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에제 47,7-12; 요한 5,1-9
박승렬 목사(한우리교회)


오늘 제가 향린교회에 와서 하느님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향린교회는 저에게 믿음의 고향입니다. 향린에서 보낸 저의 청년시절은 저의 신앙의 밑둥이 되어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한우리 교회는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세 들어 살면서 그곳 대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입니다. 한우리 교우들과 저의 가족들을 대신해서 따뜻한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저는 매우 낯익은 장소에서 낯익은 분들과 함께 낯익은 본문과 낯익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강의든 설교든 첫 장면이 산뜻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일단은 낙제점인 것 같습니다. 낯익은 본문에 낯익은 제목이어서 신선함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38년 된 아주 고질병 환자를 고쳐준 치유 이야기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내가 어디 아프다면 “주님, 그런 치유의 능력을 나에게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그런 기적을 일으키셨던 분이셨고 지금도 그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정도의 말씀일 뿐일까요? 이 본문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의 어떤 응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네, 저는 어디가 낫기를 원합니다.” 또는 “아니요. 저는 지금 충분히 건강합니다.” 라거나 질문과 응답이 있어야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이 물음 앞에 여러분과 제가 서 있습니다.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정말 낫기를 원하는가?’ ‘내가 낫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아픈 곳, 온전하지 않는 곳은 어디인가?’ 등등의 질문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질문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이 앓고 있던 병은 무엇이겠습니까? 38년 동안 누워있는 것을 보면 중풍병자일까요?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라고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이 환자는 중풍병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성경의 병자들 목록에 중풍병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역성경은 혈기 마른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병자였을까요? 중풍병자일까요? 그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채 누워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채 누워있다고 해서 다 중풍병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38년 동안 누워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유대교의 속박에 얽매여 말라비틀어진 삶,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유대교 규정들을 보면 이것은 안 되고, 저것은 안 되고, 그것도 안 되고 등등 금지사항이 너무나 많습니다.
유대교는 무수히 많은 법률로 죄인을 양산해내는 체제였습니다. 그런 체제의 속박 하에서 사는 삶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유대교 성전에서 주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들이 내려와 사람을 고쳐준다는 그 연못은 참 신기한 연못입니다. 사람들은 그 신비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하염없이 누워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물을 휘저어 놓기를 기다리며, 그 물에 들어가서 병이 낫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 역시 그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연못이 좋은 것일까요? 희망일까요? 그런 연못은 사기입니다. 그런 연못은 거짓입니다. 이런 연못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천사는 천사가 아닙니다. 거짓 천사와 거짓 연못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속으로 ‘아니 저 목사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나? 성경에 나오는 것을 거짓이라고 하고, 믿지 말라고 말하다니.’ 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이 본문이 이루어지는 배경 무대를 살펴봅시다. 사건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였습니까? 1절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즉 이 사건이 일어나는 때는 명절이며 안식일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때입니다. 사건의 장소는 베데스타라는 연못가입니다. 이 베데스타, 베짜타라는 말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벧 에스타 라고 읽습니다. ‘벧 에스타’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무대는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그것도 베데스타 곧 ‘자비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비가 있는 현실이었을까요?
베데스타 연못의 물은 깨끗했을까요? 실제 물은 깨끗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연못에 내려오는 전설을 보면 그 물은 결코 깨끗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설에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여 놓고 그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낳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천사가 오기 전에는 그 연못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자비의 집이라고 하는 베데스타 연못은 더러운 물이 있는 곳이며, 더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더러운 곳입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병자들이며 죄인들로서, 부정한 사람 곧 더러운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곳에 있는 더러운 사람들이 깨끗한 천사가 내려와서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천사는 자주 내려왔을까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었다는 것을 보면 천사는 결코 자주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은 깨끗하게 될 자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은 자주 내려와서 깨끗하게 해주면 안 됩니까? 물을 가끔 움직이게 할 것이 아니라, 아예 물을 흐르게 하고, 물이 늘 움직이게 해서 깨끗하게 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이 천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어도 “오늘은 기쁜 날이니 오늘은 전부 공짜”하는 식으로 이왕에 내려와 물을 움직였으면 그 날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를 다 낳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는 움직인 그 날의 물을 퍼가서 뿌려주기만 해도 모두 낳게 해주어야 천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정말 천사라면 그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천사는 정말 가끔 내려와서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선착순으로 일등만 우대하고 있습니다. 2등 이하, 3등, 4등은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지도 않습니다. 이런 천사가 천사일까요? 그런 천사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자비라면 결코 자비가 아닙니다. 일등만 기억하고 일등에게만 자비를 베푸는 천사나 연못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사람을 기만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짓의 뿌리일 뿐입니다. 그곳에 감사의 기도가 있겠습니까? 감사의 찬양이 있겠습니까? 2등 이하의 사람들은 결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거짓 연못과 거짓 천사에 현혹되어 있는 대표적 사람이 본문에 등장하는 38년 된 혈기 마른 병자입니다. 그는 유대교의 억압된 체제가 흘려주는 거짓된 희망에 속아서, 거짓천사에 현혹되어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사람들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38년은 한 세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세대의 사람들이 체제가 주는 거짓에 속아서 누워있습니다. 그는 겨우 한 사람 정도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에 거룩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자비의 집이지만 자비가 없는 베데스타 연못가에서, 이름은 천사지만 천사가 아닌 것을 기다리고 있는 이 얼마나 역설적인 장면들입니까? 베데스타 연못가 이야기는 1등만을 우대하고, 1등만을 기억하는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차서, 거룩한 백성들을 더러운 사람들로 만들고, 무기력하게 누워있게 만든 유대 종교의 말라비틀어진 현실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메시아가 오면 해결될 것이라는 신기루만을 주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0절 이하에 38년 된 병자에 대한 유대지도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있습니다. 그들은 요를 치우는 것은 불법이라고 단언하였으며, 주님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자비의 집에서 온전한 삶으로 되돌려주시는 주님을 박해하고 죽이고자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짜 자비의 집과 가짜 천사에 속아서 베데스타 연못가에 누운 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었고, 38년 된 환자는 그 연못에 있는 사람을 대표하고, 그 세대를 대표하며,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를 대표합니다. 그는 천사만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에 현혹되어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50년대에 회자되던 말 중에 ‘인천 앞 바다에 배만 들어오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합니까? ‘메시아나 천사가 오면 다 해결 될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유능한 지도자가 오시면, 좋은 선생님이 오시면, 좋은 목사님이 오시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도자가 형편없어서 우리가 이 모양이야’ 라고 하며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살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거짓에 속고, 남의 탓만 하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의지를 묻습니다. 주님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네가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느냐?” “건강하게 되기를 원하느냐?” 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정말 낫게 되기를 원하느냐? 하는 의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낫게 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통일되는 것을 정말 원하느냐? 너희는 하느님 나라를 정말 원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우리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정말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안정된 직장도 필요합니다. 화목한 가정도 필요합니다. 웬만큼 살 수 있는 물질도 필요합니다. 또 민주주의와 통일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도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정말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바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의 탓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급자나 동료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지도자 때문에, 등등.

