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요한의 묵시록(7)-유배당한 사람들
이사야 54장 4-10절, 묵시록 1장 9-11절

[묵시록과 정치적 상황]

성서를 읽을 때는 본문(텍스트)과 상황(컨텍스트)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흔히 성서 자체를 본문이라고 말하지만, 성서 안에도 본문과 상황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이 둘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한 후에 오늘의 상황에 대비하면 성서는 우리에게 오늘의 하늘말씀을 들려줍니다. 특히 요한의 묵시록을 읽을 때에는 이 글이 씌어진 시대적 상황을 분명히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은 로마라는 정부가 단순한 통치제제가 아닌 신적체제로 바꿔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직전 시이저의 뒤를 이은 로마의 통치자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사라는 칭호에서 아우구스토스라는 칭호로 바꿔지게 되는데 이는 단지 황제 칭호의 차이가 아니라 신의 자리에로 올라서는 칭호였습니다. 그 이후 네로를 비롯한 로마황제들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황제숭배를 하지 않는 신앙인들을 무참하게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야훼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삶의 윤택과 복지를 보장하는 축복의 길이 아니라 박해와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빼버린 채 묵시록을 읽는다면 묵시록은 단지 죽음 후의 세계를 그리는 하나의 신비적 종교 문서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 저항이자 동시에 정치적 저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있어 로마 황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주(주인님)로 부르는 일을 거부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과 상황 1: 로마인들에게 보여진 그리스도인들]

세계의 중심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고 그리고 권력은 한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라 부르며 경배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고, ‘로마의 평화’는 영원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어디에서나 Pax Romana가 외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한 작은 집단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별로 들어보지도 못한 로마의 변방 팔레스틴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유대왕국의 후예들이었고, 로마에 대항하였기에 불타 없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라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것과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이에 기초하여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지킨다는 것 밖에는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들 안에 새로운 분파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팔레스틴의 변방 북쪽 갈릴래아라는 곳에 태어난 예수라는 청년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회적 약자들과 3년가량 살다가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소요케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고발을 받아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 죽은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였다고 주장하고 그를 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당시 로마제국 안에 살던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집안의 내력도 없고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그가 한 일이라곤 사회적 약자들과 어울렸고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려냈다고 하는 확인할 수없는 헛소문뿐인 사람이 어떻게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라는 사람이 그의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대결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팔레스틴만이 아닌 여기저기에 나타났기에 그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른 때와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따르는 사람들이 더 늘어만 간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박해를 하면 할수록 더 완강히 버티고 목숨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 자신들도 신을 경배하는데 로마 황제를 덧붙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워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반황제파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바울로가 로마서 13장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하고 세상 권력자들을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도 바울로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써서 보낸 교회 중에는 바울로가 개척한 교회도 있어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로와는 달리 로마의 권력에 대해 매우 완강했습니다. 로마는 사탄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국민들을 하나의 통치체계로 묶어가려면 로마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는 일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시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상황 2: 천국과 지옥 이야기]

따라서 요한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천상의 싸움은 단순한 종교적 환상이 아닌 매우 구체적인 현실의 자기 투쟁이었습니다. 달에 사람의 발자국을 남기고 화성에 탐지위성을 보내는 오늘날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는 매우 유치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는 결코 천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도 저는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신앙을 유치하거나 천박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신앙이 자신만의 믿음을 절대화시켜 배타적이 신앙인이 되게 하거나 혹은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타계신앙이 되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눈을 감게 할 때 이 신앙은 유치하거나 천박한 것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결코 천국과 지옥을 그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악마인 붉은 용으로 보고 로마의 황제들은 일곱 머리와 열 뿔로 보면서 하느님의 용사 미가엘 천사군대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환상이 아닌 이 땅에 임하는 주님의 나라 곧 천년왕국의 세계를 향한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신앙 투쟁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투쟁의 기록을 일곱 교회에 보내 성도들로 하여금 읽도록 하였습니다.

이점에서 묵시록은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들의 고통과 그 희망을 담은 사회적 전기(social biography)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죄악과 슬픔,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을 견디면서 용기와 희망을 품게 하는 민중들의 이야기입니다. 헬만 헷세의 소설 [데미안]의 표현을 빌린다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폭력의 세계를 깨고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평화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그려진 천상과 지하세계의 이야기들은 믿음의 자기실현과 투쟁을 설명하는 재료일 따름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헌신과 고통 없이는 하느님의 의의 승리는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요한이 유배당한 상황에 초점을 맞춰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유배란 살던 곳으로부터 강제로 쫓김을 당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유배당한 사람들이란 오늘날에 있어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우선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국가 권력의 포로가 되어 다른 곳으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과 같이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 살던 곳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제4세계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제는 아니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많은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북한의 새터민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유배당한 사람들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삶의 뿌리가 뽑힌 채 변방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배는 성서에 있어 결코 낯선 주제가 아닙니다.

