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전교인수련회설교원고1.hwp

수련회 준비로 애쓰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웠습니다.
아주 많이 ... ^^


------------------------------------------------

“하느님의 모습대로”

청년신도회 정영두


본문말씀
창세기 1:27
“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로마서 9:24-26
“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호세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내 사랑을 받지 못하던 백성을 내 사랑하는 백성이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 하신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리라”

오늘 저의 부족한 설교에 “하나님의 모습대로” 와 더불어 “적들과 함께 가는 길” 이라는 다른 작은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성경은 얘기합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비록 범죄 함으로 인해 변질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그분을 인식할 수 있는 영성이 남아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보고싶어하셨던 분들은 옆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을 닮은 분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향린교회에 가는 걸 걱정하셨습니다. 향린의 진보성이 한 개인의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방해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향린을 선택한 것에 대해 최고는 아닐지 모르지만 최선이었다 라고 얘기하고싶습니다. 그리고 곧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고백할 날이 오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꿈을 키워나갈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제가 향린에 와서 들었던 가장 많은 단어들은 진보, 보수, 보수교단, 예장, 기장, 이라는 단어들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거기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배타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안전함을 느끼고자 합니다. 진보니 보수니 예장이니 기장이 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더 단단하게 뭉쳐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부를 단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저 역시 진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진보의식, 다시 말하면 우린 너희와 달라 하는 특권의식, 잘못된 선민의식은 반대합니다. 열려진 진보성이 아닌 닫혀진 진보성 그래서 그 누구도 쉽게 다가올 수 없는 그런 공동체는 반대합니다.
많은 교우들이 저에게 물어옵니다. 어떻게 향린에 왔냐고? 이 교회는 다른 교회랑 많이 다르다며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제가 못 올 데 왔습니까? 도대체 진보가 뭐길래? 진정한 진보라면 누가라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여기는 진보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진보를 지향하기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향린의 분위기를 독특합니다. 분위기가 독특해서 다가가고 싶은 곳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저희 향린은 어떻습니까? 저희교회는 독특한 사람들만 오는 교회입니까? 어느 사상을 가지고 있던 어떤 일을 하던 누구나 올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대형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나의 지적, 정치적 수준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 향린을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엉뚱한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조헌정 목사님과 추광태 장로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 중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사람입니까?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 팝 가수 마이클 잭슨, 이병일 목사님, 전두환 전 대통령, 가수 심수봉, 전태일 열사, 이건칠 집사님 이분들 중에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시 모두다 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들이 왜곡되어있고 병들어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20절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읍니다”. 우리는 그들과 화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있습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몇 번을 싸우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몇 만 번을 싸우더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입니다.
그럼 향린이 그 동안 내세웠던 것들은 포기하자는 얘기냐?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저 사상이 다르고 길이 다르다 하더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왔습니다. 아직도 세계곳곳에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종교분쟁이요 민족분쟁입니다. 해방이후 사랑하는 이 나라가 두 쪽이 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왔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왔습니까?
저도 싫습니다. 이 땅의 통일을 반대하는 그 인간들이 싫고 노동자들 착취하는 자본가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습니다. “상기하자 6.25” “몰아내자 김정일” 외치는 보수, 우익 기독교인들 생각하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칼을 갈고 싶어집니다. 남북이 화해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정말 죽이고 싶은 그들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긴 싸우되 화해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세상사람들 눈엔 그들도 우리도 똑같은 기독교인들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두 손을 동시에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손이요 또 하나는 화해하기 위한 손입니다. 우리에겐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들을 화해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끼리 먼저 화해해야합니다.
저는 많은 집회에 참가했고 또 열심히 돌을 던졌습니다. 그랬던 제가 저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전 전경으로 뽑혀 전라도 광주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돌을 던지는 입장에서 하루아침에 돌을 막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첫 데모를 막던 때였습니다. 시위대쪽 확성기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가진 자들의 개를 보아라”
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사랑하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자리에서 외치고 싶었습니다. 난 개가 아니라고 나도 당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 싸우지 말자고 무기 내려놓고 진압복 벗어놓고 뛰쳐나가 외치고 싶었습니다. 눈물은 하염없이 나왔습니다. 저 역시 대학생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제발 맞지 말라고 울부짖으며 건물들을 향해서만 던졌습니다. 대학생들과 싸워야 하는 그 상황이 절 미치도록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를 그들과 싸우게 만든 것입니까? 그런데 우습게도 고참이 되면서 저는 제 안에 있는 이중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참 때 그렇게 힘들어했던 제가 고참이 되어서는 조준해서 대학생들에게 돌을 던진 것입니다. 경찰에게 정당화되는 폭력에 어느새 둔감해져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울부짖으면서 맞지 말라고 했던 제가 나중에는 재미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봤습니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폭력이 그들에게 행여 재미가 되진 않았을까? 오늘은 전경을 몇 명 맞췄는지 쇠파이프를 몇 번 휘둘렀는지. 마치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한 형제들이 싸웁니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만 따지다가 이 땅의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쓰러져 갑니다. 역시 많은 전경들이 쓰러져 갑니다. 서로 싸우는 그 자리엔 그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죄는 깊어질수록 분석을 거부합니다. 싸움은 깊어질수록 화해를 거부합니다. 우리에게 싸우기 위한 치열함이 있는 것처럼 화해하기 위한 치열함 역시 있습니까? 화해를 포기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기도 힘들어질지 모릅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가지의 기능을 하는 근육이 있는데 그 중에 “길항근” 이라는 근육이 있습니다. 이 근육은 다른 근육과 달리 반대로 작용하는 근육입니다. 예를 들면 힘이 오른쪽으로 작용하면 이 길항근은 거꾸로 왼쪽으로 작용하게 되어있습니다. 길항근은 영어로 “antagonist” 이라고 합니다. 영문 뜻은 적대자, 경쟁자, 맞상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대로 움직이는 근육이 있어야 원하는 동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삶에도 antagonist 가 있을 때 우리는 더 균형을 잘 잡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도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들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다양한 모습에서 배울 건 배우고 또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모습이 어떨까요? 너무나 힘들다는 걸 압니다. 그들을 용서하고 또 화해시키는 일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일인지 우리 모두 압니다. 조헌정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처럼 조지 부시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그가 더러운 전쟁 병에 걸렸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가 감기에 걸렸다고 우리를 내다 버립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실 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진보야 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다른 편임을 선언하는 것이 되고 벽 하나가 세워지게 됩니다. 예수 님이 오신지 이 천년만에 세상은 이만큼 변했습니다. 하물며 예수 님이 아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태초에 만드셨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시나브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적들과 함께 가는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나와 너 이전에, 친구이기 이전에, 부부이기 이전에, 부모와 자식관계이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9:24-26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 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사랑 받지 못했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 부르리라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어떻게 저 사람이, 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야? 라고 얘기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 나중에 바울처럼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들과 함께 걷기를 원 하실 지도 모릅니다.

불이야! 여러분 가슴에 용서와 화해의 불이 붙었습니다. 이제 그 불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용서와 화해를 베푸는 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베풀지 않으면 그 불은 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