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30일
향린의 개혁적 영성의 길(2)
민수기 13장 25-33절 에페소 2장 15-23절


전 지난 주 하늘뜻펴기에서 여러분들에게 가능하면 향린교회를 떠나서 한번 살아볼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제가 모든 분들의 반응을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한 장로님은 도전을 주셔서 고맙다는 분도 계셨고, 어떤 청년은 난 그래도 향린의 물귀신이 되겠습니다. 하는 분도 계셨고, 어떤 분은 자신은 본래 15년 전 향린교회에 등록할 당시는 5년만 있다가 본 교회로 돌아가고자 했다가 그냥 눌러앉고 말았는데,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얘기를 하신 분도 계십니다. 방문을 오셨던 어떤 분은 막혔던 곳이 뻥 뚫렸다는 얘기를 하신 분도 계십니다. 아마도 현재 다니는 교회목사님께서 지나치게 전도나 교회성장을 강조하셔서 진절머리가 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이미 아마 언제나 그렇듯이 지난 주 하늘뜻펴기 내용을 다 잊어버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향린교회 나오는 것만도 버거운데, 무슨 교회를 한다는 말인가? 목사님이 한 두달 쉬었다 오시더니 약간 도셨구나. 아니 지금 세상에 신학을 전공한 목사들도 교회가 안돼서 얼마나 힘들어하는데 하시면서 그냥 한쪽 귀로 흘려보내신 분들이 대다수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으니 오늘도 같은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또 하겠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마찬가지이구요.


