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를 따르라
마르 8,27-38
정준영 준목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답답한 요즘입니다. 어디에 귀를 대어도 ‘좋은 소식’ 날아오지 않습니다. 어디에 발길을 돌려도 ‘좋은 노래 가락’ 들리지 않는 때입니다. 오히려 미리 부쳐놓은 노동자의 유서와 이라크인들의 서러운 부고 소식만 전해질뿐입니다. 터져 울리는 총성처럼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몹시 갑갑한 현재입니다. 먼 곳의 전쟁상황이 TV화면으로 신속히 배달되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나 몰라라” 하는 이들은 결국 그것으로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곳곳에서 생명이 으스러지고 문드러지는 비명소리 들리는데, 귀 막고 눈 감는다고 그 처절한 울움소리 가리지 못할텐데, 왜 이렇게도 그런 군상들이 많은지요!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 살아갈 용기가 나는 건, “‘어둠이 빛을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그 기막힌 예수의 부활선언 때문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예수를 다시 따를 때입니다. 다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8: 27-30)을 이른바 “마르코복음의 분수령”이라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까닭은 이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장면을 전후로, 마르코복음의 국면이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앞뒤의 분위기가 점차 바뀝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경계로 하여, 그 앞부분이 예수께서 생명을 살리는 해방사건의 축제 분위기로 상승한다면, 나머지 뒷부분은 예수가 생명을 바치는 수난사건의 쓰러지는 과정으로 하강합니다. 어디까지 곤두박질 치냐면, 땅바닥을 치고, 죽임의 굴속까지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서 부활 꽃이 피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기독교의 힘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총 16장인데,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8장 한가운데에 위치합니다. 마치 마르코복음이라는 산에 우뚝 솟은 삼각산의 육중한 바위덩어리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라는 별명자체가 ‘바위’ 아닙니까? 그리고 마태오복음(16: 13-20)에서는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 별칭을 지어줍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불리는 계기입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언한 고백은 마르코복음의 방향을 전환하는 기점이자 마르코가 증언하는 예수의 향방을 서늘하게 가르는 곳입니다. 이런 뜻에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어떤 방향으로 길 걸어가는지를 보기 위하여, 오늘 본문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로 들어갑니다(27a).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역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선인 여기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망명하느냐 아니면, 이스라엘로 귀환하느냐가 결정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느냐가 결정 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은 경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거 도시인 셈입니다. 이런 경계선을 삶의 자리로 깔고 사는 이들은 그 경계문화에 익숙하거나 아니면, 자기 정체를 늘 확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갈림길 위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은 일종의 노림수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길 위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더냐?”(27b)라고 묻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 부르기도 하며,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대답합니다.(28) 세례 요한은 유대인의 마지막 예언자고 엘리야는 유대인들의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니 만큼,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를 대부분 예언자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29a)라고 묻자,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29b)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심상치 않게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을 엄격히 경고합니다.(30)
그들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입을 닫게 합니다. 비밀로 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고백한 베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교회의 터를 제공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직접 만들어 건네줍니다. 이를 오늘 마르코복음과 비교하면, 마태오복음에서 베드로는 굉장한 위치로 격상되고 있다는 차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비밀에 붙이라!’는 예수님의 함구령은 베드로의 오해를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오해는 베드로의 착각 때문에 일어납니다. 결과적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못보고 있음을 크게 나무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실상’을 놓고 베드로와 예수님이 서로를 심하게 나무라는 충돌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런 착각은 사람의 일을 탐낸 결과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오해가 무엇인지는 바로 이어지는 <예수의 수난예고>에서 밝혀집니다.

