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우주의 생명에로(요한묵시록 3)
에제 37,1-10; 묵시록 4,1-6

종종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통성명을 하고 약간 친숙해지면 ‘고향이 어디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도 50대 이상의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대부분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태어났고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의 구성원이기에 고향이란 단어 속에 숨어있는 어릴 때 내 놀던 동산이라든가 추운 겨울날 화롯불에 고구마 구워주시던 할머님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성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독일어에 있어 고향 Heimat 또한 히틀러의 국가민족주의를 떠올리는 부정의 의미가 강하다고 하는데, 우리말에 있어서도 고향은 혈연주의와 지연주의를 부추기는 몹쓸 단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지난번 광주에 가서 여신도회 강연을 할 때, 부려 제가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스스로 물어봅니다.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교까지 서울에서 마쳤고 3년의 군복무는 휴전선에서 이후 미국 LA에서 2년 뉴욕에서 6년 워싱톤에서 16년의 세월을 거쳐 다시금 서울생활 4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과연 내게 있어 고향은 어디인가? 태어난 곳이라면 목포이지만, 목포의 기억은 하나도 없고, 희미한 광주의 기억 그리고는 대부분의 기억은 서울과 미국입니다. 보통 조상들의 무덤을 기준으로 고향을 얘기하지만, 나의 고조할아버지부터 시작하는 선조 무덤은 경상남도 함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선산을 가본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53년 동안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고, 그곳에서는 하룻밤도 잠을 자본 적이 없으니 선산은 내게는 문자적 의미에서만 존재합니다. 앞으로도 LA에 계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 해도 이곳 선산에 묻힐 가능성은 전혀 없고 LA 교회 묘지에 묻힐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한 내 남은 평생에 부모님 묘소를 찾아볼 기회는 한두번에 그칠 것입니다. 나의 죽음은 어떠한가? 나를 묻어줄 두 자녀는 미국에 살고 있고, 그들은 Korean-American으로 분류가 되지만, 제사나 성묘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나의 장례와 관련한 나의 바람은 일전에 공개한대로 내 시신을 화장하여 재의 반은 백두산 어느 이름 모를 나무 밑에 묻어주고 나머지 반은 한라산 어느 이름 모를 나무 밑에 묻어주기를 바라지만, 자식들이 이 소원대로 따라줄지도 의문입니다. 이번 주 여러분도 모두 선산을 다녀오겠지만, 저도 묘 자리를 알아볼 겸 제주도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미 고향의 의미를 상실한 젊은 세대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나이가 되면 어떤 일들이 생겨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나아가 손주들이 여러분의 나이 때가 되면 어떤 일들이 생겨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농촌은 대부분 6,70세 이상의 노인세대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시면 농촌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요? 성묘라는 조상제사가 당분간은 지속이 되겠지만, 빠르게 지속되는 국제화시대에 얼마나 오래 갈까요? 제 가까운 친척 한분은 모두 출가한 자녀가 아홉인데, 작년 추석 때에는 세 자녀 가정만 모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여섯은 모두 뉴질랜드 아프리카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성묘를 하는 일도 생길지 모릅니다.

묘지를 잘 써야 자식들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풍수지리설이 지금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뿌리 깊게 남아 있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산 중턱마다 묘지 없는 곳이 없고 점점 호화롭게 장식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미국보다 우리가 더 잘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풍수지리설에 전연 위반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는 달리 묘지를 선택할 때 낮은 곳을 선택하고 호수가 근처를 선호하며 나무 밑 그늘을 선호합니다. 풍수지리설로 따져 가장 좋다고 하는 명당이 미국서는 값이 제일 싸지요. 하는 짓이 상놈들의 짓인데 부자로 잘 살지요.

부활을 믿는 서양의 기독교국가에서는 대체로 매장하지만, 갑부들은 돌로 된 관에 시체를 안치하고 따로 대리석 집을 만들어 보관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는 마지막 날 먼저 부활하고자 하는 욕심이지요.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도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장례는 높은 장작더미위에 놓고 화장하여 그 뼈를 갠지스 강에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장작을 살 돈도 없는 사람은 타다만 시체를 그대로 강물에 띠워 보내 물고기의 밥이 되도록 합니다. 불교권이 강한 티벳이나 네팔과 같은 지역에서는 들판에 그대로 시신을 두어 새나 동물이 먹도록 풍장을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돌무덤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는 본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것을 예수님에게 드린 것이고, 보통은 석관을 이용하였고 가난한 서민들의 경우는 들판에다 돌로 덮는 정도였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제는 조상을 기리는 성묘나 제사도 허례허식적인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고 보다 실질적으로 조상들의 뜻을 기리는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뜻을 아로새겨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되새겨보고 나누는 실천의 시간이 되어야지 제사상에 놓는 음식을 만들고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일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허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라.]

