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묵시록(1) 카이로스의 역사변혁

다니엘 1,1-16; 묵시록 1:1-3


        교회는 세상의 달력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에 맞추어 1년의 시작을 크리스마스 4주전부터 시작합니다. 이를 대림절이라 부르고 이어 성탄절 주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 강단의 색깔이 보라색 하얀색 빨간색 초록색으로 바뀝니다. 교회가 세상과 달리 나름대로의 절기를 만들고 그 시작을 달리하는 것은 성서적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시간이라고 번역되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란 두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셀 수 있는 물량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력 칼렌다와 같은 어근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역사 안에 신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질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이를 성서에서는 시간이라는 말 대신에 ‘하느님의 때’ 혹은 ‘때의 임박함’으로 번역합니다.


        안병무선생은 이 두 시간의 차이를 무정란과 수정란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무정란은 그 안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은 없다. 그 껍질 속에 갇힌 것처럼 그것은 영원히 그 안에 차단된 채 일정한 시간과 더불어 썩어버리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수정란은 그 안에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미래를 수태했다. 그것은 이제 올 일, 즉 병아리를 까게 된다는 새 사실에서 그 의미가 주어졌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역사 안에 들어왔다 함은 바로 이 무정란과 같은 역사가 수정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중심이 생기고 따라서 목적이 주어졌다.’(역사와 해석 1982. 282쪽) 다른 말로 하면 카이로스란 결단의 시간을 말합니다. 교회의 절기는 바로 이러한 카이로스적인 신앙적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이 짧아서 그런지 남신도회 주일의 제정 배경에 이런 카이로스적인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총회가 보낸 서신을 보면 남신도회 제정 배경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이 없이, 그저 9월 셋째주일을 남신도회 주일로 지켜주시고 거기서 나오는 헌금을 총회에 보내주면 기념교회를 건립하는데 쓰겠다는 얘기만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처음에는 여신도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교회 안에서의 저들의 주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해 여신도주일을 제정하였는데, 남신도들이 이에 자극을 받아 남신도주일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샘’에서 나온 것이라 보여집니다. 5월 8일도 본래 어머니날에서 어버이날로 바뀌었는데, 이것도 시샘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미 교회내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남신도들에게 남신도회 주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향린교회에서는 남신도들이 나서서 이 주일에 차라리 설교를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사회나 보고 기도정도 하는 일을 같고 남신도주일이라고 명하는 것은 총회가 그렇게 정했다 할지라도 꼭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많습니다. 우리 남신도들이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오후예배를 외부강사로 모시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저는 우리 교회가 50년 전에 개척한 거암교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여간 아직까지 여신도주일에 하늘뜻펴기 주제를 정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남신도주일에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막막합니다. 작년에는 가정에서의 아버지 역할을 강조하는 말씀을 드렸지만, 남자라고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도 정당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남신도주일을 맞아 우리 남신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지위가 조금 높아진다고 해서 거기에 ‘시샘을 내지는 말자’ 그렇게 부탁하고 싶고 그런 결단을 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도 여성이라는 이유하나로 사회나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많은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함에도 여성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더 적은 봉급을 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함께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여성은 바로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준비하지만 남성은 신문이나 TV를 보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에 비하면 더 심합니다. 작년에 어느 보수교단의 총회장이라는 사람이 신학교에서 하는 설교 중에 ‘지저귀를 찬 여성은 단상에 오를 수 없다’는 여성비하의 발언을 하였지만 그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어느 기관장이 이런 얘기를 했다면 그는 며칠 내로 그 자리에 남아 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향린교회는 이점에서 앞서 간다고 말하지만, 여성장로가 당회의 과반수를 넘기까지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고 더욱이 여성을 담임목사로 초청한다고 할 때, 반대하는 분들이 상당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만약 여러분들이 여성담임목사를 원하신다면 향린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상과 그 영향력을 생각해서 지금이라도 흔쾌히 물러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제 임기 중에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과도기적으로 남여공동담임목사제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발언으로 오늘 예배가 끝나면 어르신들로부터 특히 우리 사랑하는 권사님들로부터 무슨 얘기를 듣지 않겠나 걱정이 되는군요. -저 조목사가 사람은 좋은데 가끔가다 우리 가슴을 놀라케 하는 폭탄발언을 가끔 하더니 오늘은 남신도주일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늘도 기어코 우리를 놀라케 하구만!- 여성총리, 여성장관, 여성당수, 이제 여성 대통령 운운하는 시대에 향린교회가 여성담임목사를 논의하지 못한다면 이는 상당히 수치수러운 일이 아닐까요?


