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는 사람--신윤옥

저는 허리가 아파서 치료 겸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이 곳에 왔습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 곳에서의 시간은 흥미롭고, 편안하며,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저는 그분의 사랑 덩어리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제게 언제나 따뜻한 밥을 지어 주시는 어머니, 물질로 마음으로 저를 배려해 주는 형제들, 치료 과정에서 인연으로 만난 많은 사람의 넘치는 애정과 정성, 그리고 저를 하나님 앞에서 그 경험들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자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조 목사님과 향린 가족 여러분의 깊은 뜻에 고마움을 드립니다. 또한 설교 준비차 피시방에 앉아 열어본 이메일 속에는 제가 목회를 하는 교회(Pigeon Lake Millet) 교인들이 보내준 기도의 편지들과 이 곳에서 저를 아껴 주는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해 가슴 찡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과연 누구이기에 이 같은 엄청난 배려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소위 인정받고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 한 아이의 어머니, 조그마한 교회를 사랑하는 시골 목사일 뿐입니다. 권력도 힘도 없으며, 박사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의 변화의 물결에 그리 공헌하고 있지도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유명하게 될 것 같지도 않은, 정말 하늘의 수많은 별 가운데 하나인 별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존재일 뿐이지요. 이런 제가 이와 같은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그리고 조건 없는 은혜 덕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명상과 기도에 들어가 보니 제게 하나님이 주시는 다른 은총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왜 이런 시간을 갖도록 인도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응답을 먼저 말씀 드리면,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지식으로 관념으로 생각으로 의식으로 그리고 마음으로만 알고 있으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하시려는 더 크고 깊은 사랑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허리가 몹시 아팠습니다. 새해가 되고 봄이 오고 여름이 되는데도 좋아지지 않고 점점 나빠져 걸음을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몸의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깊이 듣는 것은 외면했습니다.
그동안 저를 있게 해 온 삶의 철학은 제 신앙적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삶은 성실함과 책임을 다하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신적 세계관은 저를 지금까지 지배해 온 하나의 삶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뚝 떨어져서 그리 되지는 않았겠지요.


인간은 관계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저의 그런 모습 역시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겠지요. 집안의 문화, 즉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 1960년대 박정희 독재 시대에 주어졌던 새마을 정신, 그리고 1980년대 대학 시절 사상 무장을 통해 거대한 노동자 변혁이 가능하다고 여긴 신념, 그리고 더 나아가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면 잘살 수 없다는 정신과 문화가 삶의 도로 지배되고 안착되어 버린 이민의 삶……. 어찌 보면 성실과 책임은 저를 이루는 전부, 아니 저보다 훨씬 중요한 진리로 그것만이 좋은 삶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며 저를 있게 하는 삶의 도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런 저를 서서히 무너뜨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저희 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문화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질문하며 늘 긴장해 있는 저를 보며, 그들은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감사가 더 많았습니다. 일주일 가운데 5일 간 교회 일을 하며 이틀을 쉬는 제게 잘 쉬라며 쉬는 날에는 정말 섭섭할 정도로 제게 무관심했습니다. 이렇듯 저는 교인들로부터 사랑을 한몸으로 받았지요. 저 또한 마음을 다해 정성으로 교인들을 대해 우리의 관계는 늘 따뜻했습니다. 해외에도 ‘향린’지가 다 돌려지고 제가 몸담고 있는 캐나다연합교단의 한인 목사들도 받아 보게 되니 제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요. 아무튼 저의 목회 활동은 아주 밝고 편안했지요. 물론 목회 활동에 어려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제가 아프게 되고 몸의 진액이 다 빠져 이 바쁜 교회 절기에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는가가 여러분의 관심거리겠지요.
아까 이야기의 출발이 제가 하나님의 근원이 사랑이고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은혜로 주어진다는 얘기를 했지요.
저는 성실히 책임감을 다하는 것이 제 신앙의 도리이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에 응답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이런 시간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답이 뭔고 하면 제가 살아가는 삶의 척도, 신앙의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해 가는 것은 성실성, 열심, 책임을 다하는 것보다는 ‘내가 나 되게 살아가는 것’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나 되게 하라.’
이 말은 참으로 어렵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만이 나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깊은 기도와 명상 또는 자신에 대한 지극한 존중 없이는 그것을 깨닫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지요.


