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묻으라 - 느헤미야의 비전(3)
느헤 2,19; 마태 25,14-18


저는 2주전 느헤미야의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을 전하면서 설교의 마지막을 알렉산더 대왕의 예화로 마쳤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주요 골자는 이러합니다. 중대한 전투를 앞두고 야간 순찰을 나왔던 왕은 보초가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앳된 얼굴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보초에게 그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알렉산더라고 작은 소리로 답을 합니다. 3번씩이나 ‘너의 이름이 무어냐?’고 묻던 왕의 질문에 이 보초는 자신의 목소리가 작아서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목소리를 높여서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제법 분명한 소리로 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자네 이름을 바꾸던지 행실을 바꾸던지 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 말은 처음 안티오키아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불려진 별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승천 이후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갈릴리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하는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겉잡을 수 없이 많아지자 스테파노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이는 종교재판을 감행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박해가 실은 교회의 성장과 이방선교라는 생각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파노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에 사울이라는 유대교에 광신적인 젊은 청년이 이 일에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는 스테파노 집사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용서의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 청년 사울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그가 이일로 쇼크를 받았다는 구절은 없지만, 그가 후에 바울이라는 복음전도자로 변화되는 일에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그의 죽음 앞에서 가졌던 평온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떠오릅니다. 반대로 자신은 어떠합니까? 예수라는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조건 감옥에 가두는 증오에 붙잡힌 사람.


여기 두 사람의 다른 신념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사람은 평온 그 자체요 다른 한 사람은 증오에 포로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믿는 믿음은 바른 믿음일까? 사울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고민에 이어 부활한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다마스커스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대한 박해는 예루살렘 지역 외의 이방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만, 신앙 안에서의 어려움과 박해는 또 다른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로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저는 이 말의 뜻을 젊어서는 별로 알지 못했습니다. 조금 나이를 먹어보니 이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혹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대 전제하에서 시작한 일은 처음은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결국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대표적인 교회가 안티오키아교회입니다. 여기에 1대 목회자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르나바 집사가 있었고, 후에 사울이 동역자로 함께 일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과 더불어서 교인들이 함께 말씀으로 훈련받으며 1년을 지나갈 때에 비로소 이웃사람들이 안티오키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별명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이 구절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 교회 나오면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 아닙니까? 성경은 교회 출석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브론딘이라는 불란서의 외줄타기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1859년도에 최고조에 다다릅니다. 그것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300미터 이상의 줄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여러 차례 왔다갔다 했기 때문입니다. 긴 장대나 혹은 불을 들고 건널 때 마다 모여든 군중들은 그의 곡예에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바퀴로 된 손수레를 밀고 건넜습니다. 또 환호를 지릅니다. 그때 이 브론딘은 군중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수레에 누군가를 태우고 건널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물론,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세계 최고입니다.’ 환호를 지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수레를 타고 그 외줄을 건너는 기막힌 장면을 연상합니다. 얼마나 스릴이 넘치는 장면입니까? 다시금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여러분 누구 자원자가 있습니까? 그렇게 환호하던 군중들은 마치 물을 끼얹는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봅니다.


