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실천: 영생을 얻는 길
루가 10,25-37; 스바 3,11-13
홍근수 목사
우선 이 순간의 저의 마음 상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향린교회를 그만두고 나서 5개월 만에 이 자리에 서서 여러 사랑하는 교우들을 한꺼번에 보니 우선 반갑고 그 다음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가 지난 6월 초에 향린교회를 은퇴 한 후 이 예배실에 몇 차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만 이렇게 강단에 서서 여러 교우들 전체를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에 조 목사님이 요르단에 가시게 되었고 설교를 요청하여 기꺼이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간단하고 당연하게 생각한 저의 은퇴는 사뭇 논쟁적이고 그 소문이 국내는 물론 널리 국제적으로도 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은퇴 때문에 많은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로부터는 박수갈채를 받으나, 나이 많은 동년배들에게서는 ‘어쩌자고 왜 은퇴를 하였느냐?’ 는 등 걱정 겸 나무라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의 입지가 편하지 않아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은퇴에 대하여 많은 동년배의 목회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홍근수 목사도 자원은퇴를 했는데 왜 목사님은 홍 목사 보다 가진 것도 많고 또 더 오래 되었는데 은퇴를 하지 않는가?’ 라고 하여 상당한 압력을 받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남쪽 지방의 한 친구 목사는 강제로 교회를 떠났는데, 저의 자원은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단순히 제 혼자만의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보았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으나, 제 친구 목사들이 그렇게 수난을 당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저의 은퇴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처럼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솔직히 향린 교우들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만나지 않으려고 하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저의 은퇴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난 번 9월 27일 국제 반전평화의 날에 대학로에서 어떤 후배 목사님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래 교회를 떠나고 요즘은 어디로 가십니까? 사무실이 어디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노상이 모두 내 사무실이 아니오? 내 사무실은 아주 넓은 이 노상이오!’ 라고 말했더니 그도 크게 웃었습니다.
제가 은퇴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교회란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서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뜻깊은 일이라고 믿어서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백수’라는 저의 소개에 대하여 아니라고 하면서 ‘화백’이라고 고쳐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림을 그릴 줄 모르고 소질도 전혀 없는 사람인데 그런 이름은 당치 않는다고 했더니 그 말은 ‘화려한 백수’라는 말의 준 말이라고 하여 크게 웃었습니다. 괜찮은 것 같아서 앞으로 애용해야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은퇴했다는 것이 단순히 제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도 끝도 없는 너스레를 그만 늘어놓고 본론으로 들어 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너무나 유명하여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면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 곁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쳐 갔는데 세 번째로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고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가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도덕적인 훈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도덕적인 훈화로 이해하더라도 중요합니다. 요즘 종교인들은 도덕적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들과 하등 차이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더 못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도덕적인 훈화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란 글자를 새긴 봉고차 같은 것이 고속도로 상을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 비유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낸 것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는 예수님의 명령도 있고 하여 단순히 이를 자신의 생활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고속도로에서 어려움을 당하여 낭패를 겪고 있는 차를 보통 공짜로 고쳐줍니다. 그래서 진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전적으로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이고 그가 예수를 의미한다고 보아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한국의 민중신학에서는 대체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며 신음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안병무, {민중과 성서}(안병무 전집 5, 한길사, 1993), 130.
그러므로 이 비유의 제목도 그렇게 바꿔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경을 헤매며 신음하고 있는 ‘강도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이 사람’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문자 그대로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이고 지배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냥 지나쳐 간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본래 레위인은 평신도이지만, ‘신분적으로는 사제계층’이고 ‘직업적인 종교인들’ 안명무, {예수의 이야기}(한병무전집 4, 한길사, 1993), 81.
입니다. 이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다교의 핵심적인 지도인사들로 예루살렘 성전을 관장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유대 사회는 ‘신정정치’ 사회이고 따라서 종교 당국의 핵심적 지도자면 곧 그 사회의 핵심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회적 신분은 상류층에 속하는 기득권층이고 부자들이며 그 사회의 지배계층을 의미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면서 신음하고 있는 이 사람의 처지를 보고 또 듣고도 그냥 지나쳐 가버립니다. 적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회의 지배세력은 그들의 비단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이나 바닥 인생인 민중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보고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가서 필요한 응급조치를 하고 그를 여인숙 - 오늘의 병원 - 에다 데려다 주고 비용을 주면서 부탁까지 하였다는 사마리아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유다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상징처럼 되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소외된 땅의 사람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왕따’ 당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왕따 당한 이유는 역사적- 민족적 이유로서 그들이 혼혈인종이고 또 혼합 문명을 가지고 있어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고 땅의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과 같은 민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주셨던 이 교훈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민족적인 상황은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처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지배 계층이나 그들이 믿고 있는 미국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한국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실은 강도이고 ‘악의 축’ 국가이고 ‘불량국가’입니다.
