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할 그 분,
잠언 8,22-31/ 요한 1,12-13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장은 로고스론이 나옵니다. 당시 희랍세계는 참된 것, 본질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substance(본질)로 불리우며, 문자적으로는 “근본에 있다”는 뜻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existance(실존)이라고 했는데, 즉, 밖에 있다는 뜻이며 본질이 밖에 투사된 그림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그리이스-로마의 거대한 제국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을 정복하고, 정복당한 백성들의 부와 노동력을 쥐어짜서 더 큰 군대, 더 큰 권력을 누리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귀족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철학에 불과합니다. 이 철학은 사회의 불합리, 억압, 말도 되지 않는 불평등, 신분주의를 그대로 운명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이데아의 세계, 완전한 세계로 복귀할 터이니, 그때 진짜 자유가 우리 앞에 자연적으로 올 터이니, 여기서는 무조건 참고 지내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은 저주받은 삶이고, 본질이 아니고, 단지 잠깐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니, 큰 의미를 두지 말 저 세계에 의미를 두라는 괴변으로 저항정신을 무디게 하고, 그들의 불만을 달래가며 자신들은 그 틈에 최고의 것들을 옹골차게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즉 로고스, 이데아이신 하나님, 참 빛,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살을 입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세계관 이원론을 송두리째 부수고, 우리가 살고 만지고 느끼고 보는 이 세상이야 말로 참이신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이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본질의 세계이기에, 그들이 저주하고 제외한 이세상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영접한다’는 것은 희랍어로 람바노인데 받아들인다, 웅켜잡는다(get, recieve, accept, grasp)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요즈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큰 의식을 치루어 가며 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의식이 이에 해당했는데, 세례식 이외에 영접의식을 별도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를 영접한다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면 우리의 존재가 구원,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도식적, 주술적으로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멍멍이가 하늘에 대고 우엉하고 짖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받아들입니다.”라고 하면 존재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고, 하늘과 땅의 생명록이 바뀐다는 식의 유아적 상상이나 주술로 복음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생각과 신념만으로 우리의 운명이 바뀐다고 믿는 것은 “열려라 참깨”하면 문이 열린다고 보는 주술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주술에 병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고작해야 부뚜막 귀신 정도로 만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 자신에 대해 “내가 곧 나”(εγω ειμι- 에고 에미)라고 밝힙니다(8,24; 28등). 이것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모세를 향하여 자신을 “???? 야훼-나는 곧 나다”라고 밝히신 야훼라는 명칭을 희랍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당시로는 한 시골 청년에 불과한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야훼이다”라고 감히 선언하였습니다. “내가 곧 야훼이다.”라는 대담하신 말씀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너희들도 하나님이다.”라는 비밀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의 새로운 존재를 밝히시려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고 아버지 안에 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한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보았다... 너희도 아버지를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하나님이다....너희도 신이다.“

요한복음의 구조를 보면 예수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예수와 우리들과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하나님과 청중의 관계로 연결되어집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듯이 너희들 모두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밝히시는 것은 자신 만이 아니라 그 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 즉, 우리들의 존재까지도 포함한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어디서 시작됩니까?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만나는 시점, 모태로부터 시작됩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선재(先在)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이미 창조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분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선재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선재로 이어집니다. 오늘 봉독한 잠언의 본문을 봅시다.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낫다
..........
나는 그 분의 곁에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 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언 8,22-31).