[출애굽과 바빌론 유배 이야기]

우리는 흔히 성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얘기하라고 하면 출애굽사건을 듭니다. 물론 출애굽이라는 엑소더스 사건 문자적 의미로 (Exodus=out of way) ‘길 밖으로’의 사건은 힘에 기초한 인간 역사의 길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습니다. 노예들이 탈출하여 가나안이라는 곳에 새로운 민중해방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왕을 중심한 통치제제를 거부하고 야훼 하느님만을 통치자로 삼아가는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이자 성서의 출발이며 신구약성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대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해방 사건에 맞물려서 변주되는 또 하나의 대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빌론유배사건입니다.

500년간 지속되던 왕국이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수천명에 이르는 핵심 집단이 통째로 오랏줄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 그발강가에서 60년을 살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은 성서안의 또 다른 대주제입니다. 엑소더스의 해방사건과 바빌론의 유배사건은 성서라는 타원형의 두 중심점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가는 창조와 해방을 가져온 기쁨의 사건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뿌리를 뽑히는 유배와 억압을 가져온 슬픔의 사건입니다. 인생이라는 곡도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연주되듯이 성서도 기쁨과 슬픔의 주제가 번갈아 연주되는 하늘의 교향곡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보면 60여년의 바빌론 유배기간은 매우 짧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바빌론의 침공을 경고하고 있고 성전의 파괴와 유배를 당하는 아픔이 있고 귀환의 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에즈키엘은 바빌론에서 활동을 한 예언자입니다. 에즈라 느헤미야 같은 책은 바빌론에서의 귀환과 관련된 책입니다. 시편의 많은 노래들은 바빌론 유배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편이 137편입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이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출애굽사건이 구원과 해방이라는 기쁨과 승리의 주제를 안고 있다면, 바빌론사건은 포로와 억류라는 슬픔과 고난의 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간 해방신학을 포함한 제3세계의 신학들은 출애굽 사건에 너무 집중하여 왔습니다. 민중신학 또한 자유와 해방의 관점에서 엑소더스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바빌론 유배가 담고 있는 한과 고난의 주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점이 있습니다. ‘한’을 얘기하기는 하였지만 바빌론 유배에 깊게 연계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배로서의 이민자들]

전 목회학박사논문에서 이민신학이라는 주제 하에 바빌론의 유배사건을 중점으로 다루었습니다.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만, 7, 80년대만 해도 미국의 한인 이민자들은 주로 고국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영어와 문화의 장벽 게다가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로 인해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영주권이 없어 쫓겨나갈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빈손으로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오직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면 그것은 돈을 버는 일입니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하루의 휴식도 없이 밤낮을 두 개의 직장을 오가며 10년 20년 뼈 빠지게 일을 했습니다. 그래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가게터를 마련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기대했던 행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간 아파도 병원진찰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에게 갑작스레 말기암의 선고를 받는 경우도 있었고, 집만 구입하면 재미있게 살자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중년 부부들의 뿌리 깊은 갈등과 거기에 곁따른 자녀들의 탈선문제로 가정마다 아픔 투성이였습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도 많았지만,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적인 구조의 문제도 많았습니다. 기독교 목사로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는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단지 위로와 희망을 외치는 설교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한인의 후예로서 고국이 겪고 있는 독재와 분단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답을 해야 하는 신학적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출애굽 사건에서만 조명하던 아시아의 이민신학을 바빌론 유배에 연계하면서 민중신학과의 연대를 시도했습니다. 제 논문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3개의 기둥 곧 성서와 회당과 랍비들은 모두 바빌론 유배에 그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자기 말을 갖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 때는 성서라는 정형(定型)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에 새롭게 태어난 2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거대한 주류 문화에 휩쓸려 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고 구원해낸 과거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재해석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창세기 1장을 포함한 모세 5경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성서비평학에서는 P문서(Priestly Writings, 제사문서)라고 부르는데 이 P문서는 바빌론 유배를 배경으로 한 문서입니다. P 문서에는 안식일과 할례와 정결법 등이 주요 주제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바빌론 포로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한 종교문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거대한 바빌론의 주류 문화에 대항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약자로서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몸부림(code)이었습니다. 상황을 배제하면 종교적 문서가 되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공동체의 자기정체성 지키기라는 몸부림의 발자취가 되는 것입니다.

