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lidarity of Love (사랑의 연대)
신명 6,4-6; 루가 6,20-31
헨리 훼리 목사(벨츠빌 장로교회 임시당회장)


Yesterday witnessed a great outpouring of expressions of love. Cards, letters, flowers and candy proclaimed in different ways a common sentiment: "I/we love you." It was, of course, Valentine`s day, and in the United States it marked the date for the highest volume of sales in roses(especially red ones) and chocolate. This annual celebration of love seems to affirm what the Beatles asserted in the hymnody of pop culture: "All you need is Love." It underscores what my wife and I, as teenagers, sang about during our summer church conferences: "It`s love; it`s love; it`s love that makes the world go round."


어제 여러분들은 사랑의 고백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카드나 편지 혹은 꽃다발이나 사탕이라는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했지만, 거기에는 꼭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물론, 어제는 발렌타인데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년 중 이날 장미꽃 그중에서도 빨간 장미꽃과 초코렛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날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축제는 마치 비틀즈가 불렀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라는 팝송의 가사를 확인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중고등부 여름수련회에서 아내와 함께 불렀던 “그것은 사랑, 그것은 사랑, 세상을 움직이는 그것은 사랑.”이라는 노래를 강하게 떠올립니다.



Our scripture readings suggest that the Beatles and conference song writer have captured a central insight concerning human existence: love is an essential and sufficient principle for living as we need, and ought, to live. In the Shema, or call to Israel to love God we discover a comprehensive claim upon a person and a people. The nation and its individual members owe God a total response heart, soul, and strength a solidarity of love. It is not enough to feel a mystic love for God; that feeling must find expression in thought and action. The triad of love thus expressed realizes its solidarity in itself, in its relation to God, and perhaps most importantly, in relation to the creation, especially those in whom the image of the creator resides.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하늘말씀은 마치 비틀즈와 수련회때 불렀던 그 노래의 작사자들이야말로 사랑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도 충분한 원칙이라고 하는 인간 실존의 핵심을 보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쉐마,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서의 명령 속에서 개인과 민족을 향한 포괄적인 선언을 듣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이라는 사랑의 연대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신비한 사랑으로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 느낌은 머리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사랑의 삼중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연대를 보여주지만,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더 중요하게는 창조주의 형상이 담겨 있는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Because God is one, the creation must respond as one. Israel is called to be an example of the solidarity of love that emerges from this profound religious insight. The people are challenged to transcend their inherent tribalism, and exclusivist religion. How ironic it is, that three expressions of monotheistic faith find themselves denying the solidarity of love they should embody: Jew, Christian, Muslim affirm God`s unity in creed, and deny their faith in their deeds. Try to imagine what a difference there would be if Israelis and Palestinians, not to mention Christians in that region of the world, did in fact, love God with all their heart, soul, and strength. A security fence dividing a region and exacerbating violence and terror would fall; people who honor Abraham as a common ancestor could see in the faces of their former enemy the likeness of their brothers and sisters. Perhaps this hope is possible elsewhere in the world as well.


왜냐하면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피조물들은 하나로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러한 깊은 종교적 성찰에서 나온 사랑의 연대를 보여주어야 하는 본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부족주의와 배타적인 종교를 뛰어 넘으라는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 곧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한 분 하느님을 고백하는 교리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이룩해야 할 사랑의 연대라는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모두 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한번 상상만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서로를 가로막는 보호벽과 악화되어가는 폭력과 공포는 무너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섬기는 그들은 전에는 서로가 적으로 여긴 얼굴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형제나 자매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샬롬의 평화는 마침내 그 거룩한 땅에 임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희망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All people are God`s children with legitimate expectations to experience their divine birthright in concrete terms. As expressed in the African=American spiritual: "All God`s chillun` (children) got shoes; all God`s chillun` got a robe". These expectations are at the heart of our gospel reading this morning. The passage may be more familiar to you in the extended version recorded in Matthew`s gospel where it is known as the Sermon on the Mount. Matthew stresses the spiritual dimension of deprivation felt by the marginalized of society, and that is a valid concern to be addressed by the Christian community.


모든 민족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신적 출생권이 보장받는 합법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은 신발을 신고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은 옷을 입어요.” 라는 미국 흑인영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대들이 바로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오는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 당하는 착취에 대해 영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에게는 타당한 관심입니다.

In Luke`s account, however, the emphasis in the Beatitudes focuses on the concrete needs of human beings in distress: the poor, the hungry, the sorrowing, the despised of the earth. It was this focus that came to my attention when I began research on the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churches in 1963. When I joined the faculty of the Divinity School of Howard University, my colleagues helped me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a Black liberationist theology as a quest for social justice.


그러나 루가복음에서의 축복의 말씀은 가난한자 배고파하는 자 슬퍼하는 자와 이 땅의 눌린 자들의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필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1963년도에 미국의 흑인교회사에 관심을 갖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워드대학교 신과대학의 교수로 갔을 때, 나의 동료들은 흑인해방운동가의 신학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사회정의에 대한 물음임을 깨닫도록 도와주었습니다.

I had also begun reading about Minjung theology and noted many similarities between the experience of the oppressed in Korea and the African=American experience. When I visited Gwangju for the first time, in 1995, some faculty members from Hoshin University (now Honam Theological University and Seminary) took me to the original cemetery for the victims of the popular uprising of May 1980. I remember my first impression of those tightly massed graves with the shrines and Christian memorials left by families; I recall the weathered pictures of missing students attached to the fence; and I glimpsed for a moment the anguish of the minjung.