마치 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제자들의 위대한 행적에 대해 감탄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이런 위대한 행동들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믿는데, 나서라고 하면 나서지를 않습니다. 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이 미는 이 외줄 수레에 너도나도 다 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인간변화와 사회변혁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3주째 함께 공부하고 있는 느헤미야는 그 시대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우선 복습을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유대포로 3세대로 페르시아 시민) 그의 직업은 무엇이었지요? (술관원)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그의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조국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 이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가장 처음에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현장 파악) 두 번째로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 몇 달 동안? 4개월. 그리고 오늘 본문이 다시금 시작합니다. 하루는 술을 따르는데, 안색이 좋지 않은 느헤미야를 본 왕이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자네 왜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은가? 몸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마음에 무슨 걱정이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이냐?’ ‘폐화, 만수무강을 빕니다. 소신의 선조들의 뼈가 묻힌 성읍이 돌무더기로 남아 있고 성문들은 불에 탄 채 그대로 버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근심이 떠나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묻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청이 무엇이냐?’ 이때 본문 4절을 보면, ‘나는 하늘을 내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아뢰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을 해서, ‘폐하 잠깐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하느님께 기도를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이 의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왕의 마음이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청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유다로 가서 선조들의 뼈가 묻힌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하여 주십시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황후가 ‘얼마나 걸리면 갔다 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답하기를 ‘예 지금은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고, 제가 거기에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며칠간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또 덧붙여서 여행에 필요한 절차와 물건들을 자세하게 요청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도 그냥 막연히 도와주십시오. 하는 기도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느헤미야가 ‘그때 가봐야 알겠습니다.’ 하고 막연하게 답을 했다면, 왕은 ‘그래 느헤미야야 그러면 한번 잘 알아보고 다음에 답을 주거라.’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면, 다음에는 왕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4개월을 기도하면서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여기서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룩하고자 하는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추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비전을 꿈꾸고 있다면, 실제 내 손에 붙잡힌 것으로 알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으로 알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통일에 대한 비전과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이미 통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알고 북한 사람들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같은 국민으로 알고 상대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통일이 되지 않았으니까가 아니라, 이미 통일이 된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그동안 친북인사로 낙인이 찍혀서 입국이 거절당했던 수십 명의 해외인사들이 귀국하여 고향땅을 밟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과 북을 동일선상에 두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해 왔던 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다’ 라고 하는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이 있은 지 수년이 지나 이제야 이분들의 입국을 허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창피한 노릇입니다. 이 가운데 내일 입국하는 독일의 송두율 교수가 있는데, 국정원이 과거의 그의 활동을 앞세워 영장을 발부받아 공항에서 그를 체포하려는 것은 과거 유신독재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구시대적인 발상입니다. 입국을 허락했으면 조건 없는 허락이 되어야합니다. 일본에 사는 정경모 선생은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는 조건부를 달아서 이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 들면 자기 고향 땅에 가서 죽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까지 갈 수는 없다.’ 만약에 우리 정부가 정말 통일을 원했다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일한 이분들을 이렇게까지 푸대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부가 겉으로는 통일과 민족화해를 외치지만, 실제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 아침에 어느 고등학교 정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문 앞에 서있던 4명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차를 타고 들어가는 선생을 향해 경례를 하면서 ‘멸공’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문민정부 이후 이런 따위는 모두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60년대 군사문화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연필 대신 키보드를 두드리고 머리 색깔은 변했지만, 같은 형제를 향한 적대의식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2,500여년전 페르시아라는 나라의 왕도 느헤미야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조국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허락하고 도와주었건만, 어찌 자기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해 일한 분들을 환대하고 그간의 노고를 기억하는 표창장을 주지 못할망정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조건을 달아 서약서를 쓰게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입니다. 게다가 베트남에 이어 이번에도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낙인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노무현 정부가 명분없는 이라크 파병을 거부함으로 우리 대한민국도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라는 인식을 분명히 국내외에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손실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를 향해 그간 우리의 약점으로 얘기되는 사대주의를 깨고 자주민족의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정부의 지도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이익보다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좀 더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 이번 일은 결정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부시대통령으로부터 이지맨이 아니라 하드맨이라고 불려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시가 노대통령을 향해 쓴 ‘이지맨’이라는 영어표현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문자의 번역 그 자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대방을 인종적으로나 혹은 인격적으로 얕잡아볼 때나 쓰는 언어입니다. 우리 노대통령이 이런 건 좀 아셨으면 합니다.

