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는 ‘향린’> 루가 24장 1절-12절

돌아오는 10월30일 다음주 월요일은 저의 서른일곱번째 생일이고, 11월1일 수요일은 아홉해를 맞는 결혼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연초부터 이번 주말을 제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남편인 홍용표 집사와 두 딸과 함께 가족여행을 가기로 거창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몇주전 뜻하지 않게 ‘하늘 뜻 펴기’에 대한 제의를 받아 고심한 끝에 가족여행을 접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다닌지도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5년중 중간 7,8년은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거의 향린을 떠나 있었습니다. 제가 스물두살때인 91년 향린교회는 시간 속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역사성을 띠고 개인적인든 공동체적이든 삶의 현장에서 사랑, 정의, 평화를 외치며 치열한 몸부림을 치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그런 기억들을 안고 제 작년에 다시 향린에 왔을 땐 저에게 향린교회는 더 이상 역사성을 띠지 않는 교회로 비춰졌습니다. 마치 집이라는 공간속에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일정액의 월급으로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만족하며 사는 가정주부의 모습처럼, 또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여 퇴근하며 그래서 똑같은 월급을 받으며, 거대한 조직 속에 안주하려는 셀러리맨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서울 한복판 명동이라는 값비싼 곳에서 십수년의 전통을 과시하며 공간 속에 정착한 그런 교회로 말입니다. 저 또한 이런 교회에서 무기력증에 걸린 늙은 노파처럼 하품이나 하며 편안히 몇 년째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던 저는 마치 주변인처럼 겉돌고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자생력을 갖고 싶어서 였을까요? 내적 동기 부여가 몹시 필요해서 였을까요? 다시 성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다양한 성서마당 중 ‘여성의 눈으로 성서읽기’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중 저에게 가장 뼛속 깊이 파고 든 부분이 바로 예수의 부활 메시지였습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고 있는 저에게 어스름히 비추는 한줄기 새벽의 빛처럼, 저에게 예수의 부활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너무나 흔한 단어지요. 교리적으로 기독교를 지탱해주는 단어이기도 하지요. 단답형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선입견속에 가두어놓았던 ‘예수의 부활 메시지’를 이 시간 저는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오복음 17장 9절에서 13절을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부활에 대해 대화하는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그 말씀이 세례요한인줄 깨달았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소수 사람들은 승천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냐 예수냐며 수군거렸지요. 그러나 정작 예수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이나 예수에 대해 전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르코복음 9장 9절에서 13절까지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물어보다가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해 율법학자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부활 메시지가 없다면 저는 물론이거니와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회의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부활이 단지 당시 일회성으로 끝난 부활이었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 그 부활 사건은 역사 속에 하나의 사건일 뿐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다시금 예수의 부활에 대해 고민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과거 속에서의 부활이 아닌 현재도 앞으로도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시간성을 갖는 부활입니다. 예수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심지어는 제멋대로 다루어지기까지 하는 미천한 존재로 부활하십니다. 예수의 정신, 그 맥락을 이어가는 사람이 부활한 예수가 아니겠습니까? 부활은 일회성이 아닌 지금도 역사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안병무 박사는 강남향린교회 창립예배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예수는 있다. 지금도 살아있다. 2천년전의 예수가 아니다. 오늘날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 우리의 거리에 살아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없다. 순교하는 놈이 한명도 없다. 교회 밖에는 있다. 자꾸 죽어가지만…교회는 없어”라며 눈물로써 호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예수의 정신,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기를 두려워하는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고난의 현장과 부활의 현장에서 증인이 된 갈릴래아 여인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받는 사람들은 국가에 반역하며 백성을 선동하는 자, 즉 정치범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자리에 있는 다는 것은 처형당하는 자들과 한패거리로 몰리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래아의 여인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켰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에서 10절에 보면 갈릴래아 여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열려 있었고 예수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흰옷 입은 청년만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들은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고 말했고, 여인들은 지난날 예수가 그녀들에게 다시 살아나겠다는 말을 떠올리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헛소리려니 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또한 예수의 손과 허리에 못 자국을 찔러본 다음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을 떠올리며 갈릴래아 여인들이야말로 예수를 진정 사랑한 사람들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그 말’을 기억했던 갈릴래아의 여인이야말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갈릴래아 여인들의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당시는 여인들의 바깥출입을 금하던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모든 것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소외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예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희망이었고 진리였습니다. 어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도 갈릴래아의 여인처럼 부활한 예수를 보지도 않고 천사들의 말만 듣고도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의심 많은 토마스처럼 못 자국을 보여 달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예수를 사랑한다 할 수 없지요. 우리 모두 예수를 다시 묵상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난날 통일을 위해 그 누구보다 더 앞장섰던 문익환 목사님나 힘없는 노동자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죽어갔던 전태일님 이외에도 이름도 빛도 없이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었던 많은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예수는 어느 노동자로, 혹은 택시 운전기사로, 혹은 노숙자로 부활하여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천히 여기며 살고 계십니다.

오늘은 기독교 개혁주일입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기독교 개혁이라는 거창함보다 향린 안을 다시금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안병무 박사의 말처럼 향린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전통이나 혈연 등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닌 미래를 향해 달리는 공동체로 거듭나길 내 자신과 향린공동체에게 당부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이야기로 ‘하늘뜻 펴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영화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여인이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0가지를 정해 하나 하나 이루어 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입니다. 여인은 남겨진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그녀가 없는 그녀의 인생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는 18세까지 생일 때마다 축하메시지를 녹음해두고, 남편에게는 아이들과도 어울릴 새 아내를 찾아줍니다. 그녀가 없는 그녀의 인생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이지요.

나 없는 ‘향린’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목록을 적어봅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모두다 여러 가지 이유로 향린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떠난 자리만 남기렵니까? 우리들의 아이들만 남기렵니까? 나 없는 향린에 내가 계속 남아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향린은 결코 늙지 않을 것입니다. 향린은 역사속에서 꿈틀거릴 것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예수공동체로 다시 부활하는 향린의 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