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3일
향린의 개혁적 영성의 길(1)
신명기 32장 10-20절 요한복음 12장 24-26절

지난 주 교인수련회에서도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참석하시지 않은 분도 많고 또 이 강단에는 오늘이 처음이므로 저에게 2개월의 재충전의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기간에 FTA를 반대하는 원정시위단에 참가하여 워싱톤에서 삼보일보를 비롯한 여러 시위에 참가하고 미국장로교 총회에 기장을 대표하여 에큐메니칼 총대로 참석하기도 하였기에 ‘쉬러 가신 것이 아니군요.’ 라고 제게 말씀하신 분도 계십니다만, 이것 또한 제게 있어서는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는 배움의 시간들이었고 재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결혼 25주년을 맞아 동구 몇 나라와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도 매우 밀접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여정은 본래 계획했던 것을 하였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저의 향린교회에서의 앞으로의 목회를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갖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성찰이 갑작스레 생긴 것은 아닙니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보다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구리로 만들어진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던 제 얼굴을 유리 거울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임기 전반전의 평가]

이번 2개월의 안식은 향린교회에서의 저의 첫 번째 임기 6년 사역에 반을 마치고 나머지 반을 맞이하는 중간시기였습니다. 경기로 말하면 전반전을 뛰고 휴식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전반의 처음은 일종의 탐색전이었습니다. 코치로서의 저의 역할과 선수로서의 여러분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저 코치가 과연 이력서에 기재된대로 제대로 실력이 있는 코치인지를 알아보는 시간이었고 저 또한 여러분의 실력이 과연 외부에서 듣던 대로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조금 과장이 있었던 것인지를 알아내는 탐색의 시간이었습니다.

탐색이 끝난 1회전 이후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함께 하나가 되어 진짜 경기를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 바대로 세상과의 영적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라 광화문에서 시청 앞에서 대추리에서 우리는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데 전반전이 끝난 전광판에는 향린교회 0 세상 0 이라고 선명하게 점수가 나타났습니다. 해설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는 볼 점유율이나 코너킥 그리고 골 슈팅수에 있어서는 향린교회가 월등 많았지만, 문전 앞에서의 패스 부정확과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한국축구의 고질적인 모습이 재현되었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렸습니다.

