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버리고
본문 : 에레미야 9, 22-25 ; 마르코 10,17-31

지지난주부터 계속 강단에 오르다보니, 그리 어색하거나, 떨리지 않아서, 미리 올라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로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한지 꼭 111일이 되었습니다. 간혹 제가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1년 전쯤의 이야기 혹은 한참 전의 이야기에 대해 `그 얘기 알죠?` 라던지, `아직도 들녘교회를 안 가봤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입니다. 이럴 때 굉장히 당황하기도 하지만, `아~ 오래 전부터 같이 있던 사람으로 대해주니, 오히려 고맙다...`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가 일대일로 대화해보지 못한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항상 죄송스러운 맘이 듭니다.
우리가 아기의 백일을 기억해 주고 축하해주는 것은, 옛날에는 백일 전에 죽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 아닙니까? 백일이 지나도록 별 탈 없이 살아있는 아이를 그제서야 태어났다고 인정한 것이죠. 저도 100일이 지나도록 죽거나, 아프거나, 도망가지 않았으니, 잘 적응하고 있다고 인정하셔도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기저귀 찬 여자`, 무슨 영화제목도 아니고, 여하튼, 아주 천박한 수준의 성차별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종교지도자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분 얘기로는 `여자 목사야 있다고 치지만, 그 여자 목사가 축도도 해요?` 라고 묻는 분도 계시다고 하는데, 2주 연속 여성 목회자의 하늘 뜻 나누기와 축도가 있는 예배에 참여하시는 여러분들은 한국사회에서 드문 경험을 하시는 분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하늘 뜻을 전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해놓은 성서 본문 안에 있는 주제 단어들의 빈도 수를 살펴보곤 합니다. 제가 일일이 손으로 셀 수는 없으니, 주로 단어를 넣으면 성서 안에 있는 구절들이 정리되어 나오는 프로그램을 쓰지요.
우리들이 흔히 쓰는 `믿음`의 경우, 성서 안에는 약 215개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기도` 라는 단어의 경우는 약 500개 정도의 구절이 나옵니다. 그에 반에 오늘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돈` 또는 `재물`의 경우는 약 2084개 구절 정도가 나옵니다.

돈과 재물과 관련한 여러 경구들도 있습니다.
-지식을 지나치게 많이 쌓은 사람은 늙지만, 돈을 지나치게 많이 가진 사람은 젊어진다.
-돈은 어떤 닫힌 문이라도 척척 열 수 있는 황금열쇠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의.식.주와 돈이다.
-부자도 굶주림에 고통받을 때가 있다. 굶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을 때다.
-만일 부자가 대신 죽어 줄 사람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풍족하게 살 수 있다 등

