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하느님(마태오복음 2장 1-7절)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성탄절이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공휴일이 된 건 오래전의 일입니다. 우리보다 선교역사가 긴 중국이나 일본도 공휴일로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이승만정권의 친기독교적인 정책과 미군 주둔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날을 공식적인 공휴일로 지키지 않더라도 이 날이 연말연시와 맞물려 있어 휴일이라고 하는 생각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같은 종교적 공휴일인 석가모니의 탄생일인 초파일과 비교하면 이는 분명합니다. 신자 숫자로 보면 불교 숫자가 더 많으니까 초파일이 성탄절보다 더 성대하게 지켜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이 더 떠들썩하게 지켜지는 것은 연말연시라는 상업적 대목과 그 시기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녁 교우 몇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명동을 들어섰는데, 음식점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인파에 떠밀려 다녀야만 했습니다. 성탄절이 갖는 종교적 의미는 사라지고 연말연시 대목이라는 상업성만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한 교우께서 제게 보낸 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2000번이나 오시다 지쳐, 이제 한번쯤 거르셔도 될 것 같은데,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에 치이는 제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올해에도 오시나봅니다.’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마저 세상에 치이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기독교나라에서도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줄어들어 몇몇의 미국의 대형교회들은 고심 끝에 교회 예배를 폐지하고 비디오를 만들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관심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아기 예수로 인한 구원의 기쁨과 신앙의 깨달음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모임과 선물입니까? 오늘날 성탄절은 한마디로 말하면 노는 날로 인식이 되고 있고 이 여파는 믿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에게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과 같이 신이 인간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느님’ 혹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구원 사건’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저러나 오늘은 기쁜 날이다’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복음서에 기록된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기뻐한 사람들은 극히 소수요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옛 페르샤나 바빌론 지역에서 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말하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세상 만물 이치를 공부한 깬 현자들입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이 땅에 구주로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 귀한 선물을 준비하고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이들이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여 헤롯왕을 면접하고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십니까? 우리는 별을 따라 그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내는 온통 술렁거리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왕이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의 상태가 깨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기득권을 빼앗긴 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예루살렘 성 밖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의 탄생 소식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기 예수 탄생이 자신이 서 있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기쁨이 되기도 하고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느님이라는 말뜻에서 신적 보호와 인도와 그리곤 평화와 행복을 꿈꿉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종교적 환상에 불과하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방박사에게 속은 것을 안 헤롯은 군대를 보내 베들레헴 근처 두살박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는 살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를 피해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행복과 풍요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대신에 오히려 슬픔과 고난과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기 예수가 자라 33세가 되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신이 인간에게 보여준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골고다에서 힘들게 얻어지는 평화보다는 따뜻한 교회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사랑의 설교를 듣는 마음의 평화를 즐깁니다. 우리는 신이 인간의 몸으로 마구간에 나셨다는 그 그림을 보면서 평화를 느낍니다. 그러나 신이 그 자리에 내려오기까지의 그분이 가지셨던 고통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 라고 말씀 속에서 평화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 위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던 그 투쟁과 고통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대주교로 미국의 군사원조를 비판하고 군부의 권력을 비판하다가 1980년 3월 24일 저녁 성찬식을 거행하던 중 군인들의 총탄에 의해 쓰러진 오스카 로메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폭력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과 잔인한 불공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랑의 폭력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검이나 증오의 폭력이 아니다. 형제애의 폭력이며 평화를 위해 무기를 쳐서 낫으로 만드는 폭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진리와 거룩함을 지향하는 힘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감정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Love is touching, love is feeling 하는 그런 사랑과는 다른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신이 하늘로부터 날개를 타고 사뿐히 그리고 조용히 인간세계에 들어오신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세계의 불의와 힘의 폭력의 구조를 찢고 들어오신 고통과 울부짖음의 사건입니다. 마구간에서 들려진 어머니 마리아의 해산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셨으며 그로 인해 아무 것도 몰랐던 많은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이 살해당해야 했으며 그 이후로 지난 2천년동안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순교의 죽음으로 내어 몰았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예수를 따라 정의의 이름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신이 인간이 되신 사랑의 사건이지만, 이는 폭력과 살육이 뒤따라야 했던 위험한 사랑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에서 내가 밀알이 되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버려야하는 자기 목숨은 어떤 목숨이며 이로써 얻게 되는 목숨은 어떤 목숨입니까? 첫 번째 목숨도 살고 두 번째 목숨도 사는 왜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구원은 없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첫 번째 목숨을 포기해야 두 번째 목숨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리고 임마누엘의 하느님 사건 속에 담긴 진정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는 이 선언 속에 담긴 고뇌와 고통 그리고 해방을 향한 사람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더욱 거룩해지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갈등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켈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선교회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의 선교회원들은 시련과 모욕을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봅니다. 겸손과 인내를 기르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한층 성스러워질 수 있는 기회로 봅니다. 질병조차도 종종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로 하느님이 자신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 방편으로 그리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문제를 더 심오하게 분별할 수 있는 기회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의 동방박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권력자들을 두렵게 하고 가진 자들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에 소동을 불러 일으켰던 동방의 박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 때를 읽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때가 오면 별을 따라 나서는 결단이 필요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팔아 선물을 준비하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자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 왕은 어디에 오시는 것일까요? 동방박사들이 물었습니다. 그 아기는 베들레헴에 태어납니다. 베들레헴은 너무나 작은 마을이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수도 예루살렘 의 변두리 마을로 성전 제사용 양을 키우던 곳으로 똥냄새가 진동했고 로마군대의 기마부대가 주둔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강남도 아니고 양천구도 아닙니다. 잠실이나 성남도 아닙니다. 요즘은 전철로 인해 동두천이 뜹니다만 동두천도 아닙니다. 그 마을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곳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들어 하루 일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뚝방입니다. 말똥냄새와 말발굽의 행진소리 대신에 미군들이 몰래 갖다 버린 포르말린의 독한 냄새와 헬기 소리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오늘의 베들레헴은 우리가 눈만 돌려보면 우리 주위 곳곳에 있습니다. 그곳은 월 30만원의 정부 생계지원비로만 살아가야 하는 독거노인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양지마을이기도 하고 평택의 대추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갖고 그들을 찾아 나설 때 여러분은 동방의 박사가 될 것이며 세상은 동요할 것입니다. 아파트 평수가 의미 없어지며 학력과 권력에의 끈이 무의해지는 그래서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협과 공포로 다가올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도발적인 사랑의 행동은 또 다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처단하는 권력의 횡포와 자본의 횡포가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집트로 피신의 길을 허락하고 함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다시금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엑소더스의 하느님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때는 하느님께서 거룩한 하늘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의 낮은 자리에 오신 것처럼 나도 그 하느님을 따라 성문 밖,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외진 곳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서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 사이에 끼어 있는 노점상들을 바라 볼 줄 아는 눈을 말하는 것이고 시청과 청계천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감추어진 노숙인들의 한숨소리를 듣는 귀를 말하는 것이고 대추리에 남아있는 농부들의 차가운 손을 향한 따뜻한 심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의 떡과 잔,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속에는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 어울리며 가장 사랑했던 그들의 눈물과 땀 한숨과 고통 그리고 정의와 평등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눈망울이 담겨 있습니다. 성가대가 부르는 성탄절 칸타타 노래 소리 밑바닥에 임마누엘 하느님의 고통의 소리가 깔려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령께서 앞서 가시는 좁은 길을 따라 나서는 이 시대의 동방의 박사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