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 뜨겁든지 (요한의 묵시록 4)
열상 18, 16-21, 묵시록 3;14-22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어떤 주제에 대해 반드시 얘기를 해야 하는 압박감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주제가 결정되어 있는 절기예배를 드리는 경우,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고 부활주일에는 부활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지만 이 경우라 하더라도 해석에 있어 선포자의 주체적 여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성서일과표 렉셔너리에 따라서 설교를 하는 분도 성서구절이 구약 신약 시편 최소한 세 개는 되니까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구나가 다 아시다시피 북한 핵에 관련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문제에 민감한 향린교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민족문제에 대해 성서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목회자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북핵과 언론]

오늘 새벽 유엔 안보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결의하였고 이에 북한은 이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강경한 얘기를 함과 동시에 방문 중인 러시아 외무차관을 통해 대화를 통해 한반도내의 비핵화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전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다 아는 얘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느끼는 국내 언론과 국외 언론 사이의 보도의 차이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지난 한 주간 워싱톤포스트와 뉴욕타임즈를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한주간내내 매일 북한의 핵문제를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언론이 북한을 핵실험을 비난하면서도 이렇게까지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부시의 강경노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겨레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언론들은 때는 이 때다 하고 모든 책임을 햇볕정책을 편 김대중정권과 이를 이어가는 노무현정권에 있다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느끼는 바이지만, 이런 주요 신문들의 주장이 너무 단편적이고 그 머리기사 제목을 보면 너무 유치하기 짝이 없어 헛웃음을 자아낼 때가 많은데 이번에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비난의 초점은 그간 남한 정부가 북한에 퍼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뭘 퍼주었다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작년 남북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책정된 예산이 5천억원이었습니다. 이 액수를 남한 4천만 한사람으로 계산하면 만이천원정도입니다. 일주일 혹은 한달이 아니라 일 년에 만이천원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일 년에 점심 두 끼 그것도 6천원짜리 설렁탕 두 번 사주고 퍼주었다고 말한다면 그 친구는 왕따를 당합니다. 개성공단 금강산관광비 다 합쳐도 일인당으로 계산하면 일 년에 몇 만원이 안 됩니다. 일년동안 유흥비로 지출되는 돈을 계산하면 얼마가 될까요? 거기에 비하면 아마 조족지혈일 것입니다.

남한의 일 년 예산이 200조원이었는데 5천억원은 4백분지 일에 불과합니다. 0.25%입니다. 만약 이를 우리가 퍼주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수입의 십의 일을 드리는 헌금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퍼주다의 40배에 해당하는 단어는 뭐가 있나요? 퍼준다는 표현은 너무 많이 주어서 준 사람이 휘청거릴 정도에 이르렀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생색을 내면 주어 놓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겁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쥐꼬리만큼 받았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퍼주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야 치사한 놈 내가 이거 안 받고 안 먹고 말지 그냥 가져가라고 그래.’ 그리고는 그놈을 골탕먹일 심통을 부릴 것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심통이 나서 매일같이 휴전선에서 이런저런 작은 소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해 보세요. 국제신용평가는 계속 떨어질 것이고, 외국 자본은 모두 빠져나갈 것이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민 간다고 야단법석일 것입니다. 이런 정도는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런 천박한 언론에 쉽게 동의하고 비난을 합니다. 남한의 대학진학율이 세계 최고인데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게 모두 돈만 버는 일에 몰두하여 사물을 보는 판단은 너무나 천박하고 유치합니다.

[부시대통령과 미국언론]

그런데 이런 천박함은 소위 세계 최강 미국을 대표하는 부시대통령부터 하는 짓거리입니다. 911 테러의 배후를 잡는다고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하여 이산저산에 폭격을 해되고 결혼식에도 폭격을 하는 등 민간인 수만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밉게 보던 세 나라를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더니, 그중 한 나라인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 핵실험 공장이 있다 빈라덴의 배후자다 등등 온갖 거짓 소문을 퍼뜨려 무력 침략을 해서 그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60만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납치와 자살폭탄으로 하루에도 수십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모하메드를 믿는 서니파와 시아파의 미움의 대결은 후세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을 달해 치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이 미움이 끝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미움과 살인과 저주의 불길을 당긴 것입니까?

