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공동체 - 느헤미야의 비전(7)
느헤 5,1-13; 사도 2,43-37
느헤미야의 비전을 따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애당초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도전을 전제하고 있듯이, 그의 이야기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입니다. 1장에서 외국에서 태어나 출세한 그는 조국 예루살렘 성전의 성벽이 무너져 있고, 성문이 파손된 채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삶에 대한 도전입니다. 2장에서 그는 왕의 비서실장으로서의 공인된 책임과 개인적인 비전의 실현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길을 방해하는 외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제3장에서는 서로 다른 기능과 은사를 가진 개인들을 서로 잇닿게 하여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만들어갑니다. 4장에서는 외부의 적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직면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한 손에 창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연장을, 밤에는 파수를 낮에는 일하는 그리고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않는 깨어있는 자세로 이를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성은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합니다. 꿈에 그리던 그의 비전의 완성을 눈앞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매번 그러하듯이 성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러 외부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느헤미야에게는 이번에는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의 또 다른 도전이 주어집니다. 그간에는 외부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밀집력을 보였지만, 외부의 누르는 힘이 약화되자 안에서 분열의 소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의 삶을 보면 이 현상이 매우 뚜렷합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러하듯이 빈손으로 시작한 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나 가정적으로는 아주 단단합니다. 그러다가 몇 년의 고생 끝에 돈이 벌리면서부터 가정 안에서는 그동안 들리지 않던 분열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래 전 뉴욕에서 있었던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부는 빚을 내어서 야채가게를 시작합니다. 몇 년의 고생 끝에 돈이 벌리기 시작합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이 부부는 버는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집안에 독 두개를 묻어두고는 거기다 현찰을 보관합니다. 그래서 독 두개에 현찰이 가득하게 되었던 어느날, 부인은 독안에 든 돈이 점점 비는 것을 발견합니다. 남편이 도박에 빠진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서너 번 아틀란틱 시티에 가서 블랙잭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아내도 ‘니가 하면 나도 한다. 남편이 잃은 본전 아내가 되찾자.’ 뭐 그런 각오가 있었던지 아내까지 함께 나서서 도박을 하여 수개월 만에 벌어 논 돈 다 날리게 되고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대체로 고생할 때는 부부사이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의 여유가 생기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삐꺽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용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요즘처럼 계급 분열의 다툼이 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대립은 있었지만, 부자와 빈자 사이의 투쟁 대립이 이렇게 심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사는 일에 안정이 되면서 외부의 목표가 달성이 되자 내부의 분열이 터지는 현상입니다.

느헤미야도 같은 일을 당하였습니다. 성벽이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이르자 백성들 가운데 불평과 불만이 높아져 이런 소리가 들리지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불평이 들렸습니까? ‘흉년으로 우리의 밭도 포도원도 집도 모두 저당 잡혔다. 우리는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빚밖에 없다.’ ‘살아 보겠다고, 목에 풀칠이라도 해야겠다고, 우리는 아들딸을 잡혔다.’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의 경제 현실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일이 아니라,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져온 현실입니다. 사실, 인류역사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진보하여 간다고 생각하지만, 같이 잘 살아가는 일이야 말로 역사진행에 가장 중요한 일이기에 단적으로 말하면 진보한다기보다는 퇴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부자 1세계와 빈자 3세계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어 이제는 빚더미에 앉은 국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3세계의 빚을 탕감하라고 요구하는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세계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기 보다는 이제는 말 안 듣는 가난한 나라들을 군사의 힘으로 밀어부처 식민지화 하는 전근대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우려도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 현상(polarization)은 점점 극대화되어져 갈 것이다. 국제사회뿐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 안에서도 이 우려는 오래전부터 얘기되어져 왔습니다.

