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묵시록(8)

[묵시록은 당시의 인권선언문]

다니엘 6장 11-18, 묵시록 13장 6절-14장 1절

2년 전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책이 한권 있었는데 ‘버림받은 사람들’[The Left Behind]이란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백만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에 들어가는데, 무려 4천5백만부 이상이 팔려나갔으니 엄청나게 히트한 책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세상 종말을 그린 11부로 된 대하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팔려나간 것을 보면 9.11 테러와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미국인들의 심리적 여파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대주의 종말신앙인들]

그런데 미국 기독교에는 백여년전부터 이렇게 종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근본주의 신앙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신학을 세대주의 신학(dispensational theology)이라고 부르고, 이런 교리를 주창하는 신학교로 달라스신학교와 탈봇신학교 등이 있는데 현재 남한에서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분들 가운데 여기서 공부한 분이 많기 때문에 남한 기독교에도 그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근본주의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모두 7천년으로 계산하고 이를 천년단위로 해서 7세대로 나눕니다. 여기에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베드로서의 말씀과 창세기 천지창조의 7일 그리고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나팔, 일곱 촛대, 일곱 대접의 숫자와도 상호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은 지금까지 6천년동안에 걸쳐서 각 세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인간 역사를 다스려 오셨는데, 세상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마지막 7번째 세대에 곧 돌입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마지막 세대는 천년왕국이라 불리는데 이는 묵시록 20장에 재림하시는 주 예수와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된다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말세의 시나리오를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유대왕국이 재현될 것이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시나리오는 소위 말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나라를 회복하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수십년 전에 주장된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라가 회복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입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슬렘 성전이 허물어지고 유대성전이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969년 8월에 데니스 마이클 로한이라는 미국인이 이슬람 성전으로 올라가 휘발유를 적신 걸레를 가지고 거기에 불을 질렀습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가 세대주의자 설교가에 현혹된 그리스도인임이 밝혀졌습니다. 성전 회복을 하는 여기까지는 유대인들이나 세대주의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종적으로 보면 이들은 대체로 부시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 하고 세계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미국 중남부에 넓게 퍼져있는 백인 보수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있고 그래서 반유대주의자들입니다. 2주전에도 텍사스 주정부 청사 앞에서 독일 히틀러시대의 군인복장을 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행진이 있었고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로는 반유대적이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친이스라엘적이라는 것이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의 배경에는 자신들이 믿는 성서의 종말 시나리오가 진행이 되려면 우선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회복되면서부터 이 둘은 갈라집니다. 왜냐하면 세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면 이때부터 묵시록에 기록된 전쟁과 지진과 기타 말세 징조가 일어나고 사탄의 왕이 일어나 결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시키는 마지막 우주전쟁 곧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재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군대를 끌고 내려오시어 이들을 박멸하는 최후의 심판이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남한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구원에 대해 얘기할 때,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휴거 종말 신앙인들]

그리고 이에 관련하여 또 하나의 구원 논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을 받게 되는 과정을 사도 바울로가 조금 더 자세히 부연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이 설명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 안에 엄청난 오해와 혼란이 있어 왔습니다. 데살로니카에 보낸 첫 번째 편지 4장 16, 17절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간다’는 단어가 문제의 구절입니다. 이는 헬라어로는 ‘하르파게소메다’라는 동사인데 이를 라틴어 성경에서는 raptus 라고 번역을 했고 영어성경에서 이를 납치라는 뜻이 있는 rapture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는 ‘끌어 데려간다’ 라는 의미에서 한자어 ‘휴거’(携擧)라고 번역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다미선교회라는 단체에서 1993년 10월마지막 날에 세상 종말이 오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해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가출을 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이 휴거 사건은 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졌지만, 1999년 2000년도에도 작게나마 있었고, 올해 6월 3일에도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하고 또 여기에 현혹된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목회할 때 유력한 교인 한 사람이 세대주의 종말신앙에 휘말려서 곤혹을 치루었던 적도 있었고, 젊은 신학생 한 사람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하다가 이 휴거신앙에 빠져 담당 교수와 신학 논쟁을 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소수종파들은 모두 처음에는 이런 휴거신앙에서 출발했고 666이라는 적그리스도를 기성교단에 비유하고 144,000이라는 구원 숫자를 자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으로 해석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종류의 휴거신앙을 갖고 있고 마지막 심판 때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 목사님들은 이런 교인들의 종교 심리를 이용해서 부흥회 참석이나 헌금 전도 등을 필요이상 강조하고 때로 강요합니다. 얼마 전에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자기 고백을 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말세신앙에 빠져 집 안방에서 개척교회가 두 번이나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아니 그냥 비판적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의 삶을 파괴한 사탄의 원흉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에 열심이 있어야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확신이 지나쳐 광신이 되고 열심이 지나쳐 맹목적 신앙이 되는 일은 자주 생겨납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 이런 비판적 얘기를 하면 교인들은 대개 좋아합니다. 자기 위안으로 받아드립니다. ‘아 믿음은 적당히 믿어야지 지나치면 안 돼’ 때로는 자기변호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아 목사님 그래서 제가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교회 일에는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까? 강요하지는 마세요.’ 여러분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다 그러하듯이 교회 비판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전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고민이 많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도 해야 하고 교회에 열심을 내도록 유도도 해야 하고. 사회비판적 성향이 강한 향린교인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 열심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일 예배 참석도 소홀한 경향이 많고 대림절에 수요특별 모임을 해도 그 숫자가 그 숫자입니다. 내년도 예산을 위해 헌금약정을 하시라고 재정부장이 나와 특별 요청을 해도 소수 인원만이 참여합니다. 연말이 되어 교회의 일꾼을 새로 뽑으려고 해도 다들 사양을 하시니까 어려움이 많습니다. 예전에 다른 교회에서 해보았다고 정중히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 일은 한번 말려들면 못 빠져나온다는 이상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상처를 입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 몇 년을 다녀도 겉만 빙빙 돌며 구체적인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하고 향린교회라는 큰 틀 안에 그냥 묻혀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추수할 곳은 많은데 일군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향린교회도 일할 곳은 많은데 일군은 적습니다.