부시대통령은 언젠가 김정일위원장을 pigmy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본래 아프리카 적도부근의 키가 작은 왜소한 원주민들을 일컫는 말인데, 미국에서 키가 작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경멸할 때 쓰는 말입니다.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적인 용어라 막되어먹은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이런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일본사람들을 경멸할 때, 키가 작아 형편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왜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요즘은 국민수준이 높아져 이 단어를 쓰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써서 언론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런데 빨간색 혐오즘(레드컴플렉스)에 걸려 있는 상당수의 남한국민들과 국내 언론들은 이런 부시대통령의 발언을 좋아하고 김정일위원장을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미치광이로 보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이번의 핵실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요언론들은 이번의 북한의 핵실험은 전혀 미치광이의 미친 짓이 아니라 매우 이성적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10일 "북한의 핵정책은 전혀 비이성적이지 않다(North Korea`s nuclear policy is not irrational at all)`는 제목의 논평을 실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은 서구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최근 사례일 뿐이다. 또한 이번 사건은 다자간 군비축소라는 검증된 체제로 복귀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치기는커녕 북한의 정책은 매우 이성적이다. 공산정권은 지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미국 정부에 맞서 북한은 억제력을 구축해 왔다. 조지 부시는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해 빌 클린턴 시절 합의된 석유공급을 중단했다. 부시는 이미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정권에 대해서 이라크에서처럼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한 바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배경에는 냉전이 끝난 이후 핵보유국들이 보여준 이중 잣대가 있다. 자기들과 동맹국들은 핵무기에 매달리면서 다른 나라들에게는 핵무기 보유를 용납하지 않는 행태이다. 마치 10대 청소년들이 음주를 한다고 비난하는 알콜중독자처럼, 핵강대국들은 핵무기 확산을 이 시대의 테러로 규정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당시하였다.]

여기서 잘못하면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 잘했다고 얘기하는 것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난한다고 해서 북한을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틀렸다는 양비론만 얘기하는 일은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기에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지 북한이 잘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는 일은 이 한반도 전체를 핵전쟁의 위험으로 몰아가는 일이기에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핵폭탄 자체를 비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전 그런 분들에게 지난 1960대부터 92년도까지 남한에 핵폭탄이 있었을 때는 왜 가만히 있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이야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상대방이 하면 불륜이라는 자가당착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일은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미국이 가진 핵은 안전한 핵이고 북한이 가진 핵은 위험한 핵이다.라는 편견도 잘못된 것이고 북한이 핵을 가졌으니 우리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또한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할 태도는 감정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각국의 서로 다른 입장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북한은 왜 이러한 최후의 카드를 끄집어냈는지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약 이라크에 핵이 있었다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이에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동네에 어떤 힘센 친구가 저 세 놈들은 나쁜 놈들이다 하고 비난하고 한 놈을 잡아다 아예 떡이 되도록 족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은 족을 쳐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다음 차례가 자신인 것을 알면서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과거 그 친구한테 거의 죽도록 두들겨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보기만 하면 불러다가 “너 죽을래?” 하며 한 대 때리는 시늉을 하여 왔습니다. 이는 을지포커스와 같은 계속되는 군사훈련을 말합니다. 북한은 마치 술만 먹으면 집에 들어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와 같이 심한 대인공포증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지 제거의 대상이 아닙니다.

[민족공동체 의식이 아니면 원수사랑이라도]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구석으로 몰면 더 심한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때의 피해는 우리가 당하지 미국이 당하지 않습니다. 전 북한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그 정권이 무너지기만 바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만약 정권이 무너져 북한 주민들이 밀려 내려와 그들이 길거리에서 쓰러져 잠을 잘 때, 자신의 안방은 아니더라도 건넛방이라도 내어줄 용의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럴 자신도 없는 사람들이 막상 일이 벌어지면 책임도 지질 않을 사람들이 정권 무너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무책임한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일말의 책임의식이라도 있다면 지금 그렇게 일방적인 비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 북핵이라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원수 사랑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안 만나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은 아무리 원수사이라도 안보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리적으로 남과 북은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입니다. 저쪽이 죽으면 이쪽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현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면 그뿐이지만, 그 아픔과 불행은 그 자녀들이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의 비상식적인 행태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제된 북한사회만 이상하게 아닙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남한사회도 이상한 사회입니다.

