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의 공동체 - 느헤미야의 비전(6)
느헤 4,1-17; 마르 12,28-34


자식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간 노부부가 영어학교를 한달정도 다니다가 배운 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먼저 둘이서 하는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해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가 밖에 나갔다가 아파트 벨을 눌렀더니 안에서 할머니가 ‘후꼬?’ 그러자 할아버지 젊잖게 ‘미랑께.’

지난주에 안병무 선생께서 향린교회를 가리켜서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렸다.’는 자기 고백적인 얘기를 가까운 지인에게 하셨다는 얘기를 말씀드리면서, 저는 고양이도 호랑이의 혼을 한 50년 품으면 호랑이가 되지 않겠느냐? 는 반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 향린교인들이 자신의 모습이 고양이인줄은 모르고 계속 호랑이인 줄 착각한다거나 아니면, 이 노부부가 스스로 만든 콩글리쉬를 영어인양 착각하듯이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참 교회의 모습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중세기의 구교의 부패한 종교권력에 항거하여 비텐부르그 대학 정문 앞에 95개에 달하는 질문을 부친 날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흔히, 이 날을 개신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고, 구교에 항거하였다는 의미에서 개신교인들을 영어로는 Protestant라 부릅니다. 물론, 우리가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모든 공을 루터 한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서 위클리프나 후스와 같은 개혁가들도 있었고, 당대의 칼빈, 쯔빙글리와 같은 개혁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 개혁운동의 바닥에는 농부, 노동자와 같은 소외되고, 눌린 자들의 역사변혁의 진정한 주체자들이 있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르네쌍스라 일컫는 문예부흥운동과 휴머니즘 사상의 전개,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 등 모든 부분에 변혁을 향한 제 요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역사주체성을 강조하더라도 불을 당긴 루터의 개인적인 결단이 얼마나 중요했다는 것은 재차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종교 개혁가들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생각들은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는 어떻게 재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는가? 혹 개혁되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하는 것을 목회적인 차원에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10년 전에 발표한 향린교회 신앙고백 및 교회갱신 선언서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갱신해야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오늘 여기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으로 다음의 3가지를 말합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만으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Sola Scriptua 오직 성서만으로.

첫 번째 명제, ‘믿음만으로’ 라는 말은 ‘오직 의인은 믿음만으로 살리라.’는 바울의 고백에 근거하고 있고, 이 바울의 고백은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구원 선언 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의인이냐? 는 물음은 종교가 시작한 이래 계속 물어져 온 질문입니다. 쉽게 도달하는 결론은 행실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면 누구의 행실이 좋으냐? 라고 비교를 하기 시작하변 이 상대적 비교는 끝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다른 사람의 행실이 더 좋아 보입니다. 결국은 의인은 한사람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더 큰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명제는 곧 이러한 구원역사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몫이라는 선언이며 동시에 사람의 공로주의를 배격하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의 베드로성당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던 교회는 소위 말하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그 말미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습니다. ‘동전이 돈궤 속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뛰어오른다.’는 비성서적인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선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라는 이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앙은 이를 너무 강조함으로 ‘값싼 은혜주의자들을 양산한다고 한다면,’ 진보주의 신앙인들은 ‘이유가 없는 선물은 받지 않겠다는 인간의 자존심을 붙잡기에 결국은 구원을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신앙인들 가운데는 하느님의 구원이 주는 기쁨과 감격을 잃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명제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한다는 명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어떤 제도도 명예도 권력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 권력 그리고 교황권에 대한 비판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안병무 선생으로부터 들은 예화 하나를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제가 대학4년 동안에 기억하는 또 하나의 예화가 있습니다. 당시 대만의 장로교 총회장이셨던 분이 들려준 자신의 얘기입니다. 처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시골교회에 가서 몇 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라고 교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 그 교회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과 같이 마지막 예배는 온통 눈물바다였습니다. 그리고 축도를 마치고 이제 떠나려는 목사님을 모든 교인들이 가면 안된다고 붙들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이 뉘우친 것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 나는 목회를 잘못하였구나, 저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들이 아닌, 나를 바라보는 신자를 만들었구나.’ 요즘 강남의 설교 잘하는 어떤 목사님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아들 교회로 옮겨갔는데 이 목사님을 따라 교회를 이동한 교인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지요. 철새신앙도 문제이지만, 목사 우상화가 된 것입니다.