여러분 제가 공개적으로 약속을 드립니다. 떠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놓아 드리겠습니다. 지나치게 열심을 내면 제가 그만 두라고 할테니까 열심을 내보시기 바랍니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안 담그실 것입니까? 여러분을 편하게 그냥 놔두면 나중에 제가 하느님에게 야단을 맞을 것 같아 지난 제직회에서 말씀 드린 대로 내년에는 주차안내나 식당봉사 헌금계수와 같이 봉사자가 필요한 부분에 성가대나 예향 교사를 제외한 모든 집사님들을 일괄적으로 한달씩 배치를 할 것입니다. 강제로 시킨다고 비난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신앙을 위한 일이니 협력을 해주시기를 바라고 육아 혹은 다른 이유로 하기 힘드신 분은 연락을 주시면 빼드리겠습니다.

휴거 얘기를 하다가 교회 봉사 얘기로 흘러갔습니다만, 교회 안에서 휴거 논쟁이 끝이 없듯이 봉사 얘기도 끝이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로가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휴거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카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은 예수 재림시에 구원을 받겠지만 이미 죽은 부모님이나 형제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이 많아 슬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죽은 사람들은 먼저 일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여러분도 죽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과 같이 공중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라고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로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 마지막 날 주님의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세상 어둠의 사람들과 같이 술 취하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종말의 관한 모든 말씀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어 이 땅에서 선한 청지기로서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말세 신앙과 숫자의 상징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관련된 구절들을 미래에 대한 하나의 예언으로 보고 묵시의 언어들을 문자적으로 풀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적그리스도이자 짐승의 표인 666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144,000이라는 구원받은 숫자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ㄱ ㄴ ㄷ 하는 기본 글자가 숫자를 대신하지 않지만 중동이나 서양언어의 알파벳은 숫자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름들을 숫자로 풀어쓰는 일이 가능합니다. 전통적 해석으로는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바꿔 숫자로 계산하면 666이 됩니다. 이후 중세기를 거쳐 근대에 오면 나폴레옹 루터 몇몇 교황, 히틀러 스탈린 등을 666에 비유했고 심지어는 헨리 키신저라는 이름도 글자 풀이를 해보면 그 숫자가 666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부시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가 가장 강한 텍사스주 출신인데다, 종말의 시간을 계산하는 세대주의 신학의 중심지인 달라스신학교가 있는 달라스 출신이기에 어렸을 적부터 이런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 그가 ‘악의 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의 머리속에는 짐승의 표인 666이란 글자가 새겨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대화의 정치란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666에 대한 바른 해석은 개인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는 계산법을 적용하기 보다는 7은 완전을 뜻하는 당시 헬라문화의 상징숫자이고 6은 하나가 모자란 불완전 숫자임으로 666이란 악의 불완전성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144,000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144가 12 곱하기 12이니까 히브리인들에게 12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 곧 완전과 거룩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과학과 컴퓨터가 더 발전하게 되면 이런 무지한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렇게 성서를 통해 미래를 점치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말세적 신비운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그 시기는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셨고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도적과 같이 임한다는 것만을 강조하셨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하고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서를 읽으면서 자신에게도 어떤 기적적 사건이 일어나기를 고대합니다. 성서를 읽다가 은혜받은 구절과 장수를 따라 복권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도 가운데 불치병이 기적적으로 낫기를 원합니다. 수요대림절 특강을 하시는 안상님목사님이 지난 주 수요일 고백적인 얘기를 하셨습니다. 신학대학 교수의 아내였지만, 14살 딸이 뇌암으로 사경을 헤맬 때에 병 고침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안수기도를 받았다는 말씀과 딸의 죽음으로 인한 신앙 갈등과 아픔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의 기적 이해]