        연초에 여러분에게 목회 전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참여도가 지극히 낮아 매우 실망한 부분이었지만, 그중 한분이 요한의 묵시록을 본문으로 한 하늘뜻펴기를 하여 달라는 부탁이 있었고, 저 또한 20여년전 요한묵시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겠노라는 답변을 했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오늘은 9월 셋째주일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하늘뜻펴기의 새로움을 여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성서의 마지막 책을 보통은 요한계시록으로 부르지만, 공동번역은 요한의 묵시록이라고 부릅니다. 1장 1절에 나오는 희랍어 아포칼륍시스란 단어는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드러낸다고 하는 광의적 의미에서 계시(Revelatrion)로 번역되기도 하고 세상 종말과 새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는 묵시문학이라는 협의적 의미에서 묵시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한자말을 풀이한다면 啓示는 열어서 보인다는 의미가 있고 ?示는 말없이 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된 말이기도 하지만, 이는 누구를 주체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부를 수 있습니다. 계시는 하느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보여주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계시적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림과 숫자와 기호로 표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는 묵시가 됩니다.


        아시는대로 요한의 묵시록은 성서 안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며 해리포터 책마냥 지성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황당무계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하늘뜻펴기로는 가장 피하는 책입니다. 지금의 목사님들뿐만이 아니라 신약성서가 27권으로 정경화되는 과정에서도 요한의 묵시록은 문제가 많았던 책입니다. 4세기의 교회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이 책은 정경이 되기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고 정경이 된 후에도 예루살렘의 키릴(Cyril) 주교는 아예 이를 정경 목록에서 빼어버렸고 자신의 교구의 금서목록으로 지정해 버렸습니다. 이후 계속된 논란을 겪어오다가 16세기 교회개혁 시대에 쯔빙글리나 마르틴 루터는 이 책을 성서에서 빼자고 하였고 칼빈은 신약성서 전권을 주석하였지만, 이 묵시록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톨릭교회나 신교교회의 매일성경읽기 렉셔너리에도 이 묵시록은 최소한의 구절만 들어갑니다.


        반면 신비적인 것을 좋아하고 이단적 성격을 띠고 있는 목사들은 가장 많이 애용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묵시록에 나오는 숫자와 상징 언어들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창조역사가 6천년전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천년왕국이 모년 모월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 신학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요한의 묵시록을 본문으로 삼아 하늘뜻펴기를 펴는 일에 섣불리 접근하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몇 개의 본문으로 제한되어 있고 특히 장례식에서 많이 애용합니다. 그래서 신도들에게는 요한의 묵시록은 죽음이후에 관한 책이고 천상의 세계를 그린 책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에서는 이 요한의 묵시록은 구약성서의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24장 마르코복음 13장 등에 나타나고 있는 묵시문학의 일부로 이해합니다. 묵시문학이란 어느 민족에나 볼 수 있는 문학형식으로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위기상황에 나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모든 묵시문학의 작품들은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 악마의 세력을 넘어뜨리고 신천지의 세계의 도래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정감록과 같은 책도 같은 유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는 내용에 있어서는 느부갓네살이라는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는 페르시아 시대 이후의 희랍제국의 일부분인 시리아의 안티커스 4세 때의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고 경전 외의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외경이라고 부르고,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마카베오서와 동시대의 책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실제 이 땅에서 투쟁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면, 다니엘서는 천상의 싸움으로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궁중에 뽑힘 받은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이 왕의 진미 곧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야채와 물만으로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는 이교도의 가르침과 제사를 거부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야훼신앙을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또한 다니엘서와 같은 사회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서가 시리아의 안티커스 4세 때의 유대교의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요한의 묵시록 또한 바빌론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만 이는 로마황제 도미티안 때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책은 이러한 민족탄압과 종교박해라는 사회정치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책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묵시록은 사도 요한이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아 소아시아의 파트모스섬에 유배당할 때에 환상을 받아썼다고 9절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이후 등장하는 넷 여섯 혹은 일곱이라는 숫자나 상징 언어에 있어서는 다니엘서를 비롯한 다른 묵시문학과 동일한 관점과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케플러같은 학자는 ‘요한의 묵시록’을 여러 권의 묵시문학을 보고 정리한 표절문학으로 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독특한 