오늘 읽은 마르코 10장 17절 이하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 16절-30절과 누가복음 18장 18절-30절에도 나와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있지만, 루가에서는 유다의 지도자 한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와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하고 운을 띄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 예수께 묻습니다.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겠냐고?` 물은 그 의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정말 궁금했었을까? 아니면 어떤 의도를 숨기고 이렇게 물어봤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순수한 신앙심에서부터 나오는 매우 진지한 질문이라기 보다, "종교적인 호기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호강에 겨워서, 이젠 영원히 늙지 않고 살 수 있는 불노초를 구하려하는 진시황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에 관련된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묻습니다. 이 청년, 이미 그런 것쯤 어릴 때부터 잘 지켜 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럼 이제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한동안 표준 새번역 성경을 쓰다가 캐다나에 가니 그 교회는 개역성경을 사용하여, 다시 후진하여 개역 성경을 한창 썼습니다. 그러다, 근래 공동번역으로 다시 성서를 읽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슬픈 기색을 띄며 근심하며 가니라`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같은 말을 `풀이 죽어 떠났다`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났다`로 읽으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서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도한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 놓고 누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모릅니다. 그 부를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 즉 은혜의 선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행한 모든 잘못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정을 행하여 돈을 모아 놓고도 하느님이 은혜 주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잘못 믿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가 보면, 부를 누리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제가 신학을 시작한 동기는 `종교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한번 없이 자라온 저는 한신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제가 자라온 환경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환경, 모든 사람이 누려온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부모님이 재벌이라거나, 대단한 갑부는 물론 아닙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80년대 초반에 나이키 신발이 유행했습니다. 저는 중학생이었는데, 반 아이들 중 80프로 이상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다닐 때, 부모님은 `프로 스팍스` 신발을 사주셨습니다. 그런 유행에 따라서 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저도 `프로 스팩스`도 아닌 `프로 스팍스`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을 창피해 하거나, 그 신발을 사준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겪었던 87년도의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과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들으려고 했던 여러 신학과 수업들로 인해, 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기는 했지만, 내가 누리고 있는 환경에서 오는 이로운 점들, 좋은 것들은 쉽게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종교적인 호기심`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을 따라 가고 또 가다 보니, 이는 단순히 호기심에서 끝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끌리는 대로 가고 또 가다보니, 점점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생겼고, 또 버리지 않으면 더 나갈 수 없는 장벽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이 사람이 자신의 영생에는 그토록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면서 남들의 삶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재산을 팔아 나누라고 하신 것은, 젊은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재산도 가지고 편히 살다가, 죽어서는 영생까지도 누리려 하는 욕심을 갖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결국 좋은 것은 다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이웃과 함께 하는 자로 전격적인 변화를 하지 않으면, 영생의 길은 없다고 그에게 전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풍족하게 있는 재산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쓰라고 하신 말씀을 그는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편히 사는 길을 택하지 말라는 것이니, 그 요구가 우리들 신앙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을 포기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난 9월 즈음, 구역예배에 가서, 얘기를 나누다가 `목사님에게 있어서 우상은 뭐예요?`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우상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편안히 살고 싶은 유혹`이 제일 두렵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목욕할 때, 뜨거운 물 잘 나오고, 잠 잘 때, 따뜻하게 잘 수 있는, 난방 이 잘 되는 생활에 익숙한데, 그 익숙함을 미련 없이, 불평 없이 여러분은 버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는 사실, 가진 자의 오만함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이 따뜻한 목욕물을 버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순간, 다른 한쪽에서는 따뜻한 목욕물은 고사하고, 깨끗한 물 한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어서, 더러운 물로 목을 축이다 죽어 가는 생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풍족하게 있는 것을 이웃을 위해 쓰고 그 삶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온다면, 이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거의 없을 판국입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제자들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도 다 따랐다는데, 그것 갖고는 턱도 없다고 하시니,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요?"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가 쓱 등장을 하더니,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지만, "그 때 베드로가 의기 양양하게 말하였습니다." 내지는 "가슴을 쭉 펴고 매우 자신 있게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라는 표현을 덧붙이면 더 생생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도 어렵다고 하시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온 나는 영생보다 더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훨씬 좋은 것을 받게 되겠군` 하면서, 왜 만화를 보면 너무 좋아 쏟아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가며, 한번 씩 웃는 그런 표정 있지요? 그런 표정을 한번 지은 후, 아마 이렇게 또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 우린 뭘 얻나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본문 이후에 따라나오는 내용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자리를 청탁을 하러 예수께 갔고, 그 모습을 보던 제자들이 난리가 났었습니다. 차마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제자들 역시 그런 맘을 다 품고 있었거든요.
`모든 것을 버렸다`고는 했지만, `그 버린 댓가는 무엇일까, 저 사람이 저정도면 난 엄청난 것을 얻겠구나`하는 기대감이 베드로의 가슴에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희생의 대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실히 일해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조차 못 받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당연하게 쥐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일이 곧 새로운 대가를 자동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엄청난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져, 스스로 가난해 지는 삶을 실천하지만, 그 대가로 우린 혹시 명예를 얻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봐야할 일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첫째인줄로 알았는데 결국 밑바닥이고, 여러 가지가 아직도 부족해서 밑바닥인줄로 알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으뜸이 되는 역전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는가 하는 그 순간, 바로 그렇게 여긴 것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힘들게 쌓은 것을 스스로 허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희생했다고,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새로운 기득권으로 내세우는 순간, 하느님 나라 어디에도 설자리가 없게 됩니다.

