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품은 마리아

사무엘상 2, 1-10, 히브리서 11, 1-3, 8-16 누가복음 1, 39-56

안 상 님 목사 (전 여성교회 담임목사)

오늘은 대림절 셋째주일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의 본문을 택했습니다.
성서일과는 교회의 달력에 따라 그 계절에 적중한 성서구절을 나열해 놓은 ‘성서구절집’입니다. 1년 52주일을 교회력에 따라 성구를 배열해놓은 주일성서일과 는 교회의 공중예배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성서일과의 유래는 바빌론 포로기 후기 회당의 규례로 소급합니다. 유대교의 축제일을 위해 특정한 날에 일정한 구약성서의 본문을 지정하여 읽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어떠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2세기 말경에 구약성서 본문 외에 사도들의 글과 복음서가 함께 읽혀졌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성서일과는 3년을 한 주기로 주일마다 구약, 사도서신, 복음서에서 세 본문을 읽도록 만들어서 3년이면 성경전체를 한 바퀴 돌게 짜여있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택하는 것은 여성신학이라고 하면 아예 전통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성서일과의 본문을 택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여인이 나옵니다. 그중 세 명 한나, 사라,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낙인을 찍혀 슬퍼하다가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늙은 나이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갖게 되어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는데 도구가 되었던 여인입니다. 나이 많아 아기를 낳은 세 어머니와 함께 ‘예수를 품은 마리아’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그 앞에서 일어난 일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눅 1:30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두려워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는 수태고지를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마리아는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아기를 가지게 된다니 마리아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율법으로는, 신명기 22장에 나타난 대로 여자가 결혼을 해서 처녀가 아니었던 것이 드러나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율법 아래에서 처녀가 임신을 했다면 당연히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물론 그 율법을 알았을 텐데도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면서 그 임신을 받아드립니다. 마리아는 자기 목숨을 걸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성의식이 생기면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남자 없이 잉태된 것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그 후에 20세기의 세계적인 신학자라고 하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제목 아래에, “성령으로 잉태된 처녀탄생 사건에서 남성성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여자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신학자가 쓴 글이어서 더욱 신났던 것입니다. 남성성, 가문계승에서 남자만이 사람으로 인정되던 세상에서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것은 그 남성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추적하여 다윗의 후손이라 하지만 사실 요셉은 예수 탄생에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남자 없이’ 예수를 잉태하게 된 것은 제게는 굉장히 신나는 일입니다.

지금은 가족법이 개정되어서 호주제도가 없어졌지만 25년 전에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단체 연합’에서 단체장들이 이태영 박사와 함께 가족법 개정을 하러 청원서와 서명지 보따리를 들고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자기 지역에서 세력을 과시하는 유림을 두려워하여 개정안에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유림이 가족법 개정을 반대하는 절대적인 이유가‘남자의 씨’였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그‘남자의 씨’없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가부장제도를 뒤엎는, 변혁의 역사를 선포하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1;39-45에 보면 마리아는 자기보다 먼저 임신한 엘리자베스를 만나러 갑니다. 엘리자베스는 사제 즈가리아의 아내이고 사제 아론의 후예의 집안사람으로 노년에 아기를 임신하고 기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예수의 길을 예비하러 먼저 온 세례요한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갈릴리(‘저주받은’ 땅에 살고 있는‘죄인들’)의 이름 없는 집안의 처녀요 목수의 약혼자로 남자도 없이 아기를 밴 미혼 임신부입니다.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 현경 박사는 이렇게 나이 어리고 비천하고 한심한 처지의 마리아가 유다 땅에 사는 나이 많은 사제의 부인을 만나는 일은 “지역, 신분, 연령의 벽을 뛰어 넘은 여성의 연대이며 자매애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매애라는 말은 여성운동의 핵심이 되는 단어입니다. 당시로 보면 그 사회에서 대단하신 분인 엘리자베스와 별 볼일 없는 마리아의 만남이 여성들의 자매애를 촉발하는 연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를 만난 엘리자베스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자베스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마리아의 믿음에 감탄합니다. 바로 오늘 서신 본문인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눅 1:46-55에 엘리자베스가 마리아를 환영하는 말을 듣고 마리아도 대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내리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 부분을 마리아의 찬가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말씀인 이 마리아의 찬가는 오늘의 구약본문 말씀인 삼상 2:1-11의 한나의 기도와 같은 맥락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의 슬픔에 젖어서 하느님께 애원했습니다.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고 간구했습니다. 한나가 마침내 아이를 낳은 후에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라 하여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나는 아기가 젖 뗄 때가 되자 야훼께 서약한 대로 사무엘을 야훼께 바치면서 기도합니다.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들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기리라.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딩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주시고