최근 우리 사회에서 송두율 교수 사건이 큰 사건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점점 더 단순해져가고 있습니다. 송두율 교수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고 이제는 ‘거룩한 자유 민주 체제를 뒤흔드는 간첩에게 동조해준 사람이 누구냐?’ ‘그와 연계된 세력이 누구냐?’ 하는 문제로 나아갔습니다. 한 방송국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청와대, 민주화기념사업회 등이 마녀 사냥의 사냥감이 되어 있습니다. 또 다시 매카시즘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사건 자체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 사건을 보는 제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이북과 신뢰를 쌓아가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려면 이북과 친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북과 친한 사람과도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두율 교수에 대한 발표문을 보면서 제게 불편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꼭 노동당에 가입해야 했을까? 꼭 축전을 보내야 했을까? 꼭 돈을 받아야 했을까?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그런 일을 꼭 했어야 했을까? 등등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돌아보며, 왜 그럴까? 왜 내가 불편해할까? 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나 역시 통일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이북과 친하다고 낙인찍힌 사람에 대해 불편해하는 마음을 여전히 갖고 있었습니다.
통일을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불편해하고 있는 저에게 주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너는 정말 통일되기를 원하느냐? 또 너와 네 민족이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내 안에 있는 나의 마음에 내가 걸려 넘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도 역시 두려움, 대립의식 등 낡은 틀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마치 38년 된 환자가 낡은 요를 깔고 앉아 있던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시대도 바뀌고 사람들이 오고가는 이 시점에 그런 낡은 요를 걷어 치워버릴 만도 한데 여전히 치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아주 낡은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깔고 앉아있음을 봅니다. 메카시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저처럼 이런 낡은 틀을 깔고 앉아있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요를 깔고 앉아 있습니까? 아주 오래된 요를 깔고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38년 동안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하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은 “일어나라. 너의 자리를 걷어라. 그리고 걸어가라.” 라는 세 마디의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어나라라는 말은 성경에서 부활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네가 일어나라” “네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 우리 자신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깨닫고, 네 자신이 일어나고, 네 자신이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8년된 요를 걷어치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를 걷어들어라”에서 ‘걷어들다’는 말은 ‘걷어 치워버린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유대교 체제의 거짓 신화에 속아서 살았던 38년의 세월을 딛고 일어나서 할 일은 그 동안 깔고 앉았던 낡은 요를 걷어치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를 걷어치워라. 그리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38년된 병자가 요를 걷어치우고 걸어갔습니다. 그는 온전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얽어매던 거짓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기력함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자유롭게 다니면서 온전하게 하신 생의 풍성함을 더욱 널리 펴는 일입니다.
거룩함을 내세우지만 결코 거룩하지 못한 체제와 더러운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일어나서 새 삶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새 삶을 꿈꾸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삶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분단의 아픔과 갈등이 사라진 통일된 나라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특히 향린교회는 통일의 꿈을 꾸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일구어가는 대표적인 기독교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에서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고 있는 물은 무엇입니까?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려보낸 물은 정말 가끔 한 사람이나 겨우 살릴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른 뼈가 되살아나는 꿈을 보았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성전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물줄기를 보았습니다. 에제키엘이 본 새로운 성전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물은 메마른 사막을 적실 뿐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사해까지도 되살려내는 생명력이 넘치는 강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죽어있는 것까지도 살려내고 생명을 살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위대한 그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는 물은, 교회의 가르침은 겨우 한 사람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죽어버린 세상을 살리는 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온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는 생명의 물이어야 합니다.
낫기를 원하십니까?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까? 통일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낡은 요를 걷어치우십시오. 그리고 행하십시오. 그리고 낡은 틀에 매어 목말라하는 백성들에게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십시오. 향린에서 주는 물은 어떤 물이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에 두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1등만 살리겠다는 한 방울의 물을 주는 굳어져버린 성전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죽어있는 세상을 향해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는 성전이 있습니다. “향린”은 어떤 물을 흘려보내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시겠습니까? 온전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을 살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생명의 물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생명을 살리는 믿음의 길에서 늘 동반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