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가 본 기독교 개혁 / 창세기 12, 1-4

오랜만에 이 자리에 서는 것 같습니다. 2년전 집사 직분을 반납하고 나서 예배시간 감사기도 순서를 맡지 않게 되어 내심 좋았는데, 결국은 휠씬 무거운 짐을 지고 서게 되었네요. 제가 집사 직분을 반납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집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교회 내에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의 직분이 역할분담보다는 무슨 신분이나 서열로 여겨지는 한국교회 문화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평신도 주도적 내지는 평신도 중심적 가치를 표방하는 우리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서열화의 요소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교회 활동을 다수가 조금씩 분담하기보다는 소수에게 편중되는 현상은 여전하고, 장로니까… 권사니까… 집사니까…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세속적 가치가 관철되는 것이 가끔 보여 싫었을 뿐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같이 아무개 선생님 하고 부르며 서로 존중하던 과거의 향린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희망사항일까요?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여 기독교개혁주일로서 오늘을 지키지만, 저는 루터가 했던 진정한 의미의 위대한 일은 그가 도피시절에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평신도에게 성서를 돌려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존 위클리프가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일이 있었지만 수고가 많이 드는 필사본이기 때문에 보급이 제한적이었을 것입니다. 루터 이후에 유럽 곳곳에서 개혁가들이 자기 나라말로 성서를 번역하였고, 구텐베르크 인쇄기술과 맞물려 성서가 빠른 속도로 배포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평신도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서를 접하게 되면서 그동안 몰랐던 뜻밖의 소식 즉, 복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의 역사(役事)가 다시 살아나면서 근대로 향하는 변혁의 역사가 새롭게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루터의 기독교(종교)개혁 사건은 이후 수백년간에 걸쳐 의무교육, 봉건적 신분제 철폐, 시민혁명 등 근대시민사회로 이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하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개신교는 새로운 사제계급의 출현, 도그마화, 교권에 대한 신봉 등으로 인해 다시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말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하느님사랑과 인간사랑의 근본정신을 망각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 사치스런 예배공간, 복잡한 전례, 방어용 교리 등과 같은 겉치레가 늘어나고 규칙을 만들어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기보다는 차이점을 부각하여 서로 대적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세우려 하기 마련이고, 심하면 서로를 죽이는 짓도 서슴지 않지요. 특히 오늘 본문에서 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뿌리로 하는 일신교들 즉 유다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정말 전투적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유다교도 15백만명, 이슬람교도 13억명, 기독교도 22억명 정도로 다합치면 전세계 65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니 본문의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예언이 실현된게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하느님을 섬기면서 이렇게 민망하리만치 서로 적대적이니 지하의 아브라함이 지하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반해 개혁가들은 종교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주었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으며, 규칙은 간단명료했기 때문에 매우 유연하고 포용적이었습니다. 성서를 평신도에게 돌려준 루터의 경우에도 후대에 비판받지요. 자유와 해방정신에 도취된 재세례파들과 연관되어 있는 독일농민들의 반란을 탄압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무식한 농부들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셨지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얼마나 간단합니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모두 쉬운 말로 되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는 제자들에게 성서의 다른 거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산상수훈만 읽고 그대로 행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복음은 그에게 있어 단순히 삶의 공식이었고, 그는 당대의 유식한 문화에 대한 반대명제를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복음을 어떤 알레고리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일반 민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해석이나 주석이 복음의 힘을 거세시킬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종교개혁, 민중교회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주장도 쉽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이에게 굴복하여 모든 이를 하나같이 섬겼고, 도둑이나 맹수에게 축복을 베풀 만큼 포용적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개혁가 원효대사는 깨달은 바를 세상에 나눠줄 수 없다면 팔만대장경도 고름닦는 걸레에 불과하다고 보고, ‘무애가’라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한 노래를 부르면서 중생구원에 나섰지요.