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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설교)를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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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3
한가위 감사주일- [감사의 노래를 불러라]
시편 95, 1-11; 마르코 12, 41-44
오늘을 한가위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은 세상 한가위가 너무 분주하고 소란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북핵 논쟁으로 세상은 계속 소란스럽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감사예배는 우리의 신앙이 정말 세상만물을 주관하신다고 믿는 야훼 하느님께 기초한 신앙인지 아니면 입술로는 그렇게 고백하지만, 실상은 다른 무엇을 믿는 신앙인가를 가늠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본래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제사/예배는 출애굽의 해방을 기억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감사야 말로 우리의 신앙의 근본입니다.
[복을 부르는 암호]
한 마을에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고 이 노인은 감사의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자를 많이 구제했습니다. 이 노인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을 일생동안 성실하게 섬겨온 늙은 종이 있었는데 이 종에게는 재산을 주는 대신 주머니 하나를 주었습니다. “여보게나, 자네가 나를 한평생 이렇게 돌봐줘서 고맙네. 그 답례로 자네에게 이 주머니를 주려하네. 이 주머니 속에는 복이 가득 들어 있는데, 언제든지 복이 필요하면 하나씩 꺼내서 사용하게. 만일 복이 다 떨어지면 세단어로 된 암호를 외우면 복이 다시 가득 찰 것일세.”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늙은 종은 복주머니를 유물로 받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복주머니 속에 복이 다 떨어졌습니다. 복주머니에 복을 다시 채우려면 주인이 가르쳐 준 세 글자로 된 문장을 외워야 하는데, 이 늙은 종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늙은 종은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서 혹시, 세 글자로 된 암호를 말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학자는 말하기를 아마도 그 암호는 “나는 갖기를 원한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종이 이 말을 아무리 외워도 그 복주머니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부흥목사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마도 그 암호는 “주님 복을 주세요.”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또한 소용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늙은 종은 배고픔에 지친 몸으로 주머니를 털어서 빵을 하나 샀습니다. 막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그곳을 지나가던 거지아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늙은 종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빵을 반으로 쪼개 주었습니다. 그러자 거지아이는 빵을 받아들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하고 빵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를 듣는 순간 이 늙은 종은 “그래 바로 이 말이다. 그래 바로 이 말이 복주머니의 암호이다.” 그래 이 늙은 종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자꾸만 외웠습니다. 그때 복주머니는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외우는 구호는 어떤 구호입니까? “오 하느님, 나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느님, 나는 많이 갖기를 원합니다.” “오 하느님,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더 사랑해주셔야 해요.” 그래도 우리의 복주머니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호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한지는 몰라도 아무리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욕구를 다 채워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건 우산장수의 소원과 아이스크림 장수의 소원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감사의 길일 것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불만 혹은 불평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가 혹은 불평하는가는 그 사람이 처한 처지나 환경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인간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 들어도 감사하는 얘기만 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 들어도 불평뿐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의 목표를 구원이니 의니 실천이니 하는 복잡한 것들로 세우지 말고 감사에 목표를 두고 자신을 깨우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잠시 생각을 모으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동안 생각이나 말에 있어 감사는 얼마나 했고 불평은 얼마나 했는가? 그리고는 매일매일 반성을 통해 감사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고 그들은 나를 도와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 세상은 행복한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작은 자의 큰 헌금]
사도바울로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3장 16-18절은 성서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면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세상 물질주의적 가치 때문에 이 권면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이런 일들은 특별한 성인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경험, 곧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성령의 체험이라고 믿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가까이 계시는 목사님으로 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 나이가 50이 넘으시고, 홀로 사시는 가난한 여교우 한분이 계시는데, 어느 날 돈 만불(천만원)을 가지고 와서 이 돈을 목사님 원하시는 선교처에 써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겁니다. 지난 삼년동안 세탁소에 나가 바느질을 해서 2만불을 모았는데, 그동안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마음에 아팠는데, 이번에 계돈 2만불을 타면서 만불을 드린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분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사님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삼년 전 술주정뱅이 남편이 이 부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고, 이 분은 자녀도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갈 생각을 하면, 이 만 불은 이분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더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남편에게 맞아서 뇌의 시신경을 다쳐, 한쪽 눈은 실명이 되었고, 다른 한쪽 눈마저 바느질을 하느라 너무 무리를 해서 그 눈마저 아파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진통제만 잡수시면서, 그 아픈 한쪽 눈으로 바느질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픈 한 쪽 눈으로 세탁소 구석에서 바늘귀를 꿰는 그 분의 모습을 한번 상상을 하니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분이 바친 돈 만불은 자기의 한쪽 눈을 바꾼 피 값이었습니다. 