신적 체험을 통해 신비로운 세계를 보았다 하더라도 이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일반론을 전제한다면 문학적 구조나 표현이 같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평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평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니엘서나 묵시록이 황당무계하게 보이고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그들의 동시대에는 이런 종류의 글들은 민중 속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씌어진 그 시대에 이와 비슷한 책으로 ‘에녹서, 12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 바룩서’가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요한의 묵시록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묵시록, 바울의 묵시록, 토마스의 묵시록, 스테파노의 묵시록, 동정녀의 묵시록’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목들을 보면 교회의 모든 리더들이 다 묵시록을 쓴 것처럼 보이나 실은 당시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존경하는 스승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잘 알려진 사람의 이름을 빌려 책을 내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묵시록이니까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저자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신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 5경을 모세가 썼다는 것은 유대인 공동체의 신앙의 고백으로 이해해야지 학문적으로 이를 증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모순과 어려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 5경안에 담긴 그 신앙적 의미와 고백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이를 어떻게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지 그 저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말도 많고 오해도 많았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요한의 묵시록을 종교적이고 묵시문학의 입장에서 이해하여 오다가, 지난 20여년전부터 몇몇의 제3세계 신학의 등장과 더불어 이를 사회정치적인 시작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소수의 노력들이 있어 왔습니다. 민중신학에서는 이를 ‘수난시의 민중언어’라고 정의합니다. 저 또한 같은 입장에서 이것들이 민중의 언어라는 점과 또 그 언어들이 모두 사회변혁적인 언어라는 점에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단어 하나에 매이게 되어 묵시록의 전체적 틀을 잃게 되어 위험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3장에 나오는 낙인의 숫자 666을 보수기독교인들은 로마 교황이나 히틀러나 스탈린, 호메이니 후세인 김일성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미국의 수장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나 악마의 축이라는 표현을 쓸 때, 묵시록에 사탄으로 등장하는 용이나 짐승을 떠올리며 자신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칼로 이해했을 것이 가능성이 많고 지금도 미국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모두 악마시하여 지금도 세계를 위험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잘못 믿으면 아니 믿는 것보다 못하다고 요한의 묵시록을 잘못 해석하면 너무 위험한 결론이 유추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신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적의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가축까지 죽이라는 구약성서의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나 예언자들의 멸망선언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의 사탄을 진멸하는 심판의 개념은 사랑과 용서 화해 그리고 평화라는 성서 전체의 관점에서 조화롭게 읽혀져야 하는 것이지 이런 구절만을 갖고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신학자 에룰같은 사람은 묵시록에 나오는 세세한 단어에 집중하여온 지난 50여년간의 성서학자들의 노력을 한마디로 부적절한 학문이었다고 평가절하 합니다.(Elizabeth Fiorenza, The Book of Revelation: Justice and Judgment. 21쪽) 그러나 제가 이해하기에는 이제 이러한 성서학자들의 노력에 기초하여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지금까지 신학자들의 손에 놓여 있던 이 서신을 이제는 목회자들이 가져와야 할 때라고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이 목회자였고 묵시록 역시 교우들을 상대로 쓴 목회 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회자도 신학의 훈련을 거치지만 목회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은 서로 다릅니다. 목회자의 일차적 관심은 교인에 있지만 신학자의 일차적 관심은 학문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학자들에게는 1장 1절의 ‘당신의 종 요한’이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인지 아니면 당시 소아시아의 또 다른 사도 요한인지에 대해서 관심하고, 요한의 묵시록과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 서신들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관심하고 바울서신과의 연관성에 대해 논의를 펴나가지만 저는 이것이 목회적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미국의 목회자이자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사도 요한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목회 사역이 선행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13쪽) 물론 사도 요한은 단순한 목회자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통째로 꿰어볼 줄 아는 신학자였고 하늘의 신비함을 글로 엮어낼 줄 아는 시인이었고 사회변혁의 안목을 가진 목회자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 글을 쓴 목적에 대해서 서두에서부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의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것, 곧 내가 본 모든 것을 그대로 증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요한은 ‘실천’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에 치우쳐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 함양이나 하려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명히 이 묵시록을 쓴 이유는 ‘실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공동번역 외의 다른 모든 성경은 ‘실천’이란 단어 대신 ‘지킨다’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번역했습니다. 