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예수
1사무 21,3-6; 루가 14,12-15
최상진 목사(워싱톤 평화나눔공동체 대표)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 자신과 수준이 비슷한 사람 혹은 생각이 맞는 사람들만 초대하지 말고 소외된 이웃을 초청해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크리스찬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수준이 같고 생각이 통하는 가까운 사람들은 언제나 도움을 받았을 때 다시 갚을 수 있어 베풀어준 도움이 헛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베풀었을 때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며, 베풀어 준 사람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과 이처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 자신의 사랑이 100% 소외된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감사가 하느님께 100% 영광이되는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PERFECT)이 된다는 것이다.
갚을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말 한마디, 빵 한 조각, 혹은 생수 한 병을 나누어도 하느님이 사랑이 온전하게 전해 질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웃은 누구인가?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 가난으로 혼자 일어 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북한 동포들, 거리의 노숙자들, 40만 외국 노동자들과 10만의 조선족 노동자들...... 바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사랑을 필요한 자들이다.

무공해 신학과 거름공동체 신학
노숙자와 생수(Living water)나누기 운동
평화 나눔 공동체가 노숙자들을 위해 음식을 나눈 지 6년째가 되었다. 그리고 생수 나누기 운동을 벌인지 3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화 나눔 공동체는 매년 1만병의 물을 워싱톤 디씨 빈민가에 있는 흑인 노숙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수 나누기 운동을 왜 해야 하느냐?” 그리고 “너무 흔한 물이 흑인 노숙자들에게 무슨 의무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했다. 생수 음료 수 백통 분량의 물을 한번으로 샤워나 빨래로 소비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생수 1병은 너무도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매년 400여명의 가난한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이 폭염의 더위와 갈증으로 죽어가는 미국의 빈민가에서는 물 한 방울은 생명과도 같다. 이 지구상에는 생수 1병을 사서마실 수 있는 돈이 없고, 빵 한 조각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안 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부유한 크리스찬들이 가장 보잘 것 없이 여기는 물 한 모금과 빵 한 조각이 없어 하느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기독교의 모순을 잘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한 여름 폭염으로 빈민가의 거리나 공원에서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노숙자들을 보게 된다. 그 목마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인지 상상 할 수 없다. 이들을 찾아가 시원한 생수 1병을 주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 생수를 나누는 사람들을 반기는 노숙자들의 반응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며 고통에서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생수에 대한 영어 정의를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은 자연의 것을 거져 나눈다는 의미에서 ‘자연의 수’ 혹은 ‘천연수’란 의미의 “natural water”로 정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노숙자들에게 생수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는 저들을 보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의미하는 “living water”로 운동의 이름이 바꿨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수가라 불리는 동네에서 만난 천하고 가난한 사마리아 연인에게” 네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남들이 감히 할 수 없는 거대 한 것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마실 물 한 모금이라도 그리고 먹을 수 있는 빵 한 조각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이웃 사랑의 첫걸음임을 알아야 한다. 결코 가진 게 있어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줄 수 있는 따로 챙겨 놓은 것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다. 진정한 나눔이란 작은 것 하나라도 자신의 것 하나라도 자신의 필요를 이웃과 함께 나눌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파괴된 하느님의 거룩한 창조 질서
우리는 왜 우리의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어디 우리의 자연 물만이 우리의 것인가! 어디 우리의 땅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인가! 모든 만물은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지 우리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이방인이든 한민족이든 하느님으로부터 난 자연물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우리의 것이라 창고에 가득 채우고 이방인인 노숙자 들이나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들이 굶주림에 있어도 외면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법도를 거역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소산들을 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 뿐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인 모든 자연의 생명을 끔찍이 사랑 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태초에 숨을 쉬든 안 쉬든, 날든 못 날든 생명력 있는 모든 것(living creatures)을 창조하셨다. 바위도 그 안에 살아 있는 맥이 있고 이끼와 식물을 살게 한다. 흙도 생명이 있다. 흙 안에 살아 있는 영양분이 있어 온갖 생명을 살린다. 태양도 생명이 있어 피조물들에게 영양분을 공급 한다. 이러한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장)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또한 피조물을 아름답게 보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혈육이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다(창세기 6:19 )