길고 긴 기도 중에는 이렇게 사회질서가 뒤바뀌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기도가 나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누가복음 4장 18절에 나오는 예수의 나사롓 선언과도 통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러한 내용은 마카비가의 독립운동가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남미의 해방신학에서 횃불을 든 민중의 노래로 재해석되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마리아라고 하면 연상되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머리에 금관을 쓴 마리아의 인상과는 전연 다릅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도 가장 많이 읽혔던 성경구절입니다. 이 노래가 저 같은 사람도 여성운동에 함께하게 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는 마침내 해산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1-7 에 보면, 갈릴리에 살던 마리아는 로마황제 아우구스도가 호구 조사령을 내려서 본고장으로 등록을 하러 요셉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여관에는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데 사람이 자는 방도 아니고 마구간의 말구유에 뉘었으니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의 극치라고 할까,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2:8-20에 보면, 그 아기는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의 경배를 받습니다. 그 시대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마리아의 해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객지에 나와서 아무도 해산구완을 해주지 않는데서 첫아기를 낳은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을씨년스러웠겠습니까? 그 사회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느님을 맞이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1-12에 보면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옵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경배 드렸다. 그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아기 예수는 유태인이 아닌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받습니다. 유태인의 왕 헤로데는 어떻게 태어난 아기를 찾아서 죽일까를 궁리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마리아의 해산은 계급과 인종의 장벽을 무너뜨린 변혁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21-38에 보면,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데리고 정결례를 드리러 갑니다. 그들을 축복해준 사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 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 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15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 있어라.”
아직 삼칠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산모에게 몸조리 할 시간도 없이 요셉은 그 밤으로 떠나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마태북음 2:22에 보면,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 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여 이스라엘 땅으 돌아오니,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유다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하다가 꿈에 지시 받고 갈릴레아 지방으로 가서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2:41에 보면,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아들이 일행 중에 끼어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 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사흘 만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 아냈는데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8:19-21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이 많아서 만날 수 없었 다.“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 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 며 형제들이다.”

마리아는 이런 아들의 말이 섭섭했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어머니라면 아들을 찾아갔는데 나와 보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된다는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 것입니까?

요한복음 2:1-11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 갑니다.
잔치가 한창인데 술이 떨어졌다고 야단입니다. 예수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던 마리아는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의논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기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거절당한 마리아는 그대로 있지 않고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시켰습니다. 예수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마리아는 자기 생각대로 일을 추진합니다. 예수는 기다리고 있는 하인들에게 큰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였고, 결국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사에서 스위들러 Leonard Swidler는 마리아가 예수의 이 첫 번째 기적을 선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요한복음19:25-27에 보면,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 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육신의 어머니를 걱정하여 그의 생계를 제자에게 부탁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가 결코 어머니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느 아들 못지않은 효도를 예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누가복음23:49 에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레이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의 친지들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고 또한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이 여인들도 줄곧 함께 행동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태가 어찌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아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1:12-14에 보면, 예수 승천 후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층 방에는 11제자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하였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계속 2:1에 보면,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이후로 마리아는 초대교회의 활동에 중심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의 말씀과 마리아를 연결해 봅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음으로 고향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이제 나이가 많은 여자인데다가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은 마리아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기에 서슴없이 “저는 주님의 여종이오니 천사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품은 마리아의 삶 전체가 바로 하느님을 믿는 믿음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어떻게 예수를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당황하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말을 믿는 믿음이 또한 마리아의 삶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평범한 시골처녀로서 이 세상의 구세주를 잉태하여 낳아서 기르고 그 아기가 어른이 되어 역사를 뒤집는 하느님의 교역을 퍼뜨리는 과정을 다 지켜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리한 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아픔을 수없이 견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이 죽는 자리에까지 함께 하고 죽은 후에는 아들이 남기고 간 일을 합니다.

마리아는 한 여인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지켜본 가장 완벽한 사람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이후 평생을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살아간 마리아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완벽한 믿음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들이 노년에 임신했던 한나, 사라,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네 여인은 모두 우리가 본받아야할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참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를 품은 마리아의 삶을 훑어보면서 우리가 감히 마리아처럼 살겠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마는 적어도 그 모범을 바라보면서 우리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그 모범을 따라 가려는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일상에서 조금씩, 최선을 다해 변화해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 한나의 기도, 예수의 나사렛 선언들이 모두 새로운 세상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세상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의 삶에서 변혁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뱃속에 품었고, 가슴 속에 품었던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예수께서 선언하신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한 걸음 나아가려는 결단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