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
이사야 51장 1-8절 필립비 1장 27-30절

[9.11 5주년을 맞는 세계]

5년 전 빈라덴을 추종하는 알카에다들의 비행기 테러에 의해 뉴욕과 워싱톤에서 3천명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 세계는 지금까지 테러 노이로제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911테러도 부시정권이 알면서 방조한 가능성이 있고 일부는 조작되었다는 얘기를 언론매체가 공개적으로 다루고 있고 또 이렇게 주장하고 다른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미국인들입니다. 물론 화씨911이란 영화는 빈라덴집안과 부시집안이 석유재벌집안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어느 공대교수는 쌍둥이 빌딩이 비행기의 충돌에 의해서만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너질 수 없고 이는 미리 설치된 폭약으로 인한 폭발이 함께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당시 워싱톤에 살고 있었는데, 그날 펜타곤 건물에 부딪힌 비행기는 왜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고, 사람의 시체잔해나 비행기의 잔해는 왜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빨리 날아도 눈으로 보면 다 보이는 것인데 수백만이 사는 워싱톤에서는 왜 한명의 목격자가 없는지, 그리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하늘에 떠다니는 이상한 물체를 찍어 UFO 실재를 주장하는 판에, 왜 문제의 그 비행기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나오질 않는지, 펜타곤 건물 외곽에 매어 달린 감시카메라들은 다 모양으로 달고 있었던 것인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간 케네디대통령의 암살사건과 같이 펜타곤 비행기 폭파사건은 영구히 미궁으로 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날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렸고,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때보다 세계의 정치군사적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지금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은 채 끝없는 살상이 계속되고 있고, 한달 전에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똑같은 명분을 갖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1500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우리는 기도회 모임에서 이러한 끔찍한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국제긴급구조요원으로 일하는 한비야씨는 그의 책 ‘지구밖으로 행진하라.’에서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조그만 아이들이 중무장한 탱크에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고 있는데, 언론에서 이것을 거창하게 [시위]라 규정짓고 그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시위 집압]이라고 부른다. 테러리스트파... 자신들의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 여러 방법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그런 테러리스트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같은 강점기에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를 상대방도 아닌 전 세계가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닐까.’(247쪽)

[전쟁은 누구에 의해 왜 계속되는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 정말 이스라엘이 주장한대로 테러근절이 목적이었는가? 지난주 신문귀퉁이에는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전협정 3일을 앞두고 레바논 남부에 미국제 집속탄(한 폭탄 안에 80개의 소형폭탄)을 쏟아 부었는데, 10만개의 불발탄이 널려져 있어 이를 제거하는데 만도 1년이 걸린다고 UN이 발표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불발탄이 10만개나 있을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유효날짜가 지난 포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날짜가 지난 포탄들은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무기를 들여오기 위한 술수는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는 모두 무기로 주는 것이니까 창고를 비워야 새 물건이 들어가지요. 그래서 또 미국에 있는 군수공장들은 돌아가는 것이고. 알빈 토플러가 ‘혁명적 부’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이제 전쟁은 선과 악이라는 정의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경제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시는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는 더 안전해졌다고 말하지만, 미국국민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60%는 미국 안에서의 테러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사람들에게 있어 911 이후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이 곁들인 기쁨이 아닌 공포의 시작입니다. 세시간전에 비행장에 도착하여야 하고 티켓을 발부하는 곳에서 짐은 당신이 스스로 쌌느냐? 누군가로부터 물건 운반을 부탁받은 적은 없느냐? 질문을 받고 검색대를 향하는 긴 줄에서 티켓과 여권을 높이 들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긴장하면서 빨리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안전요원들은 두 번 세 번 티켓 이름과 여권의 사진을 반복확인하고 스피커에서는 누군가가 보지 않는 짐은 가져간다는 얘기가 반복됩니다. 검색대 앞에 이르면 재빨리 주머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놓아야 하고 혁대를 풀고 신발을 벗어야 하고 때로 재수가 없으면 양말까지도 벗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슬리퍼를 제공하는데, 미국 어느 공항에서고 슬리퍼를 제공하는 공항은 없습니다. 간혹 여성들이 얇은 스타킹만이나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걸어 다닐 때는 안쓰러운 마음도 생깁니다. 들고 들어가는 가방 안에는 헤어스프레이도 안되고 손톱깍기도 안 되고 이제는 물을 포함한 음료수조차도 안됩니다. 한사람씩 사면이 막힌 작은 박스 안으로 들어가 서면 갑자기 옆에서 휘익!하고 바람이 통과하면서 화약 냄새를 검색하는 신종 검색대마저 등장하였습니다. 여행이 아닌 신병훈련소에 입대하는 기분이고 온 몸이 발가벗기우는 기분입니다. 이제 앞으로 만약에 자살폭탄자가 수술을 통해 신체 내부에 폭약을 숨기는 일이 발생하면 이제는 몸 안을 비추는 X레이까지 등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전요원들은 남녀의 신체구조를 훤히 들여다보게 되겠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국인들은 테러분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미국의 반전평화주의자인 노엄 촘스키교수가 비판하는대로 미국이 군사적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패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석유자원을 챙기려는 과소비 독점욕을 포기하지 않는 한, 친이스라엘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야웨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전과 달리 그리 뜨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지금 오늘의 이러한 파괴적 성향을 과연 바꿔갈 수 있을는지에 대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무력감과 더불어 종말에 대한 은연의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언론에 튀어나오는 핵무기의 위협 그리고 영화 괴물이나 올해 지구 각처에 일어난 살인적 더위나 가뭄, 홍수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무절제한 개발로 인한 환경오염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폭력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

