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12일 전교인수련회 여는예배 “우리 가운데”(마르코 6:45-53)

옛날에 아주 용한 의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병도 이 의원이 지어주는 약만 먹으면 덜컥덜컥 나았답니다. 그러니 환자들이 몰려왔고 또 그 중에는 병 고치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용한 의원은 연구를 거듭해서 마침내 죽은 사람도 살리는 연고를 만드는 비방을 발견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쓰려고 연고를 만들어 놓고 감추어 두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용한 의원도 별수없이 늙어서 죽게 되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자기가 가장 믿는 제자를 불러 유언을 하기를,
“내가 이제 죽게 되었는데,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벽장 속에 감추어 둔 연고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그 연고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발라라. 그러면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일은 너 혼자만 알고 있다가 그대로 하여라.”
며칠 뒤에 의원이 죽었대요. 스승이 죽자 제자는 얼른 벽장에 감추어둔 연고를 꺼내어 시체의 발바닥에서부터 바르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차디차게 식었던 발바닥이 다시 온기가 돌며 시체가 살아나는 거예요. 한참 정성껏 약을 바르던 제자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가만 있자. 스승께서는 이 약의 제조법을 일러 주시지 않았어. 이 약을 다 바르면 스승은 살아나시겠지만, 내가 죽었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래, 이왕 스승은 돌아가셨으니 이 약은 내가 죽었을 때 사용하기 위해서 남겨 두기로 하자.’
이렇게 생각한 제자는 약바르기를 그만두었죠. 살아나던 스승의 몸이 다시 싸늘하게 식어서 땅에 묻혔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제자도 남은 생을 잘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는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제 죽는데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벽장 속에 평생을 감추어둔 약이 있으니 죽거든 그 약을 온몸에 고루 바르도록 하여라. 그러면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역시 그 제자도 죽어서 아들이 벽장에서 약을 찾아다가 아버지의 시체에 바르기 시작했죠. 약을 바르자 몸이 다시 따뜻해지면서 살아나는 거예요. 아들은 너무나도 기뻐서 열심히 약을 발랐어요. 이제 배까지 바르고 가슴에 약을 바르려고 하는데 약이 다 되고 말았어요. 스승이 맨처음 만들어놓은 약이 일인분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결국 그 제자도 살아나다가 도로 죽었답니다. //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들에서 오천 명을 먹인 후에 예수님을 제자들을 강제로 배를 태워서 벳새다로 보냅니다. 예수님은 땅에 홀로 남아 무리들을 돌려보낸 뒤에 기도합니다. 한 밤중에 바다 가운데 있는 제자들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노를 젖느라고 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그들을 “반대하여” 불어왔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바다, 밤, 바람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관합니다.
바다는 환난과 시련을 가져다 줍니다. 바다는 ‘태고의 혼돈’을 상징합니다. 이 혼돈의 물은 무제한적인 카오스와 통제불능의 장소로서 사탄적 혼란의 영역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이러한 전통적 상징을 따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위험을 느낄 때에 예수님의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합니다. 바다는 유대인의 땅과 이방인의 땅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며, 그것을 건너는 것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다는 제자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장소입니다.
밤은 살인의 음모와 죽임의 시간입니다. 무지와 깨닫지 못하는 미명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밤은 빛과 깨달음, 보게됨의 반대인 어둠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위기의 시간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잡히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당한 것도 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도 밤입니다.
바람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적대하며, 그들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의 길을 거슬러 반대하는 세력입니다. 그 바람은 미친 것처럼 제자들을 삼키려고 파도를 일으킵니다. 큰 바람은 제자들을 위협하여 공포에 떨게하며 죽음의 순간으로 몰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바다를 건너 이방인의 땅 벳새다(“어부의 집”)로 가라고 보냅니다. 예수님은 땅에 남아 있고 제자들만 보냅니다. 얼마전(4:35-41)에는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제자들만이 항해를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한 밤중에 바다를 건너 이방인의 땅으로 가기 위해 애쓰며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와 바다를 흔들고 파도를 만들어 그들을 대적할 때에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나요? 본문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바다에서 바람에 시달려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4장에는 예수님이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항해, 예수님을 배제한 항해는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제자들 안에 예수님이 없거나 무시되었을 때에 그들은 자기 목숨마저도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사건은 진행됩니다. 예수님은 괴로워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다가 지나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겨서 그들에게 가서 용기를 줍니다. “나다, 두려워 말고 용기를 가져라.”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서 배에 오르자 바다와 바람이 즉시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 제자들의 태도는 의외입니다. 제자들은 몹시, 지나치게 놀라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새벽의 푸름이 다가오고, 그들을 대적하던 바다와 바람도 잠잠해 지고, 예수님도 함께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르코는 그 이유를 “그들은 그 빵에 관하여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과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συνίημι는 “함께 보내다, 같이 놓다, 모으다”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는 “이해하다, 완전히 파악하다, 깨닫다”라는 의미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의 조건은 함께 걸어가고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일을 겪으며 가르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존재를 바로 알지 못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빵의 나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배움의 기간이 짧거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바로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πωρόω는 “어리석은, 돌같이 되다, 단단해지다, 굳어지다, 무감각해지다, 냉담하고 무표정하게 되다” 라는 뜻입니다. 유대문헌에서 이 단어는 “불복종, 구원의 상실”, 심지어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르코에서 이 단어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당원들과 손잡고 음모를 꾸미는 데서 나옵니다(3:5). 마음이 뒤틀려서 아무리 좋은 일을 보더라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음해합니다. 이러한 일이 항상 일어나는 곳이 바로 정치권이죠.