물론 우리말에 지킨다는 표현 속에 실천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실천한다’ 혹은 ‘지킨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tereo란 단어는 튼튼한 상자에 넣어 안전하게 보관하다라는 뜻이 아닌 유대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상생활 가운데 꾸준히 지키고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고서라고 이를 지켜나간다는 비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TDNT VIII. 141-145쪽) 영어성경 또한 모두 keep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어떤 번역은 마음에 새긴다는 표현까지 사용하여 마치 말씀을 머리로 묵상하는 것이 저자 요한의 본래 의도인 것처럼 오해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한교회를 포함한 서구교회의 있어서 치명적 약점은 성서단어나 구절을 마치 퍼즐게임을 풀듯이 성서 이곳저곳의 단어들을 연계하는 지식적 훈련이 마치 성서연구나 하느님 말씀에 대한 바른 묵상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요한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묵시록은 404 구절이 있지만 성서 앞부분에 대한 언급이 518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직접 인용구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결국 이 말은 ‘앞에 나온 65권을 읽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책을 읽지 말 것’이라는 말과 성서는 ‘암송을 통한 반복이나 증명자료가 아닌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묵시] 47쪽)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도 요한이 서두에 tereo란 단어를 쓴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골방에 들어가 자신의 글을 묵상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박해의 현실에서 이를 이겨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공동번역은 ‘실천’이란 단어를 선택함으로 저자 요한의 의도에 맞는 최상의 단어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지적 유희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순교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리고 그러한 위험이 자신이 돌보았던 신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위기의식 속에서 하느님의 카이로스를 보면서 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신학자의 전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요즘 많은 신학자들이 상아탑에 갇힌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활동하면서 하느님에 관한 사유와 집필에 몰두하였습니다. ‘바울은 감방에서 긴급히 편지를 받아쓰게 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세 명의 대제를 거치면서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하는 가운데 ’세상에 대한 논박‘(contra mundum)을 썼고, 어거스틴은 로마의 질서와 시민권의 붕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목회를 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칫 유럽을 영적, 정신적 혼란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미신과 이단과의 투쟁에 지성을 바쳤으며, 칼빈은 지칠 줄 모르고 제네바 개혁 주도 계급으로부터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발전시켰고, 바르트는 노동 분쟁을 중재하면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본훼퍼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지하 저항세력을 이끌었고, (서남동 안병무는 군사독재정권하에서 해직과 투옥을 통해 성서에서 하피루와 오흘로스라는 감추어진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끄집어내어 민중신학이라는 저항신학을 태동케 하였고,)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 동료들이 로마의 가혹한 핍박에 시달리고 있던 시대에 외딴 밧모섬 감옥에 유배되어 묵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유진피터슨 [묵시] 23쪽 괄호는 설교자 첨가)


        신학자들의 임무는 악의 혼돈 가운데서 복음의 질서를 입증하고, 체험과 이성의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균형 있고 일관성 있게 정리하여야 합니다. 즉 죄, 패배, 좌절, 고난, 박해, 정치, 경제라는 우리의 외면적 표피들을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거룩과 치유, 천국과 지옥, 승리와 심판, 시작과 종말이라는 내면적 영원성으로 바꾸어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공동체가 계속해서 합당한 소망을 품은 채 사랑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일입니다. 성서의 처음 창세기는 역사의 시작을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한의 묵시록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감격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중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와는 다른 삶의 번민과 근심과 고통거리가 계속됩니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을 고백하지만, 동시에 그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에게는 끝없는 삶의 회의와 좌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크로노스의 연대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카이로스적 관점 곧 하느님의 인간 역사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혼돈과 소용돌이를 뚫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깨달음을 위해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묵시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신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제가 묵시록 하늘뜻펴기를 할는지는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열 번 정도는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해야 저나 