단순한 돈 만불이 아니었습니다. 기댈 사람이라고 아무도 없는 이국땅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그분에게 있어서 이 돈 만불은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수십만불 아니 수백만불 보다 값어치가 나가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무명으로 자기 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감사주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헌금궤는 성전문에 놓여 있었고, 당시의 돈은 모두 동전이었기에 돈을 궤에다 넣으면 떨어질 때마다 땡그렁!하고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자랑스럽게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500원짜리 동전입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해하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많은데 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을 털어 남을 돕고자 하고 가진 것으로 충분한 사람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가진 것, 그 최후의 것을 내어 놓는 마음은 정말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신앙의 차원입니다. 세상이 경쟁과 욕심으로,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아무리 얼룩져간다고 하지만, 이렇게 꺼지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 같아요.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 이겨내거든요. 그 연약한 과부의 몸,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내놓을 것도 없는, 병들어 이곳저곳 쓰리고 아파 건들면 곧 부서질 것 같은 그 몸 그 어디에 그런 신앙의 힘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이것은 말로는 설명되지 아니하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자기의 슬픔이 크면 클수록, 자기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고, 감사가 더 높아지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경험되는 역설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비밀이자 역설]
제가 아무리 오늘 감사절을 맞아 주님께 감사하자고 해도 모를 사람은 여전히 모릅니다. 다만,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아픔을 새기고 또 새기고, 한밤중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마냥, 그 마음에 아픔과 한을 끝없이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만이 알아듣는 자기만의 비밀이요, 하느님만이 아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가난하고 아파한다고 다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바닥을 가본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계획을 갖고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자기 힘 때문에 산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고 불만이 생겨나고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불평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허약한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푼 두푼 모아온 돈, 자기의 눈을 바꾼 생명 같은 돈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명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요.” 라고 선언하십니다.’
옛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된 학식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든 경우에 배우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부자가 누구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 것을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참 부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을 많이 가졌을 때 부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가진 자는 얼마마한 부자입니까?
기왕 가지려면 세상의 조그마한 부분을 갖기 보다는 하늘을 통째로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을 때에 갖고 가지 못할 것 보다는 내가 죽을 때에 하늘나라에 갖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에 많이 바치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치졸한 해석이고 보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까운 해석은 이런 삶의 지혜의 깨달음을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얻는 것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감사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신앙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야 말로 만병통치약이다. 왜냐하면 감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인상을 쓰면서 불평함으로 일어나는 분쟁을 막는 예방주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남의 잘못이나 찾아서 비난하려는 분열의 균을 죽이는 마이산과 같은 역할을 하고,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아물게 하고 그 영혼의 상처를 싸매는 연고와 같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플 때, 약을 먹습니다. 또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모든 육신의 병은 마음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마음의 병은 영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감사라는 보약을 먹는다면 우리들의 몸 또한 건강하여 질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아는 은혜의 통로로 그리고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감사의 재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로는 기도해도 고쳐지지 않는 육신의 병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는 약함의 감사요 약점의 감사였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장 8-10절)
[하느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예물]
진정한 신앙인은 나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함을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진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결점과 피하고 싶은 약점을 갖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야훼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나의 가진 약점과 결점과 아픔을 통한 감사를 원하십니다.