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고 하는 효자를 향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를 따르는 일이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아버지의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게 하셨을까?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하라니? 어떻게 죽은 자가 장례를 치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앞에 나오는 죽은 자는 누구이고 뒤에 나오는 죽은 자는 누구인가? 앞에 나오는 죽은 자는 육신에 죽은 자를 말한다면 뒤의 죽은 자는 그 영혼 곧 시대정신에 죽은 자를 말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름없는 곧 자신의 삶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세상이 가는대로 함께 흘러가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겠다고 할 만큼 나를 알았지 않았느냐? 하늘의 부름을 깨달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너는 죽은 자가 아니고 이제 산자가 아니더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를 지내게 하고 산자는 깨달음의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깨달음은 그 즉시로 행해야지 미루면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만 생긴다고 하는 경계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은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봅니다. 조상제사가 공자에 있다고 하지만,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저녁에 죽을 것을 안 아들에게 아버지의 장례가 그의 마지막 삶의 행위가 되어야 할까요?

미국 오하이오주의 어느 감옥에서 죽음 직전의 사형수들의 행동을 기록한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의 기록입니다. ‘엄마에게 필사적으로 전화를 걸던 존 힉스에게 8시 8분 교도관이 전화로 엄마를 연결해줬다. 힉스는 전화를 끊은 뒤 목사와 다시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힉스는 진정제를 달라고 했다. 그는 목사와 다시 대화를 나눈 뒤 8시 28분 잠시 볼 일을 보았다. 힉스는 그 다음 1시간을 목사와 다시 얘기하고 성서를 읽었다. 중간에 물 한 컵을 마셨다.’ 전 이 기록을 보면서 만약 내가 그때의 목사라면 나는 무슨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그가 읽은 성서는 어떤 부분이었을까? 아마도 요한의 묵시록은 아니었을까? 요한의 묵시록은 현대인들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리는 천상의 싸움 얘기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들에게는 자신이 돌아갈 진정한 고향이 어떤 곳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복음의 책은 아니었을까?

우리 인생을 개인의 좁은 영역을 떠나 보다 폭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죽음의 참 의미가 보여지고 그래야 죽음을 넘어서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햇수만큼 50년 60년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최소한 인류 3천만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 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단절이 아닙니다. 생명의 진화 한 과정일 따름입니다. 1978년 퓰리처상 논픽션부문 수상자인 칼 세인건은 그의 책 <에덴의 용>에서 150억년이라는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9월 14일에 지구가 탄생했고 9월 25일에 생명이 탄생했으며 인간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 즈음에 등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일생은 밤 11시쯤에 태어나자마자 1초안에 꺼저 버리는 숨 바람에 불과한 것이고, 지금 세계의 최강을 뽐내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구석기시대로 돌아갈 각오를 하라고 약한 나라들을 윽박지르는 미국은 아무리 길어야 한 5초쯤 있다가 사라지는 연기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사는 길]

죽음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최근에 출판된 ‘인생 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서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공저 류시화 옮김)이란 책은 죽음직전에 있는 여러 사람의 경우를 설명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류시화씨는 서문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인 것이다. 이 책 속의 숱한 등장인물들의 말을 빌리면, 삶은 하나의 기회이며, 아름다움이고, 놀이이다. 그것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세상이 보여주는 최상의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룰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11쪽)

이 책을 쓴 엘리자베스 퀴빌러 로스 자신의 장례식에는 가족과 친구 몇 명이 모여 조촐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흑인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두 자녀가 앞으로 나아가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곤 참석자들은 미리 받은 종이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퀴빌러 여사는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하듯이 자신의 육신이 새로운 환희의 세계에로 다시 태어났음을 전하였습니다.

지난 5월에 펜실베니아 부루더호프 공동체에 머물면서 그들의 조그마한 공동묘지에 가보았습니다. 관이 묻힌 그 네모진 땅에는 온통 갖가지 꽃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곳은 죽음의 땅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이 춤추는 땅이었습니다.

전 묘를 왜 굳이 간수하기도 힘든 봉분으로 만들고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삶의 환희나 부활의 노래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전 국민의 20%나 된다고 하는데 왜 무덤에는 부활의 기쁨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성묘가 의무감 때문에 친척들을 의식하기에 가는 일이 아닌 이 세상적인 것을 넘어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창조의 예식으로 만들어지도록 하는 일에 교회의 책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 또한 떠남만을 강조하는 슬픔의 장소가 아닌 그분의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담겨 있는 예식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앞으로는 장례식장에 그분의 삶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방영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져보았습니다.