2주전 제가 아내랑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관광지에서 모이면 떠들고 고성 방가하는 비상식적인 행태들은 30년 전과 다름이 하나도 없고, 제가 줄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치기하는 사람들, 비행기 안에서 천천히 순서를 따라 내리면 되는데, 그 좁은 통로를 비집고 몇 발자국 앞서나가겠다고 밀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비애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나이든 분들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이게 모두 젊은이들이라는데서 더 큰 비애를 느꼈습니다. 비행기 탈 때마다 한국 사람들에게 느끼는 비애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도착도 하기 전에 꼭 일어나서 짐을 꺼내며 설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내선이라 이번에도 당연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면서 마음의 비애를 느끼면서 비행기가 서자 저도 짐을 내리기 위해 복도에 섰는데 두세 줄 뒤에 있는 젊은 부부가 그걸 뚫고 나가겠다고 저보고 비켜서라는 것입니다. 저보고 다시 좌석 안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제 앞에 이미 수십명의 사람들이 쭉 서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앞서 간다 하더라도 불과 한두 줄에 불과하리라고 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급한 사람이니까 순서를 따라 내리자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이 젊은 부부가 시비를 걸고 들어 오더군요. 그래 여행 초장부터 김이 새고 말았습니다. 사회의 기본질서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대학졸업을 하면 뭐하고 국민소득 2만달라 3만달라가 되면 뭐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북도 남도 모두 비정상적인 사회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분단에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 분단극복을 위해 우리가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끝으로 북핵문제는 경제봉쇄를 통해 풀려고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효과만 있을 따름이고 궁극적으로는 대화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세계는 로널드 레이건 시절 핵 협상가로 활동했던 막스 캄펠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국가의 핵을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들을 폐기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무와 요한의 묵시록]

오늘은 안병무선생 추모 1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오후 3시에 이 자리에서 추모예배가 있고, 내일은 성공회대학에서 추모강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안병무선생은 향린교회를 시작하신 12명의 창립자 중의 한분이시기도 하지만, 독일의 유학생활 10년과 유신정권에 의해 옥살이를 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오랜 시간동안 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신 중심인이셨습니다. 안수를 받지 않아 목회자라 불리우기보다는 신학자로 교수로 사상가로 저술가로 불리우지만, 지금 현직에 있는 수많은 목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던 스승이시기에 목회자들의 목회자이셨다고 말할 수 있고 한때 세계가 주목했던 한국적 신학인 민중신학 형성에 절대적인 위치를 갖고 계시는 분이기에 오늘 안병무선생을 기억하는 하늘뜻을 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저 또한 그분에게 배웠던 한 사람으로 저의 초기 신학적 사고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의 묵시록 4번째 하늘뜻펴기를 펴면서 안병무선생님의 묵시록 이해에 대해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안병무선생이 성서 전체와 역사를 개괄적으로 맥을 잡아 쉽게 평신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 첫 번째 책, 1972년도에 발행된 ‘역사와 증언’- 이 책을 통해 신학생이던 그 시절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에서 요한의 묵시록을 묵시문학의 하나로 설명하면서, 모든 상징과 숫자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당하는 역사적 현실을 초자연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암호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195쪽) 요한묵시록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민중이란 단어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의 수정판이자 증보판인 1982년도에 나온 ‘역사와 해석’에서 요한의 묵시록에 관련한 묵시문학의 4가지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이는 어떤 위기 또는 박해에 의한 수난기에 발생한다. 둘째 이는 민중적 문학성격을 띠고 있으며 고난 받는 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환상적 얘기체로서 좌절하기 않게 하기 위해서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는 묵시적 언어들은 ‘바로 수난시의 민중언어’이다. 네 번째 여기에는 민중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제목은 다르지만, 이 두 책은 성서개관이라는 점에서 거의 같은 책입니다. 시간적으로도 10년의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성서를 바라다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증언’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민중이란 단어가 ‘역사와 해석’에서는 수도 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책 사이에는 박정희 군사독재 유신정권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직을 당하고 투옥을 당한 개인적 경험과 자유와 해방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민주화 운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안병무교수님의 묵시문학 혹은 묵시록에 대한 근본적 전이가 이루어집니다. 단지 신학적으로 정리된 묵시문학으로 보던 견해에서 사회정치적 문서로 그리고 민중들의 한과 희망이 숨어 있는 민중의 언어로 이해한 것입니다.