이 사회에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고 안병무 선생님은 일찍이 개탄한 바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민족을 핑계대지만, 사실은 이승만 때부터도 잘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민중을 위한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고 그들은 민중을 배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 는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가 누구냐?’ 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또 같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지금 오늘 우리 민족과 조국의 모습은 바로 사경을 헤매면서 신음하고 있는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람의 상황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강도 만나 죽을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데 대하여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원칙적으로만 생각하고 이곳을 떠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민족이고 조국이, 더 구체적으로는 이 땅의 노동자 농민 빈민., 즉, 오늘의 한국의 민중이, 오늘날 세계에서 국제적으로 보면 이라크인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즉, ‘강도 만나서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면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웃’이고 그 이웃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현실적인 응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행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의회의 최종적인 결의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들이 찬성하는 이유들을 보니까 대체로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과거 미국에 신세를 졌는데 그 미국이 지금 요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 할 때라는 것, 둘째는 미국과 우리 사이는 상호방위조약의 당사자라는 것, 세 번째는 우리의 국가이익 때문이라고 내 세우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 우리에게 해방 후에 구제품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 국가이익 때문에 한국을 점령하였고 6.25 전쟁을 치렀지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선사업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다들 밝혀졌습니다. 미국은 그 값어치를 수 십 배를 이미 빼갔습니다. 은행에 다니는 분은 더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지난 3년 사이에 미국이 주로 금융계, 그러니까 주식 같은 데에 200억 원인가를 투자하여 그 몇 십 배가 되는 수 조원을 빼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미국인들이 기업에 투자한 것은 없다는 것이 노동계의 말입니다. 그러니 미국인이 투자를 빼 가면 한국 경제는 속빈 강정이 된다는 말은 기우일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해마다 비싼 군사무기를 팔아먹다 못해 이제는 고철 덩어리를 차세대 전투기라고 비싸게 팔아먹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은 우리의 이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지나가는 레위인과 다름없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말하기를 매일 아침 계란을 먹기 좋아하는 미국인인데 그들이 계속 그 계란을 먹기 위해서는 그 계란 만을 먹어야지 왜 계란을 낳는 암탉까지 먹으려 하느냐? 고 항의할 정도입니다.
오늘의 목사, 신부들, 즉 성직자라는 사람들은 그 때 제사장처럼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의 장로-집사라는 정치인들, 전경련 사람들, 군 장성들, 서울의 강남 사람들, 엄청난 천문학적 돈을 가져야 소유할 수 있는 미국 뉴욕시의 맨하탄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 나라의 상류층 부자들 등은 그냥 지나가는 레위인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전쟁이 나면 빨리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지나쳐 가는 데에는 각기 내 놓을 만한 정당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의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이들은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 그 땅의 가난한 민중들, 그 사회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 신음을 하면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구출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이 이웃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도 큰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사랑과 인정을 베푼 사람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생겼다고 다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하여야 할 일을 한 사람이 진짜 인간이고 그렇게 하는 인간이야 말로 구원을 얻습니다.
조국의 현실이라는 조명에서 성서의 교훈을 볼 때 오늘날 미국은 우리 한국인에게 무엇입니까? 이 나라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것은 하필 민중신학의 시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통일되기 이전에도 사실입니다. 미국의 주도 하에서나 이 정권의 주도 하에 통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주도 하에 통일이 된다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 민중이 이웃이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는 대로는 다른 강대국이 아니고 정권도 아니고 성직자를 포함한 기득권 세력도 아니고 오히려 그 피해자들인 이라크, 이 조국, 그리고 현 정권 하에서 탄압을 받고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강도 만나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면서 신음소리를 발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석유이권과 패권주의 때문에 일으킨 미국의 더러운 전쟁이고 침략 전쟁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고 타국들에서는 파병을 하지 않고 있고 파병을 결정한 나라도 취소하는 지경인데 현재 우리나라가 유일한 참전국이 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이것을 ‘나 홀로 파병’이라고 합디다. 지금 한국은 이라크에 유일한 파병국이 되어 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지경에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인.이라크 과도정부는 물론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이라크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군사력을 더 파병하거나 외군에 의한 군정이 아니라 속히 권력을 이라크인에게 넘기라는 것입니다. 이번 유엔 결의도 사실은 그것을 미국이 수정하여 비로소 러시아, 중국, 불란서, 독일 등이 유엔에서 찬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들 나라들은 미국의 대이라크전에 군인이나 돈을 부담하지 않는 조건으로 유엔 결의에만 참여하고 찬성해 달라는 미국의 설득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뒷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라크 전에 참전한다는 것은 무고한 이라크인에게 적대하고 결국 이라크인들의 자주적인 정치를 늦추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라크인들은 우리 한국에 대하여 아무런 해치는 일도 적대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 정권은 국가이익이란 말로 사실은 국가이익에 상치되는 일만 해 왔습니다. 지금 한국 산품이 중동에서 불티가 날 정도로 인기가 있는 모양이지만 만일 이 나라가 이라크에 파병한다면 이는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손해나는 일 뿐입니다. 파병하는 것은 한국 산품이 더 이상 중동에서는 잘 팔리지 않을 뿐 아니라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 나라의 국가이익 면에서 본다면 손해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미국의 부도덕한 이라크 전에 참전한다면 중동에 나가 있는 우리의 교포들, 주로 기업체들의 직원들, 언론인, 기타 한국인들은 여행이 자유롭지도 못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파병 후에 한국인 사망자가 속속들이 나고 한국인이 이락라인들의 테러의 목표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이라크의 주한 대사관 직원들은 이라크인들의 협박을 받아서 피난을 갔고 숨어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 당국은 우리 국민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정부는 안전 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보고에 토대하여 파병을 결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와 전적으로 다른 보고가 방송기자들에 의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들은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라크 파병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더 큰 문제들은 그것이 도덕적-종교적 문제입니다. 사람들, 그것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문제는 생명을 긍정하고 정의를 옹호할 의무가 있는 도덕적인 문제이고 종교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이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돕는 일이고 그렇게 할 때 강도 만나 사경을 헤매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다시 반복하는 말이 되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주셨는가?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사경을 헤매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강도 만난 사람과 관련을 맺고 그를 도와주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으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을 때라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