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성 프란치스꼬, 원효대사… 이분들 앞에서 우리가 불완전하고 노쇠하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이들은 아주 먼 옛날 각기 다른 곳에서 살았던 분들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새로운 자요,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미래를 지닌 자들로 보입니다. 이분들이 추구한 개혁과 해방 프로그램의 핵심에는 인간의 혁명이 있었다고 봅니다. 인간혁명을 성서 용어로 하면 ‘회개’ 또는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여년전 안병무 선생님도 모든 제도나 조직의 변혁보다 인간혁명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1년전 정관을 제정했고, 최근에는 실천적인 내용을 담은 신앙고백문을 새로 만드는 작업을 개시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게 제도 개혁에만 그치고 여기 모인 한사람 한사람의 내적인 자각과 실질적인 변화에는 미치지 못할까 우려되어서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만들어만 놓고 우리의 개혁의 소임은 다했다는 자기만족에 빠질 위험조차 없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개혁은 제도나 조직의 변혁에 앞서 개개인의 회개와 거듭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어떤 점진적인 개선의 길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혁명을 뜻합니다. 철저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미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것들을 그대로 안고 간다면 새로운 존재가 되거나 새 세대에 참여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시는 야훼의 분부에 대해 아브라함이 두말 없이 그대로 따라 길을 떠나는 이야기와 같은 상황이지요.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 가운데 그는 많은 어려움도 겪고, 인간적으로 비겁한 모습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정수를 몸소 보여주었고, 후대에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거듭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동구권과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급진적 혁명운동이 퇴조를 보이던 시기에 제가 몸담던 기독교 동아리는 해방의 이념이 아닌 수도원적인 영성을 통해 힘을 얻고자 수도원을 찾아 다니면서 다양한 영성훈련법을 배웠고, 저도 무수한 영성서적들을 읽으면서 내적인 수양 속에서 더욱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광야생활을 하는 훈련을 거듭했었습니다. 그러나, 취업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처음의 결심이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말대로 쉽게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광야생활이 힘들어지고 자꾸 변명의 논리만 늘어가고 무기력해져 갔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로 결단한 나는 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돈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자본주의 구조를 변혁하는 입장에 서지 않는가? 그건 “현재”에서 얻은 것, 얻은 자리, 기득권을 절대로 고수하려 함으로써 그것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면 “현재”라는 기존 질서에서 소외되어 버립니다. 그와 더불어 나의 온갖 기득권도 박탈당하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제국적 체제의 힘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걸 느끼며 절망합니다. 그에 비하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미약하구나… 작년초 우리집 소유권 등기를 하면서 갈수록 커가는 중력의 힘을 느꼈습니다. 나는 가난한 형제들을 섬기고 희생할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유지 또는 개선하기 위해 경쟁사회에서 남보다 앞서려고 달리면서… 그러면서 무슨 여유로 형제들을 도울 있을까? “현재”의 가치에서 내 삶을 보장 받으려고 노력하는 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새로운 세계가 오고 있다고 꿈꾸었고, 그 꿈을 그대로 선포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읽거나, 예수님, 성 프란치스꼬, 원효대사의 이야기들을 접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세상을 벗어나는 것, 다른 이들을 보다 지성으로 섬기는 것, 가난한 이들과 보다 다정하게 살고, 자연을 보다 훌륭하게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가 정말로 오는 것처럼 믿어지거든요. 그러나 정작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부르심에 대해서는 주저주저하는 나 자신을 봅니다. 나를 유혹하는 “현재” 다시 말해 “이집트의 고기가마”에 머물고 싶고,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는 당연히 크고 작은 고난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이렇게 고뇌하다 주저앉아 버리는 니고데모인데 무슨 자격으로 거창하게 기독교 개혁의 이념이나 이상을 논하겠습니까? 제국적인 체제 앞에서 연약한 존재인 우리 모두에게 인간을 신뢰하고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제국적인 체제를 떠나는 새로운 선택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