물론 이것은 우리가 흔히 “지혜의 선재”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제목을 붙여 당연히 지헤에 관한 이야기다 하고 넘어가버리면 그 본 뜻을 놓치기 쉽습니다. 만약 지헤가 선재하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하는 주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지혜를 덧 붙여 4위 일체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지혜’ 또한 인간의 한 부분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것의 귀한 성격이 강조되다보니 인격화되고 신격화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인간에게서 분리해 내서 따로 신적 존재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우상화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총체적 인간’의 일부로 보아야 하고, 인간 존재의 심오함을 밝히는 뿌리에 대한 고백으로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또 집회서 24,9에 “그는 나를 영원 전 태초에 창조했다.”고 하고 경외서인 모세의 승천 1,14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발견하시어 세계 창조 때부터 나를 그의 계약의 중보자로 예비하셨다”고 하며 신약성서 에베소서 1,4에도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성서의 여러 전승은 인간 존재의 뿌리를 창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천덕꾸러기로 여기는 한 민중이거나, 아직 미성숙 한 사람으로 여기는 한 아동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그가 3살짜리라고 하더라도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불과 3년의 삶을 산, 3년의 경험과 가치를 지닌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나이 3살 이전에 태초부터 그의 출생까지의 시간이 괄호 안에 있습니다. 까마득한 태초로부터 유래한 그의 존재의 뿌리의 시간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까마득한 시간은 세살짜리 어린이건 고희가 넘으신 할아버지이건 그들은 이미 까마득한 시간을 함께 지내다가 우리 시대에 함께 태어난, 동시대에 던져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동지적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양식 나이 계산은 그가 출생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돌이 되어야 비로소 한살이 됩니다. 하지만 한국식 나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는 한살입니다. 이것은 모태의 시간을 포함시키는 계산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모태를 발생의 뿌리로 보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요한복음을 비롯한 위에 제시한 말씀들은 한 인간의 뿌리를 태초이전의 시간으로 소급합니다.
이러한 관점대로 계산한다면 오늘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의 나이에다가 태초로부터 나이를 보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한 인간, 한 아이를 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태초로부터의 깊이는 그의 인권의 깊이이고, 그의 인간적 가치의 깊이는 태초로부터 내려온 인류가 가진 경륜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기 자식이라 하더라도, 이 어린아이는 나에게 유래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대에 조금씩의 시차를 달리하기는 하겠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같이 책임지는 동역자입니다. 나와 내 아이는, 몸으로 아버지 아들,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하고 있으나, 사실은 태초부터 예비 되었고 오늘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도록 예비하신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존재입니다.
우리가 3살짜리 어린이를 불과 2-3년의 경험과 지식,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만 여긴다면 그 존엄성을 이야기할 근거가 매우 취약해지며, 더군다나 시간의 양으로 인간의 가치나 권리를 셈하게 되는 모순을 불러오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어린이를 불완전한 인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고 어린이를 차별하게 만드는 신학적 오류를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뿌리가 창조이전부터 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아무리 세상에 사람이 많아도 우리들 하나하나는 유사품이 없는 존재이고 복사판이 없는 존재입니다. 공산품과 같이 동일한 틀에서 찍어내는 균일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 수없는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중에 아무도 동일한 존재는 없습니다. 설사 외모는 비슷할지언정 나와 동일한 경험과 조건과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은 역사 이전이건 이후이건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가 독특하게 서로 다른 유일무이한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창조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 뿐인 독특한 존재로, 성서의 고백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직접 옹기장이가 손으로 빚듯이 빚어 만드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존재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나 아니면 안되는 고유한 몫을 가지고 부름 받은 것으로서, 고유한 환경과 고유한 임무를 부여받아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과 행동 안에 있는 파송이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10, 34은 말합니다.
“너희가 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은 다 신이다.”