[정의로운 기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번 주 한겨레신문 한쪽 구석에 선임기자라는 분이 이런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정의로운 기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글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시작하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구복의 말씀을 쭉 써놓고는 이렇게 글을 이어갔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살아있는 전율로 다가오던 간난의 시대가 있었다. 갇힌 몸이지만 오히려 환한 축복처럼, 엄숙한 예언처럼 다가왔던 약속의 말씀, 이익을 돌보지 않고 열에 들뜬 듯 죽음조차 겁내지 않고 정의를 향해 돌진하던 시대가 있었다. 눈멀고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기독교는 희망의 등대였다. 민심이 구름처럼 몰렸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기독교가 뒷걸음질치고 있다. 목마름과 굶주림이 사라지고 목소리는 더 커졌는지 모르지만 마음이 가난한자들에겐 들리지 않고 애통해하는 자는 더이상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신도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던 그 용감하고 정의롭고 성결했던 이 땅의 기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한승동 18.0 17쪽 2006. 7.26)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교회가 잘못가고 있다는 반증으로 신도가 줄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면입니다. 그렇다면 신도가 늘면 교회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인가? 사실 교회가 잘 가고 못가고 하는 것과 교인이 늘고 줄고 하는 것과 직접적인 함수관계는 없습니다. 개인의 삶으로 바꿔 말하면 돈 많이 번다고 그 사람이 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돈 좀 못 번다고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과 교회는 서로 어긋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 곧 세상은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고, 산상수훈 말씀 그대로 하느님 앞에서의 의인은 이 땅에서 핍박받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 숫자와 진리의 길 사이에 함수관계가 굳이 있다면 그건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간 이 기자가 지적한대로 오늘 이 시대에 ‘정의로운 기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같은 신문 두 장을 더 넘기면 기독교방송의 권혁률씨가 쓴 장문의 시사성 글도 나옵니다. 제목은 ‘위기의 한국교회, 보수로 우향우.’ 같은 기조로 예전의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에 앞장섰던 교회들이 요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목요기도회가 시청 앞 구국기도회로 대체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통계청의 발표를 인용하면서 기독인 숫자가 줄었음을 그 반증으로 또 얘기합니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불교 신자는 3.9% 천주교는 무려 74.4%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는 1.6%가 줄었다는 것이고, 이 줄어든 1.6%를 수로 보니 14만 4천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요한묵시록 7장에 나오는 구원받은 숫자와 같습니다. 결국 그렇다면 줄어든 숫자 곧 개신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실제는 구원받은 무리를 말하는 것 아니냐?는 매우 기이한 묵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적 감소에 대해 근본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참여와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영혼구원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공격하고 진보중도 진영에서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며 세상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감소 원인을 현 사회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의 확산 때문인데,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원인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담임목사직 세습과 교회재정의 사적남용, 끊이지 않는 성추행과 간통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신문기사를 장식하고 인터넷 공간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외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민주화,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교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민주화 이후 전통적인 목회로 돌아간 분이 많고 정당정치에 뛰어든 분도 계시고 사회적 연대기구나 시민운동으로 전향하신 분도 계시고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장애인 등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회에 투신하신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나 평택미군기지문제나 FTA에 교회가 직접 반대 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밖에서 보는 향린교회의 위상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향린교회가 커졌다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다른 진보적 교회나 기독교단체들의 활동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3주전에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런목사가 한국을 방문해 대형집회를 가졌습니다. 상암동 경기장에 모인 10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워런목사님은 이제는 한국교회가 에이즈 퇴치같은 전 지구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모든 경비는 자신이 부담하고 이번에 받는 사례비나 헌금의 전부는 아프리카 에이즈퇴치를 위해 쓰겠다고 말하면서 나눔과 헌금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10만명이 드린 일인당 헌금액수는 5천원이었습니다. 5천원이라면 한 끼 점심식사인 셈입니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한 끼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관은 다음날에 모인 목회자 세미나였습니다. 만 명이 모여 세미나를 듣고 이때도 같은 목적으로 헌금을 했는데, 이때 목사 일인당 헌금액수는 2만원... 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의 십일조인 2천원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었어도 5천원을 냈으면 그건 5천원 짜리 설교를 들은 셈이고 아무리 훌륭한 세미나를 들었어도 그가 2천원을 냈다면 그는 2천원짜리 세미나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어떤 평신도가 비꼬기를 아마 릭 워렌목사가 한국교회의 현 수준과 미래를 파악했을 것이라고...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서울의 즐비한 교회들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매우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한마디를 제가 덧붙인다면 교계신문을 보면 이 릭 워렌목사가 미국에서 영향력이 1,2위가 되는 목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20년 너머 살아 미국교회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고 이 교회도 두 번이나 가보아 어떤 교회인지 잘 알지만 미국교회 영향력 1,2위라? 전혀 이해가 되기 않습니다. 미국교인들 가운데 얼마나 이 분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도대체 자신이 없습니다. 이런 과대평가는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얼빠진 대형교회 목사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릭 워렌목사가 부시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하다는 이유로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 정치에 있어 매우 깨끗한 척 하는 한국보수교회가 실상은 가장 세상 정치적인 집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시청 앞에서 대형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에서 이미 보여준 일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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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남한 교회의 전체적인 상황을 직시하면서 이제는 비판이 아닌 대안을 내어야 할 때라고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향린교회가 상대하는 적은 우리와 생각을 달리하는 보수교회가 아니라 보수교회를 뒤에서 교묘히 조정하는 세상적인 세력 곧 클수록 옳고 좋다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약육강식의 경쟁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안일과 쾌락으로 포장한 개인주의에 물든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성서적인지 조차도 분간 못하는 남한의 다수 교회를 향해 적당한 비판이나 대안으로는 중병에 걸린 한국교회를 되살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민중목회 그리고 제자들에 의한 초대교회의 본질적인 하느님 나라 공동체 운동을 다시금 시작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봅니다.

[남한사회의 교육의 실상과 대안]


제가 주장하는 대안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한국사회의 또 다른 중병인 교육문제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현재 기득의 선점을 장악한 강남의 부유계층을 제외하고 95%의 국민들이 남한의 교육 곧 사교육중심의 교육구조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택시 운전사가 자기는 130만원쯤 버는데 유치원과 초등학교 2학년인 자녀들을 위해 사교육비로 60만원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다른 가정의 예를 들면서 한 두군데의 학원을 더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만 가면 아내가 들볶아 일할 맛도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사교육으로 인해 남한의 많은 가정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갈등을 유발하고 또 자녀들을 모두 학원의 경쟁사회로 내몰아 그들의 영적 인격성장을 해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뛰어 놀면서 창의력을 키워야 할 시기에 학원으로 내몰아 실상은 아이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남한 사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모두가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강팍한 식민지 지배와 남북의 동족상쟁 그리고 군사독재정권과 미국의 제2의 식민지지배정책으로 인한 북한사탄화로 인해 우리의 감성은 죽은지 이미 오래이고 이로 인해 이성마저 희미해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력을 상실했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의 아버님이신 문재린목사님과 김신묵사모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세번 네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그분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면서 그래 어찌 미치지 않고서야 이 시대를 견뎌올 수 있었을 것인가? 미치지 않는 놈이 미친놈이지.’ 한숨 섞인 넋두리를 해봅니다.