옛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자 나를 높이 받는 자이니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50:23)’ 감사의 예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랑스런 예물이 아닌 삶의 약점과 고통의 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서 와 야훼께 기쁜 노래 부르자 감사 노래 부르면 그 앞에 나아가자. 깊고 깊은 땅속도 그분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 바다도 그의 것 그분이 만드신 것, 어서 와 허리 굽혀 경배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야훼께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 이끄시는 양떼.’(95장)
양을 치는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양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가 가진 약점을 보고 그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오른쪽 눈에 점이 있으면 점박이 뒷다리가 절룩거리면 절룩이 항상 뒤에 쳐져 따라오면 끝순이. 주님이 우리의 목자라면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뭐라고 지으셨을까요? 그리고 뭐라고 부르실까요? 그걸 감사의 노래로 부를 수는 없을까요?
우리 민족은 지금 세상의 노리개가 되어 있습니다. 북쪽도 남쪽도 스스로 자신의 정당함을 변명하지만 그건 우리들의 이야기일 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함께 도우며 살아도 시원찮을 형제나라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설쳐대는 모습을 비웃고 있고, 강대국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서로의 세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늘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세상에 200개 이상의 나라가 있고 수백 개의 민족이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와 한/조선민족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실까요? 성성의 이스라엘 나라의 본 이름은 ‘히브리’였습니다. 본래 히브리는 민족의 이름이 아닌 근동에 흩어져 살았던 하류계층 노예들을 칭하는 사회계급을 칭하는 용어였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그들을 고통 받고 억눌린 사람들로 아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지금 우리 민족을 ‘허리 잘린 나라, 동강난 민족’으로 알고 계십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민족이든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그 이름을 세상 이름 대신 기억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도 바울로가 권면한 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시편 95, 1-11; 마르코 12, 41-44
오늘을 한가위감사주일로 지키는 것은 세상 한가위가 너무 분주하고 소란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북핵 논쟁으로 세상은 계속 소란스럽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감사예배는 우리의 신앙이 정말 세상만물을 주관하신다고 믿는 야훼 하느님께 기초한 신앙인지 아니면 입술로는 그렇게 고백하지만, 실상은 다른 무엇을 믿는 신앙인가를 가늠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본래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창조주 하느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제사/예배는 출애굽의 해방을 기억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감사야 말로 우리의 신앙의 근본입니다.
[복을 부르는 암호]
한 마을에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고 이 노인은 감사의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자를 많이 구제했습니다. 이 노인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을 일생동안 성실하게 섬겨온 늙은 종이 있었는데 이 종에게는 재산을 주는 대신 주머니 하나를 주었습니다. “여보게나, 자네가 나를 한평생 이렇게 돌봐줘서 고맙네. 그 답례로 자네에게 이 주머니를 주려하네. 이 주머니 속에는 복이 가득 들어 있는데, 언제든지 복이 필요하면 하나씩 꺼내서 사용하게. 만일 복이 다 떨어지면 세단어로 된 암호를 외우면 복이 다시 가득 찰 것일세.”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늙은 종은 복주머니를 유물로 받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복주머니 속에 복이 다 떨어졌습니다. 복주머니에 복을 다시 채우려면 주인이 가르쳐 준 세 글자로 된 문장을 외워야 하는데, 이 늙은 종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늙은 종은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서 혹시, 세 글자로 된 암호를 말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학자는 말하기를 아마도 그 암호는 “나는 갖기를 원한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종이 이 말을 아무리 외워도 그 복주머니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부흥목사님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마도 그 암호는 “주님 복을 주세요.”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또한 소용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늙은 종은 배고픔에 지친 몸으로 주머니를 털어서 빵을 하나 샀습니다. 막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그곳을 지나가던 거지아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늙은 종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빵을 반으로 쪼개 주었습니다. 그러자 거지아이는 빵을 받아들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하고 빵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를 듣는 순간 이 늙은 종은 “그래 바로 이 말이다. 그래 바로 이 말이 복주머니의 암호이다.” 그래 이 늙은 종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자꾸만 외웠습니다. 그때 복주머니는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외우는 구호는 어떤 구호입니까? “오 하느님, 나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느님, 나는 많이 갖기를 원합니다.” “오 하느님,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더 사랑해주셔야 해요.” 그래도 우리의 복주머니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호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한지는 몰라도 아무리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욕구를 다 채워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건 우산장수의 소원과 아이스크림 장수의 소원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감사의 길일 것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불만 혹은 불평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가 혹은 불평하는가는 그 사람이 처한 처지나 환경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인간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 들어도 감사하는 얘기만 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 들어도 불평뿐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의 목표를 구원이니 의니 실천이니 하는 복잡한 것들로 세우지 말고 감사에 목표를 두고 자신을 깨우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잠시 생각을 모으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동안 생각이나 말에 있어 감사는 얼마나 했고 불평은 얼마나 했는가? 그리고는 매일매일 반성을 통해 감사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고 그들은 나를 도와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 세상은 행복한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작은 자의 큰 헌금]