저는 물론 그런 카리스마도 없는 사람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한 목사우상화는 매우 우려되는 교회 현상입니다. 참 신앙은 그 누구도 우상화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안병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만, 우상화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김재준 목사님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하지만, 우상화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합니다만, 저는 예수님을 우상화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야훼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우상화하지도 않습니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까?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무슨 계명입니까?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뭐가 새긴 것입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겉의 형상으로 새긴 것만 새긴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긴 것도 새긴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새긴 곧 하느님을 우상화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느님을 우상화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느님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절대화하는 사람. 자신의 생각 이외의 것은 틀렸다고 배격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을 우상화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기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속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사람, 그것도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 심지어는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의 얼굴 속에서 자기에게는 없는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을 우상화하지 않는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세 번째 명제인 성서만으로. 이것 또한 교권에 대한 부정의 소리입니다. 당시 성경은 사제들만 갖고 있었고 일반인에게는 성서를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도 일반인들은 읽을 수도 없는 라틴어 성경밖에는 없었습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서를 평신도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혁가들이 중심으로 삼았던 이 3가지 명제를 다시금 오늘 나의 신앙에 그리고 우리 향린교회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개혁의 내용을 묻기 전에 개혁이라는 정의가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개혁은 사람에 따라 내용, 형식 그리고 속도도 다 다릅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은 빠른 변화를 요구하고 나이가 드신 분들은 점진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기득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현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에서의 변화를 말하고, 기득권 밖에 있는 분들은 심하게 표현해서 뒤집어지는 변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갱신이니 개혁이니 변혁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각 개인이 생각하는 변화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다른 차원을 포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포도를 가지고 즙을 짜서 먹으면 이것은 형태만 바뀐 변화입니다. 변형이지요. 그러나 포도를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어 내면 이는 성분 자체가 바뀐 변화입니다. 변성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 포도주를 먹고 취해 버리면, 여기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변화 혹은 성서가 말하는 변화는 어떤 변화인가? 그것은 마치 사람이 술을 먹고 변하여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너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평소의 기능과 역할이 달라지는 변화를 의미한다. 자신만을 향해가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삶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하고 영원한 가치를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술에 취했다고 하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를 위시한 많은 사도들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었고, 사도 바울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병무선생도 나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미쳐도 어떻게 미치는가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명동 거리에 나가면 고성능 스피커를 달아놓고 예수 천당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미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들은 성서에 있는 대로 자기들도 길거리에서 외친다고 주장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상황을 배제한 위험한 성서문자주의 해석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수 천당을 외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되는 변화는 그냥 정신 나간 미친 행동이 아니라, 철저한 이성적 판단에 따른 결단 속에서 목숨을 거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했고, 제자들이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고, 루터와 칼빈이 그러했고,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토마스 쿤은 그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우리에게 패러다임 혹은 패러다임의 쉬프트(전환)이라는 말을 소개했다. 그는 과학분야에서의 아주 중요한 획기적인 발전은 과거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단절할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요즘은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제 분야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패러다임쉬프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얘기할 때에 자주 인용되는 예. 1829년 1월 뉴욕주지사인 마틴 뷰렌은 당시의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잭슨 대통령 각하 우리나라의 운하체계는 ‘철도라고 알려진 새로운 운송체계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연방정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운하체계를 보존해야 합니다. 첫째, 운하선박이 기차로 대치된다면 심각한 실업이 발생할 것입니다. 말에게 먹일 건초를 재배하기 위해 고용된 농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장, 항해사, 숙박업자, 수리공, 부두관리인은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이 방치될 것입니다. 둘째, 선박제조업자들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셋째, 운하 선박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예상되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에리 운하는 현대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교통수단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각하도 잘 아시다시피, 철도 위의 객차들은 기관차에 의해 시간당 25킬로라는 굉장한 속도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승객들의 인명을 위태롭게 하며 전국에 걸쳐 굉음을 지르고 연기를 내뿜으면서 달려갑니다. 또 곡물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가축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스위스 시계업계는 맨처음 quartz시계를 만들자고 종업원이 제안했을 때,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계라고 하는 것은 태엽과 스프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단 3년 만에 6만 5천명의 시계종업원이 1만 5천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유지되어왔던 시계왕국이라는 명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직업을 잃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기업주들의 이기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부패에 많이 근거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패러다임 전환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기업의 존폐라는 위기를 느끼고 있지만, 목사들도 교회의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기업과 교회는 다릅니다. 기업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족케 하는 곳이고 교회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곳이다. 그러기에 만약에 당신이 오늘 예배에 참석하기 전이나 돌아갈 때나 그저 마음에 흡족함만 있고, 나의 삶의 변화에 대한 결단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가게에 와서 돈을 지불하고 당신이 원하는 물건을 하나 사 갖고 가는 것과 같이 쇼핑을 왔다 가는 것입니다.

