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물을 넘어 - 느헤미야의 비전(4)
느헤 2,9-20; 로마 8,31-39


“하늘을 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일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아무도 이 일을 막지 못한다.”

요즈음 살아가기가 IMF 때보다도 더 힘들다고 하는 얘기를 곳곳에서 듣습니다.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적인 수치와 국민들이 경험하는 현실과는 항상 괴리가 있습니다. 발표되는 국민소득은 계속 높아가지만, 이에 곁따라서 국민들의 상대적인 빈곤감도 같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남한의 빈부 격차의 수치는 어떠한지 제가 잘 모릅니다만, 많은 국민들이 무비판적으로 우러러보고 있는 미국은 최근 발표에서 부자 1%의 소득이 가난한 국민 40%의 소득보다 많다고 하는 아주 우려할만한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 빈부격차의 수치는 지난 30년 전보다 배나 더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수많은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한번 굴러가면 세울 수 없는 경쟁에 기초한 이윤추구라는 목표만을 가진 자본주의는 이렇듯 점점 더 큰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 군사대국의 패권을 계속 쥐고 흔들려는 미국의 자국우선주의는 모든 나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라크와의 전쟁은 자국안의 모순의 문제를 자국 밖으로 그 시선을 돌리려는 고도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네로황제가 자신의 정책 실수를 기독교인들의 대한 박해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였듯이 말입니다. 다음 주일에 저희 교회와 강남향린이 함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아 한신대 교정에서 합동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때 오시는 강사 목사님이 미국의 수도 워싱톤 백악관 근처에서 흑인을 위한 빈민운동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더 생생한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들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따라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의 문제는 그 이름이 UN의 이름하의 평화유지군이든 아니면 미국 주도의 점령군 하수꾼이든 이 문제는 단순한 군대파병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호랑이 등에 같이 올라타는 꼴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미리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12위라는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이 듣기 좋아 언제 세계 10위권 안으로 돌입하게 될 것인가? 하는 수치적 놀음에 놀아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빈부의 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한 경제대국 10위권 진입 혹은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은 허울 좋은 구실 뿐이라 하는 것을 우리 국민 스스로가 자각해야 합니다.

지난달에는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가 처음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숫자를 넘어섰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적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인이기에 원화의 가치가 떨어져 수출이 어쩌고 경기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먹고사는 일은 후에도 쉽게 일으킬 수 있지만, 한번 무너진 도덕과 윤리 그리고 정신적이고 영적 상실과 체념은 쉽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이전에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결코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소위 잘 사는 사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 한인들과 일하는 다른 나라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선교사가 원주민들을 고용해서 짐을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날 걸어가는 속도가 너무나 늦어서 그날 밤 내일은 좀 더 속도를 내자고 재촉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첫째 날보다 배나 멀리 갔습니다. 선교사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 저녁 그들을 칭찬하면서 이 속도로 가면 내일 저녁이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내일은 그렇게 빨리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반문하면서 ‘아니,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데, 왜 빨리 가지 못하느냐?’ 그때 그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어제는 우리가 너무 빨리 갔기에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따라 오도록 하려면 내일은 속도를 늦추어야 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남들이 가니까 정신없이 뛰는 군상들이 우리들 주위에 아니 내 안에는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육신의 속도와 영혼의 속도는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길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뛰는 동물은 인간이라는 얘기 그냥 웃고 지나가기에는 이 말이 던지는 의미가 무겁습니다. 개인의 성공에만 몰두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느헤미야가 꿈꾸었던 무너진 성벽의 재건과 성문 보수가 과연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재해석 되어져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 년 전 당시 페르샤라는 거대한 나라의 왕의 측근으로 부상했던 느헤미야는 잠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뿌리인 유대 민족의 회복을 꿈꾸며 조국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다가온 것은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아닌, 그를 방해하고자 하는 적대적인 세력을 먼저 만납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느헤미야는 적어도 2개월 이상을 걸려서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타난 것은 1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민족의 적대세력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하느님의 뜻에 기초한 좋은 비젼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사람과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분명히 경험하는 것 하나는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이를 방해하는 힘은 항상 더 세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반대의 힘은 물론 내 안에서도 일어나고 밖에서도 옵니다.
