에 수련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은 경기에 나가기 위해 자신의 몸 상태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냅니다. 그래야 실제로 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수련은 우리가 이 땅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몰아쳐 오는 위협들, 도전들, 구조적인 악들을 이겨내고 예수의 혁명군이 되기 위해서 건강한 영적인 몸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먼저 무턱대고 기도하려 들지 마시고,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을 보려는 수련, 자신의 ‘겉 나’ 저 깊이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보는 침묵수련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고, 믿음과 욕망을 분별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의 시험과 사탄의 유혹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지혜가 솟아나도록 마음수련을 해야 합니다. 성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수련’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서를 공부하려 들지 마시고, 공부는 하시되 궁극적으로 그 성서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영의 양식으로 받아먹는 수련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성서를 하느님 말씀이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구원의 양식,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지 않으면 그 성서는 아무 쓸모없는 책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가 환자의 병을 위해 처방전을 써 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환자는 그 의사를 신뢰하고 또 그 처방을 신뢰할 것입니다. 무슨 약 몇 그람, 몇 그람 그 처방전에 쓰인 약을 먹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환장에 그 처방전을 아무리 믿지만 실제로 그 처방전대로 약국에 가서 약을 먹지 않으면 그 처방전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구원처방입니다. 구원과 깨달음과 실천을 위한 처방전입니다. 여러분이 저나 성서가 아무리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이라고 믿어도 실제로 그 구원을 위한 처방대로 그 말씀을 먹지 않으면 이 성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반대자들, 특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판과 도전을 받았을 때 구약 성서의 말씀으로 이것을 극복하고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을 봅니다. 그들 또한 믿는 말씀인데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말씀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이셨지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의 검으로 날카롭게 벼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말씀을 전통 기독교들의 고리타분한 해석이나 반 예수적인 해석을 버리고 새롭게 해석해서 진리의 무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 무기 없이 예수혁명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수련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붙어 있는 나쁜 습관, 삶의 양식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에 구조와 내 몸에 붙은 잘못 습관은, 삶의 양식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에 박혀 있는 상처들, 잡념들, 이데올로기 등이 치유되고 변화되기 위해서 영성수련,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네 번째 예수가 가졌던 믿음 중의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선 하느님 나라의 때에 관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다른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 것입니까, 안 온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음을 믿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믿음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저나 지금 사랑과 평화가 없어 보이고, 전쟁과 폭력이 나무하는 이 세계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또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고통도 슬픔, 아픔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그런 아픔과 고통, 슬픔과 죽음 속에서조차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 없고, 죽음에 처할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과 평화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이지만 끝내 생명의 나무로 자라날 역동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名詞)가 아니라 움직임, 운동을 나타내는 동사(動詞)입니다. 여러분 그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 마음,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 사이에, 그리고 이 땅 위에 나타나고 드러나리라고 믿습니까?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런 예수의 믿음을 갖지 않는 한 예수혁명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한번 예수의 혁명을 일으켜야할 때이고, 이 세계야말로 예수혁명의 현장입니다. 이 혼돈의 시기야 말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창조의 시기이고, 이 반 평화적인 세계야 말로 예수의 평화혁명을 일으켜야할 현실입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장 1절 2절이 말씀을 마음에 떠올려 봅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창조가 시작하기 지전 세계는 아직 모양이 갖추지 않는 상태이지만, 새로운 움트임, 창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빛이 없어 어둠이 깊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습니다. 빛의 혁명을 기다리고 맞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지금 시대가 그렇습니다. 어둠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것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드러내야할 때입니다. 참 혁명의 카이로스입니다. 이 시대는 지금 천 년 전의 벌어졌던 사랑과 평화의 예수혁명을 다시 고대하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라는 외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화의 빛, 사랑의 빛이 있으라고, 외치며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가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계는 평화와 사랑을 선포하고 그 사랑과 평화를 향해 실천하는 사람들을 기다랍니다. 예수의 혁명군들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 또한 예수의 혁명가로 살아가기 위해 저의 모든 삶을 받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예수 혁명군을 키워내기 위해 ‘씨?평화’라는 모임과 조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시고, 파송했듯이 그렇게 평화의 사도들을 모으고 훈련해서 평화의 대사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세 가지 예수혁명, 평화운동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첫째가 창조적이어 야하고, 둘째가 실천적인 활동이어야 하고, 셋째가 변화를 일으키는 혁명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Creative, Active, Revolutionary 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보십시오. 그 운동은 고답적이지 않고 항상 신선한 충격을 주는 창조적인 활동이었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실천적인 활동이었고, 결과적으로 사람과 사회를 바꿔내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활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예수혁명, 우리의 실천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이 세 단어 앞 자를 모으면 CAR 즉, 자동차가 됩니다. 이 세 가지 운동원칙은 예수혁명을 일으키고 자동차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에는 방향키와 동력, 엔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엔진의 힘이 좋아도 방향이 잘못되면 곤두박질치고, 아무리 방향이 좋다고 하더라고 엔진의 힘, 휘발유가 이 없으면 차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혁명군의 차에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영성이고, 엔진은 예수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무엇을 하든지 이 예수혁명의 자동차를 기억하십시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혁명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일으켜야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예수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향하신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자기혁명이 필요함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예수의 믿음, 즉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평화의 기운으로 평화로운 존재라는 자기 확신과, 또 하느님의 아들로서, 딸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삼고 이 믿음에 기초한 끊임없는 수련과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실천해 나가는 예수혁명군들에게 현세나 내세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악한 반 평화적인 영을 물리치고, 세상을 고치는 예수혁명은 불가능합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자만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마십시오. 향린교회가 참다운 예수혁명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씁시다. 자신의 삶을 바쳐봅시다. 예수 한번 제대로 믿으며 예수혁명에 목숨 받칩시다. 나이나 성별 등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예수 혁명가로서 예수혁명을 일으킵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