사도바울로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3장 16-18절은 성서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면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세상 물질주의적 가치 때문에 이 권면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이런 일들은 특별한 성인에게나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경험, 곧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성령의 체험이라고 믿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목회할 때 가까이 계시는 목사님으로 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 나이가 50이 넘으시고, 홀로 사시는 가난한 여교우 한분이 계시는데, 어느 날 돈 만불(천만원)을 가지고 와서 이 돈을 목사님 원하시는 선교처에 써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겁니다. 지난 삼년동안 세탁소에 나가 바느질을 해서 2만불을 모았는데, 그동안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마음에 아팠는데, 이번에 계돈 2만불을 타면서 만불을 드린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분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사님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삼년 전 술주정뱅이 남편이 이 부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고, 이 분은 자녀도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갈 생각을 하면, 이 만 불은 이분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교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더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남편에게 맞아서 뇌의 시신경을 다쳐, 한쪽 눈은 실명이 되었고, 다른 한쪽 눈마저 바느질을 하느라 너무 무리를 해서 그 눈마저 아파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진통제만 잡수시면서, 그 아픈 한쪽 눈으로 바느질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픈 한 쪽 눈으로 세탁소 구석에서 바늘귀를 꿰는 그 분의 모습을 한번 상상을 하니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분이 바친 돈 만불은 자기의 한쪽 눈을 바꾼 피 값이었습니다. 단순한 돈 만불이 아니었습니다. 기댈 사람이라고 아무도 없는 이국땅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그분에게 있어서 이 돈 만불은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수십만불 아니 수백만불 보다 값어치가 나가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무명으로 자기 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복음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감사주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헌금궤는 성전문에 놓여 있었고, 당시의 돈은 모두 동전이었기에 돈을 궤에다 넣으면 떨어질 때마다 땡그렁!하고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자랑스럽게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500원짜리 동전입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해하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많은데 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을 털어 남을 돕고자 하고 가진 것으로 충분한 사람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가진 것, 그 최후의 것을 내어 놓는 마음은 정말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신앙의 차원입니다. 세상이 경쟁과 욕심으로,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아무리 얼룩져간다고 하지만, 이렇게 꺼지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 같아요.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 이겨내거든요. 그 연약한 과부의 몸,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내놓을 것도 없는, 병들어 이곳저곳 쓰리고 아파 건들면 곧 부서질 것 같은 그 몸 그 어디에 그런 신앙의 힘이 숨겨져 있었을까요? 이것은 말로는 설명되지 아니하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자기의 슬픔이 크면 클수록, 자기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고, 감사가 더 높아지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경험되는 역설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비밀이자 역설]
제가 아무리 오늘 감사절을 맞아 주님께 감사하자고 해도 모를 사람은 여전히 모릅니다. 다만,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아픔을 새기고 또 새기고, 한밤중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마냥, 그 마음에 아픔과 한을 끝없이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만이 알아듣는 자기만의 비밀이요, 하느님만이 아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가난하고 아파한다고 다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바닥을 가본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계획을 갖고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자기 힘 때문에 산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고 불만이 생겨나고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불평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허약한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푼 두푼 모아온 돈, 자기의 눈을 바꾼 생명 같은 돈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명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요.” 라고 선언하십니다.’