나는 또 민중신학에 관한 책들을 읽어가면서 한국에서의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경험과 미국 흑인들의 경험이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1995년 처음 광주를 방문했을 때, 지금은 호신대학으로 바꿔졌지만, 당시 호남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1980년도 광주항쟁에서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 예전 묘지를 찾아갔었습니다. 그때 받았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많은 묘지들, 분향소와 가족들이 남겨 놓은 기독교의 유품들을 보았습니다. 또 울타리에 매어 달려 있던 헤어진 사진 한 장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라진 한 대학생을 찾는 사진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잠시 동안이지만 민중의 한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I have since visited the newer National Memorial Cemetery with its impressive symbolic sculpture and heroic reliefs portraying the events of that protest against abusive political power. But the sense of empathy I had earlier experienced was lessened. Perhaps it was because the solidarity of love requires a continuing appreciation of the loss incurred, a loss that now seems celebrated, not mourned. Jesus said, "Blessed are you who weep, for you will be comforted." If we are to offer the comfort, we too, must feel the pain. And in a very profound way this is the meaning of Christ`s admonition, "Treat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treat you."


그 이후 또 나는 새롭게 단장한 5.18 국립묘지를 갔습니다. 거기서 계엄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민들의 모습을 묘사한 거대한 조각품들과 유품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제가 이전 망월동묘지에서 느꼈던 감정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랑의 연대라는 것은 잃어버림에 대한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새 묘지에서는 기념은 있었지만, 거기에는 애통함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위로를 베푼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고통도 느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담긴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The night before I left on this trip to Korea, I conducted a funeral for the son of one of our elders. The boy was twelve years old and had choked while eating his lunch. Efforts to revive him were unsuccessful and after the removal of life-support systems he was pronounced dead three days after the accident. At the hospital his sister pleaded with me to "bring him back," and I have never felt so helpless as a minister or a human being in my entire life. I could not do what she asked; I too was feeling the loss and troubled by the senseless nature of this death. During the service the boy`s father spoke to both his daughter and to me in his remarks.


나는 지난 주 이곳으로 오기 전날 우리 교회의 장로님의 아들의 장례식을 행하고 왔습니다.(물론, 1년 전에는 저와 함께 일하신 카메룬에서 오신 장로님이십니다.) 죽은 아이는 이제 겨우 12살이었는데, 점심을 먹다가 목에 음식이 걸려 그렇게 됐습니다. 곧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결국 그는 3일 만에 죽었습니다. 병원에서 그의 누나는 저를 붙잡고 오빠를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처럼 내가 목사로서 아니 한명의 인간으로서 무력감을 느꼈던 때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의 누나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나 또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무자비한 죽음 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에서 이 소년의 아버지가 한 증언은 그의 딸과 내가 나누었던 관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I want to paraphrase his words, but first you must envision the interior of our church sanctuary. Pastor Cho knows it well. It is relatively small with a center aisle and central pulpit. On the wall behind the pulpit hangs a large cross. The communion table usually is located in front of the pulpit, but on that night it was replaced by the boy`s casket. The family was sitting in the front pew and the father had to walk past his son`s casket to reach the pulpit. When he turned to face the congregation he paused for quite a time. Then he shared a wonderful testimony. He said that it was amazing how his perspective had changed when he moved from one side of the casket to the other. Before he had been viewing the casket and thinking of the loss of his son from the pulpit he was viewing the whole church family and thinking of their solidarity with his family. He said, "I see people from Cameroon, from Korea, from the United States, representing the family of humankind. We do not always understand the ways of God," he continued, "but we know that God can always be trusted." He then thanked everyone for their support.


그가 한 말을 간추려서 말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내부의 모습을 연상하기 바랍니다. 조 목사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비교적 작은 성전 가운데에 복도가 있고, 그리고 중앙에 설교단이 있지요. 그리고 설교단 뒤로는 아주 큰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보통날은 설교단 앞 가운데에는 성찬상이 놓여 있지만, 그날은 대신 소년의 관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은 모두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아들의 관을 지나 설교단에 섰습니다.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 잠시 침묵하더니 놀라운 간증을 하셨습니다. 관 저쪽에서 관 반대편으로 걸어오면서 그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하였습니다. 저쪽에 앉아 있었을 때에는 관이 보였고, 그리고 그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설교단 쪽에서 바라보니 전체 교인들이 보이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하는 연대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카메룬사람들, 한국사람들, 미국사람들,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길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 하나는 하느님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참석한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When he finished, I thought about the cross that stood behind him. It is a symbol of the ultimate expression of the solidarity of love. It proclaims across time and space that God is with us, even unto death it reminds us that the promise of life eternal is guaranteed by the sacrificial death of the Christ who came that all people might have an abundant life, here and now. But most significantly, the cross challenges each one of us to take up our collective responsibility to witness through word and deed to the solidarity of love. Amen


그가 말을 마쳤을 때, 나는 그의 뒤에 있는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연대를 나타내는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시공을 초월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자리에까지라도 말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다는 약속을 상기시켜 주며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는 우리 한명 한명이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의 연대를 증언해야 하는 공동 책임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