‘We are Called to Be God`s Prophets" “우리는 하느님의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 라는 책에서 John Robert McFarland 는 마치 교회는 경쟁하는 기업과 같다고 한탄하면서 “우리는 마치 기업의 CEO와 같은 개념으로 교회를 바라본다. 교인은 물건을 구입하러 온 손님으로, 다른 교회는 경쟁의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보다는 교회의 성장을, 청지기정신을 가르치기 보다는 수입을 늘리기를. 결국의 관심은 영적인 것 보다는 장부에 있다. 영적인 성장을 꾀하는 기도회나 성경공부 보다는 1년 예결산을 다루는 공동의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기업이 하는 일이다. 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기업의 owner나 혹은 customer와 같이 이해되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러한 비판은 우리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장로를 뽑는 공동의회에는 열심히 참석하면서 기도회나 성경공부는 소홀하게 취급하는 오늘의 나의 신앙행태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한번쯤은 되집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변화를 꾀할 것이냐? 보다는 내가 예배 후에 만나야 할 사람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봉사와 모임에 더 많은 관심이 가 있다면 내 신앙의 근본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클럽이나 동창회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기업은 이익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교회는 소명에 의해서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다시금 재확인하고 그리고 소명대로 살아가면서 얻었던 그 기쁨과 그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 우리 교회에는 그러한 소명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장이 있는가? 를 심각하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토록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하고, 없다면 어떻게 함으로 이러한 장을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저는 제 나름대로의 답을 준비하고 있지만, 저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것 따름입니다. 답은 여러분이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리만족을 시켜주기 위해 제가 여러분의 목회자로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잠자는 소명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여러분의 숨어있는 자질을 꺼내어 쓰도록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교회 사역의 주체자가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평신도교회의 가장 큰 명제입니다.


물론, 우리 향린교회의 사역은 선언서에서 주창하는 대로 단순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개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사회변혁을 향한 주체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운동에서 배우는 것 하나는 진정한 교회 운동은 성과 속의 그 경계선에 서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송두율 교수가 남과 북의 경계선 상에 있는 경계인으로 표현했지만, 그리고 최근에는 언론에 나타난 것만을 본다면 이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만, 저는 그 경계인으로서의 민족화해적인 자세와 철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고, 동시에 우리도 바른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신앙과 사회가 만나는 그 경계, 접점 곧 boundary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함에 있어 외부의 적과 대항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일을 시키고 또 다른 하나는 창과 방패, 혹은 활을 잡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심지어는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들은 한손으로는 짐을 바치고 한 손으로는 창을 잡게 하였고, 성 쌓는 사람은 모두 칼을 옆구리에 차고 쌓았다. 저는 이 말씀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면서 교회의 모습과 신앙의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성과 속의 양쪽 경계선상에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성전 안에서 그냥 기도하는 종교인으로 머물러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상 속의 한 속인으로 살아가는 것만도 아닌 모습입니다. 물론, 오늘의 본문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는 항상 깨여있는 신앙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예루살렘 성벽에서 일하는 그 모습 속에서, 성벽은 곧 성전과 세상이라는 경계선상이라는 상징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교회는 세상과 종교라는 두 날개를 가져야 한다. 칼 바르트는 기독교인은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저는 또 한발자국 나아가 교회가 이러한 깨여 있는 모습을 유지하려면 교회 안에 또 다른 두 날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날개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예배 공동체를 말하고 두 번째 날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구역 혹은 작은 교회로서의 신앙공동체를 말합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 예수님과 한 율법학자와의 유명한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첫 번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후에 두 번째 계명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는 이 예수님의 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학자를 향해‘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엄청난 칭찬 근래 보기 드문 아주 파격적인 칭찬을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 문자로만 비교해 본다면 그의 답변은 예수님의 말씀의 반복이지만 정신으로 본다면 그의 대답은 엄청난 패러다임쉬프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 