느헤미야가 가졌던 성벽 재건의 비전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유다 민족을 새롭게 중흥시키려는 원대한 비전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 민족의 중흥을 위한 원대한 비전속에서 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 말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패권을 추구하는 나라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힘이 약한 민족의 주권을 존중하고 배움의 자세를 가진 열린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 혹은 국제화 시대일수록 자기 뿌리를 아는 민족정체성의 확립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를 알아야 상대방으로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민족중흥을 꿈꾸는 느헤미야의 비전을 품고 저는 한국교회의 부흥의 비전속에서 다음주로 다가온 장로선출을 앞두고 향린교회로서의 비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나가시는 길에 장로후보자 명단을 받게 됩니다. 지난주에 장로후보자 명단을 교회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이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혹 이름 생년 등이 잘못 표기된 경우 정정을 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부득이한 사유로 꼭 사퇴를 해야 할 분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불찰로 사퇴에 대한 분명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기에 상당한 분들이 명단에 스스로 줄을 그어 사퇴를 표명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원래 당회에서는 사퇴표명은 저나 당회서기 장로님께 하는 분에 한해서 허락한다는 결의를 하였는데, 그만 그게 목회실로 기재가 되는 바람에 많은 혼선이 빗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목요일 당회원들과 의논한 결과 우선 저의 불찰임을 사과하고 저와 의논없이 본인이 임의로 자신의 이름을 지운 것은 사퇴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사퇴를 허락했다면,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평양감사도 본인이 하기 싫으면 어쩔 수가 없듯이 제가 여러분 개인의 사퇴 자유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개인의 자유에 앞서 먼저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분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퇴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실, 저희 교우들 가운데는 내가 반드시 장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한명도 없습니다. 선거를 통해 뽑힘을 받았을 때, 본인이 부족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받아들이신 분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한번도 제가 자격이 있어 목사로 일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이 부르셨으니까 부족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채우실 것이다. 라는 확신 속에서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사실, 장로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격논의가 있지만,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자기 이름을 지운 사람들이야 말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느 한사람도 자신있게 나선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과 그 은혜에 의지해서 그 직을 수락하고 감당을 했습니다. 모세도 기드온도 다윗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베드로도 바울도 전부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줄은 그은 사람들이야 말로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같으면 제가 사퇴를 받아들이겠지만, 교회이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후보 명단을 갖고 다섯 분의 후보자를 생각해 오시기 바랍니다. 이 다섯 분을 생각하실 때에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지난 당회와 목회위원회에서 권장사항으로 결정했던 40대 이하 30%와 여성 30%입니다. 5명의 30%라면 숫자상으로는 1.5명이지만, 사람을 반으로 짜를 수는 없으니까 두 명을 생각해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한 5명 가운데는 최소한 40대 이하가 2명 여성이 2명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장로직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한국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자면, 새로운 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지난주에 모인 기장 총회에서 여성 30%를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향린은 적어도 당회 안에 여성이 반이 되어야 향린교회로서의 위치가 서는 것입니다. 만약에 5명이 다 선출이 되고 그 가운데 여성이 두 명이 되어도 실제 내년도 당회원 전체 구성수로 보면 (두 명이 안식년 휴무로 들어가신 후) 남성 5명 여성 4명으로 구성이 되기에 결국은 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또한 30대 혹은 40대에서 사람을 뽑고자 할 때에 여러분 마음이 차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지도자로 타고난 사람은 없습니다. 기본이 있는 분이면 누구나 세워주면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향린교회가 사람을 세워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고, 거꾸로 세워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도 어려서부터 저를 보아왔다면, 여러분이 저를 담임목사로 초청했겠습니까? 모르니까 불렀지. 사람이 가까우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이는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기도하는 가운데 멀리 떼어 놓고 그 사람의 장점을 보면서 뽑아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나 노회 규례서에는 장로 자격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장로 자격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의 열정이 있고, 둘째 향린교회와 우리 민족을 향한 비전이 있고 셋째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


그리고 주의할 것은 5명의 후보자의 이름을 쓸 수 있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한사람 혹은 두 사람의 이름만 쓸 경우는 이런 어려움이 생깁니다. 지금 1차 투표에서 후보자가 되려면 최소한 득표수의 20%를 획득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득표수에 여러분의 표가 포함되기에 전체적으로 20%를 확보하는 일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여러분께서는 가능한대로 5명의 후보자를 다 생각해 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향린교우들은 모두가 다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단 한 가지 염려가 있다면, 겸양의 덕이 뛰어나서 하지 않으려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연말에 부서장을 정할 때마다 서로 하지 않으려 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달란트 곧 은사를 땅에 묻어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한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었겠습니까? 성경에는 본전을 잃어버릴까봐 그래서 그 책임을 추궁당할까봐 그는 땅에 묻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진짜 마음은 딴 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땅에 묻어둔 진짜 이유는 자기 열등감입니다. 남은 열 달란트나 받고 다섯 달란트나 받았는데 나는 뭐야? 나야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냐? 나같이 미미한 존재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고 하는 열등감이 그로 하여금 자기 달란트를 땅에 묻게 만든 것입니다. 이 열등감은 비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이 비교의식이라고 믿습니다. 남과의 비교는 결국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월감 아니면 열등감입니다. 이는 결국 둘 다 자기를 파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남과의 비교를 하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납보다 잘살면 얼마를 잘살고 또 못살면 얼마나 못삽니까? 그래봤자 40 50년입니다. 그러다가 땅속에 묻히면 다 똑같은 것 아닙니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만약에 이 한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를 갖고 열심히 일하다가 한달란트를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때, 주인은 제가 믿는 주인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열심히 하였구나 이번에는 그 실패를 거울삼아 좀 더 크게 투자를 해보려무나, 그리고는 열 달란트 가진 사람이 남긴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남긴 다섯 달란트를 더한 열다섯 달란트를 주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꼭 동의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제가 복음서에서 만난 예수님은 반드시 이러한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남을 보지 않고 자기 받은 바 한달란트에 최선을 다한 종, 그는 결국 열다섯 달란트를 받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달란트 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우리의 미래, 그리고 향린의 장래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 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에 향린의 미래, 그리고 한국교회의 변화, 민족에 대한 비전을 담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달란트를 땅에 묻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묻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