또 야훼 하느님이 거한다고 믿었던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들은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필요로 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바빌론의 마르둑 신을 넘어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야훼 하느님을 새롭게 고백해야 했고,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 장소에 연연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공공모임과 교육의 장소로만 이해되던 회당이 종교적 성전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여기에 기초해서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밖으로 번져갈 수 있는 신앙적 토대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예루살렘 성전에는 레위 지파들만으로 이루어진 사제계층이 있었지만 포로로 끌려온 후, 새로운 상황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대신하는 새로운 평신도 지도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랍비운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가면 이들이 바리새인들이라는 지배계층으로 변질되지만, 본래는 민족의 멸망이라는 위기 속에서 그 민족의 얼과 야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평신도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중심이 되는 성서와 회당과 랍비들이 모두 바빌론 유배에 그 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한인 이민자들의 역할을 본 것입니다.

[변방인으로서의 이민자들]

물론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한인 이민자들은 지역적으로 단지 미국만이 아닌 중국이나 일본 소련연방에 흩어진 수백만의 한인의 후예들을 포함하는 것이고 단지 고국을 떠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역사의식은 있지만 힘에 의해 사회의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밀려난 계층으로서의 주변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전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것처럼 남은 자들에 의해, 남은 소수자들에 의해 새롭게 씌어지고 있는데, 그 남은 소수자란 주류에서 밀려나 변방에 사는 자들이다. 곧 유배당한 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변방에 있으면서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변방에 있지만 그 의식에 있어서는 변방인이 아닌 중심인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신앙을 통해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참 예수 따르미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잔은 단지 죽음만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제자들과 민중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의 지배를 물리치고 중심에 서보려는 내면의 유혹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기 위한 정의의 투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때로는 혁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로 잡겠다고 혁명을 일으킨 세력들은 권력을 잡은 이후 끝내 부패하고 마는 진리를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물론 쿠바와 같이 아직도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옛 혁명당시의 의복을 입고 있는 카스트로가 있습니다. 전 쿠바의 혁명에 대해 지식이 짧고 가보지 않아 아직까지 판단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의 손길을 뿌리치고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의 밀림지역으로 그리고 끝내는 볼리비아로 가서 그 생명을 마치게 된 것은 중심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중심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 권력의 맛에 물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자기 한계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땅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

전 지난주 3박 4일 동안 오끼나와를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대추리의 아픔이 단지 우리만의 아픔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진하고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오끼나와 사람들을 만났고, 세계를 군사적 힘으로 제패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오끼나와는 본래 130년 전만 해도 류코왕국이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독립왕국이었습니다. 중국과 조선 필리핀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다가 결국 일본의 칼잡이 사무라이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맙니다. 단 3천명의 사무라이들에게 나라가 빼앗겼다는 사실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그 후 우리 조상들이 일제 말기에 경험했듯이 성씨 개명을 강요당하고 자신들의 언어마저 금지당하고 일본화를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2류 국민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2차대전시에는 일본이 본토에서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오끼나와에 최전선을 구축하고 그 주민을 볼모로 삼아 참혹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들이 겪은 이야기에는 어쩌면 제가 아는 6.25의 참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컴컴한 동굴에 피신한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은 미군에 포로가 되면 모두 능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일제의 세뇌공작으로 엄마가 자기 자식을 죽이고 자기 목숨을 친구의 손에 내어맡긴 채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더욱 한스러운 것은 생존자들은 이런 얘기조차 지난 30년 동안 침묵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서 전쟁 시작 불과 3개월만에 주민의 4분지 일인 20만이 희생당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민간인으로 일본군에 의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하려고 하면 일본군이 죽였고 대항을 하면 미군이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듯이 미국은 일본의 배상 책임을 오끼나와인들에게 물어 그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1972년도에 일본으로 기지가 반환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성조기가 펄럭이는 미군들의 점령지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반도가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분단이 되었듯이 그들 또한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오끼나와는 크기로 보면 일본 전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일본내에 있는 미군기지의 75%가 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비행장 활주로가 버티고 있어 계속해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 굉음으로 인해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아름다운 해변은 미군들의 철조망으로 인해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실상 세계 2차 대전으로 패전국이 되었지만 중국과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의 군사전략으로 인해 지금은 세계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경제혜택 대가로 일본은 땅을 미국에 군사기지로 내어 주었는데, 그 땅이 거의 대부분 은 오끼나와인들의 땅이고 그리고 그들은 서류상의 국적은 일본인으로 되어 있지만 스스로는 일본인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미군기지로 인해 경제적 혜택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끼나와에는 제대로 된 공장도 없고 일본 본토의 실업률은 4%이지만, 오끼나와의 실업율은 8%입니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유배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군사기지로 내어주고 변방에 밀려 살아가고 있는 현대판 포로들이며 한으로 가득 찬 슬픔의 민족입니다.