제 경험을 나눠 보겠습니다. 제가 아파 걷지도 못하고 진통제를 먹으며 교회일을 열심히 할 때 교인들이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윤옥! 우린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넌 쉬어야 해. 진지하게 고려해 봐.”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사는 것은 교인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그래서 그들이 주는 웃음과 감동 때문에 제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계산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가치관 때문에 지금 교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더 나아가 그리도 쉬라는 그들의 말을 안 들으니 저는 그리 좋은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사랑하는 교인들이 아플 때 나는 무엇을 할까. 온 마음으로 그 사람이 낫기를 바라겠지요. 그 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이 깊이 헤아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그들에게 저는 그 말씀을 전달하면서도 그 체험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교회! 우리는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책임을 묻고 말합니까. 나라, 그 얼마나 책임과 의무 성실성을 말합니까. 사회와 가정에서는요. 가장의 의무, 어머니의 의무 등등.
책임과 의무는 특히 제 개인적인 경험을 보더라도 아주 훌륭한 것이지요. 좋은 것이지요. 저도 그 덕분에 아무도 믿지도 않고 모두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 신학 공부를 아이 엄마로서 일하면서 주부로서 해냈지요. 그 성실과 책임의 가치가 제 문화적인 유산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이 자리에 목사로 서서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것이지요. 그 성실과 책임의 본질은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쓰여지는 존재가 목적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함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중의 하나인 창세기 노아 조상님의 이야기는 오늘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오늘날 새삼스레 도를 찾고 도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변혁시키겠다는 거창한 의도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대로 가면 모두 함께 망할 것이 너무 뻔하기에 나만이라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럼 다 죽어 가는데 나만 산다는 것은 개인주의일까요? 이현주 목사님은 이리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세상이 장차 물로 멸망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배밖에 없었기에 노아는 배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비웃었겠지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니까요.


노아는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의지보다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살아남았지요. 그런데 그 살아남은 한 사람 덕분에 결국 인류가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그 이기심이 세상을 구한 것이지요. 개인은 절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얘기를 저는 이해했는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오늘 다른 성서 본문인 요한복음 말씀은 ‘그분은 더욱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입니다.
내가 작아지고 그분이 커지려면 내 모습, 내 목소리, 그리고 종국에는 내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잃어버리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사는 내가 될 때 그분이 나타나고 시공에 그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의심이 들겠지요. 배고픈 자들의 함성, 노동자들의 고통의 함성, 연일 신문 기사로 오르내리는 정치 비리, 그리고 교육 문제로 인한 국민들의 신음 소리는 어찌해야 하냐고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데모대의 함성은요. 내야지요, 많이. 그러나 누가 듣고 있는가도 봐야지요. 더욱이 그 함성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요. 그 소리가 없는 세상이 그 함성의 궁극적 목적이겠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다’ 했습니다. 그분의 형상대로 살려고 하는 내가 되면 그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커지게 함이니까요.


이민 가서 12년째 살다 보니 고국의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만나면 신선한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로부터 아주 좋은 책들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책들 속에 세계의 고목들이 소개된 그림책이 있었지요.
저는 이 책을 혼자 보기가 아까워 젊어서부터 곱게 늙은 할아버지처럼 점잖게 살아가는 선배님에게 선물했습니다. 선배는 책을 읽어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도 이 고목처럼 천년을 하루같이 한결같이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만약 이 고목이 너무 반듯하고 잘나고 화려했다면 그리고 잘 쓰일 재목이었다면 몇 천년 살도록 사람들이 내버려두었을까.”
선배 말씀을 듣고 저는 깊이 생각했어요.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우주의 흐름을 열어가는구나. 우리 인류 역사를…… 아무도 모르게…….
저는 교회 공동체가 참으로 좋습니다. 쉬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자기가 누군가 알아보고, 좋은 친구 만나 즐겁고……. 그러나 그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본질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목적과 잘남과 성취에 놓이게 된다면 우리는 수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그 제도와 형식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소요할 것입니다. 마치 저 거대한 미국 자본주의처럼요. 더 잘살기 운동의 자가당착 모순에 빠져 지속적인 소비와 창출이라는 순환이 끊기면 자신들이 멸망하기에 오늘도 수많은 제3세계 사람들을 자신들의 소비의 도구로 사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어린이들의 생명까지도 자유와 평화라는 구호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우리가 매순간 질식할 것 같은 뉴스로 보고 경험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얼 위해 살아가고 있나, 내 안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편히 모시려 했나, 쓰이고 싶다는 욕구, 의지, 야망이 생명이라고 믿고 사는 이 어마어마한 자본이 침식해서 질식사를 경험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럼 어디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이 어떤 체험인지를 경험해 봅시다. 저는 캐나다로 돌아가서 이 질문과 함께 제 교인들과 살고 여러분은 이 곳에서 또한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을 조건 없이 주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체험하며 살아갑시다.