[묵시는 민중시이자 민중들의 아우성]

그리고 같은 시기에 ‘민중과 한국신학’이라는 책에서 발표한 글에서는 서구의 묵시문학적인 신학 연구 자체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묵시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을 내세우며 또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역시 묵시문학을 수난당하는 민중의 운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기보다는 그것들의 사상의 계보를 따지고 차이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는 종교사학파의 관심사인 종교현상으로 보는 데 치중하였다는 것이다.‘ 묵시문학파의 발상이나 표현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기 때문에 분석을 꾀하는데서 그 핵심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통틀어 억압당한 민족의 사무친 한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들은 묵시문학을 통해 분노와 복수심, 자기 한계에 대한 한탄, 세상에 대한 증오 그리고 새 세계를 그리는 애원, 힘의 한계를 처절히 경험하는 데서 오는 초월자의 기적적 관여, 심판, 새로운 통치 등을 갈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수난당한 민중의 절규‘라는 대전제를 뺀 어떤 학문적 노력도 별 가치가 없다.”(민중과 성서 68쪽) 그리고 보다 후기 논문에 가면 ’묵시문학운동은 민중들의 아우성이자 운동이었다.‘(역사와 민중 69쪽)고 정의합니다. ’묵시문학‘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예 ’묵시문학운동‘이라고 말합니다. 묵시의 글들을 문학으로 이해하지 않고 정치사회적 민중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유언비어의 문학‘이다라고 정치적 용어로 재정의합니다.(역사와 민중 262쪽) 그리고는 예수님과 같은 동시대에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금욕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던 에쎄네파(세례요한)와 모든 수단을 통해 적을 물리치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젤롯당(가룟유다) 또한 묵시문학파라고 얘기하고 예수운동은 바로 이러한 와중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같은 책 262쪽) 결국 예수운동 또한 묵시문학운동과 같은 맥으로 이해합니다.(263쪽)

김정일위원장의 비공식대변인이라는 재일동포 한사람이 ‘뉴욕과 토교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우리가 여기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사실은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불바다라는 상징적 표현은 성서에 먼저 등장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의 유황불을 받아 소멸된 기록이 있고, 묵시록에는 ‘우박과 불덩어리가 피범벅이 되어 땅에 던져진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어쩌면 북에서 외치는 불바다란 말도 지난 50년 이상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여 생필품과 의약품과 식량이 부족하여 죽거나 중국으로 유랑해야 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실제 힘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보다는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하는 힘없는 자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안병무선생이 ‘묵시문학이란 억압당한 민족의 사무친 한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정의에서 이해한다면 묵시록에 등장하는 ‘불덩어리’라는 말이 로마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초대교인들의 묵시문학적인 저항의 상징 언어였다면 ‘불바다’ 또한 오늘날 로마를 대신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묵시문학적인 저항의 상징 언어가 아닐까요?

안병무선생이 행한 모든 설교문을 다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제가 갖고 있는 설교집에 보니 36편의 설교 중 묵시록을 본문으로 택한 설교는 모두 3편이었고 이는 모두 시간과 기다림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3장의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의 말씀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이고 ‘차든지 뜨겁든지’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유명한 표현입니다.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의 길로 들어가기 전 안병무선생은 특히 키엘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같은 사상적 맥락에 있는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병무선생의 설교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 oder/either or)라는 양자택일의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납니다. 물론 이 양자택일의 기조는 성서의 기본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야훼냐? 바알이냐?