전 여러분들이 정말 믿는 사람답게 살고 믿는 사람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당하는 죽음이라면 당하지 말고 기꺼이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언장에 좀 기쁨의 장면을 남겨 놓으면 좋겠습니다. 유언장을 쓰도록 했지만 쓰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히려 나이 드신 분들의 참여율이 적습니다. 올해 송년주일에 유언장 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아들에게 딸에게 그들이 기쁨을 주었던 순간을 유언으로 남겨주면 좋겠습니다. 그때 그 일로 참 고마웠다고 그때 참 자랑스러웠다고 그때 참 기분이 좋았다고 ... 그리고 유산은 제발 남기지 마세요. 교회에 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다 기부하세요.

[현실도피인가? 현실도전인가?]

죽음의 문제는 영혼불멸이나 영생복락의 피안적 차원이 아닌 현실 삶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해결하면 삶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종 요한은 묵시록에서 칼과 말발굽으로 세계를 억누르면서 영원한 평화를 외치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죽은 의인들의 승리의 노래를 통해 교회에 남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끝까지 그 신앙을 지켜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환상 중에 바라본 천상의 모습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도전입니다.

에제키엘 선지자 또한 바빌론이라고 하는 나라에 많은 지도자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그가 가진 고민은 선민이라고 일컬어온 유다민족의 정체성문제였고 야훼 하느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나하나 거대한 바빌론의 문화에 먹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의 웅장함에 먹히었고, 물질의 풍성함에 먹히었고, 옷의 화려함에 먹히었고, 군대의 힘에 먹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조상 대대로 믿어온 야훼를 떠나 마르둑 신을 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살았다고 하나 그 백성들은 이미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때 야훼 하느님은 바로 그 에제키엘을 환상 가운데 불러내어 마른 뼈가 즐비한 들판으로 그를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에제키엘이 그대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모두 살아나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에제키엘이 본 마른뼈 환상은 단지 피안을 향한 도피적 환상이 아니라 척박한 현실을 뚫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희망이요 변혁의 힘이었습니다. 전 여러분이 이번 주 조상 성묘를 하면서 바로 이 마른뼈가 붙어 민족이 일어나는 에제키엘의 환상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종 요한 또한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600년전 에제키엘이 보았던 그 마른뼈 환상이 실현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들은 그 환상대로 60여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고향땅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면서 남북의 분단이라는 비운의 역사의 사슬을 끊고 하나 되는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와 이방이 하나 되는 우주의 환상으로 바뀌어갑니다.

[하늘보좌에 있는 보석의 현재적 의미]

‘그 뒤에 나는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 그 옥좌에는 어떤 분이 한분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우리 현대지성인들에게 있어서는 황당하고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고민하였습니다. 벽옥과 홍옥과 비취의 보석을 언급하는 것은 단지 눈이 부실만큼의 휘황찬란함을 말하는 것일까? 보석의 순수성은 단지 미의 개념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인가? 보석은 희귀성으로 인한 가치만 있는 것인가? 저는 요한이 하느님이 앉아 계시는 옥좌를 보석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보석은 단단합니다. 단단하다고 하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심한 압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순수한 물질로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외부의 심한 압력으로 불순물은 빠져나가고 순수물질만 남은 셈이지요.

요한에게 옥좌를 장식하는 보석은 삶의 어려움과 신앙의 환난을 통해 인간의 모든 불순물, 욕망과 명예 그리고 죽음까지도 넘어선 의인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박해를 피해 힘겹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황금보다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칭찬과 영광과 영예가 바로 옥좌를 빛나게 하는 벽옥과 홍옥과 비취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리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서양의 성당이나 교회들의 창문은 거의 대부분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스테인드글래스로 예수님의 모습이나 여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스테인드글래스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태양이 밖에 비추는 낮에도 있지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경우는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황혼의 때입니다. 이때 스테인드글래스는 빛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 마냥 어둠 속에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납니다. 빨강 노랑 파랑 갖가지의 색깔들이 조화롭게 어울러져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습이나 자연의 모습은 매우 깊은 신앙의 의미를 던져줍니다. 왜냐하면 스테인드글래스는 조각조각 깨어진 색유리조각들을 붙여놓은 것이다. 깨진 인생들, 파편 같은 인생들이 서로 엮어져서 하나의 아름다운 신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stained란 단어 자체가 얼룩지고 더러워졌다는 말입니다. 전 교회들이 문제가 많은 것은 예수님이 의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조화로운 빛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깨어지고 더 많이 얼룩이 질수록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냅니다.

해안가의 들쑥날쑥한 아름다운 바위들은 오랜 세월 거센 파도에 깨어져나가면서 생긴 세월의 흔적들이고 깊은 골짜기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폭풍우로 인해 아픔의 흔적들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실패와 고난과 고통과 상실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가 소원하는 그런 편함과 풍요 속에서 나오지는 않는 법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동정심과 따뜻함과 사랑과 배려로 가득한 이들, 곧 삶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거센 파도와 폭풍우로 다듬어진 사람들이지요.