부자 청년은 부라는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 영생까지 얻으려고 했던 것을,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버린 것을 의로 삼는 태도에 대해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기득권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로써 새로운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 100원짜리 동전이랑 1000원짜리 지폐가 떨어져 있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교인들 `둘다!`라는 대답이 있었음) 저는 좀 맹한 구석이 있어서, `둘다!` 라는 대답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사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손에 떡을 들고 서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봄 쯤, `청빈론` 이냐 `청부론`이냐에 대해 한창 논쟁이 붙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도 매우 관심있게 보았던 부분인데요.
`깨끗한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또 깨끗하게 번 돈으로 교회에 헌금해야 한다`라는 것이 `청부론`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가난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것이 `청빈론`입니다.

`청부론`이라는 분야를 개척하신(?) 목사님은 책에서,
“한국 자본주의, 우리나라 경제는 개신교 신자들이 성경적으로 제대로만 해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청부사상 경제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교회는 반드시 청빈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목사가 부한 교인들의 돈을 헌금 받아 하나님 뜻에 맞게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그건 맞는 말 아냐?` 이렇게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들은 깨끗한 부자가 되고 가난한 목사는 그 돈을 헌금 받아서, 하나님 뜻에 맞게 쓴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다` 한번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 역시 결국은 `부`를 추구하는 말입니다. 깨끗하게 벌어서 부자가 된다는 말은 매우 이상적인 말입니다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부를 창출해 낸다는 것이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으로 가능하냐 라고 반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 제도가 변하고 실질적인 구조적인 실천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병이 깊어져 운명의 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여보~ 여..보.."
가족들은 마지막 유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예, 나 여기 있어요."
이 남자는 가족들을 돌아가며 찾았습니다. "첫째는 어디 있느냐?"
"예, 아빠, 여기 있잖아요. 아버지 손을 잡고 있어요."
"우리 둘째는...??" "여기 있어요. 이쪽 손이 제 것이예요."
"그럼, 막내는?" 흐느껴 울면서 막내가 대답합니다. "아버지, 저는 여기요.... 흑흑"
그러자 이 남자는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앉으며 마지막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이냐?"
마지막까지 부에 집착하는 사람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자발적인 가난`으로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자발적인 가난` 역시도, 배부른 소리다~ 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발적으로 가난해진다는 말 자체가 어쩌면 어느 날 자발적으로 가난해진 것을 후회하면 언제든지 `가난`을 벗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수밖에 없어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진 자의 오만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사회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자발적인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향린교회가 민중교회가 아니기에, 오히려 `자발적인 가난`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의 길희성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첫째, 감각적 삶의 양식이라고 해서, 감각의 만족을 삶의 주된 관심이자 행동 규범으로 삼고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초월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그저 유행에 따라 감각적 만족을 찾아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삶의 보편적인 질서를 찾아 사는 삶인데, 여기서는 행동의 규범이 나 자신의 이성적 명령, 양심, 혹은 합리적 판단에 의해 자율적으로 주어집니다. 누구나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삶이죠. 그러나 여기서도 이성 자체에 대한 믿음 이외에는 초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이 경우, 어떤 삶의 상황이 닥쳐와도 토론과 합의를 통한 제도 개선 등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는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초월적 실재와 가치에 근거하여 사는 종교적 삶의 방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첫 번째 삶의 방식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사실 현재 만연해 있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 번째의 초월적인 실재와 가치에 근거해서 사는 종교적 삶의 방식도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절충해놓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잘 들어 보십시오.
한 사람은 한달 수입이 40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래서 매주 100만원을 주정헌금으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반면, 한사람은 일당으로 4만원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4만원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400만원과 4만원은 숫자상으로는 큰 차이가 있죠. 그러나, 400만원은 어떤 사람의 한달 수입의 10%였고, 4만원을 낸 다른 사람에게는 100%였던 것입니다.
다른 한사람은 3600만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지만, 다른 한사람에게는 먹고 살 돈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에이 그렇게 낸 사람이 바보지... 자기 삶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말이야....
이렇게 말하지만, 봅시다. 3600만원이 남은 사람의 씀씀이를 따져보았을 때, 그가 3600만원 중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해 500만원, 아이들 특수 과외비로 400만원, 융자금 갚고, 좀 낡은 차 새 외제차로 바꾸는데 나머지 돈들을 쓴다면, 400만원 십일조를 냈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돈의 액수가 한 사람의 헌신도가 되고, 믿음의 척도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돈을 번 것이 무조건 잘못 되었다기 보다는 어떻게 벌었냐? 또 그 번 것을 어떻게 내가 쓰고 있느냐도 관건이 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갖고 있는 재물을 모두 나눠주라고 했습니다만, 현대판으로 바꾸어 우리가 그렇게 질문한다면, 재물도 재물이지만, 거기에 더해 " 시간`도 나눠줘라"고 말씀하시지 않겠나 싶습니다. 가진 것도 많아질수록 자꾸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되는 법인데, 가진 것을 나눠줄 때에는 시간도 같이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헌금을 통해 선교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면, 시간을 나눠주는 것 없이, 나의 삶을 나누어주는 것이 없다면, 나눔의 참 의미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중 <남양주 독거노인 방문 막을 내립니다.>라는 제목으로 후고 님이 올리신 글이 마음에 남습니다. 후고 님이 누구인지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그냥 필명을 살리겠습니다.
후고 님은, 3년여 동안 독거 노인 봉사의 이모저모를 소개하시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참여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처음의 다짐은 약해지고, 응집력도 현저히 줄게 되었습니다. 비행하다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지점에서 날개를 접었습니다. 그러나 긴 경험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것을 토대로 더 알차고 깊이 있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를 개발해야합니다. 우리는 달리는 사람, `이만하면`을 모르는 사람, 정말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청빈`으로 가진 것을 이웃에게 일부 나눠주는 단계로까지는 갈 수 있으나, 거기에 더해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일 치명적인 부분, `시간`을 나눠야 하는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우린 시간이 많으니까, 우리가 대신할게` 위로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 말에 위로만 받겠습니까?