인간의 뛰어난 판단력과 창조적인 행동이 요구되는 시기에 이러한 무력감과 공포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밤늦은 시간에 누군가가 폭력배들에 의해 길에서 폭행을 당할 살려달라는 소리를 지를 때에 아파트 창문을 통해 이를 내려다볼 뿐 문을 박차고 층계를 뛰어 내려가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아니 112에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실제로 뉴욕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지만, 살려달라는 소리를 10분 넘어 들었던 수십명의 아파트의 주민들 중 아무도 신고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무력감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우리의 힘과 의지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고 나아가서 세상에 변화를 일으켜 인류사의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잠재력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어두운 현실이 재앙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이러한 현실타개적 잠재력을 포기하는 것이야 말로 대재앙입니다. 일전에 한중일 세 나라 청소년들에게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중국 청소년은 40% 일본의 청소년은 30%정도가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한 반면에 남한 청소년들은 10%에 불과했다. 결국 나머지 90%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 도망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청소년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생각을 또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모두가 남은 어떠하든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이는 단적으로 문만 열고 나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술집과 모텔과 도박장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 분열되어 있습니다. 개인생활 우정 그리고 영적 가치들이 직업 활동과 너무나 분리되어 있어 정신 분열을 느낄 지경이다. 우리는 일터로 마트로 할인점으로 놀이터로 회식모임으로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으로 그리고 교회로 분주하게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삶은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거나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마치 누군가가 나를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희뿌연한 회색빛의 거대 도시에 갇혀 공해와 소음, 교통사고와 범죄에 시달리며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외적인 무력감과 공포 그리고 내적인 불안과 소외감에 대항하여 신앙이 필요하고 교회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잘못하면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오히려 역기능적인 역할을 함으로 인간을 더 비인간화 만들어 갈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에 의해 이 부활은 천국과 영생에 맞물려 피안적 종교적 구원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보면 첫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 이 부활은 결코 그런 피안적 신앙이 아니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결코 자신들이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영생구원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인간이 되어 세상적인 가치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가치 곧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섬김으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갔기 때문이다.

[전쟁과 폭력을 극복하는 기독교 신앙]