[스테인드글래스의 인간승리]

저는 오늘 이 시대에 스테인드글래스와 같이 얼룩지고 깨어진 인생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조용하게 보여주는 한 사람을 언급하라면 신영복선생을 말하고 싶습니다. 통혁당 사건으로 28세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고 지난 88년도에 48세의 나이로 출옥하여 성공회대 교수로 계시다가 올해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는 현대의 위기는 인간을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보는데 있다고 보고 이를 관계론적인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라고 그의 첫 번째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말합니다. (246쪽)

한때 그는 20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계급적 성분을 완전히 개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재 제화 목공 간판 제작 등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힌 그는 구체적인 노동을 통해 그리고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스스로 계급적 성분을 바꿨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소한 후 다시 사회 속에 서면서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웃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개인만 개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이웃과 함께,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정서를 공유하는가 하는 사회적 입장에 따라 자신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인성이란 개인이 자신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라고 그의 책 [강의]에서 말합니다.(41쪽)

지금 하느님의 종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갇혀 천상의 싸움을 바라보며 우주적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관점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이 세계와 우주가 야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듯이 이 종말 또한 하느님에 의해 주도된다고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시선 밖에 내던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악이 존재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우주적 심판의 주로 오시는 어린 양 그리스도에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선포합니다. 고고학자이자 신학자인 떼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이 지구밖에는 단순히 물질로 된 대기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또 하나의 정신층이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생명의 오메가 포인트인 그리스도를 향해 집약적으로 진화하여간다고 말합니다. 제가 오늘 에제키엘과 요한이 본 하늘의 환상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단순히 인생이라는 한때를 살고 가는 육체적 인간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에 맞닿아 있는 우주적 생명체라는 깨달음입니다. 지구 저 반대편 아프리카 말라위 한 촌락에 사는 이름 모를 흑인 소녀와 나 조헌정이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개별인간이 아니라 우주생명에 맞닿아 있는 관계적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나가 함께 어우러져 완전한 생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에는 두 가지 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과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낸 자의 관계를 믿는 사람입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제대로 신을 믿는 것이며 이 사람은 모든 사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도코대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씨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한겨레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분이신데, 이번 호에는 ‘백낙청씨는 알면 알수록 큰사람이었다.’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그 말미에 그는 현대사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77년도에 왜 ‘창작과 비평’을 펴냈는가?라는 물음을 하면서 그에 대한 답으로 창간호 창간사 말미에 실린 백낙청씨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지식인의 책임]

지난달 평화나눔 작은공동체를 제안하면서 교인설문조사를 했고 그 1차 보고를 오늘 발행되는 9월호 파발마에 실었습니다. 읽어보시기를 바라고 함께 조사한 영적기질을 보면 8가지 기질 중 첫 번째가 지적영성입니다. 향린교회가 지식인이 모인 교회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데, 저는 지식인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은 엘리트의식임을 경계하면서 지식영성이 가장 강한 향린인의 책임을 백낙청씨의 글에 빗대어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 21세기에 들어온 한국사회는 지난 77년도와 무엇이 다른가요? 30년 전에는 군사독재정권이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이 다른가요? 백낙청씨는 당시의 사회를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라고 평가했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이상이 풍부하고 대중은 사회의 주체가 되어 있고 타락은 줄어든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지난 30년보다 지금에 있어 국민들의 이상은 더 메말라가고 있으며, 이는 요즘 인문학(혹은 인문학자?)의 위기를 외치고 있는 오늘을 보면 명확합니다. 대중의 소외와 사회적 타락은 어떤가요? 세계에서 가장 언론이 자유로운 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대중의 소외의식은 그럴수록 더 심한 것은 아닌가요?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소외 내지 절망감은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심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열심히 살면 희망이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되지 않는다고 하는 절망감은 더 짙게 깔려 있습니다. 사회 타락은 어떠합니까?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낙청씨가 말한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책임부분은 여전히 유효할뿐더러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화된 그만큼 책임은 더욱 커졌습니다.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바로 향린교회는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되어야 합니다. 전 어떤 의미에서 지금이 바로 향린교회가 이 거점을 확보하고 새롭게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 안주하며 사라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그 기로에 서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꿈을 얘기하고 거대한 로마의 패권에 저항하며 우주적 생명을 인식하는 진정한 지식인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향린이 어떻게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될 수 있는지? 여러분에게 신앙의 숙제를 주면서 바라기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들에 살이 붙고 숨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는 에제키엘과 같이,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옥좌를 바라보는 요한과 같이 생명과 평화의 우주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