60년대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허리를 졸라 맨 덕에 이제 우리는 적어도 먹고 입는 일에 기본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고민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느냐?’는 선택의 문제를 갖고 있지, 아무거나 좋다. 배만 채우면 된다는 소리는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소고기를 먹을 것이냐? 돼지고기를 먹을 것이냐? 그리고 이것을 어떤 소스를 쳐서 어떻게 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느냐?’ 가 우리의 당면한 食의 문제이지 배고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길거리의 떠돌이 노숙자들의 관심도 먹는 밥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술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그들의 관심거리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의 양은 높아졌지만, 그러나 삶의 질에 있어서는 극심한 분쟁과 분열을 보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자살과 분신, 그리고 노동계의 총파업, 가진 자들의 놀이판인 정치권과 경제계의 결탁 속에서 진행되어온 비리와 부정, 자녀의 과외공부를 위해 엄마가 몸을 파는 교육의 부재, 갈기갈기 찢어진 종교계의 타락과 혼란 등, 사회 어느 부분 하나라도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없는 총체적인 파국을 보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십시다. 최근에 들었던 얘기입니다. 부자 동네로 알려진 강남 서초구에 살고 있는 교수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6살 난 딸이 있어 유치원을 보내는데, 그곳에는 a급 b급 c급이 있지만, 유치원인데 어쩌랴 싶어 c급을 보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딸아이가 울면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친구들이 더 이상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a급 유치원 아이들이 왕따를 놓는데, 그것도 그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는 겁니다. 너는 c급 유치원생들하고는 급이 맞지 않으니 놀지 마라. 그래서 a급 유치아이들이 c급 유치아이들을 무시하고 놀아주지 않는 겁니다. 열이 바친 이 부부교수님들. 울며 겨자 먹기로 딸을 a급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평수가 더 많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그리고 tv도 큰 화면으로 바꾸라고 앙탈을 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a급 유치원 애들끼리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점점 더 큰 차이를 발견하고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고집하면서 점점 성격도 변해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 부부교수는 비애감 속에서 결국은 그곳을 탈출하여 서울 외곽 거의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이사하고 말았습니다.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이 오늘의 한국을 자본의 열세와 천연자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세계의 18위라는 대열에까지 올려 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해 사는 것인데, 이 행복이 결코 경쟁력의 순위가 행복 순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제 수능을 3일 앞두고 있지만, 일류고등학교 일류대학에 대한 지나친 집념이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외부의 강대국의 세력에 직면한 우리나라는 내부적으로는 남과 북이 서로 갈라져 서로 적대시하여 온 것이 53년, 그것도 모자라 경상 호남 충청 강원의 지역의 내부분열이 만연되어 식상한 판에 요즈음은 정치계의 당마다 검은 돈에 대한 폭로와 악선전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어느 한 당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는 국민들이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는 현상만 심화될 것입니다. 결국은 민심의 이반으로 국가적 파탄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얼룩말들은 사자와 같은 맹수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원을 그려 뒷발질을 해댐으로 적을 물리치는데 반해 당나귀는 공격을 당하면 말과 같이 원형을 그리긴 하는데, 머리를 맞대지 않고 꼬리를 맞대고 서로에게 발길질을 해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외부의 적을 두고 얼룩말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항하지 않고 당나귀와 같이 꼬리를 맞대고 서로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어 백성들의 마음은 점점 괴롭기만 합니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며 어느 정도 성벽을 쌓아 올려간 느헤미야,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또 다른 내부의 적에 직면합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분열에 직면하여 느혜미야는 단호하게 부자들과 관리들을 불러 놓고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한 겨레끼리 돈놀이를 할 수가 있습니까?’ 당시의 하느님의 법은 신명기서 23장 20절에 명시되어 있듯이 유대인끼리는 변리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느헤미야의 책망에 모두 회개를 하고 빚을 포기합니다. 요즈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은행이라는 공공기관에서 담당하니까 이것 자체를 갖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시대에서 이 이자를 갖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부동산 투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일년 사이에 배가 뛰는 강남의 아파트 값이 예전 이자 놀이와 같습니다. 지난주에도 정부는 부동산 보유 세금을 올리겠다고 선언했지만, 이제는 늑대가 온다고 거짓으로 소리친 양치기 소년의 소리마냥 특단의 조처도 별다른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리 약을 투여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암말기의 환자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입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등장하는 말이 토지공개념입니다. 토지공개념이란 말은 1989년을 전후해서 우리 사회의 토지와 주택 값이 급등하면서 서민들의 주거생활이 제한되고 상대적인 박탈감이 만연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주장되어온 법률용어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부동산은 3분지 2가 30대 재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그 비율은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아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2년 전 현 정부의 한 관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늦추면 혁명이 온다.’는 말을 할 정도로 심각성이 절실합니다. 물가를 몇 배 씩 앞지르는 부동산의 상승은 결국 있는 사람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토지에 대한 재산권을 해석함에 있어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하다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의무를 수반한 상대적 권리’로 재해석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창기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한 인격자로 보고 그 자유로운 계약활동과 소유권의 절대성만 보장해주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궁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노동이 상품화되어 버린 오늘의 현실 속에서 도시 노동자나 힘없는 농민들에게는 이러한 초기 자본주의 사상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토지공개념이라는 말을 신문이나 여론에서 자주 얘기하면서 한쪽에서는 이거 사회주의의 개념이 아니냐? 혹은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논리가 아니냐? 하는 식의 이론 논쟁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새로운 맥카시즘에 불과합니다. 토지공개념.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공동체의 것이라는 개념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논리가 아니고 사실은 가장 기독교적이고 가장 성서의 핵심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땅은 하느님의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성서 첫 장 첫 절의 고백도 바로 이 땅의 모든 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개인 소유화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원천적인 고백입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 금지조항도 바로 마음대로 따먹는 다른 모든 실과도 하느님의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고백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법으로 제정한 것이 바로 안식년법이요 희년의 법입니다. ‘7년째는 농사를 짓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는 선언은 땅을 생명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수고해야 할 종과 가축들을 동시에 보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년동안 주인은 종이나 가축 그리고 땅도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기를 7번 그래서 50년이 되면 모든 종은 해방을 시켜야 했고, 빚은 탕감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여호수아 이래 나누어졌던 모든 지파와 기업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을 위시한 많은 국가들이 땅은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어 땅의 개인 소유화를 막고 있습니다. 하여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수요에 맞추어 공급이 주어지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이 하느님의 것이요 사유화할 수 없다면, 결국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 物도 사유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공권력으로 이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한 성서의 정신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정신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오래된 꿈입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단지 보이는 성벽을 재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백성들 사이의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트로크메라는 불란서 성서학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때는 나이 30을 맞춰서 나오신 것이 아니라, 당시 희년을 맞아 그 법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실제 연도를 계산하여 주장합니다.