그러나 2주 전 한겨레에서 <아이들은 자연이다-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란 책에 대한 서평의 글을 읽으면서 대안적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책은 도시에 살던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무주 산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써내려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자연 속에서 공부해가는 모습과 이런 과정에서 부모로서 느끼는 고민과 생각들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특히 아이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자기 삶에 대하여 고민하며 지내는 모습은 입시 입주의 경쟁에서 지쳐가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에게 현재와 같은 판박이형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 아닌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큰 딸 팽이 (18살), 아들 상상이 (12살)가 무주 산골에서 노는 듯 공부하여 일하고 행복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은 요즘 부모들이 생각하는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얻고 남들 보기에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기회를 주는 게 부모로서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한겨레 18.0 19쪽 2006년 7월 14일)

지금 이 가정이 선택한 길은 일종의 혁명적인 길입니다. 남들이 가는 넓은 길을 두고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학교는 선생이 있고 그리고 그 선생이 가르치고 지시하는 길을 좇아가는 길입니다. 이 길에는 한 과정을 마칠 때마다 졸업장이 나오고 그 다음 단계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세상이 당연시 여기는 이런 과정 자체를 모두 무시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없습니다. 물론 이 과정을 부모가 대신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교과서는 자연입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현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두부부가 뼈빠지게 일해서 다 사교육비에 투자하면 되는 것이고,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교육체재는 몇 사람만 살아남는 소수를 위한 체재입니다. 모두가 함께 성공하는 교육체재는 없는 것인가? 우리가 이 가정처럼 결단력 있게 행동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가정이 선택한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교회현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현재 성공하는 교회 혹은 성공하는 목회에 개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개념은 무엇입니까? 목사가 진두지휘하는 교회에 나와 목사가 해석하는 성경의 진리를 열심히 듣고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실천이라는 것도 대부분 교회 건물 안에 갇힌 실천입니다. 새벽기도회로 철야기도회로 일하는 시간 외에 시간은 다 목사에 의해 좌우됩니다. 왜 그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그렇게 교회가 해왔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드려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생이 정규학교에 가지 않고 자연의 학교에서 배우고 자라듯이 교인이 그렇게 자라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현재 교육이 지향하는 판박이형 인재 양성을 벗어나 학생 한명 한명이 갖는 그 나름의 특징을 살려내는 그런 교육 그런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일까? 요즘 미국에도 home school이 유행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미국에 보내기 위해 애를 쓰지만 미국 사람들은 오히려 미국학교제도에 회의를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까운 선배목사의 딸이 자녀가 둘인데, 학교에 적응이 안 됩니다. 딸아이는 너무 똑똑해서 안 되고 아들아이는 감성적으로 안 됩니다. 담임선생님과 계속 언쟁을 하다가 자식들에게 맞는 개별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예 집에서 가르칩니다.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물론 이것도 혼자서만 하지 않고 몇 명의 가정들이 함께 그룹이 지어 있고 여기도 일종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목회도 특성에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에게 있는 목회적 특성을 잘 개발할 수 있는 길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한 릭워렌목사님의 교회는 바로 이런 특징적인 소그룹 수백개가 있습니다. 전 이를 교회내의 소그룹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예 세상 속의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고 향린교인들은 이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엘지텔레콤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김영수씨의 큰 딸이 어느 날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나는 경쟁에서 남을 이기기 위해 공부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교회는 경쟁시스템 속에 있어 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의 교회와는 달리 큰 교회가 되기 위한 경쟁시스템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여기 와서 3년을 지나는 동안 교인이 반으로 줄고 헌금은 반의 반으로 줄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보다 큰 교회가 되기 위한 몸부림을 쳐오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민족의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참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 힘없는 민중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향린목회의 본질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안에 그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하는 성장논리가 숨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일정정도 이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학교 시스템, 성적표를 받고 졸업장을 받고 그리고 행복해 하는 그런 구조가 아닌 자연 속에서 함께 뛰고 배우고 살아가는 새로운 대안학교 홈스쿨 모델이 생겨나듯이 교회가 그런 길을 추구하는 대안적 목회의 길은 없을까? 정말 여러분이 하고 싶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돕는 그런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여러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 안에 갇힌 독수리가 되어 그냥 던져 주는 먹이만을 먹는 현재의 교회구조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시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불가능한 일 또한 아닙니다.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한달 전 펜실베니아 부르더호프공동체에 머물 때에 주일 아침 식사에 한 부부가 저희를 초대했습니다. 원래 미국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했다고 해서 별다르게 부산을 떨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삶은 모든 것이 간소하기 때문에 초대받았다고 해서 별 다른 음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평소에 먹는 그대로입니다. 토스트와 잼 커피 달걀이 전부입니다. 나이는 저희보다 약간 위였습니다. 자신들이 이곳을 선택하게 된 동기를 말합니다. 본래 가톨릭교인들이었고, 둘 다 대학을 나왔고 그런대로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어 뉴욕 롱아일랜드라는 곳에 좋은 집도 있었고 좋은 차도 있었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가톨릭에도 신앙부흥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일까를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서로서로가 경쟁에서 이겨나야 하는 사회적 구조, TV에 새 물건이 나오면 이를 사야 하는 자본주의적 구조. 주말이면 잔디를 깎고 집을 관리하고 여름에 한차례 가족 휴가를 다녀오고 자녀들을 위해 좋은 학군에 살아야 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정말 행복일까?를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진정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공동체생활을 하겠다는 꿈을 안고 모든 재산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빚 청산을 하고 나니까-미국은 집도 차도 다 월부로 삽니다.- 손에 불과 당시로 말하면 수백만원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곤 뜻을 함께 하는 서너가정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2년 남짓 하였지만 계속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나서 부르더호프 공동체에 와서 일년을 살아본 후에 그 후 결단을 하고 이곳에 계속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안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그가 만들어내는 화폐의 가치로 평가받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사회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결론으로 말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목회는 목사가 주도합니다. 여러 해 신학을 배우고 성서를 연구한 목사가 목회는 이런 것이다.라고 얘기하면 교인들은 이를 좇아갑니다. 전 이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고 이 길이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길과 반드시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얻고 남들 보기에 번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기회를 주는 게 부모로서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이듯이 저도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담임목사로서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신앙생활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하신다면 그 근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느님 나라 운동 본질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만족할만한 길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고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길을 찾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목회를 위해 온 것입니다. 교회목회를 위해 여러분을 이용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세상 안에서 한명의 제자로 한명의 사도로 힘차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만물의 완성으로서의 교회]