계속 오늘 본문의 정황을 보면,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심한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거절당하고, 살해되어야 하며,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31) 예수께서는 이것을 모두 터놓고 말합니다.(32a) 이 내용은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기점으로 예수가 가야할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 첫 예고편입니다. 이는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도 두 번의 수난예고가 베드로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과 <예수의 수난 예고>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예수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에서 베드로의 말문을 막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을 새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난 예고>에서 예수는 말문을 엽니다. 자기 언급을 서슴없이 합니다. 하나는 엄격히 틀어막고, 다른 하나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경위에는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로 하느님께 검증되기 위해선 예수님 자신은 고통의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시련 받는 사람의 아들, 예수는 참 그리스도와 합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일행은 지금 두 갈래 길에 서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철저히 접으라! 하고, <자신의 수난 예고>는 공공연히 펼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의 오해가 분노로 터져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끌어당겨서 그를 꾸짖기 시작합니다.(32) 이 구절은 자세한 상황 설명을 요합니다. 이유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가한 행동이 매우 격분한 상태로 진행된 상황을, 원어는 압축하여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는 누구를 ‘꾸짖다’, ‘나무라다’, ‘비난하다’라는 몹시 격노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감정이 실린 나무람의 소리입니다. 그런데『개역한글판』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라는 간청의 의미로 번역했고,『공동번역』은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로 의역했으며,『표준새번역』은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고 번역했습니다. 예 정황으로 볼 때, 항의했다는 번역이 본뜻에 가깝습니다. 개역한글판은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이자 그리스도인 예수에게 감히 어떻게 꾸짖을 수 있냐는 식으로 완곡히 처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문의 격렬한 정황이 왜곡된 실례입니다. 공동번역은 다소 원어의 의미를 염두했는지, 그나마 상황에 걸맞은 행동묘사로 처리했으며, 그 중에서 표준새번역이 비교적 원어에 충실히 번역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기 시작했다는 시간의 정황으로 보아, 꾸짖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을 만큼 나무라거나 따지고, 대들었다는 대결상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이어 나오는 예수의 대응 장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의 제자들을 보시면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열중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탐내고 있구나!” 라고 하시면서 꾸짖습니다.(33) 여기서 우리가 예의 주시할 세부 정황은 예수가 몸을 돌아서 트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의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몸을 돌린 경위는 그 전에 베드로와 심한 몸 실갱이를 할 정도로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에게 화가 났냐면, 예수의 몸이 흐트러져서 돌아갈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쥐고 흔들었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분노는 곧 그의 흥분지수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 돌아갈 정도면, 베드로의 감정이 몹시 격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흥분한 베드로에게는 정작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인,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마지막 말이 그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는지도 모를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분노를 잡아당긴 단서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선 31절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귀가 거슬렸을 겁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따른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로 축소되거나 하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왠 말입니까? 사람을 낚겠다던 그 이가, 사람들에게 버려진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보기에는 예수가 순식간에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 격하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가치가 하락하면, 자연히 베드로의 가치도 급락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온몸으로 그것 믿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출신성분이 확 바뀝니다. 이는 모두 베드로의 오해입니다. 착각입니다. 그리스도를 제대로 못 본 착시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의 멱살을 잡는 기세처럼 달려듭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 정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믿었던 그리스도는 결코 고난이나 수모, 그리고 살해당하는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예고>를, 그것도 세 차례나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믿어 온 그리스도는 장차 세상을 휘어잡을 분이고, 권력자들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는 분입니다. 뒤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논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왕관을 쓴 영광의 그리스도>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에게 <가시관을 쓴 수난의 그리스도>를 보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성공의 지름길을 바라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주문으로 동원될 뿐입니다. 