4천명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도 기적 그 자체에 관심한다면, 그 얘기는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는 과거에 일어났던 한 기적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지만, 만약에 밥상공동체라는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현상에 주목한다면, 그 얘기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던져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있는 사람들은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과 싸웠던 한 율법학자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면서 떠나갔고, 돈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다. 그래서 매국노와 수전노라는 욕에도 불국하고 악착같이 돈만을 모았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가진 재산을 내어 놓는 나눔의 회개를 실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님의 정신과 그 운동을 이어가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그 운동을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간략하게 전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그러나 오늘 교회의 모습이 과연 이러한지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교회는 과연 초대교회마냥 함께 나누는 교회, 그래서 부러움을 사는 교회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모습 속에서 손가락질과 반대에 직면해 있는가? 교회를 짓겠다면 이론적으로는 주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마땅하지만, 반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도 모르게 세상을 따라 하느님을 사유화하고 성서가 가르치는 나눔과 비움의 축복 대신에 축척과 독점의 세상적인 축복을 하느님의 것으로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2천년이 지난 오늘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때로 나는 얼굴 흰 사람들이 우리에게 돈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우리를 게으르다고 비난하면서 우리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우리에게 돈을 가르쳐 준 것이 누구인가?’ 그것은 얼굴 흰 사람들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의 데스몬드 투투 신부는 말하기를 ‘얼굴 흰 사람들이 와서 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여 기도하고 눈을 떠 보았더니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었던 땅문서는 저들의 손에 들려져 있었고 대신 성서가 놓여져 있었다.’ 과연 기독교는 탐욕과 정복의 종교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지만, 서구기독교는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을 이렇게 간단히 설명합니다. 농주가 해방을 선언하며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너희들이 돌아다니면서 말뚝을 박는 그곳이 다 너의 땅이 된다. 단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동쪽으로 열심히 나아갑니다. 해가 중천이 있으니 멀리멀리 갑니다. 그리곤 또 북쪽으로 갑니다. 아직도 해가 충분합니다. 그리곤 서쪽으로 갑니다. 해가 지려고 합니다. 급히 서두릅니다. 그래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갖기 위해 조금 더 조금 그러다 해가 저물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며 생각합니다. ‘아 이제부터는 이 모든 것이 나의 소유다.’ 소유욕에 충만해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숨이 너무 찬 나머지 그는 문턱을 넘음과 동시에 거기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말뚝의 모든 땅을 뒤로한 채, 한 평의 땅만 자기 것으로 하고 묻힙니다. 그러나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 그 한 평마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래전 김지하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그래서 우리 교회는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먹는 친교를 흔히 예배 끝난 후에 먹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층에 가서 먹는 일도 예배의 연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느님은 이제는 귀로 들었던 말씀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입으로 먹는 그 밥 톨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누는 밥은 주님의 살이요 함께 마시는 물은 주님의 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실현되는 것입니까? 바로 그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3층에서 드리는 예배만 참석을 하고 4층에서 같이 먹는 예배에는 참석하시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만, 불편하더라도 4층까지 참여할 때에 진정 예배를 다 드리는 것이요, 진정한 한 가족 먹을 食 입 口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병일 목사와 두 장로 그리고 7명의 청남회원들이 우리의 자매교회인 전주 들녘농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성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12)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가족을 사랑함이 없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서로 돌보고 사랑함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듣는 이야기이지만, ‘향린교인들은 냉정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저는 냉정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고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 심장을 드러내는 것은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사도 먼저 하시고, 모르는 분이면 저는 누구입니다. 성함은 무엇인가요? 저는 처음 와서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다들 모르고 계셔서 위로가 되지만, 그래도 적극적으로 알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도 모르는데, 언제 이웃을 알겠습니까? 이웃도 모르는데, 언제 하느님을 알겠습니까? 먼저 우리끼리 뜨겁게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뜨거워진 힘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신앙공동체는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내가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눔으로 예수 복음의 자유와 해방을 실천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