지금은 실험적 교회 실험적인 목회가 필요할 때입니다. 제가 실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이렇게 반문하실 분도 게실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인생이 향린교회를 위한 목회 실험용입니까?’ 아니 그러면 제가 묻지요? ‘향린교회가 여러분 인생의 실험용입니까? 마음 안 맞으면 바꿔치우는 실험용입니까?’ 어차피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은 없는 법이고 한번을 산다면 누구나 실험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인간은 실험적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인생이 실험이라면 실험다운 실험을 해보시자는 말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밑져도 본전이라는 당당한 심정으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실험적 교회, 실험적 목회를 한번 시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실패하면 어떡하느냐구요? 605번의 실험에서 실패하고 606번째 실험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부쳐진 항생제 치료약도 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계속되는 실험에서 실패할 때마다 좌절하지는 않았습니까? 실패라니요?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배웠을 따름이지 한번도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습니다. 한가지 발명을 위해 수백번의 다른 실험을 해야 하는데, 만약 그때마다 실패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좌절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패는 제가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실패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수비 위주의 목회를 하여 무승부로 끝나기 보다는 한골이라도 넣는 공격적인 목회를 하여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4골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그냥 그대로 계속 살다가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전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다 지치면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실험적으로 한 1년을 해보시던지 아니면 3년을 해보시던지 해보세요. 전 이 안에 한 세 번쯤 나갔다가 실패를 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로 해보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바울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놀라운 잠재력 곧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모세가 열두명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는 그 길은 불과 사흘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거기를 들어가기 위해 40년이 걸렸습니다. 왜 사흘이면 갈수 있었던 길을 40년이나 걸려 들어가야만 했습니까? 새로운 도전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고 그들은 거인이라고 한 말에 모두 사로잡혔습니다. 실상은 보지도 않고 남들이 하는 말에 모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에 붙잡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곳이니 지금이라도 당장 올라가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류시화씨의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주택사정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었더니 7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고 있지 않으면 20퍼센트는 길에서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집 없이 방랑하는 한 사두를 만나 그 기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물론 그 신문기사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엔 95퍼센트를 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있다. 집과 사랑하는 이,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는 그대도 잘 알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좋은 집을 갖고 있다 해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가 말하는 ‘사랑하는 이’란 다름 아닌 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평생을 예수 믿어도 다른 형제자매 안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잘못 믿은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관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혈연을 넘은 진정한 사랑은 정말 가능한 것인지? 내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사가 무엇인지 본 훼퍼목사님이 말한대로 오늘의 세속화된 사회속에서 하느님 앞에서 비종교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배는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꼭 일요일 11시에만 드려야 하는 것인지? 성서 말씀에 우리 모두는 사제라고 했는데, 내가 사제로서 하는 일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예수를 따라 분단과 차별의 벽을 허무는 평화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평화의 길은 무엇인지?