이런 엄청난 주장을 접한 유대인 청중들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아주 초기부터 예수를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께서 묻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였는데, 왜 돌로 치려하는가?”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고 당신이 하나님을 모독했소.”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그를 죽일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께서도 그냥 존경받을 수 있는 일만하시지, 왜 그리 미움 살 말씀을 하셨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단지 병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면 ...그리고 가끔은 비유도 설명해 주시는 정도로만 하셨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오해 살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예수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 청중 모두가 신적인 존재라고 선언하실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그일(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고 합니다. ‘예수가 누구라는 고백을 못하겠으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예수의 일은 너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신)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서로 절하고 받들라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 터이니, 그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라도 절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참 훌륭한 마음의 토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이라”는 말씀은 단지 선언 만으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말합니다. 신은 창조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듭니다. 인간은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을 만들지만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의미와 기쁨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별적 존재들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산이 뭉개져 바다가 되라 해도 그대로 될 수 있습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그분이 유별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감상하고 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통속적 신앙의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다시 하늘로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왜 자꾸 인간은 그런 짓을 할까요?
하나님이 하늘의 자리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놀라운 인간긍정의 신학이며,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품에 안으신 혁명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신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는 선언이며, 이로써 인간의 모든 차별이 소멸되고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사회가 열렸다는 새로운 질서의 선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여전히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로 인하여 여전히 몸으로 오신 그 분을 “당신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오”하고 하늘로 밀어 올려버립니다.
이 땅에 차별이 완전히 없어지고, 일류인생과 하류인생이 없어지고, 일년에 수억짜리 연봉과 밑바닥 봉급의 귀천이 사라지고, 경제력, 생활정도, 학력으로 인한 차별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는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너 까짓 놈 보다는 내가 얼마나 우수한 인간이고 고등인간인가 하는 차별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예수는 영원히 하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존재로 머무셔야 합니다. 고작해야 잠깐 몸으로 오셨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다시 신적 세계에 머무시는 분으로, 고백될 뿐입니다. 예수의 성육신은 단지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되어버리도록 우리는 억지로라도 그 분을 다시 하늘로 밀어 올려, 각종 경배와 찬사를 붙여 그분이 홀로 천상의 신적 존재로 머무르시도록 그래서 우리들의 착취와 부조리에 간섭하지 못하시도록 예수를 띄워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는 특권적 지위를 마음껏 구사하려는 저의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17,20-21)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7,23-24)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신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 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12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니 나도 말한다.”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천둥소리,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어나운서 같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씀하십니까? 하늘에 달이 솟고, 봄 되어 꽃송이가 벌어지는 소리로 말씀하십니까? 아니 하나님의 음성을 어떤 음들의 량, 볼륨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산 속에 가서 기도하다가 어떤 이상한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소리라고 기뻐하십니까? 그 목소리를 들으면 어떻고 안 들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인간의 삶을 평화롭게 이끌어가기 위한 모든 인간의 말은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식이 넘쳐 고상한 말로 하든, 전혀 교육을 받지 않아 질벅하고 천박한 말투로 하든, 모든 말은 각자의 삶의 가장 소중함이 담겨있는 그들 자신의 표현이며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ET처럼 생기셨습니까? 잘생긴 영화배우의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니 아메바처럼 흐느적거리시겠습니까? 그의 모습을 본들 어떻고 안 본들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주변의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가 너무 소중하여 그들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사무쳐와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리, 함께 어린이와 같이 춤추는 자리에 설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산타크로스처럼 선물을 우리에게 배달하시는 일을 하십니까? 헤라클레스처럼 하늘의 불을 훔쳐오는 일을 하십니까? 바람 속에서 일하십니까? 폭풍이나, 지진 속에 일하십니까? 아니면 팔장끼고 하늘에서 인간을 굽어보시며 잘못하는 놈 골라 벌이나 상을 내려 주시는 일을 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새디즘적 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일하신들 어떻고 아닌들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든 인간의 일과 우리가 받은 사명은 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어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듯이 우리는 없는 것에서 새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한사람 한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도록 그 창조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사적 예수의 리얼한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우리와 예수의 관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들 서로 간에 맺는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역할을 병고치고, 말씀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데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느냐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들 상호간의 관계를 밝혀줍니다. 그 관계 변화의 입구에서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영접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갑시다. 저는 영접의식이나 영접하는 결단의 표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를 잘 알더라도 그냥 감상자로, 구경꾼으로, 예수는 좋은 분이야! 도산 안창호 처럼, 안중근 처럼..... 그렇게 존경스런 분이라고 고백 하더라도 그분과 만나 스쳐 지나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만난다는 것은 예수를 내 삶이 전적으로 따라갈 주인으로, 주님으로 삼고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분과의 중요한 관계 설정을 말합니다.

얼마전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어떤 생각에 잠겼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땐, 반찬 같은 것을 제대로 골라 챙겨먹지 못합니다. 아마 계속 밥만 연거푸 떠먹었던 것 같습니다. 옆에서 보던 아내가 슬며시 제 숟갈위에 김치를 한 조각을 올려놓아 주었습니다. 그 때 제게 아주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이 흔한 것이고 우스운 것이지만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가 식사하는 과정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내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호흡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김치 한조작의 사건으로 인해 아내가 내 삶에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언제나 김치 한조각 같은 삶을 살아오고 있는데 그것이 안보였구나, 그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 개척교회만 하는 목회와 생활을 돕기위해 나는 세상모르고 자는 밤도 일주일에 몇일씩을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하는 아내에 대해 그냥 무난하게 살아왔지 그 존재에 대해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함께 하지 못했구나하는 반성이 제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 왔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생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와 더불어 진행되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결단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평생을 살아도 그의 존재를 영접하지 않고 살수 있습니다. 그냥 내 필요에 의해 상대를 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접한다는 것은 내 삶의 전폭, 나의 마음과 감성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주님도 나와 함께 먹고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영접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는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만큼의 간격이 있습니다. 내가 한 사람을 영접하고 만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가고 믿는 행위의 연장입니다. 우리가 매 사람을 만날 때, 거기서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고 서로 마음을 합쳐 순백한 하나님의 뜻에 합심해 갈 때, 거기서 바로 하나님의 새일, 천지창조와 인간창조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의 한 말씀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사람이다.”(요한 13,20)


파송사)
오늘 내가 한 사람을 대할 때
그 속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주를 대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하늘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는가에 따라
여러 차원의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세상에 나가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진실을 다하는 마음과 마음의 관계,
세상의 눈치 살피지 않고 하나님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순수한 관계를 만드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인간창조의 역사가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