저는 이제 후반전을 맞아 스코아를 내는 공격적인 경기를 해야 합니다. 이번 경기를 무승부로 마친다면 16강에 진출하지 못하기에 어찌되었든 골을 넣는 경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리백이냐 퍼백이냐 하는 수비중심의 경기 운영이 아니라 투톱 스리톱을 두어서라도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탈락위기에 몰린 일본이 한골을 먼저 넣고도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다가 브라질에 4대1로 대패하였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저는 1골이라고 넣는 공격적인 경기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승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교인수련회에서 영성수련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시작합니다. 지난주 저는 영성이란 하느님 앞에서의 깨어있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펜실베니아에 있는 기독교공동체인 부르더호프공동체에서 경험했던 충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사유재산없이 복음서의 말씀 그대로를 살아가는 3백명의 기독교 공동체가-미국 영국 호주에 흩어진 전체 숫자를 보면 3천명이 넘습니다.-일요일에 드리는 공적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이 언제이냐?는 저의 질문에 일주일 전체의 삶이 예배인데, 무슨 예배를 따로 드릴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은 제게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평화롭게 욕심 없이 자유롭게 그러나 매우 절제된 언어와 행동들을 보면서 저들은 공적 예배 한번 없지만, 언제나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깨어있음이 살아있는 진정한 영성인들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 깨달음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죽음이기에 여러분이 자신의 죽음을 어떤 한 순간이라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는 영성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육적 죽음과 그리고 영생의 부활을 항상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결코 후회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이 영성의 영역을 개인의 삶을 넘어선 교회 혹은 목회에까지 확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생의 목표와 영적 삶에 대한 목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어떤 과를 선택할지 직장에서는 어떤 분야의 일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쯤 결혼을 하고 몇 명의 아이를 낳을 것인가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람들도 있고 분명치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분명한 사람일수록 목표를 성취하는 확률이 높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돈과 명예와 권력지향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세상에서의 인생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자신의 계획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다음 주에는 무슨 약속이 있으십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곧 영적 삶에 대해 이런 목표를 물을 때, 몇 명이나 답할 수 있을까요? 3년 후에 당신의 영적인 삶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을 때에 몇 명이나 여기에 답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말하는 것은 단지 기도를 더 열심히 한다거나 성서말씀을 더 많이 읽는 그런 외면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자로서의 삶의 계획을 묻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의 삶의 계획 곧 여러분에게 부여된 여러분 자신의 각각의 목회의 계획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5년 전 영국에 이어 아까 말씀드린 부르더호프공동체의 방문을 통해서입니다. 사유재산 하나 없이, 상품 브랜드가 뭔지, TV 라디오 하나 없이 살아가면서-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쁘게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과 그런 연장선상에서 세상에서 교회를 섬기고 살아가는 워싱톤디시의 여러 세이비어 교회를 방문하면서 얻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미 한국말로 출간된 세이비어 교회라는 책에 그 교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고, 저희교회에서는 당회원과 목회운영위원들을 비롯한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은 토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끄럽게도 제가 워싱톤에 16년가량 있었지만, 바로 코앞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 교회에 대해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 책을 쓴 유성준목사와는 여러 번 소그룹 세미나도 하였습니다. 아마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저의 관심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조국의 통일운동에 관여토록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 때문에 세이비어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이후 이 책을 통해 이 교회를 알게 되었고, 지난 2년 동안 워싱톤에 갈 때마다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세 번 이 교회를 방문했고, 이 교회의 분가자매교회들 열개에서 반 이상 그들의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책 출판 이후 계속하여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교회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 한국교회가 사회복지선교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고 이 교회가 책에 의하면 사회복지선교에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경험한 바에 의하면 책에서 소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이 세이비어교회를 시작하여 지난 60년 동안 꾸준히 이끌어 오신 고든목사님이 갖고 있는 영적이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서의 말씀에 근거한 매우 진보적인 성서해석입니다. 제가 들은 세 번의 하늘뜻펴기에서 이 목사님은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물질욕망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와 세계제패를 꾀하는 제국주의적 정치에 대한 비판을 줄기차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책에는 분가선교교회들이 모교인 세이비어교회의 한 사역처럼 소개가 되어있지만 실제는 법적으로 모두 독립된 교회라는 것과 세 번째 이 교회들은 모두 평신도목회자들에 의해 운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들은 모두 세이비어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본질목회입니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거나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한국교회와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교회를 수백 번 방문을 한다하더라도 이 본질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혼란만 일으킨다고 봅니다.

두 번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을 때는 고든목사님과 별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고 저도 굳이 대화를 하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내가 3번째 이 예배에 참석하는 한국에서 온 목사임을 알자 대뜸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회가 세워진지 20년이 지나면서 소문이 나자 교인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나는 교인들의 헌신도가 떨어지면서 교회가 위기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 되려면 몇 단계의 훈련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게 보통 2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교회 앞에서 헌신서약을 해야만 정식 등록된 교인이 됩니다. 작년 11월 이 교회의 분가자매교회에서 운영하는 침묵수련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3일간의 침묵을 깨고 마지막 나눔의 시간 때에 60세에 가까운 한 백인 여자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이 세이비어 교회를 젊은 시절부터 30년 넘게 출석을 하였는데, 등록은 지난 2년 전에 했고 지금은 노숙자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30년 동안도 그냥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예배와 배움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선교사역에도 매우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 쓰겠다는 그 서약이 두려워서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 한명은 그 사역의 질로 본다면 한국교인 백 명에 가까운 헌신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자 고든목사님은 이를 성공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실패로 가는 위기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로서의 현실적 고민]