대답은 예수님의 핵심을 뚫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는 이 두개의 계명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로 하였을 뿐더러, 당시 가장 중요시 여겼던 희생제사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동시적인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답변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여 예배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 이웃을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이웃을 섬길 때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듯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는 이 두 날개가 동시에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모여 하느님을 예배하는 예배공동체, 그리고 흩어져서 아픔당하는 이웃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작은 교회로서의 실천공동체. 예수님의 삶을 보면 이것은 항상 하나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삶이 우선 새벽마다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눌린 자들을 위로하는 현장에 함께 하셨습니다. 때로는 회당 안에서 조차 안식일 종교법을 어기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고쳐달라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기도하러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과 속은 하나였습니다. 성에 머무는 듯 하다가는 속을 만드셨고, 속에 머무는 듯 하다가는 성을 만드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짓습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더불어 일하는 모습 속에서 한 손에는 창을 한손에는 일을 붙잡는 모습 속에서 교회는 두 날개를 가져야 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신학적으로는 성과 속의 두 날개 그리고 교회의 틀로서는 모이는 큰 공동체와 흩어진 작은 공동체의 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창립정신의 가장 큰 핵심도 바로 이 둘입니다. 교회로서의 사회현실참여, 그리고 평신도가 교회의 주인되도록 하는 평신도목회. 50년 전에는 설교를 평신도가 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었고 여전히 이 얘기는 유효하지만, 저는 작은 공동체 조직을 통해 평신도들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늘의 평신도 교회의 핵심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루터로 불이 붙은 제1차 종교개혁이 성서를 평신도의 손에 돌려주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2차 종교개혁은 사역을 평신도의 손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clergy paradigm shift(목회패러다임전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떠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교회의 모습과 조직을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갈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모습을 쫓아가는 동안에 이미 그 교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는 교회이지 미래에 맞춰가는 교회는 아닙니다. 변화의 기준은 그러한 미래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과연 향린교회에는 갈릴리 예수 운동이 살아 있는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데, 과연 우리 안에는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는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확대 재생산하도록 할 것이냐? 는 질문을 물어야 하고, 없다면 어떻게 재현시킬 것인가? 를 함께 물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정을 중심한 작은 교회 형태가 있었습니다. 안병무 선생께서는 평신도교회라는 말을 초기에는 평신도의 성서 해석에 초점을 두었고 후기에는 민중해방의 현장성에 초점을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신도교회냐? 아니냐? 그건 목사가 있느냐? 없느냐? 의 사제직 유무로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0년 전에는 이것이 기준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또 적어도 한 25년 전에는 성서 해석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목사들만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훈련받은 평신도들이 수두룩합니다. 또 요즈음 설교 성경공부 홍수시대 속에서 모두 성서해석을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스스로 읽고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많은 교회들이 평신도교회입니다. 저는 사역에 관심하고 싶습니다. 물론, 사역도 여럿이 있습니다. 성가대원, 반사, 당회 제직회 권사회의 활동과 신도회활동 관리부 재정부 식당 등등 여러분 모두가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봉사 차원에서의 사역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람을 키우는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평신도사역 교회인가? 아닌가? 는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향린교회가 어떤 이유로 6개월간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향린교회는 존재하고 있는가? 만약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요, 평신도사역을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초기의 평신도교회라는 그 비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일단 저는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그룹모임의 활성화.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영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말씀중심의 모임. 두 번째는 그것이 예수운동의 실체인 민중적 해방운동의 실천. 사회의 낮은 계층과 연대관계 속에서 갈릴리 예수의 그 혼이 살아나고 있느냐? 그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바라기는 더 많은 성숙의 기회, 더 좋아하는 일의 발견, 더 높은 열정, 적극성, 자기실현들이 이루어져 향린교회가 그 개혁의 질에 있어 우뚝 서는 교회가 될 것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