부활의 예수님은 목표를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함으로 첫 소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현실을 도피하여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을 직접 찾아오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던지며 땅끝까지 복음 곧 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곧 처음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의 영역이 아닌 오늘의 삶에 변화와 개혁을 불러일으키는 하늘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던 2세대 3세대 초대교회 신앙인들 곧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은 부활의 공동체로서 당시의 사회적 지배 가치 곧 로마의 제국적 맘몬의 가치와 이의 상징으로 나온 황제숭배를 목숨을 걸고 거부했다. 초대교인들의 이러한 신앙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세상 곧 맘몬의 신과 힘에 기초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적 가치에 편승을 하여 넓은 길을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좁고 험한 새로운 길을 걸어갈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선택에서 바른 선택을 한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우리에게 지금의 익숙한 것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줄 것이고 그리고 스스로 치유가 가능한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헌신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그 형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때 더 크게 의미가 살아납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그들이 대답하는 신앙고백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디서 그런 질문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사회적 상황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도외시하면 성서의 말씀은 죽은 문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하고 하느냐?’는 질문을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갈릴래아에서 묻지 않으셨습니다. 필립보 지방의 가이사리아라는 도시에서 이를 묻고 있습니다. 가이사리아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곧 가이사리아는 이 땅의 상징이요 세상 권력의 상징이요 권세의 상징이요 출세의 상징이요 부의 상징입니다. 이 땅의 것들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상 앞에 나아가 절하고 축복을 간구하는 그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곧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기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그런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다른 길 좁은 길을 걷겠다는 결단과 헌신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의해 순교를 당할 때에 선생님과 같이 모습으로 매어 달릴 수는 없다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죽었다는 얘기는 이미 이런 고백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리아냐? 그리스도냐? either or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선택이 처음 제자들이 가진 갈등이요 고민이었습니다. 2천년 후의 지금 우리들은 이런 고백은 교회 안에서만 말해지는 고백이고 가이사리아도 그리스도도 함께 선택하는 both and의 축복 신앙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일로 고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향린교우들마저 교회를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동창회나 계모임에 나가는 것과 나가지 않는 것과 교회에 나오는 것과 나오지 않는 것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요한복음 16장 33절: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제 곧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숨이 끊기우는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께서 이겼다는 외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까? 단지 육체적 부활만입니까? 성서는 이를 넘어선 새로운 교회공동체의 탄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거듭난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거듭남이란 세상 속에서 무력감과 공포 그리고 이기심과 갈등의 개인적 인간이 사랑과 협동 그리고 섬김과 나눔의 관계적 인간으로 변화됨을 말하고 더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향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곧 사회의 병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악마 혹은 사탄과의 싸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지 우리 안의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는 개인주의적 사고와 공동체적 사고와의 가치적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 주 새 교우 모임에서도 한분이 우리 한국사람들의 한계는‘가문의 영광’이라는 혈연주의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9월호 기독교사상에서 은퇴를 앞둔 한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나는 안다. 한국교회가 서로를 경계하며 긴장 속에 달도록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를,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에 나오는 민완 형사의 말투로 말하면 이렇다. ‘나는 범인을 안다. 그러나 그를 체포할 수가 없다. 그는 반만년에 걸쳐 만들어진 문화라는 놈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화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하나됨의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기존의 혈연 공동체적 한국문화에 먹혀버리고 만 데서 온 문제라는 것이다. 이놈을 잡아 족치기 전에는 아마도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인근 47쪽) ’반면 유럽 교회들은 그들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신앙공동체로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일 중심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미 선교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교비를 마련하고 선교사를 파송한다. 전쟁터에 봉사자를 모아 보내고 구제를 위한 물품을 모아 보낸다.(51쪽)’

[공동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들]

결국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갖는 혈연공동체에 한정하여 친교나 개인적 친분상태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혈연적 공동체에서 한발자국 나아가 신앙공동체 곧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사회선교부 수련회가 있어 밤늦도록 뜨거운 대화를 나누었는데, 등록 1년 미만의 새 교우 몇분들도 함께 참여하였고 새로운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농담을 곁들인 말이었지만, 교회의 중진 집사님 한분이 ‘그래서 목사님을 새교우들을 편애하시는군요.’ 저도 따라서 웃었지만, 농담 속에 뼈가 있다고 ‘편애’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물론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니시는 분들로부터 듣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마치 첫째가 새로 태어난 둘째 동생을 괜히 미워하고 엄마를 향해 엄마는 동생만을 편애한다고 하는 투정같이 들렸습니다. 다섯 살이 된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를 동시에 젖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 첫째도 갓 태어났을 때는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제가 오래된 교우들을 새로운 교우들과 같은 정도로 관심과 배려를 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제 전임자들로부터 아니면 다른 교회에서 목사님들에 의해 그만한 관심과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만큼 자란 것입니다. 우리는 첫째가 투정할 때, 엄마가 그렇게 말합니다. 너도 같은 사랑을 받았단다. 이제 너는 자라지 않았느냐? 너는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셋째가 태어나면 둘째 또한 같은 투정을 하겠지요. 그러나 열 살이 된 첫째는 이제는 그런 애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5살짜리 첫째는 혈연공동체에 머물고 있고 동생을 둘이나 둔 열 살짜리 첫째는 신앙공동체 차원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황대권씨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남한은 고도의 압축 성장을 겪으면서 시민사회를 제대로 훈련할 틈도 없이 과거에서 곧장 미래로 날라 온 나라이다. 따라서 물질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면서 정신의식은 봉건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거가 청산되지 않고 과거 위에 새로운 것이 계속 쌓이고 있다. 결국 이는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표리부동의 가치관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현실적인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지나친 현실주의를 낳았다.’ (새벽의 건설자들 24쪽 황대권) 혈연공동체적 사고에 머물수 밖에 없는 천박성의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간존재(間存在)로서의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에 속한 지체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을 실현하는 실천을 의미하고 타자 안에 있는 자신을 보는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적 신비체험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거기에 있고 하느님은 바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바로 우리 안에 형성된 공동체적인 실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타인 속에서 자신의 깊은 존재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박해질 뿐입니다.