저의 짧은 일생 속에서도 좋은 일이 있었을 때, 내가 세상에서 높아지는 그 이면에는 언제나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교인들 몇 명을 넘어뜨리기보다는 목사 하나를 넘어뜨리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큽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으로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오니까 달라진 게 많이 있습니다. 가끔 만나는 외부인사들이 다른 교회의 목사들과는 달리 대접해 주는 부분도 있고, 또 반면에 타부시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제가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제 설교를 읽고 비판해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분도 계십니다. 누구신지를 모르니까 따로 보상을 하지 않아서 좋긴 합니다만,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기 고국에 돌아와서만이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향린교회로 간다고 하는 소문이 난 지난 3월에 LA에서 출간되는 한 종교 신문이 근거없이 저를 모함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물론, 그 기자는 저를 잘 아는 선배 목사와 저의 항의에 의해 자신이 잘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바로 다음날로 사표를 쓰고 물러났습니다만, 목사의 생명이 어떤 점에서는 명예에 달려 있기에 당시 제가 받은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하면 로맨스요 상대방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세력을 무조건 악마적인 세력으로 보는 흑백논리입니다. 나의 비판에만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상대방의 비판 속에도 진리는 담겨 있습니다. 사실 교인들끼리의 화해가 세상 사람들끼리의 화해와는 달리 쉽지 않은 것은 거기에 신앙의 이름으로 하느님도 모르게 하느님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대폿잔 한잔 걸치면 쉽게 해결이 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는 그리 쉽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악마시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교회 싸움은 공권력이 개입되는 막장까지 가게 되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래 한 두 사람의 개인의 명예는 세워질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때까지 떨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영혼의 아픔보다 자기 주장이 앞서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바리새주의입니다. 내 믿음이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게 할 때, 우리는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채색된 이데올로기요 하나의 고착화된 주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향린인들은 어떤 일을 주장할 때마다 내 안에도 허점은 항상 있다고 하는 자기 성찰의 넉넉함을 갖는 일이야 말로 진정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에 앞서 내 안의 들보’를 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남을 저울질하는 그만큼 나 스스로도 저울질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일단 3일간의 휴식에 들어갑니다. 물론, 이는 오랜 기간동안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 여행의 피곤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추측컨대, 느헤미야는 자신을 적대시여기는 세력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느헤미야는 그의 직위가 말해주듯이 점령군 페르샤 황실에서 온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신의 지위 영달을 바라는 정치적 야심가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느헤미야는 본의가 전도된 현실 앞에서 상당히 당황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자신의 진의를 의심하며 팔짱을 끼고 보는 유대의 친구들, 그리고 밖으로는 공개적으로 자기의 귀국을 반대하는 주위의 적대적인 세력들. 여기서 느혜미야는 먼저 당면한 시련을 극복할 영적인 힘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숫자는 신문기사에 나타난 숫자와는 다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의 사흘이라는 숫자도 어떤 종교적 상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더불어 모리아산을 향해가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는 사흘과 같이, 요나가 큰 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거듭남의 사흘과 같이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에 앞서서 경험하신 죽음의 사흘과 같이 느헤미야가 휴식을 취한 사흘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종교적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사흘이라는 기간을 통해 영적인 힘을 비축한 느헤미야는 먼저 사태 파악에 나섭니다. 이때 그는 측근 몇 사람과 함께 한밤중에 일어나 비밀리에 현장 파악을 나갑니다. 우선은 방해꾼들의 방해공작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는 두 세 사람의 이름으로 그치고 있으나 이들은 그냥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의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 고위관리들이었습니다. 가장 우두머리격인 산발랏은 당시 북쪽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토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요단강 동쪽에 거주하는 족장이었습니다. 또한 19절에 등장하는 아랍사람 게셈은 유대왕국 남쪽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의 일을 반대하는 그룹들은 동쪽과 북쪽과 남쪽에서 다른 말로 하면 서쪽은 지중해이니까 사면팔방에서 조직적으로 방해공작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황제의 칙서가 있었으니 공권력으로도 대항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런 강압적인 방법은 본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용의주도한 방법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비전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겉으로는 성벽 재건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비전은 이를 넘어선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사람을 사서 성벽을 개축하고 성문을 보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성벽과 성문 보수만이 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성벽 개축과 성문 보수라는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흩어진 유대사람들의 뜻을 하나로 묶고, 시들해진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젼을 새롭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에게 중요한 것은 흩어진 유대민족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지 일은 차후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방법이나 어떤 기관의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일이 힘든 것은 일이 목적이 아니라 일은 방법이고 실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느헤미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는 절대 군림하는 권력가로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는 낮아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공권력이나 재력을 통해 혼자의 힘으로도 성곽과 문을 고칠 수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이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기에 이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을 물리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만약에 뛰어내렸다면 예수님은 너무나도 쉽게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를 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합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가 칼을 뽑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사들을 불러 이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는 붙잡히시어 죽으십니다. 