전 그 이후 두 달 동안 이 한마디가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 또한 고백컨대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늘리기 위한 목회는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 한구석에는 교인들의 출석 숫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3년 전 제가 향린교회에서 시작할 때보다 숫자가 줄어간다면 저에게는 많은 심적 부담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 가운데는 이 사실을 제게 언급하면서 목회에 대한 수정압박을 하실 분도 게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분가선교를 생각하고 또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 또한 여전히 숫자가 늘어났을 경우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이것 또한 여전히 수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외부 사람들은 끊임없이 -제 아버님을 포함해서- 향린교회에서 새로운 목회는 어떻습니까?를 물으면서 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늘었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모두가 숫자로 저의 목회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인의 숫자가 늘지 않는다고 당회로부터 사임의 압력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생계를 책임진 아빠가 봉급이 줄어드는 것만큼 제게도 교인숫자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분명히 2천년 전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한다는 하는 교회 사역을 하는 목회자에게 있어 이는 분명히 모순이자 현실입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요구와 비난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마리를 찾아다니다가 99마리의 양이 90마리가 되고 80마리가 되면 그게 무슨 목회냐고 비난을 받게 마련입니다. 교인들은 모두가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자신만을 돌보아 줄 것을 요구합니다.

목회 20년 동안 무엇이 목회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소위 말하는 다양한 제자훈련 프로그램들을 배우고 때로는 실천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실상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교회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교인들 또한 본질보다는 수에 관심을 하면서 수가 많아지면 본질이 바르기 때문이라고 믿고 만족합니다. 평신도목회를 주창하면서 평신도를 목회자의 차원으로 세워보려고 하지만, 교인들은 이론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헌신의 범위를 미리 계산하고 있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결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이비어교회 책을 다시금 읽어보았습니다.

[많은 숫자는 거의 필연적으로 비인격화와 제도주의로 향하고 헌신을 약화시킵니다.]

물론 여기서 많은 숫자라고 할 때 얼마부터가 많은 숫자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향린교회는 500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이비어 교회는 150명을 넘어 본적이 없고, 주일 예배도 6,70여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십여 개의 분가자매교회들을 가면 10명에서 15명 단위로 예배를 드립니다. 거기에 설교가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수가 모이는 예배를 작게는 15년 길게는 30년을 해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작다고 큰일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작은 것들이 뭉칠 때에 더 큰일들을 합니다. 물론 여기서 큰일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크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파트 평수를 얘기하듯이 크다 작다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인지. 겨자씨의 비유 혹은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아파트 평수를 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은 큰 사람이야 혹은 그 사람은 작아. 라고 말할 때에는 분명히 보이는 신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든목사님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십시오. [내적인 영성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고도로 헌신되고 훈련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큰 규모는 실제로 효과를 반감시키며, 이것은 실로 반문화적이어서 깊이를 가지고 문화로의 중독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세이비어 교회는 숫자를 통해서 오는 힘의 유혹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애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을 따르는 추종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최소한의 훈련을 하고서도 마치 고난도의 훈련을 마친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향린교회가 하는 일이 희귀하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가 지시하는 최소한의 일을 감당하고서도 마치 고난도 곧 성서가 요구하는 최고의 경지를 마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이 얘기는 우리 향린교인들이 유심히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외부인사들의 쓸데없는 칭찬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실은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한 것 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행하고 나서 우리는 다른 교회가 하지 못한 것을 하였다고 하는 자만감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다른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거나 혹은 그들과 하느님 사이의 문제도 두고 우리 교회가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만 고민하고 토론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5년 전 처음 향린교회에서 하늘뜻을 펼치면서 향린교회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진짜로 오해하면 곤란하지요. 우리가 칭찬에 현혹되면 그때부터 겉잡을 수 없습니다.