성공한 그리스도! 최고경영자 예수! 이는 그리스도의 실상을 오해한 이들이 주조한 지폐 속에 그려진 예수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그리스도를 오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가라!”고 다시 일침을 놓습니다. 하늘의 광영만 쳐다보고 따라온 베드로에게는 수난을 감수하라!는 고난을 감내하라!는 예수의 수난예고는 그를 분명히 낙담시켰을 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공동번역에는 원어에도 없는 ‘물러가라’는 말을 첨가했다는 사실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개역한글판은 원어 그대로인 ‘내 뒤로!’에다 (물러가라)는 말을 덧붙여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사탄아! 내 뒤로!”가라 입니다. 여기서 ‘나’는 수난의 길로 발을 떼는 ‘예수’입니다. 그 뒤로! 가서 나를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난 받을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베드로, 모욕을 거부하는 베드로, 죽음을 회피하는 베드로는 하느님의 길을 원천 봉쇄하는 사탄이나 다름없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둔갑한 연유입니다. 수난을 부정하는 그 자리에 사탄은 자란다고 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의 일’을 꾀하는 사탄은 내 뒤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행위명령은 결국 “너는 내 뒤로 와서” 내 등을 보고, 내가 어느 길로 진입하는지를 확인하면서 “다시 나를 따르라”는 의미로 변합니다. 그것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다시” 받은 셈입니다. 크게 마음이 부서진 베드로에게 예수는 다시 나를 따르라! 합니다. 이 얼마나 힘을 주는 격려입니까? 예수께서 다시 부르니,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따를 뿐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나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 자신을 부정하고, 그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34)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부터 수난당하는 그리스도가 되도록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릅니다. 아니 하느님의 일을 치르기 위해 오르다 보니, 수난을 받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다 보니, 부정과 부패에게 놀림깜이 됩니다. 평화를 실천하다보니, 폭력에게 폭행당합니다. 참을 살다 보니, 가짜에게 왕따당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전 지배체제에 칼을 주로 가는 예수를 따르려면, 먼저 자신을 부정하라!입니다. 예수께서 칼을 공고한 예루살렘 지배체제를 향하여 던지는 사정은 그들의 이득과 권력이 헐떡이는 난공불락에 금이 가게하고 틈을 내어 결국에는 그것을 분열케 하려는 겁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기인한 사람의 일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내미는 탐욕을 거역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십자가라는 의미는 개인의 기구한 팔자를 그저 받아들이는 숙명론을 위로하기 위한 신세한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에게 저항하라는 주체하라는 항변입니다. 그것은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당시 로마제국의 응징인 십자가 처형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를 뒤 따르라!고 예수님은 부릅니다. 바로 이 길과 방향이 일그러진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향린교회가 계속 따라서 다져가야 할 길입니다.

진짜 예수가 걸어가는 길의 이정표는 2000년 전에 이미 쇠못으로 박혀 있습니다. 예수를 살해한 그들이 직접 박은 못입니다. 그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단 십자가는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아무도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손을 댄 사람이 바로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 후로 기독교는 제왕의 얼굴로 남의 땅, 남의 집, 남의 침실을 마구 침범하는 제국주의적 횡포의 검을 휘두르도록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변종은 오늘 조지 부쉬네 기독교를 떠받치는 근본주의자들의 침략전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정의 길을 실천하지 않고 유지되는 모든 교회는 모두 반쪽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결국 베드로는 반쪽 예수를 믿고 따르다가, 예수의 실상과 대면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예수가 살기등등한 예루살렘을 오르는 길에 다른 제자들도 두렵고, 놀랐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예수는 큰 도둑들이 모인 예루살렘의 성전지배체제를 향하여 지금도 오르는 중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격한 분노는 그의 절망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믿어온 신념이 허물어졌기에 생긴 일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찾아든 좌절감과 절망감은 결국 그가 예수를 반쪽으로 본 그 사태에서 빚어낸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오해한데서 오는 현기증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제거한 귀족의 예수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이상한 예수상입니다. 깨지고 두들겨 마진 이들의 예수상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뒤틀린 한국교회가 그 길과 방향의 키를 틀지 않는다면, 예수를 다시는 따라갈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갈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예수가 참 그리스라고 판명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임을 또렷이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걸어가고 있는, 그 수난의 대열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동참한 이들입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고 희년청년회 여러분!
삶이 고달프고 피곤할 때마다 우리를 불러, “다시 나를 따르라!”고 어깨를 가볍게 치고 가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순간의 좌절을 영원으로 끌고 가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2000년 동안 낡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려놓아 그만 쉬게 하고,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립시다! 부디 끝까지 사람의 아들, 그 예수가 성큼성큼 밝고 간, 그 길에서 떨어지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오늘도 어딘가에서 꾸준히 길 따라, 걸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