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생명(8)
전통과 개혁
사무엘상 10 : 9-13 ; 사도행전 6 : 1-15

우리가 아는 대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이 되어 있고,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어 성경에는 장수와 절수가 없습니다. 장의 구분은 성경을 보다 쉽게 찾도록 하기 위해 영국 캔터버리 대주교인 스티븐 랭턴에 의해 1226년도에, 그리고 절수는 인쇄공인 로버트 에스티엔에 의해 1551년 리용에서 파리로 가는 마차 여행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지만, 우리는 장수나 절수에 매이지 않고 내용에 따라 성서를 읽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번역본들은 독자의 편리를 위해 내용에 따른 소제목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집사 선택인가? 보조자 선택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6장의 소제목은 한국어든 영어든 보통 ‘일곱 집사의 선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은 ‘일곱 보조자의 선택’이라고 함으로 집사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켰고 대신 보조자란 말로 대치하였습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을 보면 구제하는 일만 전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안수 받은 직분자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처음부터 집사라고 호칭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일단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보조자라 칭하여 그 격을 낮춘 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보조자라는 말이 만약에 하느님의 사역 혹은 선교에 대한 폭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보조자라는 의미라면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사도’라는 직책을 보조하는 의미에서 보조자라고 쓰여 졌다고 한다면 -제가 보기에는 이런 의미에서 쓰고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이 단어는 잘못 번역되었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집사라는 단어 ‘deacon’은 봉사를 뜻하는 ‘diakonia’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희랍어로 보면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말씀과 기도의 디아코니아’ 라고 말하고 있고 새로 뽑는 사람들은 ‘구제의 디아코니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와 집사 둘 다 똑같이 디아코니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직분의 차이가 아닌 기능에 대한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사도와 집사는 수직적 직분이 아닌 수평적 직분 곧 일의 분담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보조자란 번역은 오늘날의 집사직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초대교회의 사도라는 직분은 오늘날에는 목사와 장로로 이분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본래 직분이 말씀과 기도였다면, 목사는 말씀에, 그리고 장로는 기도에 전념하도록 주어진 직분이 성서가 증언하는 본래의 정신입니다. (장로님들만 ‘아멘’하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처음에는 분명한 필요와 기능에 따라 생겨났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통화 제도화되어 왔고, 한국교회는 특히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수직적 직분으로 굳어져 왔습니다. 본래 감리교나 침례교에는 장로제도가 없습니다. 미국감리교회는 장로, 집사라는 단어를 평신도에게 사용하지 않고 목사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목사 안수를 받으면 ‘집사목사’라 부르고 3년의 시간이 지나 정회원이 되면 ‘장로목사’라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감리교는 세계감리교회로부터 장로를 세우도록 특별 허락을 받아 시행하고 있습니다. 회중교회로서 직분의 차별을 없애고자 시작한 침례교도 장로제도가 없는데 유독 한국침례교회에서만 장로 제도를 받아들이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두 교단 안에는 장로제를 수용하자는 교회와 본래의 교단 정신을 회복하자는 반장로제의 교회로 갈등이 있습니다. 왜 다른 나라의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들은 장로제가 없어도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운영되는데 유독 한국교회만이 교단의 본래 정신과는 어긋나게 장로제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로를 하나의 자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집사: 執事인가? 雜事인가?]