현실과 본질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향린교회가 이 시대에 참으로 귀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저 앞에 붙여놓은 현수막의 글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고 우리는 이것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거기에 만족하고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고 이는 여러 교우들도 함께 느끼는 일입니다. 이전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향린교회를 나오신 분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어 그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출석하시는 교인들은 예전 그때의 긴장을 생각하고 나옵니다. 그때 그 얘기를 자주하고 그때 그 사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만 교제합니다. 님은 이미 떠났는데, 술잔을 기울리며 살아가는 어떤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핍박과 압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압력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걸 못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다 관심하는 것은 오랫동안 출석하시는 기존의 교인들이 아닌 향린교회의 옛 명성을 찾아 제 발로 들어와 등록을 한 새 교우들이자 대체로 젊은 분들입니다. 이전에 교회를 다니면서 실망을 하고 새로운 교회를 찾아오신 분들이거나 사회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활동을 하면서 신앙의 필요를 느끼거나 혹은 함께 동참할 동지를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분들이 정식으로 등록을 한분만도 일년이면 50명이 넘고 함께 살자고 살짝 소매를 끌어주었으면 실제는 백 명도 넘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 가운데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나갔고 또 떠나가고 있습니다. 다음주에도 이십여 명이 넘는 분들이 새로 등록을 하지만, 이분들이 얼마큼이나 버텨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전반전을 마치면서 후반전 전략을 짜는데, 같은 방식으로는 승부를 낼 수가 없습니다. 선수기용이나 전략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뭔가 2%가 부족합니다. 파이팅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팀웍이 새롭게 구성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왕년에 축구선수도 좀 했던 축구광입니다. 이번에 LA에서 함께 스위스전을 보았습니다. 매우 아쉬워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설기현이를 빼고 박주영이를 넌게 잘못이다 처음부터 경험이 많은 설기현이를 등장시켰어야 했다. 아드보카드가 국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런 모양이다. 나중에 패한 후에 그 책임을 면하려고 그런 것 같다.’ 후에 보니까 신문에 같은 기사도 나오더군요.

하여간 사람들의 입김에 좌우되지 않는 본질에 입각한 목회를 해야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후반전을 뛰어야 하는 선수들에게 어떤 전략을 제시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질을 추구하는 목회]

이제부터 드리는 얘기가 좀 충격적인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실은 어제 저녁에 하늘뜻펴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인쇄를 하고자 컴퓨터를 켰는데, 또 고장이 났습니다. 방집사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하드디스크가 고장이 난 것 같은데 파일복구는 힘든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컴퓨터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지가 20년이 되었고 지난주에도 매일 사용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꼭 토요일 저녁에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너무 황당해서 그냥 잤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얘기를 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가? 그러려면 진작에 말씀해야지 막판에 하실 것은 무엇인가? 난 이것 밖에 준비한게 없으니 이대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후반전에 내세우는 목회의 전략은 교인들을 훈련을 시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계속 머물도록 붙잡아서 향린교회의 귀신들이 되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공동체 교회를 만들어서 스스로의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지금 원칙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를 해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자연의 생명원리]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자연이 갖는 하나의 생존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자라면 그 새끼는 부모와 집을 떠나 또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생물의 자연 원칙이자 생명의 보존 원리입니다.

오늘 신명기서의 본문 말씀을 보면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무슨 말씀입니까? 독수리는 그 둥지를 매우 높은 절벽 끝이나 높은 나무 끝에다 만듭니다. 다른 동물들이 접근이 쉽지 않게 하고 자신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절벽 끝에 매달린 둥지를 흔듭니다. 왜요? 그 안에 있는 새끼들이 굴러 떨어지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공중에 굴러 떨어진 새끼들은 죽지 않기 위해 파닥파닥거립니다. 그러다가 땅에 부딪히게 되면 날개로 받아 올리고 또 떨어뜨립니다. 그런 훈련을 얼마쯤 하고 나면 나는 것에 재미를 붙인 이 새끼는 자기의 길을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자연생명의 법칙이자 생존의 전략입니다.