오늘 읽은 구약의 열왕기상 18장 또한 이 전통에서 보면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는 부흥했지만, 종교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때가 아합 왕 시절입니다. 그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았는데,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을 만들고 이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야훼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하십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가뭄이라는 재앙을 내린 것은 바람과 비를 조정하는 신은 바알이 아닌 야훼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가뭄의 3년을 마무리 짓는 사건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왕과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 850명과 대결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백성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늘뜻펴기의 제목이나 성서의 본문말씀은 매번 달라지지만, 이 물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기회만 된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제가 신앙상담을 할 때도 답은 한 마리만 잡으면 되는데, 꼭 두 마리를 다 잡으려고 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결국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라오디게이아와 남한]

묵시록은 본래 사도 요한이 자신이 목회하였던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에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2장과 3장에 걸쳐 이 일곱 교회를 향한 구체적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의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의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은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앞의 여섯 교회들은 모두 칭찬과 더불어 경고와 책망의 얘기가 함께 있는데, 이 라오디게이아 교회만은 칭찬은 전혀 없고 책망뿐입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 지역이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이아는 당시 소아시아의 은행과 금융의 중심이며 특히 모직물 생산으로 유명했고 ‘멘’이라는 의학신전과 더불어 의학교가 있었는데 특히 ‘콜루이온’이라는 안약으로 유명했던 지역입니다. 당시 가장 부유했던 곳입니다. 부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러기에 당연히 신앙의 위기를 보지 못하고 세상과 쉽게 타협하였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 함께’라는 신앙의 구호를 갖고 죽음의 늪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부자되기를 원합니다. 현재 노무현정권에 대한 불만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기 대통령의 선택기준 또한 경제입니다. 그런데 전 우리나라가 경제력 세계 몇 위가 되면 국민들이 이에 만족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위가 되면 만족할까요?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가 180여개 나라가 넘는데, 그게 190개가 된다고 해서 만족할까요? 전 이점에서 우리나라가 참으로 병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내 아들과 딸이 예쁘고 귀여워도 모두가 1등 할 수는 없습니다. 게중에는 2등도 있고 3등도 있고 꼴지도 나옵니다. 문제는 한 인격을 그가 가진 개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성적과 석차로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경제는 한 나라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일 따름이지 그것이 그 나라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경제적인 면만 본다면 인구나 자원에서 볼 때, 남한은 지금이 최고의 수준이라고 봅니다. 물론 노력을 그쳐서는 안되겠지만, 이제는 더 높이 올라가려는 욕심을 버리고 현재의 주어진 삶을 보다 풍요롭게 즐기는 여유를 가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 이상 더 경제에만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것은 결국 자기 패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의 상태를 불평한다면, 그러면 우리보다 경제력이 뒤떨어진 세계 180여개의 나라의 수십억의 사람들은 뭐라고 불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스스로 부자라 말하고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인생도 문제이지만, 맨 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사는 인생도 문제입니다. 자부하는 인생이나 불평하는 인생이나 모두 물질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기에 문제이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있기에 문제이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기에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하나의 악세사리 치장용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욕망실현을 위한 도구일 따름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에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라]

이런 라오디게이아 교인들을 향해 요한은 다시금 경고합니다. “들어라,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주님께서 나의 인생의 문을 두드리신다. 왜요? 왜 주님께서 나의 인생의 문을 두드리십니까?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의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셨나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으시다구요? 주님은 지금도 두드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데요? 혹 집 안에서 너무 분주하게 움직이느라고 못들은 것은 아닐까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음 때문에 못듣는 것은 아닐까요?

안병무선생은 ‘문을 두드린다 함은 인간이 폐쇄 상태에 있음을 전제한다. 이는 새 가능성에 대한 차단을 말한다.’(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301쪽) 그리고는 엘리어트의 ‘칵테일파티’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한 문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열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왜 나는 ’나‘라는 감방에서 나올 수 없을까? 지옥이란? 그것은 곧 나 자신이다. 지옥이란 홀로 있음이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은 한갓 그림자처럼 스칠 뿐이다.’ 사실, 지옥이란 우리의 죽음 이후에만 오는 현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의 현실은 존재합니다.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과 영혼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아파트의 평수와 명예와 세상 권력으로 자신을 대변하는 모든 사람들은 실상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질적 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양적 변화에 만족하는 사람들, 더 많이 소유하거나 더 적게 소유하는 일만을 관심하며 이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은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똑, 똑, 똑....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