오늘 오후부터 두 번째 연말 당회가 열립니다만, 자료 중에 올 한해 교회활동을 날짜별로 정리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8월부터 왔지만, 1월부터의 교회 여러 활동들을 죽 훑어 볼 수 있었습니다. 보면, 시간을 내서 참여해야하는 여러 활동들이 있었지만,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사람들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곳에 지원금을 보냈지만, 지원금과 더불어 따라갔어야 할, 말하자면 손이라도 붙잡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예상보다 적었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예레미야 9장에서는 `지혜, 힘, 돈은 다 자랑할 것이 못되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읽은 공동번역에서는 뜻을 깨친다라고 되어 있지만 개역성경과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나를 아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아는 것이라는 번역이 더 맞습니다. 깨우친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에 머물 수 있지만, 구약성서에서 `앎` 이란 곧 `삶`을 말하기에, 삶이란 -국어사전에는 사는 일이라고 되어 있던데-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삶이 뒷받침이 되어, 아니 내 삶이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라는 것인데, 여기 계신 분들은 적어도 나는 종교적으로 예배만 드리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 정의와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말이죠.

이어지는 24,25절을 보십시오.
아시다 시피, 할례란 하느님께 대한 전폭적인 헌신을 몸에다 표현한 것인데 하나님과의 하나됨이 없는 고작 조그마한 표시 하나 내놓고 `나 할례받았다~` 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면서, 오히려 그 마음이 하느님과의 연대감을 의식하고, 그 뜻대로 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눔의 삶을 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거지를 보고,
“하느님, 이 겨울에 떨고 있는 거지가 이 사람 하나가 아닐 텐데, 하나님, 거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기도했답니다.
그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나는 이미 대책을 가지고 있다.”
“그 대책이 뭡니까?”
“바로 네가 그 대책이다.”
한해를 정리하면서 새해에 대한 계획들을 한창 세울 때입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마음에 받아야 할 수술 부위는 어디입니까?
침묵하시겠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다가 오히려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는 자가 되기 보다,
모든 것을 사심없이 버리고, 마음의 수술을 받기에 주저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의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위로, 교통하심이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 내가 가진 재물과 시간까지 이웃에게 나눠주기에 주저함 없이 나아가기를 다짐하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