어떤 분이 말합니다.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는 분자입니다. 물론 분자를 쪼개면 원자가 되지만 그 순간 물질은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립니다. 산소와 수소원자를 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인간사회의 최소단위는 무엇일까요? 개인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계를 더 나누면 개인이 되지만 그 순간 ‘인간성’은 상실됩니다. 인간이 가진 영혼과 인간성은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사이(between)`에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어떤 철학자는 사람을 ‘간존재(間存在)’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 변화나 성장은 거짓입니다. 관계가 약해질 때 우리의 정신과 인간성도 약해집니다. 결국 한 사람의 정신이 병들어 간다는 것은 관계가 병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은 `뇌`가 아니라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추구는 자신의 인간됨의 추구이다. 공동체의 본질은 전체성이다. 나의 요구와 내가 속해 있는 전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다. 공동체는 그 안에서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좀 더 깊은 현실이다. 그것은 또 다른 신의 이름이다. 공동체는 내가 온 존재를 걸고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나 자신의 선물이다. (데이비드 슈펭글러 새벽의 건설자들 43쪽)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 일구어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을 넘어선 공동체적 사건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성서를 통해 야훼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말을 들어라 정의를 추구하고 야훼를 찾는 자들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우러러보고 너희를 낳아준 사라를 쳐다보아라. 내가 부를 때 그는 혼자였으나 나는 그에게 복을 내려 자손이 번성하게 하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가 누렸던 축복은 ’혼자‘에서 ’함께‘ 거하는 믿음공동체이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문조사로 나눠드린 ‘평화를 위한 섬김과 나눔의 작은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축복을 여러분들이 갖도록 하기 위한 꿈에서 출발했습니다. 자신의 미래의 영적 삶에 어떤 계획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도록 하는 초청이었습니다. 지난주에는 40여명이 조사에 응해주셨고 오늘은 더 많은 교우들이 이 조사에 응해주시리라 기대하지만, 이 작은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지 모든 교우님들은 이번 조사에 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조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의 행정 책임자로서 제일 힘든 것은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엉거주춤 중간에 서 있는 방관자들은 저로 하여금 중간에서서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여러분들이 향린교회의 한 교인으로서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내가 속한 곳이다. 이들은 내 사람들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나는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들은 나의 관심사를 공유한다. 나는 이곳을 안다. 나는 이곳에 친숙하다. 이곳은 나의 집이다.’(다니엘 얀켈로비치, 새벽의 건설자들 44쪽)

[그리스도인의 특권]

헬렌 켈러는 "장님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시력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사도바울로는 자신의 꿈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서 필립비교회공동체에 보낸 편지 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갖고 화요일 직원예배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라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무슨 부끄러움인가? 임목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사람 앞에서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이라고 했고, 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 고백 곧 죽음을 넘어서 믿음과 삶의 일치가 그의 꿈이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삶의 목표는 바로 그리스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만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문단에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의 하늘뜻펴기 제목이 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고난 받는 일까지도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특권이란 특별한 권리입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가 없고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특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고난받는 것까지도 특권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전 여기서 그의 믿음 앞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고난받는 것을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70년대 유신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으로 붙잡힌 사람들에게 판사가 사형언도를 내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영광입니다.’ 죽음이 영광입니다. 왜요? 민족을 위해 죽는 일만큼 영광된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사형언도를 통해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지요.

흔히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긴다고도 말하고 교회를 섬긴다고도 말합니다. 사실은 목사들이 어느 교회에서 일합니다. 라고 말하면 약간은 천박한 느낌이 들어 섬긴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교인들도 교회를 섬긴다는 표현을 씁니다. 어떤 집사님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어느 기독교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다들 나는 아무개 집사이고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개장로인데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이 섬긴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려서 향린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명색이 교회의 중진이라는 사람이 교회를 그냥 다닌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것 같고 스스로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두어야 하겠고 그렇다고 어느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혹은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것 같아 애매한 표현으로 교회를 섬긴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사도바울로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을 가졌을 때 쓰는 말을 깨달을 때, 함부로 쓰기는 어려운 용어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섬긴다 혹은 교회를 섬긴다는 얘기를 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사회나 국가가 교회를 다닌다고 핍박을 가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난이 함께 하는 섬김의 특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의 물질만능의 개인주의가 주는 넓은 길을 거부하고 함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좁은 길을 선택하여 오늘의 세계 안에 만연한 무력감과 공포감을 떨쳐버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향한 개혁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히틀러독재치하에서 학생들을 일깨우며 반독재운동을 펼치다가 죽임을 당한 후버교수는 마지막 삶의 자리 법정에서 피히테의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독일의 모든 것이 너와 너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책임이다.” 이 말을 인용하여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향린교회의 모든 것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이렇게까지 외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