물론 누구나 인간은 한계적 상황에 부닥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기적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침이나 급식과 같은 기적을 베푸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기적 치유를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빵 기적을 통한 영적 깨달음에 있었던 것이지 기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보리빵 다섯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몰려듭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니 이 사람은 우리가 아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가 어떻게 생명의 빵이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며 수군거리고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예수를 따르겠는가?’ 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이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하늘로 붕- 떠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때서야 내가 생명의 빵인 것을 믿겠느냐? 그렇게 너희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기적은 실상 육적인 것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기적을 경험하는 일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정말 예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육에서 영으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지 않고 결국에는 오히려 계속 기적이라는 육적 현상에만 머물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인간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경험할 때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자연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이해를 넘었을 때 초자연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기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성탄절에 빨간 양말을 벽에 걸어놓고 선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탄절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빨간 양말 속에 자신이 바라던 선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어린이에게는 어떻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저 벽난로를 통해 들어왔다갔는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지만, 부모님에게는 자연적인 일입니다. 결국 사람에 따라 기적이 되기도 하고 기적이 아니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현대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낫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학적 지식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시대에 따라 계속 발전합니다. 불치병이란 그 당시의 의학적 지식이 짧아 치유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에 부르는 명칭이지 그것 자체가 치료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고쳐냅니다. 시대에 따라 기적이 되기고 하고 기적이 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참 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기적이란 인간의 영역 안에 신이 개입한 사건을 두고 해야지 인간의 이해를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적이 반드시 초자연적 사건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했다면 그건 신적체험이고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저는 제 아들 재준이가 태어났을 때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기적을 병 고침과 같은 영역에만 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삶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덩어리입니다. 돌아보면 누군가가 제 목을 잡아채고 끌어내지 않았다면 급류에 휘말려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시속100킬로로 달리는데 갑자기 큰 트럭이 골목길에서 튀어나와 정면으로 부딪힌 경험도 있고,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컴컴한 저녁에 혼자 산을 타다가 절벽에서 미끄러져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넋을 놓았는데 순간 발이 돌부리에 걸렸는지 돌부리가 발에 걸렸는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속 130킬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던 차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다중 충돌로 인해 차체가 동강난 채 나둥그러져 있는 모습 속에서 부활의 체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기적 이해]

성서 안의 기적 이야기들에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임하는 공통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홍해의 기적 이후에 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이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홍해의 기적은 정치적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었고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은 일용할 양식은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경제적 자유와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던 사람들, 그들은 당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종교적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았고 사회적 차별과 격리를 벗어나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뒤집어 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다면 거기에 기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봅니다. 저는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에서는 아무런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뭐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 신이니까 그런 것도 못해서야 무슨 신이 되겠는가? 그런 정도의 감흥 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고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약자들이 살고 있던 주변부 갈릴래아로 가셔서 그들에게 평화와 정의와 평등과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대망을 제시하시고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서 저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진정성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합니다. 성탄절의 기적을 동정녀탄생에만 두는 것은 마치 빵을 먹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먹을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기적은 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어라. 그러면 영원히 살 것이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 해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본훼퍼목사님이 고난과 희생이 결여된 값싼 은혜와 고난과 희생이 들어간 값비싼 은혜를 나누어 말씀하셨듯이 육에 한계에 머무는 값싼 기적도 있고 육의 한계를 넘어 신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삶을 밀어 넣는 값비싼 기적도 있습니다.