에레미야 선지자는 창조주 하느님을“오직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오 사시는 하느님(living God)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고 찬양 했다(에레미야 10:10)
그러나 우리의 불의와 죄악을 범하고 하느님께 회개치 안으면 “하느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the land of the living)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고 고백했다(시편 52:5).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니 이는 생수의 근원(the fountain of living water)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예레미야 17:3)
에스겔 32:24-28에서 생존 세상 즉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향해 테러(terror)를 자행하는 자들을 멸하신다고 에스겔 선지자는 강조했다. “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베풀렸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살육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terror inthe land of the living)로다 (24절)....”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자신의 거룩한 소유를 거져 은혜로 주셨다. 그 은혜를 받은 소산의 남은 것들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거져 은혜로 주라는 의미이다. 그 소산을 돈을 주고 판다면 하느님께서 본래 의도한 땅과 소산에 대한 분배 정의를 위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땅에서 나는 모든 소산들은 하느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은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저버렸다. 하느님의 거룩한 땅에서 나는 소산들을 경제적으로 가난한 노숙자들, 즉 과부들과 고아들과 함께 나누어 주도록 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법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느님의 허락도 없이 하느님의 거룩한 땅을 서로 소유 하려고 폭력과 전쟁을 앞세웠다. 하느님의 생명이 깃든 거룩한 땅을 자신들의 소유물인양 온갖 비리와 폭력 그리고 전쟁을 통해 강제적으로 빼앗고 부도시키고 차압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정의와 법도가 메말라 버린 세상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많은 교회들마저 하느님의 거룩한 땅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투기를 하느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 손익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서 법정투쟁을 하며 이권다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교회들에게 가난한 노숙자들과 과부 고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최고 부자들의 5%가 미국 돈의 40%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고 부자들의 20%가 미국 돈의 85%를 소유하고 있으니 분배 정의와 견제정의가 타락한지 이미 오래다.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미국인 10명 중 2명이 현재 노숙자이거나 과거 노숙자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평화와 나눔 공동체가 노숙자 선교를 하는 미국의 수도 워싱톤 D.C에 만 약 3만 여명의 노숙자들이 있다.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많은 가난한 이웃을 눈앞에 두고 관망만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사랑이 법도가 바닥까지 실추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럽의 종교 박해를 피해 청교도 들이 미국 대륙에 처음 도착 했을 때 자신들이 성경대로 하느님의 땅을 서로 분배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 왔다. 이들의 청교도 신앙과 생활은 미국의 정신과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남북전쟁을 겪으며 서로의 땅과 이익을 챙기느라 경제정의와 분배정의가 상실되고 말았다. 심지어 경제적인 부를 축척하려는 투기가들 때문에 저들 청교도들의 순수한 거름공동체들마저 흔들리고 있다. 저들의 거룩한 땅을 값비싸게 주고 사서 투기하는 사람들이 저들 공동체 주변에 유흥시설을 건립하고 심지어 아파트 단지를 세워 집값을 올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의 신앙적 보루인 청교도들의 신앙이 흔들린다면 미국 기독교는 언젠가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무공해 신학과 무공해 인간
자연재배, 즉 무공해 작물을 땅에서 재배하려면 우선 산성화된 땅을 알카리성 토지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화학비료를 사용한 땅에 비료를 주지 않고 작물을 재배 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공해물 작물이 될 수 는 없다. 기본적으로 산성화 된 땅을 알카리성 토지로 바꾸는데 최소 3-5년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공해 작물을 재배하는데 가장 좋은 거름은 무엇일까? 무공해 농사를 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인체의 폐기물에서 나오는 인분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러나 인분에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자연 발효를 시킨 후 거름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생명력이 있는 자연 식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선호하는 비료나 영양제(비타민A, B, C, D...)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가치가 없는 인체의 폐기물인 인분이 오히려 가장 값진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더럽다고 하는 그 것이 자연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무공해 인간들을 만들기 위해 산성화된 인간의 마음의 밭으로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인간을 산성화 시키는 마음이란 이기심, 교만, 불만, 명예욕, 사치, 폭력 등이다. 이러한 산성화된 마음을 알카리성 마음이 밭으로 바꾸는데 보약이나 비타민과 같은 영양제가 필요한 게 아니다. 무공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사람도 인체 폐기물인 인분거름이 필요하다.