우리말에 집사는 잡을 집(執)에 일사(事)자를 씁니다. ‘일을 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는 일하는 봉사자란 뜻으로 집사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장로로 번역된 presbyter라는 희랍어 단어는 본래 ‘나이가 많은 사람’이란 뜻이 있으니 장로로 번역해도 괜찮지만 구제에 대한 봉사자를 일하는 집사로 번역한 것은 출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집사는 양반 상놈의 계급이 있던 시절에 집의 종들의 우두머리격인 상놈이나 중인에게 주었던 호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집사는 일을 부려먹기 위해 만든 직분이 아닙니다.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안수를 통해서 직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안수집사 외에 서리 집사제를 만들어서 이 집사직분을 일하는 사람으로 전락을 시켰고, 또 현재 모든 교회들이 일과 상관없이 교회를 열심히 1년 이상 출석하면 출석상 비슷하게 주는 제도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큰 교회는 반, 작은 교회는 대다수가 집사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친구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 ‘야! 너는 교회 몇 년씩 다니면서 집사 하나 못받냐?’ 하고 핀잔을 줍니다. 현재 미국장로교회에서의 집사는 그야말로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 구제를 담당하는 사람 등 극히 전문화된 일을 하는 몇 사람만 임명을 합니다. 장로와 같이 3년을 임기로 일합니다. 아주 큰 교회가 아니면 사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관리하는 집사가 책임을 집니다. 이분은 평일에도 교회에 자주 들리지만, 여름에는 자신의 휴가를 이용해서 건물보수를 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가면 장로는 많아도 집사는 아주 적습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집사라야 일하는 청지기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는 반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집사는 너도나도 다하는 ‘잡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렇다고 다 무시하고 새로 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 여기 앉으신 집사님들 ‘아, 언제 우리가 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괜한 사람 집사라고 직책을 주지 않았습니까? 거, 목사님 병 주고 약주기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줄 압니다. 제가 집사님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집사직의 그 거룩성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는 분명이 집사를 선택할 때,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기준을 가졌습니다. 내가 원치 않았지만 집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부정적으로 여겨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영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갖기를 바랍니다.(이럴 때는 말하지 않아도 집사님들은 ‘아멘’ 좀 해주세요.) 구약성서의 본문도 사울도 본인은 전혀 원치 않았지만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하느님의 영을 받게 됩니다.

[교회내의 그룹 갈등]
보통의 설교는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을 하늘말씀 읽기로 정할 때에 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집사직의 시작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면이 있습니다. 처음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12사도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서 히브리말을 쓰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말을 쓰는 유대인들이라는 두 그룹이 생겨나고, 구제하는 일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언어는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언어가 다르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부는 언어는 같아도 그 의미가 달라 많은 갈등을 겪는데, 언어 자체가 다르면 그 힘든 정도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미국인 교회와 한국인 교회를 합쳐서 당회를 하게 되면 영어로 합니다. 그러나 한국 장로님들이 그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이 잘 안되다 보니 입을 다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연히 하나 되는 일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한 교회 안에 미국교인과 한국교인 사이에 언어로 인한 벽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벽은 단순히 이 두 그룹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인 안에서도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과 갓 이민 오신 분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미국식, 한국식이란 말이 등장합니다. 갓 오신 분들은 모든 일에 한국 사람이니 한국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오래되신 분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고, 우리가 미국에 살고 우리 후손들이 미국화 되어가니 좋든 싫든 미국식을 좇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영어교재를 쓸 것이냐? 한국어교재를 쓸 것이냐?입니다. 지금은 이민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대부분 영어교재를 씁니다만, 20년 전만 해도 한국어를 고집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민역사가 짧았고, 대부분 한국서 갓 이민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고집하다보니 교육효과에도 문제가 있고 아이들이 흥미를 잃고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민역사가 길어지면서 토요 주말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예배는 영어로 합니다.