[시마다 겐지목사님 이야기]

그러나 우리 방문단 일행은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면서 꺼지지 않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다음 주에 임보라목사께서 얘기할 수 있도록 두 사람만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시마다 겐지라는 목사님이 27년 전 미군기지 철수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매우 개인적이었습니다. ‘딸이 때어났는데, 전투기가 뜨고 내릴 때에 굉음으로 인해 젖을 먹지 않고 잠을 자지 않으며 때로는 벽에 머리를 박는 등 이상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청에 민원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들도 동감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얘기했습니다. 자민당 출신 시장은 미군기지가 일본에 돈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미군 기지사령관을 만나 항의를 하였습니다. 처음 만난 사령관은 ”목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목사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그래 답변하기를 ”그래 지금 너에게 설교하러 왔지 않느냐.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목사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미군기지로 인해 조상대대로 살아온 이 땅은 인간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시작하였지만 교인들은 떠나가고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또 잡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미군주둔의 피해를 알리는 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03년에 시작된 16번째 기지반환 재판이 지난 목요일에 열렸습니다. 그날이 떠나는 날이라 재판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겐지목사님은 말합니다. ‘미국의 힘 앞에서는 일본 법원도 별수 없을 것이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 강정구교수라는 분이 계신다. 그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한 글로 인해 국가보안법에 고발을 당해 현재 교수직을 박탈당한 상태이다. 16일 같은 날 오전에는 당신이 재판을 받고 오후에는 그분이 재판을 받는다. 우리는 이점에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난 당신들의 뜻대로 미군기지가 반환되도록 기도하고 나아가서 오끼나와의 독립까지도 기도하겠다. 당신 또한 미군기지가 없어지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그리고 남북이 통일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겐지목사님은 지금은 인쇄기가 낡아 대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3년 목회를 하였지만 교인들은 8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열성적으로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언제 9명이 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까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교인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번째 교인이 된 사람은 미군과 결혼한 한국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수요일에는 일행 16명은 4개 교회로 흩여져서 현지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참석한 교회에는 모찌스끼 목사와 교인 6명, 한인목사 4명과 유학생 통역 모두 12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오끼나와는 지금 일본 내에서도 2등 국민으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8세의 모찌스끼목사는 오끼나와 평화운동에 참여하고자 오사까 출신으로 이곳에 왔고 아예 호적까지 오끼나와로 바꾸었습니다. 그날 본문은 히브리서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서 13장 12절의 말씀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을 읽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문 밖이란 당시 죽음의 골짜기 골고다를 뜻합니다. 그곳은 인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자신의 안에서 밖으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버림받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군 해병대가 쓰는 성경책을 보여줍니다. Good News 라고 표지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표지 색깔은 미해병대 옷 색깔로 되어 있었고, 오른쪽 하단에는 해병대 마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성경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의 내용은 우리가 읽는 성경책과 글자 하나 다름없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군대용으로 만들어진 그 성경책을 보면서 그들은 전쟁 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는 그 일을 성서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온 몸에 전율이 왔습니다. 물론 300년 전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올 때에도 성서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엑소더스의 길]

평택 대추리 도두리에서의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은 실패로 끝난 듯이 보입니다. 도두리 주민들은 정부의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분들도 이제는 싸움에 지쳤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의 그분들의 투쟁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대추리에 40여 주민만이 남았습니다. 정부는 김지태이장에게 공무집행방해죄로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지만 그로부터 다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자진 출두한 그에게 이미 5개월이나 구속되어 있던 그에게 2년의 형을 내린 법원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을 받고 국민을 보호하는 법원인지 아니면 미군의 군사법정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지태 이장은 어떤 보상을 바라느냐는 말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너른 들판을 사시겠다고?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다.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 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 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답이 나올 것 같다.‘

우리는 대추리 도두리의 아픔을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평화에의 투쟁의 길에 함께 하기도 하며 농민들의 한숨과 몸부림을 보았습니다. 전 오끼나와에서 제국의 폭력에 의한 피비린내를 맡았고 고통과 신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서 안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고통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들의 신음 소리와 바빌론 그발강가의 한 맺힌 이야기들과 로마의 폭정 아래 떠돌아 다녀야 했던 4천명 5천명의 배고는 소리와 육신의 아픔 때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을 그리워하는 병든 자들의 신음과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여인들의 한의 소리와 파트모스 섬의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문 밖에 거하는 변방인, 주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음소리와 고통의 소리가 하늘에서는 찬양의 노래가 되고 승리의 찬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성서가 지시하는 엑소더스의 길 곧 ‘길 밖’이란 곧 하느님의 역사는 성문 안에 있는 주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문 밖에 거하는 유배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진리의 길을 말합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대추리의 무너진 학교의 폐허 위에 진달래와 민들레의 꽃들로 만발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말 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현실을 판단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 우리의 미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우리를 짓누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글을 읽었던 초대교인들이 로마의 원형장 안 사자들의 울부짖음 앞에서도 조금도 굴함 없이 나아갔던 것과 같이 지금 자신의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패권과 자본의 힘 앞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평등과 자유와 평화의 깃발을 들고 조금도 굴함 없이 계속 전진하여 나아가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