강한 동물일수록 훈련은 더욱 강합니다. 호랑이는 언덕에서 새끼들을 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잡아먹히는 약한 동물들은 함께 살아가면서 도망다니는 요령만 터득합니다. 전 향린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그리고 투쟁을 하면서 강한 동물의 생존전략을 좇아갈 것인지 아니면 약한 동물의 생존전략을 좇아갈 것인지를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소문과 같이 강하다면 당연히 독립의 전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물론 종교구원사적으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고 또는 사회정치적으로는 로마의 권력과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 돌아가셨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목회사역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계속 머물러 있는 한 제자들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떠나라고 해도 떠나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보면서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지면 경찰에 행방불명 신고를 하고 계속 자기를 찾아 다닐테니까 아예 보는데서 죽는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날 것을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비유로 말했지만, 이제부터는 명백히 말하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따로 아버지께 구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의 독립된 신앙의 존재로 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 제자들이 답변하기를 ‘지금은 주님께서 조금도 비유를 쓰지 않으시고 정말 명백하게 말씀하시니 따로 여쭈어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제야 믿느냐?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무슨 의미에서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분이 어떻게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건 제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어가는 제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미국에 가서 50대 말에 파산신고를 하여 한 5년동안 수고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셨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이지만 집도 차도 다 빼앗겼으니 인생의 실패자이십니다. 대형교회의 장로님이셨으니까 충격이 보통 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이 80세를 넘겨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80이 넘은 노인에게는 별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삶이 자신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 세상을 이겼다고 고백하십니다.

향린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고저의 흐름마냥 다 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 혹은 제일 큰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역사의 시점에서 두고 한말이지 그것이 결코 영원히 지속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영원히 승리하는 길을 말씀하시고 그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떠날 계획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떠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목회적 사명을 갖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떠남은 혼자의 떠남이 아닌 적어도 10여명이 함께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이미 향린교회에서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오신 어르신들에게 떠나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함께 살아가시면서 자신의 생을 정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곳에 남아 계시면서 이곳을 찾아온 새로운 젊은이들에게 신앙의 교훈과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전달하기 위해서도 여러분은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있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교회에 거하는 존립목적 자신의 목회사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새로 온 젊은이들을 만나면 언제 떠날 것인지를 묻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나의 뒷바라지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나가 살라고 자식들에게 얘기하듯이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하시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단지 개인의 헌신적인 삶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전체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혀 죽어서 많은 작은 생명체로 태어나는 꿈을 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걷고 뛰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가 수많은 향린교회들이 이 땅을 휘젓고 다니는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자신만의 목회를 구상하십시오]

독립된 존재로 살아갈 능력이 있다고 믿는 교인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계획을 세우세요. 3년을 머물든지 아니면 5년을 머물든지 10년을 머물든지 자신의 영적 계획서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을 만나면 우리 한번 나가서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꼬득이세요. 장로님들에게도 부축이세요. 우리 나가서 교회 한번 하자구요. 그래서 신앙의 동지를 만드세요. 적만 올려놓고 어쩌다 한번씩 나오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이제부터 좀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때는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내일 회개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하라.’ 가까웠다는 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현재완료의 시제입니다. 이미 온 것입니다. 다만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미 온 것입니다. 이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결론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좇아 12명쯤이 모이셔서 실패해도 좋으니 자신들만의 목회와 교회를 시작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아니더라도 교회를 한 5년 다니셨으면 교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기도하는지에 대해서 배울 만큼 배웠습니다. 무식한 어부들도 예수님으로부터 3년 이상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목회도 구경만 하지 말고 실천하면서 배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어떻게 사는 것을 배워서 사는 사람 있습니까? 결혼할 때 부부간에 사는 방법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것 아닙니까? 결혼식 저녁에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아이고 저 놈들이 잘살아갈까?’ 하고 염려하지만 다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라고 목회를 처음부터 배웠겠습니까? 이론은 배웠지만 실제는 다 현장에 가서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처음 이 교회를 시작하셨던 12분 중의 한분이신 홍창의장로님이 곗십니다.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홍장로님 교회가 뭔지 목회가 뭔지 다 배우고 출발하셨습니까?’ ‘홍장로님 그때 12분 중에 신학교를 나오신 분이 있었습니까?’ 보세요. 한분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 23년 동안 향린교회는 목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정에 배움이 있고 훈련이 있고 진정성이 있으니까 성령께서 인도하시어 오늘까지 온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온실에만 자라왔고 너무 우리 안에만 갇혀 살다 보니까 야생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야생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갇혀서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은 무슨 음식이 나오나 하면 밥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고기가 나오면 아이 좋아라! 하고 기뻐합니다.

다음 주에 오늘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한번 심각하게 고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렇게 한번 한번밖에 없는 삶에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시도하고 싶은 분들을 찾고 그분들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기도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에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