지금도 한인들만 모인 교회 안에서는 예배 형식이나 조직을 갖고 한국식이냐? 미국식이냐?를 갖고 많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국식, 미국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기가 몸담고 있었던 한국의 어느 교단의 어느 교회의 예를 말하고 있고, 자기가 살아온 미국의 한 단편을 갖고 미국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식인데, 미국에 오래 산 사람은 미국식, 갓 온 사람은 한국식, 이렇게 말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한국식을 선택해야 하고, 또 미국에 사니 미국식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혼란만 있고 싸우다가 말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식 미국식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말고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방식을 따릅시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목회의 원칙을 따라서 하십시다.’ 하며 성서의 본래의 정신을 찾아서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런 제 미국 교회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말을 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여기에 그리스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당하고 있었다는 이 구절이 말하는 상황이 매우 민감하게 다가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구제를 위해 일곱 집사/보조자를 선택한 것으로 씌여 있지만 사실 이 안에는 단순한 구제의 문제가 아닌 교회의 주도권 싸움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룹 갈등이 깔려 있는 것 입니다. 이 사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들이 신도들을 모아놓고 공동의회를 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여러분 혹 군대에서 식량 배급을 담당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대대장이라면 식량배급 담당자를 뽑는 일에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습니까? 사심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면 되지 않습니까? 반드시 리더의 자격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식량배급 담당자가 아닌 그리스파 교인들의 리더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식량배급을 맡았으면 식량배급만 해야 하는데, 그 이후에 보면 식량 배급했다는 구절은 하나도 없고, 바로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일곱 집사 중 리더격인 스데파노를 설명하는데 ‘스데파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다.’ 식량배급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도들이 하는 일을 하고 있고, 기적을 행함에 있어 사도들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 중 두 번째 등장하는 필립보도 8장에 가면 하라는 식량배급은 하지 않고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 전파를 하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제하는 보조자 혹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집사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초대교회의 일곱명이 선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필이면 그 숫자가 왜 일곱명입니까? 5명이면 어떻고 10명이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12이란 숫자가 유대민족 12지파를 대표하는 숫자라면, 일곱은 당시 헬라와 로마문화를 대표하는 숫자였습니다.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 4천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이런 표현은 바로 복음이 유대민족을 살리고 이방민족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임을 상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파 사도의 역할 담당]
그러니까 오늘 사도행전 6장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일곱 집사의 선택도 아니고 사도를 돕는 일곱 보조자도 아니고, 실은 그리스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곱 사도의 선출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성서이해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보다 더 한발자국 나아가는데 이러한 그리스파 일곱 사도를 선출하고 나자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7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전에도 초대교회가 급성장한 기록은 여기저기 있습니다. 하루만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5천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다 양적 성장의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다른 성장의 얘기를 하는데, 수많은 사제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사실은 쉽게 해석이 되지 않는 구절입니다. 이 사제는 유대 제사장들을 말하는데, 예루살렘의 수많은 제사장들도 예수를 믿었다. 해석에 난제가 있지만, 저는 이 말을 숫적인 의미보다는 질적인 성장으로 이해합니다.

스데파노나 필립보를 위시한 이 일곱명이 얼마나 젊은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 한가지 그들은 그리스파 사람들의 대표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과 지중해 중동지역은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 그리스 문화권이었습니다. 그리스말을 하는 새로운 리더들이 등장했다는 말은 폭넓은 시각과 국제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리더로 등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일을 독식해 왔던 국내파가 그 리더쉽을 독점하지 않고 이를 나누었다는 말도 되지만, 해외 선교에 눈을 돌리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지역으로 소아시아로 로마로 그 시야가 넓어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교회가 일을 함에 있어 소외된 사람들이 없게 하고 또 전통에만 매이지 않고 다른 생각,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곧, 새로운 사람들을 리더로서 세우고 따랐더니 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동시에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고백을 하는 표현은 제각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적입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끼리끼리 모인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이나 여력이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깊은 관계를 갖기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끼리끼리가 닫혀 있을 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조직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그리고 리더쉽이 항상 새로운 사람들로 대체되어갈 때, 그 조직은 살아있는 조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길러내는 멘토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새로운 문화와 사고에 열려진 마음을 갖고 조직을 항상 새롭게 한다고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처럼 변화가 어려운 조직도 없습니다. 