여러분에게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역사인식과 종말의식이 서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나 저나 묵시록에 등장하는 숫자와 큰 소리와 환상적 그림의 소용돌이를 뚫고 그리스도 중심의 분명한 인생관과 목회관을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들도 이번 기회에 요한의 묵시록을 함께 읽어가면서 느낀 바를 말씀해 주시고 설교 비평도 함께 하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묵시록 10장에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면 입에는 달겠지만 배를 아프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받아먹어 배가 아픈 고통의 과정이 있기를 고대합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성서를 읽으려하지 말고 허망하고 골치 아픈 얘기라고 제쳐두지 말고 꾸준히 성서가 이끄는대로 자신을 놓아 세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오늘 이 시대에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 때문에 로마의 정치권력과 황제숭배를 거역하였기에 핍박을 받아 유배상태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이 묵시록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까? 예수를 따르는 일 때문에 세상 권력자를 비판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많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자기가 믿는 종교나 양심의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쿠바에 있는 미국 군형무소인 콴타나모에 갇힌 수백명의 이라크 모슬렘들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감옥에 갇혀 있거나 그들이 세워놓은 장벽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남한 사회에는 누가 있을까요? 저는 평택의 대추리 도두리에서 현재 3년째 투쟁하고 주민들을 떠올립니다. 이미 대추리 도두리는 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난 5월에 이중 삼중의 철조망으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13일 새벽에는 국방부가 주민들과 평화지킴이들을 구속하고 빈집 철거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집을 팔고 떠난 사람들의 이웃집을 파괴하는 것은 한마디로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압박하기 위한 술책입니다. 여기 남아있는 주민들은 이제 나이 60 70세에 이르러 다른 지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벅차고 자신들이 평생을 걸쳐서 일구고 살아온 그 땅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님을 버리는 것과 같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문정현신부님을 비롯한 소수의 신앙인들을 제외하면 그분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아니지만, 그들 또한 분명히 하느님의 자녀임은 분명하고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의 나라라는 큰 틀에서 보면 그들은 모두 사도 요한과 같이 세상 권력자들로부터 의의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를 대변하는 국방부는 마치 부시가 이라크의 주민이나 북한주민들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적대시하듯이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무시하고 적대시 여겼습니다. 대화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계속 공권력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폭력이고 테러입니다. 게다가 확장되는 미군기지 또한 원래 의도와는 달리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기지가 아닌 전략의 유연성이라는 이름하에 한반도를 넘어선 국제분쟁에 뛰어들기 위한 미국만의 이익을 위한 기지이기에 동의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보 안보하지만 뭐가 안보냐는 것이지요.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아프카니스탄의 빈라덴이나 한때는 모두가 미국과 한편이 되어 안보라는 이름하에 함께 손을 맞잡고 공동의 적을 향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안보라는 이름하에 이 둘은 절친한 친구사이에서 죽고죽이는 천추의 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안보 안보 하고 외치는데 이게 누구의 안보입니까? 미국의 안보입니까? 대한민국의 안보입니까? 미국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자입니까? 아니면 대한민국은 죽으나 사나 미국을 상전으로 여기고 꼬랑지를 흔들며 그 뒤를 종종 쫓아가야 하는 개새끼입니까? 대한민국과 미국은 별개의 독립국가입니다. 목적이 같아 같이 설 때도 있지만, 갈라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바로 후세인이나 빈라덴의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난 13일 새벽 대추리 도두리를 향해 진격하는 수천명의 군인들 앞에는 이런 펼침막이 펴져 있었습니다. ‘1943년에는 일본군, 1952년에는 미군, 2006년은 한국군에 의해 쫓겨남.’ 남은 92가구의 주민 2백여명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습니다. 지금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은 마치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것처럼 철조망 속에 갇혀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어렸을 적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 있는 고향으로부터 쫓겨날 뿐만 아니라 그 고향 자체가 군사기지로 변하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꿈과 환상이 아니고서는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고 자신들에게 임하는 세계화의 군사적 폭력을 이겨낼 길이 없습니다. 환상이냐? 죽음이냐?는 막바지에 몰려 있습니다. 그들에게  환상은 현실을 도피하는 허구가 아니라 오늘을 이겨내고 현실을 변혁케하는 하늘의 힘입니다. 이 땅의 크로노스의 일상을 깨고 나오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카이로스적 사건입니다.


        일제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하여금 출애굽기와 요한의 묵시록을 읽지 못하도록 하고 성서에서 뜯어낸 것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서 요한의 묵시록은 난해하고 황당무계한 글이 되기도 하고 바로바로 쉽게 이해되는 하늘의 계시가 담긴 예언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에 소아시아의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라면 이 요한의 묵시록은 국가적 폭력과 돈이 지배하는 로마사회를 향한 항거와 변혁의 거친 목소리로 들려졌을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