[묵시록은 인권선언문]

묵시록은 단지 우리가 흔히 바라는 빵의 얘기로 가득 찬 종교적 기적들의 총집합서가 아닙니다. 미래종말과 심판에 대한 단순한 예언만도 아닙니다. 얘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 분명한 것은 묵시록을 읽었던 초대교인들은 로마인들로부터 당하는 사회적 차별과 인권이 침해당하는 정치적 박해 속에서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하느님 나라 운동에 매진했다는 사실뿐입니다. 양자선택의 기로에서 믿음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녕을 포기하고 동굴 속으로 땅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래서 묵시록을 단순한 종교적 문서로 읽어내기 보다는 로마의 폭정과 패권주의를 고발하고 약자와 의의 승리를 선언한 인권선언문서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유엔이 정한 세계인권선언의 날이자 교회가 지키는 인권주일입니다. 유엔이 택한 인권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 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이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와 신념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세상은 보통 사람의 지고한 열망이다. 따라서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구약성서의 중심은 율법서이고 이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4개의 명령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6개의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발이 노예 곧 약자들의 출발이기도 했지만, 율법서인 레위기나 신명기의 말씀에서는 약자에 대한 보호를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돌볼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일을 따도 다 따지 말고 이삭을 주어도 다 줍지 말고 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남겨두라고 명합니다. 옷 저당을 잡더라도 밤에는 추위에 떨지 않도록 돌려주라고 명합니다. 약자에 대한 인권보호가 명백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율법의 이 약자보호로서의 인권선언은 약해지고 제사로서의 종교적 역할만 남았습니다.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이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의 무리가 되었다. 모두들 뇌물에만 마음이 있어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과부의 송사를 외면하는구나.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야 1장)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계명들이 더욱 굳어져 종교법으로만 존재했습니다. 본래 약자를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법과 정결법과 성전제사는 철저하게 가난한 자와 약자들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땅의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말하십니다. ‘내가 율법을 완성하리라.’ 그리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회당 가운데 세우시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밀 이삭을 비벼먹은 일을 두고 공격하는 자들에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인자가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희생제물과 헌금환전을 통해 부를 쌓아가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시며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사람의 권리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병 고침 또한 상실된 인권을 회복하는 첫 단추였을 따름입니다.

[人權은 神權이다.]

인권(人權)! 사람의 권리 그것은 단지 사람만의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신권(神權)입니다. 신의 권리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곧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신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성서의 신 야훼 하느님은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한 어느 공동체에나 자세히 살펴보면 약자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약자가 있고 직장에도 약자가 있고 어느 사회에도 약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름이 차이로만 이해되지 않고 차별의 이유로 악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언어와 의식 속에,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습관과 문화 속에 약자차별이 존재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무능하다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차별입니다. 도움이란 주고받는 것입니다. 신체적 구조에 따라 정상인과 장애인이라고 부르지만 신체적 정상인들은 장애인들이 갖는 따뜻하고 순수하고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장애인들입니다. 하늘나라 들어갈 때는 탈락의 여부가 신체구조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마음구조에 따라 결정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이 올라갈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자신들만의 아성을 구축하고 가진 것들을 지켜가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최근 부동산값이 미친듯이 치솟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미쳐 날뛰는 것을 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어디든 아파트를 하나 꼭 구입해야 한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봅니다. 이번에 구입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왜? 조금만 더 넓게 보면 자기가 얻은 불로이득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들의 형제나 누이의 자식 곧 조카들이나 그들의 자식들이 당해야 하는 피해인 것을 알지 못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정책부재나 정치적 쟁점이 아닌 인간 양심의 부재요 민족공동체 의식의 부재입니다.

요즘 사회적 논쟁이 되고 있는 한미 FTA, 노동법, 사학법, 간첩을 양산해내는 국가보안법,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 문제에는 모두 강자들의 자기보호논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말은 책의 글자가 변함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책은 글자가 변하나요? 그것은 성서가 본래 지향하는바 야훼 하느님은 약자를 대변하시고 그들의 아픔에 항상 관심하신다는 그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뜻이고 하느님은 약자의 권리를 착취하는 강자들을 끝내 심판하실 것이라는 그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묵시록은 그 맨 마지막에 ‘주 예수여 오소서!’로 마칩니다. 이는 단순한 오심이 아닌 약자의 아픔과 권리를 외면하고 패권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자를 심판하기 위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오심을 말합니다.

오늘은 이런 정의와 평화를 위해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는 두 번째 대림주일입니다.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말은 단지 마음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의 귀신이 떠났다가 집이 깨끗이 청소된 것을 보고 자기 친구들을 데려와 일곱 귀신이 들어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을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자신을 바꿔야 합니다. 진정한 변혁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의 변혁은 나 하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안에서 그냥 기다리시지만 말고 나눔의 풍요로움과 절제를 통한 거룩한 자유를 체험하며 문을 열고 나아가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저는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 인권주일을 맞은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을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하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tv도 없었고 컴퓨터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던 수십년전의 외침이지만, 오늘 이 아침에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