변화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변화는 지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 깨달음이 있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머리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두 번째 단계인 정서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따르지 않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부부간에 머리로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습니다. 괜한 자존심이 발동을 하여 어려움이 생깁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 이성적으로 변화하지만 그에 따르는 마음의 변화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어려운 단계는 습관의 변화입니다. 머리로 깨달은 것을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변화를 하는 일이 한두번은 가능하지만, 습관을 고쳐 새로운 행동양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말합니다. 제발 양말 좀 벗을 때, 뒤집어놓지 말라고. 한두번은 제대로 벗어 놓습니다. 그러나 곧 옛날로 돌아갑니다. 남편은 말합니다. 제발 스타킹 좀 화장대 위에 벗어 놓지 말고, 치약은 밑에서부터 짜라고. 이 단순한 일이 뭐라고 하면 한두번은 이행이 되는데, 한 사나흘 지나면 도루묵입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을 고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조직의 변화입니다. 조직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조직이 교회입니다. 기업의 조직은 수직의 조직이니까 위에서 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손실이 많아 회사문을 닫게 되면 구조조정을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문 닫는 줄 알면서도 변화가 안 됩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르는데 하려고 해도 안되는게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내분이 일어나 싸우면 둘 다 죽게 되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서로 양보가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싸웁니다. 밖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할 일이 널려져 있는데도 굳이 안에서 싸우다 죽겠답니다.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전통과 개혁]
자그마한 교회에 어느 목사님이 부임을 했는데, 강단 중앙에 피아노가 놓여 있어서 의아해 하는데, 한 교인이 와서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목사님, 저 피아노 옮기시면 안 됩니다. 저 피아노는 이 교회의 유력한 모장로님이 기증하신 것이에요. 이미 앞서 두 분의 목사님들이 저 피아노를 옆으로 옮기셨다가 결국은 장로님과 갈등이 생겨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목회를 오래 하시려면 저 피아노는 손대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조언을 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께서 지혜를 짰는데, 매주일마다 피아노를 10센치씩 옮기셨습니다. 그래 2년이 걸려서 이 피아노를 옆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처음 부임하는 목회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예화입니다만, 오래 전 볼트모아의 어느 한인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다가 이런 교회를 보았고, 오자마자 피아노를 옮긴 그 목사님은 오래지 않아 결국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저는 우리 향린교회가 참으로 좋은 교회이고 훌륭한 교회이고, 제가 여기 담임목사 가 된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년이 안되어 예배실 전면 휘장을 뜯어내고 창문을 바꾸었지만, 한사람도 반대 없이 진행된 것을 보면 매우 개혁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폭 넓은 활동을 위해 조직 변화를 해보려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문조사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3분지 일정도만 참여를 해서 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안하신분들 빨리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것과는 안이 많이 다르다고 보고 있는데, 의외로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라고 변화를 원치 않는 분들이 상당수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변화가 좋은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 그냥 해오던 대로 익숙한 삶을 따라 사는 것이 편하고 좋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죽게 되니까 변화를 꾀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설문조사에서 저를 좇아 변화를 원하는 항에 무조건 동그라미 표시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사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조직을 가졌을 때에 얼마나 많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조직의 변화는 했는데,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다. 이거야 말로 하나마나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담임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물가로는 이끌 수는 있어도 물을 먹고 안 먹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보고 강한 리더쉽을 발휘해서 좀 밀어 붙이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목회 해보니 이런 말 하는 분들부터 안하시더라구요. (제가 웃기 위해 한말이니까 이런 말 하신 기억이 있는 분들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사가로 유명한 프랜시스 쉐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20-30년 전이 아닌 내일의 문제에 대비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교회는 지독한 시련 속에 고통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의 위기를 느꼈다면 앞으로 진정한 변화를 맞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젊은 세대에게 보수적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부당한 일이다. 기독교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보수가 아닌 개혁이다. 보수주의는 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하고 현 상태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으므로 보수적인 된다고 함은 전체를 놓치는 것과 같다. 공정해지기를 원한다면 젊은 세대에게 현 상태에 맞서는 혁명가가 되라고 가르쳐야만 한다.’ (브라이언 맥라렌, ‘저 건너편의 교회’ 17쪽)

오늘 본문에서 스데파노는 단순히 리더로만 나선 것이 아니라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똑같은 죄목으로 처형을 당합니다. 물론, 그가 흘린 순교의 피는 또 다른 열매를 맺어갑니다. 전통과 개혁, 둘 다 붙잡고 나아가야 할 우리 신앙의 화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향린교회가 한국교회의 리더로서 계속 남기 위하여 어느 쪽에 더 힘을 실어서 나아가야 할지를 묻고 싶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