무력사용을 거부하시는 그 이면에는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을 불러일으키시려는 비전 때문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일어서서 함께 이룩하시는 비전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 느헤미야는 손쉬운 방법을 뒤로 하고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꼴은 너무 처참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었으며 성문들은 불에 탄 채로 있습니다. 어서 빨리 예루살렘 성을 쌓아서 다시는 남에게 수모 받지 않도록 합시다.” 이 대목에서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꼴은 너무 처참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꼴은 너무 처참합니다.’ 그는 이곳에 온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은 이방인입니다. 성벽 재건을 마치면 다시 돌아갈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우리’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뜻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여러 사람을 함께 말하는 복수 인칭대명사이지만 동시에 울타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래 우리 민족은 ‘나’라고 하는 개인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묻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말할 때도 ‘내 것’이라는 표현 보다는 ‘우리 것’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는 자녀들을 얘기할 때,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들, 우리 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남편, 우리 아내’ 라고 말할 때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영어를 위시한 서구권의 말은 언제나 주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I나 Ich는 문장의 어디에 들어가든지 대문자로 씁니다. 주어를 빼고서는 문장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라고 하는 주어는 언제나 문장 전체 속에 숨어 들어가 있거나 그냥 ‘우리’ 속에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후에 책임상의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공동체가 개인보다 항상 앞서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구의 개인주의가 밀려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우리 민족은 분단이 안겨준 오랫동안의 상처로 인해 자신의 속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자신과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흑백논리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길만 막히지 않으면 불과 서너 시간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영남 호남 충청 강원이라는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모임에서 조차 장을 뽑을 때는 언제나 지역 출신이 당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지도력은 어떤 형이냐? 혹은 그 사람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느냐? 이런 질문 보다는 그 사람은 어느 지역출신이냐? 이것이 현재 소위 말하는 우리의 종교지도자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분단이 말들어낸 망국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민족의 성곽은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에 탄 채 검게 남아 있습니다. 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것을 지키는 보호막입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입니다. 그것이 무너져 있으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수모를 당합니다. 지난 59년 동안 우리 민족의 성은 무너진 채 있습니다. 마치 느헤미야가 무너진 돌더미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듯이 우리도 3.8선의 철조망으로 인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집만 튼튼히 세우면 되는 양,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성공인 양, 착각과 오류 속에 빠져 있습니다. 남과 북의 대립적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한 우리는 영원히 그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과 남은 당연히 하나이지만, 분명코 하나로 보아야 하고, 그리고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사회의 쟁점화가 되고 있는 이라크 전투병 파병은 그 답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미국과의 협력경제니 국제정치니 복잡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인들이 보는 시각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해서 남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나라가 어디 딴 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웃기고 있구만! 제 집의 성곽이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에 탄 채로 그냥 있는데, 다른 집 무너진 곳을 고치겠다고 하면 정말 우스운 꼴입니다. 그것도 그 집 주인이 요청한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 파병이 우리의 국력을 자랑하는 무슨 자랑거리인줄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수치요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라크인들의 가장 큰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남의 것이 아닌 내 자신의 성의 무너진 부분부터 세워나가야 합니다. 내 믿음의 성이 무너진 곳이 있다면 이를 바로 세워야 하고, 내 가정의 성이 무너져 있다면 이를 바로 세워야 하고 우리 향린교회의 성이 무너져 있다면 이 또한 함께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의 성곽이 무너져 있습니다. 느헤미야서 3장을 읽어보면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의 부분 부분을 책임을 지고 자신들의 가진 재능을 내어 놓고 힘써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의 구성원들끼리 교회에서는 교회의 구성원들끼리 자신들의 가진 바 재능과 은사를 내어 놓고 무너진 성을 보수하십시다. 내 몸이 내 가정이 내 교회가 그리고 내 민족과 온 인류가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십시다. 사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방에서는 적들이 조롱을 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 공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실현을 위한 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많은 장애물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이렇게 소리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배고픔입니까?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는 도살당하는 양처럼 천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불란서의 어느 동네 입구에는 중세기 때부터 세워져 있었던 예수님의 상이 있었습니다. 그 모양은 두 팔을 벌리고 사람들을 포옹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시 독일군과의 전투로 말미암아 양쪽 팔이 떨어져가고 말았습니다. 전쟁 직후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누가 밀고자였는지를 잡아내기 위해 서로를 향한 의심의 눈빛이 충혈 되어 있던 어느 날 한 주민이 거기에 이런 팻말을 걸어 놓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팔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