여기서 인분에서 나오는 거름이란 상징적으로 실패, 좌절, 고통, 멸시, 천대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인간의 최악의 아픔을 의미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분거름도 바로 밭에 뿌려지면 독성기 있기 때문에 일정기간 발효시켜야 한다. 인분인 좌절과 아픔을 발효시키지 못하고 마음에 간직만하고 있으면 인간들을 참다못해 자살을 하거나 정신착란을 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마음 밭의 작물들을 죽게 만든다. 여기서 인분을 발효시킨다는 말은 1)인생의 밑바닥 삶을 경험함으로써 심오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2)인생의 밑바닥 삶을 통해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과 겸손의 미덕을 배우는 것이며 3)예수님이 인생의 밑바닥, 즉 노숙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인분이 발효되는 고통’을 통해 겸손과 섬김의 도를 보여 주신, 즉 ‘그리스도의 무공해 인간되심’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인생의 쓰라린 아픔과 고통인 인분을 하느님이 지리로 발효시키지 않으면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 비관, 비방, 폭력, 전쟁 등의 시각으로 보게 되어 하느님의 신질서를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들이 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가장 생명력 있는 자연, 무공해 식물은 사람의 인분이 발효 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처럼 가장 생명력이 있는 사람, 즉 무공해 인간은 인생의 인분이 발효되는 아픔을 통해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도’로 채워 질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무공해 인간을 만드는 거름공동체
자연의 사람, 무공해 인간이란 거름을 먹고 자라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주신 거름을 먹고 자라는 사람들은 정직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아픔과 고난을 발효시킴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기에 더 나아가 이웃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나누기를 즐겨한다.
‘무공해 인간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상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그것이 발효되어 진리로 자유케 될 때까지 서로 섬기며 하나 되는 거름공동체를 말한다. 우리와 함께 발효 될 인분들은 누구인가? 바로 죄인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노숙자들 그리고 양심과 진리 앞에 고난 받기를 자청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리스도는 이들을 사랑하며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라 명하셨다. 세상의 천한 것을 들어 가장 고귀하게 만드시는 주님은 세상의 버려진 인간 폐기물과 같은 가남하고 소외된 인생들을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는 거름공동체의 삶을 통해 ‘자신을 닮은 무공해 인간’을 재배하시길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였는가!
생명이 있는 메뚜기와 함께 논에서 뛰 놀던 남북한 어린이들을 향해 6.25 때 대포 알을 쏘아대지 않았던가! 개울가에서 가재를 잡으며 동심을 즐기던 베트남 어린이들을 향해 베트남 전쟁 때 미사일을 쏘지 않았던가! 자연의 흙으로 모래성을 쌓으며 소꿉장난을 하는 천진한 이라크 어린이들을 향해 대공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전쟁과 분쟁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질서의 보존자로 세우신 은총을 우리는 잊고 살지 않았는가! 하느님이 그렇게도 자신의 현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수많은 인간들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아 벌집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거름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들은 비단 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다. 자신들 교회의 대형화에 눈이 멀어 소외된 이웃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교회들도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거름공동체를 파괴하는 공동체들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세우는 공동체들은 무엇인가?
첫째, 인생의 바닥에서 허덕이는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을 발효시켜 진리로 거듭날 때까지 돌보아 주는 거름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둘째, 예수님처럼 겸손의 도를 배워 생수 한 병이라도 들고 목말라 하는 노숙자들을 찾아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셋째, 사회적으로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이든, 경제적으로 천시 받는 아프리카 흑인들이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이든, 연약한 자들을 자유케 하는 평화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끝으로 한 순간 목을 축이는 체험보다 더 큰 갈증해소, 영원한 자유함의 기쁨, 하늘나라의 소망, 즉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영원한 언약의 소중함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수를 닮은 무공해 인간’을 만들며 진리가 통하는 ‘거름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섭리이다. 가장 기초적인 거름공동체는 먹거리공동체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를 끝내고 자기 교인들과만 식사를 즐기는 셀러드 바(Salad bar) 공동체가 아니다. 상추나 고추를 심더라도 그 소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식탁공동체인 것이다. 더 나아가 가장 성숙된 거름공동체는 생활공동체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시들의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 고집하지 않고 서로 섬기며 소유를 통용할 수 있는 생활동공체는 초대공동체의 모습이었다. 아울러 생활을 통해 신앙을 실천케 하는 성숙된 생활공동체는 물질문명과 이기주의의 모순으로 사랑이 메말라가는 현대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거름공동체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의 목적이 자신들만의 만족이나 안식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름공동체는 더 많은 소외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기 위한 생활공동체의 모체요 밑거름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이웃과 진정한 나눔과 섬김이 있는 생활 코이노니아, 즉 거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 사명일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진리 그 자체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묵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