바다, 밤 그리고 바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세계는 죽음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쳤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안주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라고 손짓합니다. 잘못된 세상을 거슬러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모든 생명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용감한 젊은 예언자 예수님을, 이 세계 속에서 살면서 따라가기엔 너무 어렵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성난 파도, 술수와 모략으로 유혹하는 어두움,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길을 막는 바람이 있는 한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이 가신 길을 헐떡이며 좇아가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기에 살아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었고, 밤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으로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을 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땅의 경계선에서,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그 곳에서 땅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은 새로운 목적지를 향한 과정이며, 그 곳에 바로 우리가 헤치고 걸어갈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지 하나의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쉬운 일이죠. 그러나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소홀해 하거나 그 존재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 공기, 사랑, 가족 등등. 약초에 관한 책을 읽다가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한 약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것이 모두 잘만쓰면 약이 됩니다.
그런 말 중에 하나가 “예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너무 자주 불러서 너무 쉽게 들리고 너무 작은 의미로 변해버렸나 봅니다. 더 나아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해방이 아니라 억압을, 살림이 아니라 죽임을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악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를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오용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예수의 이름을 들먹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말하는 예수는 이미 성서의 예수와 거리가 멀어진 의미로 들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말하지만, 그 예수는 이미 성서에서 증언하는 예수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열거하기엔 시간이 아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이 우리 주변에서,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예수님를 살리는 척 하다가 다시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이러한 오해와 변용과 악용은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수 없이 읽고, 듣고 보았던 예수님의 삶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돌같이 단단해졌고, 굳어져 무감각해졌고, 냉담하고 무표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망이 나의 눈을 가려서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나의 욕심이 나의 귀를 막아 예수님의 말씀을 똑바로 듣지 못하게 하고, 나의 지식이 나의 영혼을 흐리게 하여 예수님의 역사를 바로 깨닫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둔함이란 이렇게 부족한 지식이나 욕심으로 이른바 소신이라는 이름 아래 죽도록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무지와 욕심이 고집을 만나면 폭력이 되고, 경직된 교리가 소신을 만날 때 그 역기능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중에서 새롭지 않은 때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 큰 의미를 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 50년 전에 출발한 향린교회와 함께 또 다른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함께 가야할 길입니다. 어디를 향해서? 예수님이 걸어 가신 그 길을 향하여. 그런데 그 길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흔적이 희미해졌습니다. 새로운 길에 함께 발걸음을 내딪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굳어진 마음을 풀고 서로의 어깨를 부축이며 예수님의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리고 찾은 만큼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우리 가운데 모시는 일입니다.
도기순 장로님이 안병무 선생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언제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이는 평생을 예수를 찾아 다녔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어요.” 안병무 선생님이 강남향린교회 설립예배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축사하신 말씀이 들립니다. 몇 번이나 울먹이며, 기어이 소리내어 우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에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후에 녹음된 테잎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었습니다.
(한참을 울먹임) “왜 우리는 세상에 왔나? 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나? 하도 예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그리고 있으니까. 나는 비록 못났어도, 내가 예수의 뒤를 따르지 못해도, 내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과 내 모습이 너무도 달라도, 내가 그린 예수의 얼굴이 나를 마구 짓밟아도, 내가 모욕당하고 심판을 받아도 예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자, 그 용기를 갖자, 나와 일치시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예수의 얼굴을 이렇게 그려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아니야 내가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그의모습은 정직하게 그리자. 세상에 그대로 드러내 놓자. 세상에 예수는 있다.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의 거리에 살아 있다.” (다시 울먹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