옛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된 학식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든 경우에 배우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부자가 누구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 것을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참 부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을 많이 가졌을 때 부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가진 자는 얼마마한 부자입니까?
기왕 가지려면 세상의 조그마한 부분을 갖기 보다는 하늘을 통째로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을 때에 갖고 가지 못할 것 보다는 내가 죽을 때에 하늘나라에 갖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에 많이 바치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치졸한 해석이고 보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까운 해석은 이런 삶의 지혜의 깨달음을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얻는 것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감사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신앙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야 말로 만병통치약이다. 왜냐하면 감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인상을 쓰면서 불평함으로 일어나는 분쟁을 막는 예방주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남의 잘못이나 찾아서 비난하려는 분열의 균을 죽이는 마이산과 같은 역할을 하고,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아물게 하고 그 영혼의 상처를 싸매는 연고와 같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플 때, 약을 먹습니다. 또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모든 육신의 병은 마음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마음의 병은 영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감사라는 보약을 먹는다면 우리들의 몸 또한 건강하여 질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아는 은혜의 통로로 그리고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감사의 재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로는 기도해도 고쳐지지 않는 육신의 병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 감사는 약함의 감사요 약점의 감사였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장 8-10절)
[하느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예물]
진정한 신앙인은 나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함을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진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결점과 피하고 싶은 약점을 갖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야훼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나의 가진 약점과 결점과 아픔을 통한 감사를 원하십니다.
옛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자 나를 높이 받는 자이니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50:23)’ 감사의 예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랑스런 예물이 아닌 삶의 약점과 고통의 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서 와 야훼께 기쁜 노래 부르자 감사 노래 부르면 그 앞에 나아가자. 깊고 깊은 땅속도 그분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 바다도 그의 것 그분이 만드신 것, 어서 와 허리 굽혀 경배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야훼께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 이끄시는 양떼.’(95장)
양을 치는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양의 이름을 지을 때는 그가 가진 약점을 보고 그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오른쪽 눈에 점이 있으면 점박이 뒷다리가 절룩거리면 절룩이 항상 뒤에 쳐져 따라오면 끝순이. 주님이 우리의 목자라면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뭐라고 지으셨을까요? 그리고 뭐라고 부르실까요? 그걸 감사의 노래로 부를 수는 없을까요?
우리 민족은 지금 세상의 노리개가 되어 있습니다. 북쪽도 남쪽도 스스로 자신의 정당함을 변명하지만 그건 우리들의 이야기일 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함께 도우며 살아도 시원찮을 형제나라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설쳐대는 모습을 비웃고 있고, 강대국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서로의 세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늘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세상에 200개 이상의 나라가 있고 수백 개의 민족이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와 한/조선민족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실까요? 성성의 이스라엘 나라의 본 이름은 ‘히브리’였습니다. 본래 히브리는 민족의 이름이 아닌 근동에 흩어져 살았던 하류계층 노예들을 칭하는 사회계급을 칭하는 용어였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그들을 고통 받고 억눌린 사람들로 아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지금 우리 민족을 ‘허리 잘린 나라, 동강난 민족’으로 알고 계십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민족이든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그 이름을 세상 이름 대신 기억하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도 바울로가 권면한 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