어떤 교우님이 게시판에다 이런 글을 써놓았더군요. 주일 예배드리거 가는 것이 혹 아편주사 맞으러 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 안에 있을 것이지 아니면 우리를 차고 나와 자연 속에서 산등성이를 몇 개씩 넘어가는 수고 끝에 한 마리의 토끼를 잡아 배를 채워나가는 야생의 길 사이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아직도 주저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50년 세계 역도 선수권대회가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각국의 치열한 순위 다툼보다 바실리 알렉세예프(러시아)의 기록 경신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알렉세예프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던 500파운드(약 227kg)를 들어올릴 유일한 선수였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부담을 느낀 알렉세예프는 499파운드까지만 들어올리고는 금메달을 차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말았다.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알렉세예프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행요원들의 실수로 그가 들어올린 실제 무게는 499파운드가 아닌 501.5파운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일이 있자말자 이해에만 무려 6명의 선수가 500파운드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결국 500파운드의 한계는 육체적 한계가 아닌 역도선수들 스스로가 만들어 논 심리적 한계였습니다. 혹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우리 스스로가 그어놓은 심리적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나 한번 새로운 목회 실험적 교회를 해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 안계십니까? 한 두 분이라도 좋습니다. 모두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조용히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손을 들기가 겸연쩍으면 천장을 향해 고개를 한번 젖혀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수요일 기도회가 7시반부터 한시간 있습니다. 그 이후에 여기서 한번 모여 얘기라도 해보겠습니다.(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새 교우 23명이 헌신의 서약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답니다. 제가 이분들에게 지난주에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지난 3년동안 향린교회에 있어본 경험에 의하면 1년이 지나서 보면 여러분 가운데 서너사람을 제외하고 다 사라질 것이다. 내 경험과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그냥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교회의 창립멤버와 같은 헌신과 결단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끼리 교회를 실제로 시작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향린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이 강해 2부 3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꺼려한다. 그러니까 지금 자리가 실상 앞자리를 빼놓고는 빈자리가 없다. 빈자리가 없다고 물러날 생각을 하거들랑 등록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의자 빼앗기 게임이 있는데, 그런 각오로 의자를 뺏어야지 그냥 누가 빈자리 내어주겠지 하고 있다가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다. 여기야 말로 치열한 경쟁이 있는 목회현장이라고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등록인원이 제일 많습니다. 이번 분기와 지난 3년동안의 다른 분기와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니 한 가지 차이밖에 없었습니다.(뭐죠?) 제가 2개월동안 교회를 비운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향린교회는 다른 교회랑 반대대는 일이 많은데, 사회참여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교인증가 방식도 달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왜 아멘 안하세요?)

복음은 화해와 일치가 생명이지만, 이 생명을 지켜 나가는 방법은 나눔과 섬김입니다. 나눔과 섬김이 제대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작은 단위가 되어야 합니다. 보다 큰 교회가 되기 위해 그리고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는 작게 나누어져야 합니다. 작은 공동체 작은 교회로 나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여러 개의 작은 그룹들로 갈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대추리현장예배와 같이 우리가 함께 모여 크게 소리칠 수가 있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